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가짜의 세카이(セカイ):
지금 한국 미술에서의 일본 문화

이연숙(리타) 미술비평

Art Critique

《로컬! ロ〡カル!》 pie 전시 전경 2023 사진: 양이언 제공: pie


“원본으로서 일본을 의식하지 않는 새로운 세대의 오타쿠는 아마도 초국적 케이팝 팬덤처럼 원조 오타쿠 종주국의 주권을 초월하는 자신의 자격을 요구할 것이다. 그런 순간 진짜를 능가하는 가짜, 아무리 애써도 진짜 미만으로 남을 가짜의 처절한 운명을 즐겁게 긍정하는 진짜 가짜의 자리가 탄생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자리는 처음부터 결코 고급문화는 못/안 되는 하위문화의 주체가 기억하는 최초의 자리다. 만약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동시대 한국 미술의 경계에서 국적과 문화 간의 ‘혼종’ 정체성을 인정하거나 이용하려는 시도를 살펴보려 한다.”

우선 개인적인 이야기다. 나는 1990년생이다. 많은 만화, 애니메이션을 대여점에서 처음 접했다. 학교 근처 대여점에서 온갖 만화책을 가리지 않고 빌려 보다가 나중에는 입고를 기다리기도 싫어서 돈이 생기는 즉시 대형 서점에 가서 직접 구매했다. 한국 만화도 많이 봤지만 대부분이 소위 ‘왜색(倭色)’이 짙다고 하는 일본 만화였다. 돈 벌어서 일본에 가져다 준다고 어른들이 꾸중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추어 창작 전반을 의미하는 동인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학교 무렵에는 이미 ‘반일’을 내걸고 국산 작품만 보자며 ‘일빠’ 무리를 떠나겠다 선언하던 ‘언니’도 있었다. 그 ‘언니’는 당시 〈바람의 검심〉이란 작품의 ‘큰손(大手, おおて)’, 요즘 말로는 존잘이었다. 민족주의자로서 사무라이를 모에하던 그 ‘언니’의 분열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한국인과 덕후 정체성의 경합과 갈등을 느끼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 괴로웠던 건 일본 만화 수준의 작품을 한국에선 아직 찾을 수 없다는 민족적(!) 열패감이었다. 그렇다고 국산 작품만 보며 애국 하기에는…뭐랄까, 그건 심각하게 재미없는 일이었다. 실은 그런 내적 모순을 겪는 건 나뿐만 아니었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만화를 보고 ‘일음(일본음악)’을 듣는다는 이유로 어른들에게 친일파라는 꾸중을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 어른들은 거리낌 없이 입에 붙은 옛날 일본어를 쓰면서 늘 일본이 물건은 잘 만든다며 일제 기계를 고집했다. 정말이지 너나없이 징한 일본 콤플렉스를 겪는 시대였다.

일본 문화는 광복 이후 오랜 기간 후기식민주의적인 금지와 부인의 정서 영향 아래 전파 월경과 불법 복제본을 의미하는 ‘해적판’이라는 공공연한 비밀의 형태로 한국에 유입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경계의 형성과 혼합의 과정 자체가 “한국 대중문화의 형성 과정이자, 경계를 사이에 둔 일본과의 문화적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문화적 산물”임은 분명하다.1 일본 대중문화의 단계적 개방은 1998년에 이르러서야 추진된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그간 한국 사회에 실체 없는 공포로 자리 잡은 일본에 의한 ‘문화적 침략’이라는 시나리오를 두고 “두려움 없이 임하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2 개방 이후 거의 30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 해당 발언을 되돌아보면 시사점이 적지 않다. 알다시피 그간 한국에서는 과거 침략 전쟁에 대한 일본의 수정주의 역사관에 의해 불거진 여러 사건에 대응해 크고 작은 반일 불매운동이 꾸준히 일어났다. 반대로 일본에서도 인터넷을 중심으로 결집한 우익에 의해 혐한 운동이 부추겨졌다.3 이런 상황은 일본 문화로 정체성을 형성한 덕후 주체 내부에 민족과 문화가 경합하는 정체성의 문제를 안겨주었다. 나와 같이 개방 전후 혼란 시기를 겪은 덕후 주체라면 아마도 자신이 쿨 재팬 전략으로 대표되는 “오타쿠 문화 공영권”4이라는 기획에 포섭되어 있다는 사실에 관해 어떤 방식으로든 입장을 정리할 외부적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계기는 ‘덕질’이라는 “취향 정체성”과 세대를 걸쳐 계승된 역사적 감정의 총체인 일본 콤플렉스라는 “민족 정체성”을 경합하고 결합하게 만드는 과정 역시 수반했을 것이다.5 언급한 ‘언니’의 경우처럼 일본이라는 출처를 완전히 지우면서 동시에 강하게 의식하는 태도 또한 바로 이런 정체성 협상 과정의 적극적 전략의 일부다. 이는 물론 만화라는 장르에 국한해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아무튼 ‘라떼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한편 작년에는 한국의 GDP(국내총생산)가 일본을 추월했다는 뉴스가 잠시 화제였다. 케이팝을 포함한 경제적, 문화적 성장으로 일본 콤플렉스 없는 한국의 젊은 세대와 일상에 녹아든 한류로 인해 혐한 없는 일본의 젊은 세대가 만나 서로의 문화를 동경하며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희망적인 스토리텔링은 여러 언론과 연구를 통해 발견된다. 이제는 덕질을 언어 삼는 초국적 취향 공동체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진단이다. 1998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말한 두려움이 해결된 지금 시점에야 진정한 의미에서 개방이 가능해진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전지구적 팬데믹에 따른 자가격리 시기를 거치며 OTT와 소셜 미디어 사용이 부쩍 늘어나 온갖 문화에 면역이 생긴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는 더 이상 〈진격의 거인〉, 〈귀멸의 칼날〉 같은 작품은 과거와 달리 부정적인 오타쿠 문화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비록 잘 팔리는 일본 작품에 늘 따라붙는 우익 논란에도 말이다. 얼마 전 국내 개봉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누적 44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4주 연속 국내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 3위의 성적을 기록하기도 했다.6 용어의 엄밀성에 대한 문제는 있지만7 어쨌든 오타쿠 문화의 인기를 가시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장소는 실은 전혀 놀랍지 않게도 홍대 상권이다. 홍대 일대는 2000년대 초반에도 특히 여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본 문화의 유통 거점으로 여겨져 왔다. AK플라자에 입점한 만화, 애니메이션 상품 판매점 ‘애니메이트’8를 출발 지점 삼는 ‘오타쿠 로드’는 오타쿠 성지 아키하바라의 이름을 따서 이른바 ‘홍키하바라’라고 불리기도 한다.9 굿즈샵, 가챠샵은 물론이고 과거 일본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지하 아이돌 라이브 공연장과 메이드, 집사 카페가 이제는 홍대 상권의 중심이다.10 오타쿠 문화의 수입을 넘어 정착이 이뤄지는 현장이다. 반대로 일본에서도 케이팝과 코스메틱을 중심으로 한 한국 문화의 영향력이 크다. 2000년대 중반부터 N차 한류를 경험하며 자란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 한국 문화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일상 깊이 스며든 주류 문화와 같기에 한류라는 단어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분석까지 있다. 민족보다 취향이 우선하는 최초의 세대다. 전에 없던 개방으로 인한 문화적 혼종의 창조에 따라 양국 관계도 크게 달라질 거라는 예측은 이미 현실인지도 모른다.11 물론 낙관이 사치로 느껴질 만큼 우리에겐 각자 그리고 같이 해결해야 하는 여러 과제가 있다.

왼쪽부터 『레시피』 창간호, 3호, 2호 제공: 미식회

그럼에도 만약 일본 콤플렉스가 없는—혹은 이를 역전된 민족주의의 잠재적 형태로 받아들이는 세대의 시대라면 분명 뭔가 달라질 것이다. 원본으로서 일본을 의식하지 않는 새로운 세대의 오타쿠는 아마도 초국적 케이팝 팬덤처럼 원조 오타쿠 종주국의 주권을 초월하는 자신의 자격을 요구할 것이다. 그런 순간 진짜를 능가하는 가짜, 아무리 애써도 진짜 미만으로 남을 가짜의 처절한 운명을 즐겁게 긍정하는 진짜 가짜의 자리가 탄생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자리는 처음부터 결코 고급문화는 못/안 되는 하위문화의 주체가 기억하는 최초의 자리다. 만약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동시대 한국 미술의 경계에서 국적과 문화 간의 ‘혼종’ 정체성을 인정하거나 이용하려는 시도를 살펴보려 한다.

먼저 서브컬처 공간을 거점 삼아 이뤄지는 이른바 한국 오타쿠 뉴웨이브 운동이라 할만한 일련의 연구, 창작, 전시, 교류의 흐름을 지목하고 싶다. 2020년 문을 연 공간 pie는 “범주를 좁힌 전시 기획”, 구체적으로 말해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을 포함한 서브컬처”를 중심에 두는 전시 기획을 목적에 두고 있다.12 한편 같은 건물에 위치한 공간 H.ai 또한 “서브컬처 공연, 렉처, 마켓 소모임을 기획하는 커뮤니티형 카페”로 성격은 다르나 지향은 같다.13 물론 2010년대 중반 신생 공간 시기에도 오타쿠 정체성과 코드를 적극 전유하는 기획과 작가—이를테면 진챙총과 장지우의 개인전14이나 강정석과 이수경의 전시 플랫폼 ‘피아☆방과후’15—가 있었다. 하지만 pie와 H.ai는 처음부터 서브컬처 커뮤니티의 양육과 돌봄에 방점을 찍고 운영되는 공간이기에 다르다. 그간 pie에서 기획한 《파이☆썸머☆피버》, 《패턴》, 《Snow Wizard: 파티 플레이!》, 《로컬!》과 같은 교류 중심 전시는 “작가와 관객이 연대를 통해 완성되는 공간”16을 만들고자 하는 pie의 관계 지향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특히 《로컬!》은 ‘캐릭터 회화’라는 장르를 주로 그려온 한국과 일본의 작가 28명의 작품을 내건 기획 전시로 제목에 담긴 의미가 흥미롭다. 해당 전시를 공동 기획한 아케미 작가는 전시 입장객 배포 책자에서 ‘서브컬처 작가’의 경로에서 마주한 한계를 토로하는데 이에 대안으로 제시되는 개념이 바로 ‘로컬’이다. 전시 소개에 따르면 ‘로컬’은 “특정 문화가 시작된 곳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지역과 문화를 이해하는 사람이 같은 시대에 다른 어떠한 태도로 만든” 무엇을 긍정하는 관점을 담고 있다.17 즉 본래 국적과 상관없이 귀속 의식을 느끼는 문화의 ‘로컬’, “현지인”처럼 창작하자는 주장인데18 이는 순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앞서 캐릭터 기호를 언어 삼는 초국적 창작 네트워크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든다. 한편 pie는 현재 운영되고 있지 않지만 H.ai에서는 공연과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부정기 행사 ‘포트 오브 락 마켓’은 “미술, 출판, 패션,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창작자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행사”19로 서브컬처 아트 콜렉티브 ‘미식회’의 앤솔로지 『레시피』, 국내 유일 애니메이션 잡지 『쿄로쿄로』, 서브컬처 비평·리뷰 커뮤니티 ‘애니큐어’의 비평 동인지 『크림』과 같은 출판물을 소개하는 통로로 자리 잡았다. 출판물의 방향성과 정체성은 모두 다르지만 이는 ‘로컬’하게 서브컬처를 수용하고 경험하려는 시도라는 차원으로 수렴된다.

*본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 ‘2025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 진행하는 특별 기고이다


1 김성민 『일본을 禁하다: 금제와 욕망의 한국 대중문화사 1945-2004』 글항아리 2017
2 ‘일본대중문화개방’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https://www.archives.go.kr/next/new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3611&sitePage=
3 노윤선 『혐한의 계보』 글항아리 2019 126
4 김일림 「‘오타쿠 문화 공영권’ 연구: 언어의 전위부대와 보편 언어의 영토」 일본비평(Korean Journal of Japanese Studies) Vol.26 pp.292~347 2022
5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물론 현재의 오타쿠들 또한 겪고 있을 일이다. 김인숙 「민족정체성과 취향정체성의 긴장과 조정-일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우익논란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석사논문 2022
6 김상협 ‘‘귀멸의 칼날’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연상호 ‘얼굴’ 맹추격’ KBS뉴스 (2025.9.15)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357464
한편, 연상호 감독이 장편 애니메이션〈돼지의 왕〉으로 크게 주목받은 애니메이터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기사의 제목은 의도와 상관없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천만 영화〈부산행〉은 원래 연상호 감독이 애니메이션으로 준비했던 작품이다. 그는 여러 매체를 통해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의 어려운 상황에 대해 토로해 왔다. 〈얼굴〉 또한 그의 만화가 원작인 영화다
7 분량상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지만 국내에서는 현재 ‘오타쿠’란 일본 애니메이션, 만화에 대한 아마추어 연구자나 창작자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빠순이’이란 멸칭으로 불렸던 아이돌 팬을 포함해 굿즈, 가챠 수집가 등 무언가에 열정을 보이며 시간과 자본을 투자하는 소비 주체 전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했다. 마찬가지로 논의가 필요한 용어는 ‘서브컬처(subculture)’다. 이 용어는 LGBT 등 정체성 기반의 소수자 문화, ‘운동’으로서 성격이 강한 대안/대항/하위 문화, 단순 비주류 문화 모두에서 사용되지만 문맥에 따라 다른 기원을 품고 있다
8 한편 2004년 개점해 2020년 팬데믹으로 인한 매출 급감으로 폐업한 만화 전문 서점 ‘북새통’ 문고가 현재 ‘애니메이트’와 협업하며 국내 만화를 전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신지수 ‘“안녕! 북새통”…코로나19에 문 닫는 만화전문서점’ KBS뉴스 (2020.12.8)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5066276
9 강은 ‘2024 홍키하바라 보고서: 홍대는 어떻게 ‘오타쿠 성지’가 됐나’ 경향신문 (2024.7.6) https://www.khan.co.kr/article/202407060600021
10 최현정 ‘[라이브 아이돌의 세계①] 홍대를 점령한 라이브 아이돌’ 더팩트 (2025.9.8) https://v.daum.net/v/20250908000244556, 서형석 ‘“만화 주인공 같네요”…국내도 집사·메이드 카페 인기’ 연합뉴스 (2024.4.28) https://www.yna.co.kr/view/MYH20240428003200641
11 대표적으로 다음 논문이 있다. 김선영, 허재영 「일본 내 4차 한류 붐의 특징과 한일관계: 일본 Z세대를 중심으로」 『문화와 정치』 vol.10 no.4 2023 pp.79~103
12 pie 엑스(X) https://x.com/piepie_info/status/1323223892979195911
13 H.ai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hai_info/
14 2015년 ‘커먼센터’에서 진챙총의 《후죠시 매니페스토》와 장지우의 《지우맨의 탄생》을 동시에 진행한 바 있다. 커먼센터 엑스(X) https://x.com/COMMONCENTER_KR/status/63165786559010816
15 ‘피아 방과후’ 홈페이지 https://pia-after.com/
16 “파이” 파도그래프 https://padograph.com/ko/spaces/147 여기서 ‘파도그래프’는 “한국과 일본의 전시 및 이벤트 정보를 소개하는 포털 사이트”라는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17 《로컬! ロ〡カル!》 파도그래프 https://padograph.com/ko/events/502
18 《로컬! ロ〡カル!》 전시 리플릿
19 “동시대 서브컬처 창작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pot of Luck MARKET’ @H.ai” VISLA https://visla.kr/article/event/293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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