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휘발과 희미한 소멸의 감각:
후각예술에 대한 노트

곽영빈 미술비평, 연세대 객원교수

Special Feature
 “ 자신의 코앞에 있는 것을 본다는 건 지속적인 투쟁이다.”1
-조지 오웰-

냄새를 잘 맡는 사람은 종종 ‘개코’라 불리곤 한다. 개는 실제로 냄새를 잘 맡는데, 약 450가지의 후각 수용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에 비해 두 배의 수용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칭찬이라 할 수 있을까? 가족이나 친한 사이라면 웃어넘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터나 공적인 자리에서 상관이나 후배에게 이런 얘기를 듣는 건 그리 유쾌한 경험으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후각이 감각의 역사에서 다른 감각들에 비해 오랜 시간 주변화되고, 주목받지 못했던 맥락을 환기시킨다. 이른바 ‘동물(성)’과 지나치게 가깝다는 인식이 그것인데, 그 대상이 악취건 향기건 ‘코를 킁킁대는 존재’란 아무래도 ‘인간’보다는 ‘동물’을 떠올린다는 것이다.2 이는 “만약 내가 본다면, 나는 하나의 대상에 주목하지만, 내가 냄새 맡고 맛을 본다면, 나는 내 몸이 영향받는 방식에 주목하는 것”이라는 칸트의 서술에서도 압축적으로 드러난다.3 후각은 정신보다는 몸, 이성보다는 감성에 가깝고, 감성의 위계 속에서도 하부에 자리 잡는 감각이라는 것. 고결한 ‘이데아’의 매개라 할 시각과 청각을 선호했던 플라톤이 후각을 “생기다 만” 감각으로 간주한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4 역사적 편차가 없진 않지만, 실지로 후각에 대한 이러한 위계적 태도는 과거나 현재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상식’, 즉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여전히 ‘공통감각(common sense)’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된다.

‘냄새’라는 감각에 장기간 응축되고 투사된 이러한 긴장은 얼마 전 한 소셜미디어 타임라인에서 엄청난 논쟁을 통해 가시화됐다. 시작은 한 장의 평범한 사진이었는데, 앨리 룩스(Ally Louks)라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문학연구자가 작년 11월 말 X(구 트위터)에 막 심사를 마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들고 찍은 것이었다. 조지 오웰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J.M. 쿠체와 토니 모리슨의 유명한 소설들은 물론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등이 다룬 후각의 양상과 그 정치적, 윤리적 함의를 비판적으로 논의한 연구였다. 하지만 「후각 윤리: 현대와 동시대 산문의 냄새의 정치학」이라는 딱딱한 제목의 이 논문은 며칠 만에 온라인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됐다. “사람들이 불결한 위생 상태에 상응하는 체취를 나타낼 때 이를 싫어하는 게 왜 인종차별적이고/또는 계급주의적인지” 모르겠다고 분노하면서, 많은 이들은 이제 “냄새는 인종차별적(Smells are racist)”인 것이라 비아냥댔다. 냄새에 대한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을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시각에서 재단하려 한다는 비난 속에서, 그는 “폭정의 얼굴(the face of tyranny)”로 규정됐고 급기야 “결혼해서 애들이나 낳는 게 더 나았을 거다”라는 식의 성차별주의적 반응까지 쇄도했다. 결국 〈포브스 Forbes〉를 포함한 언론에서까지 이 현상을 다루면서5 문제의 사진 포스팅은 지금까지 1억2,000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 중인데, 이 과정에서 격앙되기보다 점잖고도 온화한 태도로 응대한 덕분에 룩스 박사는 자신의 상업 출판 활동을 관리할 대리인과 계약까지 맺으며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이어진 언론 기고와 인터뷰에서 그가 반복해 환기했듯이, 이러한 반응은 놀랍고, 앞에서 언급한 후각 폄하 역사의 측면에서 봐도 흥미롭다. ‘겨우 냄새’에 관한 것 아닌가? 물론 저자의 의도와 독립적으로 시의성을 띤 연구가 됐지만 학계, 그것도 문학작품에 집중한 박사학위 논문이며, 또 후각 연구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문제의 논문 제목과 분석 대상들은 타당하지만 ‘혁명적’이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층계급은…냄새가 난다”는 문장으로 ‘냄새 서술의 대가’로까지 간주되는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이 대표적인데, 후각에 대한 명민한 감각으로 자신의 개인적 삶과 영국의 역사 전반을 가로지른 계급적 적대를 지속적으로 포착한 그의 작업은 이미 관련 연구서가 단행본으로 나와 있을 정도다.6 봉준호 감독의〈기생충〉 역시 이렇게 냄새로 표지되는 계급의 감각, 혹은 “자본주의의 냄새”를 영화로 담아 아카데미상을 받고 이미 전 세계적인 반향을 얻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7 그런데 대체 왜, 그의 논문이 이토록 놀랍고도 격앙된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것일까? 오해와 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첨부한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 초록이 외려 사태를 “증폭시켰다(turbocharged)”고 그는 회고했는데,8 이는 그가 논문에서 사용한 “교차성(intersectionality)”과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등의 용어들이 새롭게 미국 대통령으로 재취임한 트럼프와 그의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프로그램 지지자들이 일찍부터 ‘좌파편향적’인 것으로 낙인찍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9

김지수 〈이 순간—시공향〉
채집한 지붕냄새 가변설치 2021
사진: 서스테인 웍스 제공: 작가

냄새가 “성별, 계급, 성적, 인종, 심지어 ‘생물학적’ 종의 권력 역학을 형성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그가 덧붙였듯, 우리는 “차별과 편견을 주로 시각적 현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룩스 박사의 해프닝은 언어로 매개되는 문학 바깥의 예술과 문화에도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 어떤 감각보다 직접적이고 직관적이라 할 냄새를 ‘향기’나 ‘악취’라는 용어가 전달할 수 없음에도, 이에 대한 박사논문이 저토록 격앙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면 미술과 영화, 퍼포먼스를 아우르는 시청각 영역의 작업에서 냄새는 과연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물론 이에 대한 답은 쉽지 않다. 일단 지속성의 문제가 있다. 그림과 조각, 사진과 영화로 이어진 시각의 역사나, 악보와 녹음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청각과 달리, 냄새는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키틀러 같은 매체학자의 입장에서 이는 ‘저장(storage)’과 ‘송신(transmission)’의 문제다.10 향수처럼 용기에 보관하면 되지 않을까? 후각과 시각의 접점을 꾸준히 고민해온 작가인 김지수는 실제로 이 질문을 다양한 용기로 변주해 매만지기도 했다. 가령 〈우리는 공기 중에 있다(We are in the Air)〉(2021)는 역사학자였던 아버지의 서재에서 가져온 책과 작가 자신의 글, 어린 시절 장난감과 작가의 수집품(향, 채집한 본인 체취, 촛대, 이끼) 등이 진열장과 반쯤 열린 서랍의 형태로 전시됐다. 이는 ‘재현(representation)’을 둘러싼 보다 근원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기억이나 전쟁, 혹은 순수함 같은 주제의 ‘촉매’나 ‘매개’가 아니라 냄새 자체를 미(학)적 대상으로 다룰 수 있을까? 회화를 ‘평면성’으로 규정했던 그린버그처럼, 가령 보관된 향 자체를 예술의 대상으로, ‘작품’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냄새를 원상태로 보관하고 나아가 재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미학적 평가로 직결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 또한 쉽지 않다. 이는 문제의 대상이 꽃향기인지 시체에서 나는 시취(屍臭)인지, 조향사가 새로 만든 신제품인지 하는 문제와도 독립적이다. 그림이나 사진, 혹은 영화 같은 대상이나, 음반이나 파일을 통해 반복 재생될 수 있는 시각과 청각에 비해, 후각의 지속성은 향유와 평가의 대상이 되는 ‘작품’의 형성으로 직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불의 초기작 〈장엄한 광채(Majestric Spelndor)〉(1997)처럼 냄새의 지속성과 전시 자체의 지속성을 결락시킨 사례가 있긴 하다. 이 작업은 뉴욕현대미술관의 《프로젝트》 전시에 초대되었지만, 생선 썩는 냄새를 그대로 놔둬 전시 개막 직전 철거된 악명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 작업을 시리즈로 변주할 수 있을까? 가령 생선을 새나 설치류, 혹은 (음)식물로 바꾸면서? 이는 소위 ‘미메시스’나 ‘리얼리즘’이라는 유구한 전통의 문제를 재소환한다. 가령 ‘후각의 모더니스트’나 ‘냄새의 포스트 모더니즘’이 있을 수 있을까? 이는 룩스 박사가 연구한 문학 작업들처럼 냄새 자체를 언어로 묘사하고 이름 붙이는 문제보다 근원적이다. 냄새라는 감각 자체의 미(학)적 독립성, 또는 자율성 자체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전시관 곳곳에 놓인 조형에서는 다른 향을 경험할 수 있었다.
구정아 〈오도라마 시티〉 2024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설치 전경 2024
사진: 노재민

이런 의미에서 가령 ‘야만인이 (서구의) 문명인들보다 후각이 발달됐다’는 식의 편견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 17세기 이후 가속화되는 유럽의 계몽주의와 식민주의의 이중적 기획 속에서 이러한 견해는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서양인들이 야생의 ‘미개인’들에게서 발견한 예민한 후각과 묘사의 풍부함은 ‘서구 문명’의 정신적 우월함과 ‘야만의 동물성’을 재확인해 주었던 것이다. 실제로 말레이시아의 자하이족은 지금도 박쥐의 배설물과 휘발유, 노래기의 냄새와 “새우 페이스트, 곰나무 수액, 호랑이 고기, 썩은 고기의 냄새”는 물론, “비누, 두리안 과일의 톡 쏘는 냄새”를 가리키는 각기 다른 용어들을 자랑한다.11 줄기와 꽃의 냄새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해당 식물을 단 하나의 대상으로 취급한 옥스퍼드대학 교수가 이들에게 놀림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런 의미에서 놀랍지 않다. 좀 전 환기한 자하이족의 풍부한 어휘에 비해 후각이 서구에서 “단어가 없는 감각”으로 불렸다는 사실은, 넓은 의미의 ‘근대’를 공유하게 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가 앞에서 환기한 감각의 위계와 가치평가 자체를 근원적으로 재점검하게 만든다.12 후각의 대상인 냄새와 향기란 감각의 위계 내부에서뿐 아니라 그 밖에서도 담론적으로 위계화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는 모더니즘적인 배타적 독립성을 넘어, 시각과 청각, 촉각을 아우르는 서로 다른 감각들을 ‘번역’하며 말 그대로 ‘사라지는 매개(vanishing mediator)’로 냄새와 향기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구정아 〈오도라마 시티〉 2024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설치 전경 2024
사진: Mark Blower 
제공: 필라 코리아스 런던, PKM 갤러리 서울

7개월간 이어진 60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전을 마치고 작년 말부터 이번 달까지 한국 아르코미술관에서 지속되는 구정아의 《구정아—오도라마 시티》전시는 이런 맥락에서 또 다른 벡터를 제시하는 사례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상대적으로 단단한 조각적 요소가 강조됐던 베니스 한국관 전시와 달리, 이번 귀국전은 120개에 달하는 배너가 전시공간에 매달려 있다. 이는 한국의 도시와 고향에 얽힌 향의 기억을 따로 또 같이 나눠 가진 채, 현재 국내외에서 거주하는 600여 명의 사연을 문자로 서사화한 것이다. ‘향기’를 뜻하는 오도(odor)와 ‘드라마’의 라마(-rama)’를 합친 제목의 연장선에서 이들은 냄새와 향기를 물질화하고 있지만, 동시에 비물질적 감각인 후각이 언어로 번역되었을 때의 시차와 간극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지울 수 없는 ‘한국적인’ 냄새와 향기의 배타성이란 과연 어느 정도까지 번역될 수 있을까? 지독한 냄새와 희미한 기억 모두 결국 휘발과 소멸의 평면을 공유한다면, 그 속도의 차이란 얼마나 유의미한 것일까? 무엇보다 AI(인공지능)가 인간의 언어와 시청각적 산물들을 빠르게 복제, 아니 ‘생성’해내고 있는 시점에서, 후각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본격적인 탐사는 어쩌면 지금부터일지 모른다.


1 “To see what is in front of one’s nose needs a constant struggle.”
2 알랭 코르뱅 지음 주나미 옮김 『악취와 향기: 후각으로 본 근대 사회의 역사』 오롯 2019 p.15; Alain Corbin The Foul and the Fragrant: Odour and the French Social Imagination trans. M. Kochan New York: Berg Publishers 1986 p.6
3 Immanuel Kant “If I see, then I attend to an object, but if I smell and taste, then I pay attention to… how my body is affected.” Lectures on Anthropology trans. Robert R. Clewis: Robert B. Louden, G. Felicitas Munzel and Allen W. Woo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p.67
Larry Shiner Art Scents: Exploring the Aesthetics of Smell and the Olfactory Arts Oxford University Press 2020 p.21 재인용
4 Andreas Keller Philosophy of Olfactory Perception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6
5 ‘The Online Reaction To The ‘Politics Of Smell’ PhD, Examined’ Forbes 2024.12.2
6 John Sutherland Orwell’s Nose: A Pathological Biography New York: Reaktion Books 2016 p.31
7 Simon Hajdini “The Smell of Capitalism” e-flux 2024.10.3
8 Ally Louks ‘Causing a stink: reflections on my viral PhD’ New Statesman 2024.12.10
9 미국의 저명한 학술지인 『네이처』는 지난 2월, 5만 건에 달하는 지원서 중 만 건을 선정하는 미국국립과학재단 (National Science Foundation)의 지원금 심사에서 ‘다양성’이나 ‘여성’, 또는 ‘편견(bias)’ 같은 단어들이 들어간 지원서는 탈락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로 충격을 줬다. ‘Exclusive: how NSF is scouring research grants for violations of Trump’s orders’ Nature 2025.2.3 실제로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는 지인은 이미 승인받은 자금마저 동결됐다고 얼마 전 알려줬다
10 “저장, 전송, 처리의 일반 원리 general principles of storage, transmission, and processing”에 기반한 키틀러의 예술 및 매체사관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보라. 프리드리히 키틀러 지음 윤원화 옮김『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예술, 기술, 전쟁』 현실문화 2011 p.46; Friedrich Kittler Optical Media: Berlin Lectures 1999 trans. Anthony Enns, intro. John Durham Peters New York: Polity 2009 pp.25~26
11 에드 용 지음 양병찬 옮김 『이토록 굉장한 세계』 어크로스 2023 pp.48~49; Ed Yong An Immense World: How Animal Senses Reveal the Hidden Realms around Us New York: Random House 2022 p.15
12 색을 묘사하는 어려움 역시 다르지 않다는 반론이 있기도 하지만, 그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루카 투린 ‘기억과 기억의 여러 냄새들’ 이설희, 야콥 파브리시우스 편집 『구정아: 오도라마 시티,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미술전 한국관』 Distanz 2024 p.217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