정희민 Heemin Chung

정희민의 감응적
그림과 동시대 지각

ARTIST 

정희민/ 1987년생인 작가는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3D 기술, 에어브러시, 젤 미디엄 등의 다양한 매체를 캔버스와 회절, 충돌, 결합시키는 적극적인 평면 연구를 통해 동시대의 다종다양한 시각성을 탐구하는 회화를 선보여왔다. 홍익대 회화과 학사, 한예종 조형예술과 전문사 졸업 후 두산아트센터(2023), P21(2022, 2019), 뮤지엄헤드(2021)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유수 기관 단체전에 참여했다. 2022년 제13회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금호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Iris in Bloom〉260 × 194cm 캔버스에 아크릴, 오일, 잉크젯이 전사된 겔 미디엄 2021
사진 : 김익현 제공 : 작가

정희민의 감응적
그림과 동시대 지각

문혜진 | 미술비평

《UTC-7 :00 JUN 오후 세시의 테이블》 금호미술관 전시 전경 2018 사진 : 이의록

“그들은 지나가면서 손을 흔들었고, 태양은 막 가라앉는 중이었으니, 그림자들의 가장자리는 벌써 흔들리고 있었다.”1

이미지가 모든 것을 뒤덮은 이 시대를 플라톤이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세상은 이데아를 모방한 것이고 이미지는 그 세계를 모방한 것이니, 회화는 본질에 대한 이중 재현으로 열등한 것이라 보았다. 그런데 이미지가 세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미지를 통해 인식하고 심지어 이미지에서 사물을 뽑아낸다면, 이는 주객이 전도된 심화된 타락인가? 아니면 데이터라는 보이지 않는 본질(이데아)이 또 다른 방식으로 체현된 변용인가? 플라톤의 미메시스론이 현상이 지배하는 감각의 세계와 진리가 존재하는 이데아의 세계를 구분하고 후자를 지향했음을 떠올리면, 실체가 사라졌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허무주의적 피상성을 넘어 실체의 유무와 무관하게 표면의 감각만 존재하는 동시대 유사지각의 시대를 플라톤이 좋아했을 리는 만무할 듯싶다.2 문제는 수천 년 전 사람인 플라톤의 생각이 아니라 실체가 증발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존재론적 딜레마다. 물리적 육체의 감각과 눈에 보이는 시각적 현상이 일치하지 않을 때, 외부 세계의 속도와 나의 속도 감각이 합치되지 않을 때, 우리는 무엇에 근거해 느끼고 판단해야 하나. “가짜라고 해서 못 느끼는 건 아니야”의 시대에 믿을 것은 내 몸이 느끼는 신체의 감각뿐이다. 정희민은 실체의 안정성이 무너진 포스트-실체의 시대의 분열적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며 감응한다. 그녀의 전 작업은 불확실한 시공간이 개인의 지각과 신체에 끼치는 변화를 감지할 때 발생하는 정동(affection)과 관계가 있다. 이 글에서는 동시대 지각에 정희민의 그림이 어떻게 감응하는지를 중심으로 정희민 작업의 요체를 짚고자 한다.

〈Erase Everything but Love〉 캔버스에 아크릴, 오일, 겔 미디엄 190 × 290cm 2018
사진 : 조준용 제공 : 작가

1. 정희민의 초기 작업은 주로 회화와 디지털 이미지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되어왔다. 이러한 해석은 분명 초기 작업의 일차적 특징에 부합한다. 정희민의 이름을 각인시킨 개인전 《UTC-7 :00 Jun 오후 3시의 테이블》(금호미술관, 2018, 이하 《테이블》 )의 출품작들은 픽셀이 드러난 각진 경계선, 3D 모델링 프로그램 특유의 인공적인 색감, 인위적으로 부과된 서로 다른 시점의 빛의 공존, 개연성 없는 레이어들의 중첩 등, 3D 모델링 프로그램 위에 나열된 디지털 가상 이미지를 전사하듯 회화로 이행시켰다. 초점은 매번 변화했으나 초기 작업은 모두 포스트인터넷 시대 회화 매체 탐구의 일환이었다. 《어제의 파랑》(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16)에서는 회화의 물리적 변형과 공간 연출이,《Snow Screen》(아카이브봄, 2017 )에서는 지지체의 물성과 이미지의 관계가, 《테이블》에서는 디지털 이미지의 회화적 수용이 실험되었다. 매체 연구의 측면에서 주목할 점은 디지털 이미지와 회화의 표면적 유사성이 아니라, 디지털 환경의 감각을 흡수해 회화적으로 변용하는 지점이다. 초기 작업을 관통하는 주요한 특징은 비통합적인 멀티 레이어의 공간과 복수성의 감각이다.

초기 작업 대부분에서 감지되는 멀티 레이어의 개념은 캔버스 안과 밖에 모두 적용된다. 회화, 벽면 시트지, 프린트된 액자, 텍스트 설치가 겹쳐 있는 《어제의 파랑》의 설치는 복수의 레이어가 겹겹이 중첩된 구조다. 총체적이고 통합된 공간이 아니라 이질적인 다수의 레이어가 겹쳐진 공간 감각은 곧 캔버스 내부로 연결된다. 《테이블》에 출품된〈Objects 3〉(2018 )는 포토샵에서 오리고 붙일 이미지 소스들을 얹어놓은 듯 질감이 상이한 이미지 층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방식은 후속작에서 강화된다. 서로 다른 출처의 구글맵 풍경을 쌓고 이를 지우고 이미지를 다시 얹는 〈Erase Everything but Love〉(2018)의 작업 과정은 브라우징하다가 즉흥적으로 캡처한 온갖 이미지에 둘러싸인 동시대 시각 환경 및 이미지 수용 방식을 닮았다. 도자기가 깨지기 전후의 시간이 겹쳐 있는 듯한 〈May Your Shadow Grow Less〉(2018)의 공간은 시공간을 통합적이고 안정적으로 지각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한 동시대의 세태를 정확히 반영한다. 이들 작업 위에 얹어진 겔 미디엄은 이질적 공간 사이의 분리를 더욱 강조한다. 작가는 얼룩을 올리기 위해 배경을 그린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말한다.3 환영적 공간과 유리된 사물의 공간은 겔 미디엄의 물성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중층적 구성의 회화는 그간 많았지만, 공간의 파편화와 이질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이 정희민 그림의 특징이다. 텍스처가 다른 회화 이미지와 겔 미디엄이 조각조각 기워져 있는 불완전한 환영의 그림 평면은 가상과 실제가 분리 불가능하게 뒤섞인 혼합현실과 다름없다.

파편화는 캔버스 내부뿐 아니라 외부의 배치(layout)에도 적용된다. 《테이블》은 복수의 캔버스 조합으로 구성된다. 그래픽 소프트웨어에서 자유롭게 이미지를 자르고 붙이는 감각은 캔버스 안의 구성뿐 아니라 밖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각 캔버스는 파편으로 완결적이지 않으며 이들의 조합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잠정적이고 유동적인 것이다. 그 자체로 거대한 그림판처럼 작동하는 벽면은 이후의 개인전인《우리가 다시 만난다면》(021갤러리, 2020)에서도 나타난다. 모눈종이 위에 실크스크린, 아크릴 물감, 겔 미디엄 등 여러 재질과 표면처리를 거친 캔버스가 배치된 벽면은 그림 속에 또 그림이 있는 액자소설의 구조를 지닌다. 여기서 벽면은 그 자체로 그래픽 툴 속 가상의 팔레트와도 같다. 이 같은 멀티 레이어와 파편화, 유동성의 감각은 복수의 이미지와 스크린을 왕래하며 자유롭게 모드를 전환하고, 핀치 투 줌 제스처를 통해 프레임을 끊임없이 재설정하며, 이미지를 빠르게 스크롤하고 훑어보는 디지털 유저로서 이미지를 소비하고 수용하는 양태의 체득에서 나오는 것이다.

〈Wailing and Weeping〉캔버스에 아크릴, 잉크젯이 전사된 겔 미디엄, UV프린트 145 × 112 cm 2022~2023
사진 : Artifacts 제공 : 타데우스로팍

 〈The Wolf’s Bane〉 캔버스에 아크릴, 오일, 겔 미디엄, UV프린트 223 × 187cm 2023
사진 : 임장활 제공 : 두산아트센터

2. 정희민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꽃 그림은 여섯 번째 개인전인 《Seoulites》(뮤지엄헤드, 2021)에서 처음 등장한다. 바이올렛과 아이리스 등의 제목이 붙은 석 점의 꽃 그림은 꽃이라는 소재와 겔 미디엄의 독자적 사용이라는 지점 모두에서 향후 작업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네 번째 개인전 《An Angel Whispers》(P21, 2019)까지 겔 미디엄은 독립적 재료라기보다 안료를 섞어 아크릴 물감의 일부로 사용되곤 했다. 하지만 《Seoulites》에서 겔 미디엄은 회화 표면과 분리되어 부피를 지니게 된다. 마치 껍질처럼 그림 표면 위에 슬쩍 얹힌 이 얇은 막은 이후 더더욱 부피를 불려가며 평면이지만 평면이 아니고 회화이지만 회화가 아닌 묘한 동적 평형 상태로 이끈다.4 한편, 어떤 대상이 반복적으로 탐구되는 소재로 등장한 것도 꽃 그림에서부터다. 작가가 꽃에 끌린 것은 꽃의 표면적 아름다움 때문이라기보다 꽃이 지닌 독특한 양가성 때문으로 보인다. 꽃은 잠시 피고 지는 일시성을 지녔지만, 피고 또 피는 영구성 또한 가지고 있다. 꽃잎은 면이지만 이것들이 모이면 부피를 지닌 덩어리가 되고, 조금만 세게 쥐어도 짓이겨질 만큼 취약하지만 다른 한편 질긴 생명력의 강인함을 표상한다. 꽃은 도심에서 유일하게 마주할 수 있는 야생이고, 촉각적이고 구체적인 사물이지만 동시에 현실을 초월하게 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5

그렇다면 작업으로서 꽃은 무슨 의미일까? 다시 말해 정희민이 꽃을 그리고 또 그리게 만드는 이유는 무언가? 편의상 꽃 그림이라고 칭했지만, 정희민의 작업이 꽃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님은 대부분 짐작할 테다. 그렇다고 그녀의 작업이 물리적 실체로서의 꽃과 무관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모든 작품의 제목이 지시적이지는 않지만, 그림은 투구꽃, 아이리스, 칸나, 바이올렛, 나리꽃 같은 이미지의 대상을 닮았다. 목적이 재현은 아니더라도 대상과의 물리적 접촉에서 소산한 무언가가 작업의 동기이자 지향으로 작용했음은 분명하다. 꽃은 일종의 매개물(medium)로 심상을 투영하는 수단이다. 모든 꽃은 작가가 대상과 마주하며 느낀 특정한 분위기, 시공간, 생각, 정서를 반영한다. D. H. 로렌스가 용담꽃을 보고 지옥의 푸른 어둠을 연상하듯, 작가는 꽃에 심리적 투사를 한다. 작품의 제목은 느슨하고 시적인 이 연계를 조금이나마 유추할 수 있게 해주는 징후다. ‘우리의 손금이 만날 때’, ‘아침의 노래’, ‘밤의 열림’ 같은 제목은 만남이 유발한 특수하고 구체적인 정동을 희미하나마 전달한다. 그런 의미에서 꽃 그림은 구상이지만 추상인, 혹은 구상도 추상도 아닌, 구상과 추상 사이에서 진동하는 이중적 회화다.

그림 표면에서 분리되어 독자적 실체를 갖게 된 겔 미디엄의 존재감은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기》 (남서울미술관, 2021)부터 두드러진다. 이 전시에서 겔 미디엄은 주름이 되어 활짝 피어난다. 이후 작가는 온갖 형태의 주름의 접힘을 만드는 데 골몰한다. 올더스 헉슬리는 보티첼리의 〈베툴리아로 귀환하는 주디타(The Return of Judita to Bethulia)〉(1472)의 치마 주름을 보며 매혹당한 경험에 대해 말한다. 헉슬리는 “예술가에게 피륙은 순수한 존재의 가늠할 수 없는 신비를 나름의 표현 방식으로 상징하는 살아있는 상형문자”이고, 보티첼리는 접힌 천의 전체성과 무한성을 보고 그것을 최선을 다해 표현하려 했으리라고 짐작한다.6 헉슬리가 천의 주름을 통해 우주에 충일한 완전성을 감지했듯, 정희민은 겔 미디엄을 접으며 기술적 격변 속에서 경험하는 자연의 비전, 물리적 세계와 다른 차원의 세계, 그 간극이 파생시키는 신체 감각의 변화를 주름 속에 투입한다.7 겹겹이 늘어진 커튼처럼 포개진 겔 미디엄의 껍질은 물리적 세계와 스크린 세계 사이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탈락의 감각을 형상화한다. 이때 작가가 느끼는 정동은 이중적인데, 시적 제목이 상징하듯 모든 것을 갈아버리는 디지털 환경의 탈출구로서 생명과 삶, 육체와 연결되는 정념이나 인상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 기술의 속도와 물리적 신체 사이의 부조화를 느낄 때 발생하는 피로감과 분열, 분리의 감정을 가리키기도 한다. 어떻든 이 모든 정동은 추상적이고 탈육화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몸을 통해 경험하는 것이다. 신체는 작업의 모티프뿐 아니라 제작 과정에도 깊이 연루되어 있다. 겔 미디엄에 잉크젯 출력물을 도포해 만들어진 색색의 조각을 구성하는 과정은 결과를 완벽히 통제할 수 없기에 고도로 집중해야 하는 노동집약적 작업이다. 순간적 판단으로 겔 미디엄 조각을 붙이며 흐름을 만들어내는 몸의 움직임은 겔 미디엄의 주름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이 긴장도 높은 과정은 일종의 기묘한 몰아 상태를 촉발하는데, 이는 헉슬리가 환각 상태에서 바지의 주름을 보고 영원을 감지한 것과 동기화된다. 주름의 구현은 대강의 얼개가 있더라도 완벽히 계획할 수는 없다. 우연과 불확실성을 안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조각들이 퍼즐이 맞춰지듯 온전히 전체성으로 떠오른다. 그 조형적 완성의 시점이 정희민에게는 우주적 완전함이 구현되는 순간이다.

《Seoulites》 뮤지엄헤드 전시 전경 2021
사진 : 조준용 제공 : 작가

3. 부피를 지니고 특정 대상이 있는 꽃 작업은 디지털 이미지의 납작함을 닮은 불특정한 초기 회화와 외견상 크게 달라 보인다. 실제로 꽃 작업은 몇 가지 중요한 지점에서 전작과 단절된다. 초기 회화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전시의 주제를 구현하는 일부로 다른 작업과 관계를 맺으며 성립된다. 일례로 동기화를 주제로 한《Seoulites》에서 나와 남, 삶과 죽음, 가상과 현실의 구분 무화는〈나는 오븐 밖으로 기어나왔다〉(2021) 같은 자화상부터〈묘비 목업〉(2021) 같은 설치,〈Meditation 101〉(2021) 같은 영상 작업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적용된다. 반면 꽃 작업부터 각각의 그림은 자체의 완결성을 지닌 채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그림은 특정한 감흥과 정념을 간직한 채 고유의 독자성으로 빛난다. 한편 특정 정황을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경향은 꽃 그림에 와서 상태나 정동의 반영으로 바뀐다. 오후 3시의 테이블 위의 정경을 형상화한《테이블》의 회화나 개의 입속에서 바라본 젖은 풍경을 상상한〈I Stared at You in His Dank Mouth〉(2019) 같은 직접적인 묘사는 중단되고, 추상적인 정서나 상태가 암시적으로 내포된 상징적 구현이 주를 이룬다.〈Wailing and Weeping〉(2022~2023),〈깨어난 물〉(2022) 등이 좋은 예다. 전술한 것처럼 과거 완벽한 계획안을 온전히 옮기던 작업 방식이 우연을 끌어안는 방식으로 바뀐 것도 중요한 변화다.

반면 작업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충동이나 조형적 관심은 의외로 연속적이다. 주름을 구성하는 조각들은 겔 미디엄에 잉크젯이나 UV 프린트로 색을 전사해 만들어지는데, 이 전사라는 행위는 초기 회화에서 디지털 이미지를 모사하던 것처럼 일종의 복제다. 그래픽 프로그램에서 기본 형태 위에 텍스처를 입히듯, 겔 미디엄이라는 몸체 위에 이미지를 씌우는 것이다. 이렇게 색을 입힌 겔 미디엄 조각들을 조합해 하나의 덩어리를 구성하는 과정 또한 이미지 파편들을 쌓아올려 다층적 레이어를 만드는 초기 회화의 구성 원리와 다르지 않다. 이질적 조각들이 모여 형성되는 비균질적인 시공간은 꽃 작업이나 초기 디지털 회화나 동일하다. 겔 레이어의 위와 아래, 사이에서 엿보이는 상이한 색감과 질감의 표면들은 통합된 안전한 세계의 상실을 인정하는 송가와도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공통점은 유동성과 불안정성이다. 주름 잡힌 채 캔버스 위에 안착한 겔 미디엄은 일견 고정된 듯 보이나, 두껍다는 인상이 들 정도로 겹겹이 얹혀서 중력에 의해 처지거나 얇은 막이 찢어질 것 같은 불안감을 준다. 주름 회화는 조형적으로도 면과 덩어리 상태에서 진동하는 유동체다. 면과 입체가 분명히 나뉘지 않은 혼융의 상태는 초기작부터 일관되게 나타난다. 《An Angel Whispers》에 출품된 〈아이의 노래〉(2019)는 면에서 입체로 다시 면으로 변화하다 종국에는 액체로 화하는 3D 모션그래픽 애니메이션이다. 명확히 분절되지 않고 계속해서 유동하는 상태는 실체에서 멀어진 동시대의 존재 방식이다. 가짜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는 ASMR 콘텐츠처럼, 육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형태를 가진다는 것이 보장되지 않는 데서 유래하는 불안은 영상 전체를 관통한다.《젊은 모색 2019: 액체 유리 바다》(2019)나《부산비엔날레: 물결 위의 우리》(2022)처럼 가끔 캔버스와 함께 등장하는 설치 작업 또한 평면에서 떨어져 나온 흔적으로 면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탈락된 껍질은 쌓이거나 굳어서 덩어리가 된다(《지금 우리의 신화》(타데우스로팍, 2023) ). 그런 점에서 가장 근래의 개인전《수신자들》(두산갤러리, 2023)에 등장한 데이터 전송으로 출력된 유사나무껍질은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일 수 있다.

평면과 입체, 구상과 추상, 가상과 실제, 촉각과 시각, 정지와 움직임, 자연과 인공, 우연과 계획 사이에서 흔들리는 유동성은 결국 동시대성에 대한 감응이다. 나비의 날개가 파르르 떨리듯, 작가는 예민한 감각으로 존재의 양태가 달라졌음을 감지한다. 겔 미디엄이 물질이라기보다 허상으로 느껴졌다는 작가의 말은8 그림자를 통해 실체를 인지하듯 가상을 통해 현실을 더듬을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속성이 투영된 듯하다. 돌아보면 정희민은 늘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스케치업 툴 안에서 그림자가 가상의 실체감을 부여하는 것을 보며 실물감에 대해 의문을 품고, 매개된 유사 지각이 실제 촉각을 대신하는 것을 보며 몸과 세계의 분리를 간파했다. 대면하는 모든 것이 매개된 것이고 모든 것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 충격적 단절은 껍질(그림자/환영)로 이루어진 세상에 대한 낯설음이고 부적응이다. 그 저물녘에 서서 정희민은 그림자라는 반대항으로 스스로의 실존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것이 정희민이 동시대 회화를 갱신하는 방법이자 자신의 방식으로 회화를 사랑하는 길이다.

*본 원고는()예술경영지원센터‘2024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진행하는 특별기고이다.

〈세이렌-아네모네-단단한 가슴〉복합 매체 가변 크기 2022
《2022 부산비엔날레: 물결 위 우리》전시 전경 2022
제공: 부산비엔날레

《수신자들》 두산아트센터 전시 전경 2023
사진: 임장활 제공: 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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