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의 구도자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무’로 되돌려보내기 위한 행위이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로 돌릴 때 우리들은 평안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에고’의 신장을 바라고 있으나 나는 에고의 소멸을 지향하며 그 표현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김창열
김창열 화백은 그의 작품의 대부분을 물방울에 할애했다. 물방울은 그가 평생 시달렸던 트라우마로부터 기인한다. 어린 시절 그는 고향으로부터 떠나야 했고, 한국전쟁으로 중학교 동창생 절반이 죽게 되는 고통을 경험한다. 그가 마주해야 했던 참담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물방울에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무無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를 지속했다. 물방울은 과거의 아픈 기억을 치유하였고, 삶의 기쁨을 발견하게 하였다.
그러나 물방울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배웠던 천자문을 작품에 결합하기도 하였고, 실제 신문의 지면과 활자를 활용한 그림도 그렸으며, 나무판위에도 그렸다. 그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후에도 안주하지 않았다. “제 작업에 물방울을 없애버리고 싶은 욕망이 수없이 솟아오릅니다. 그러나 물방울을 빼고 나면 내가 어디로 소멸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어요.” 그렇게 그는 안락함에 취하지 않고 실존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던 구도자였다.
물방울과 빛
김창열 화백은 물방울이 지니는 형체나 광선에 의한 빛깔을 강조했다. 물방울 작업에는 빛과 그 반사효과로 발생하는 그림자는 중요한 조형적 요소로 투명도와 광선의 효과를 높일 수 있는 ‘흔적’을 개입시켜 빛과 음양이 자아내는 미묘한 효과를 만들었다.
종이에 물방울 모양의 형태를 본떠 그것을 캔버스에 대고 그 둘레에 물방울의 그림자를 만든다. 그리고 그 반대로 본뜬 종이를 갖다 대고 물방울 안쪽에다 빛의 방향에 따른 음영과 조명을 만들어 물방울을 완성한다. 때로는 반사광을 한 점 찍어 넣어 한층 강한 영롱함을 남긴다.
물방울은 영롱하게 반짝이면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낙하를 시작하는 물방울은 찰나의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예술 인생의 기록
지난 전시 <영원의 물방울, 염원의 기록>에서 발행한 자료를 통해 화백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었다. 여러 매체에서 다룬 그의 소식은 치열하게 일궈온 그의 예술 인생을 증거한다. 물방울의 시작부터 그것과 함께한 고행의 시간, 국내외 전시와 비엔날레 참가, 작품 스타일의 변화와 발전 그리고 함께했던 가족들의 소식까지. 기사를 통해 작품 세계를 거시적으로 이해하고 이면의 소소한 이야기들도 알아보았다. 켜켜이 쌓인 기사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돌고 돌아 다시 無로
김창열 화백의 많은 작품은 제주 한림읍에 위치한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물방울을 그리는 것은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보내기 위한 것’이라는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미술관 건물도 하나의 물방울이 되어 인위를 자연으로 돌려보낸다. 미술관을 상공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보이는 回(돌아올 회)의 형상이 이를 말해주며, 낮게 드리워진 돌담은 모든 관람객의 자유로운 상상이 펼쳐지는 배경이 된다. 김창열 미술관에서는 그의 대표 작품부터 1970년대 초기 작품, 한자나 천자문 등을 조합한 변주 작품까지 그가 일생을 바쳐 일군 예술세계를 품고 있다. 제주를 방문하게 된다면, 꼭 미술관을 방문해보자. 따뜻한 봄이 깃든 제주에서 누리는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다.
진행 중인 전시
물방울의 변주 2021. 2. 2. – 5. 23.
빛과 그림자 2021. 3. 9. – 8. 15.
글, 사진: 문혜인
자료제공: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