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임 Sungim Choi

일상의 몰수-가사노동과
미적 노동의 등가성

Artist

최성임/ 1977년 출생. 이화여대 서양화과 및 동대학원에서 회화판화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개인전 《도시정원》(IBK 아트 스테이션, 2024), 《눈을 감아도 보이는 툭 툭》(온수공간, 2023),《발끝으로 서기》(디스위켄드룸, 2022),《강을 건너는 방법》(봉산문화회관, 2020), 《24》(미인도 미아리고개 하부공간, 2016) 등을 개최했다. 단체전 《공원, 쉼, 사람들》(소마미술관, 2024), 《플라스틱 파라다이스!?》 (고양시립 아람미술관, 2024), 《DRAWING WITH THE LIGHT》(더레퍼런스, 2024),《물은 다정하게 흐른다》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2024), 《휘릭, 뒹굴~탁!》(수원시립아트스페이스광교, 2022), 《나도 잘 지냅니다》(광주시립미술관, 2021), 《손의 기억》(세화미술관, 2020), 아모레퍼시픽 공공미술프로젝트 《Apmap 2018 Jeju》(2018),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프로젝트《성북예술동》(길상사, 2017), 성북문화재단 공공미술프로젝트 《살랑대는 예술군도》(성북예술창작터, 2017) 등에 참여했다. 2025년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2020~2021년 송은 아티스트스튜디오, 2018년 서울문화재단의 신당창작 아케이드에 참여했으며, 송은문화재단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집이 있던 자리〉 패브릭, led, 목재 프레임
240×160×370cm, 200×160×370cm 2022

일상의 몰수-가사노동과 미적 노동의 등가성
양효실 서울대, 한예종 강사

주부의 가사노동은 가치를 평가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invaluable) 것이면서 동시에 가치가 매겨지지 않은 하찮은(valueless) 것이다. 가부장제가 포섭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 안에서 어머니의 일은 초자본주의적인 사랑과 희생의 성역이고, 현모양처-당사자가 지각하는(가사)노동은 매번 눈에 보이지 않는 사소하고 시시한 최하층 노동이다. 아이 넷을 키운 나의 엄마가 가끔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어린 우리를 키우던 시절 이야기를 할 때면 엄마는 눈이 촉촉하고 나는 가해자 같고, 볼모 같아져서 짐짓 다른 데를 본다. 도리스 레싱의 중편에 육박하는 단편 소설『19호실로 가다』는 19호실에 가서 아무것도 안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수전의 19호실에서의 1년간의 멍때리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집안의 천사와 집안의 보수-유지 노동자 사이에 붙들린 그 여자들이 아니면 소설의 침묵이나 고요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문학은 그럼에도 서사를 부여한다. ‘우리’는 수전에 대한 공감/동일시를 최소화하는 이 소설의 불친절함 속에서 그럼에도 수전의 고독이나 자처한 고립의 이유를 어렴풋하게 이해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집 밖에서 전문가로서 자신의 능력을 갈고닦은 훌륭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그 여성을 도운 조력자들의 이야기를 지움으로써 그 여성을 돋보이게 하거나 조력자들을 가시화하면서 핵가족 제도의 부실함을 드러내거나 핵가족 제도의 외연을 넓힌다.  80이 넘은 나의 엄마는 코로나 기간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문학적인 남동생은 그 이야기를 들은 날 엄마랑 함께 울었다.

《최성임: 발끝으로 서기》 디스위켄드룸 전시 전경 2020

〈발끝〉스테인리스 스틸, 비즈 6×6×410cm 2024

( 최)성임은 지금 시대에 아이 넷을 키우는 보기 드문 여성이다. 성임은 첫아이를 낳자마자 개인전을 열었던 역시나 보기 드문 여성이다. 둘 다를 놓지 않겠다는, 그 둘을 함께 가지고 가겠다는 결기 같은 것이 첫 개인전과 첫아이 출산의 동시성에서 감지된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러기가 대체로 어렵다. 아이를 낳고 경력단절로 집안에 갇힌 여자들은 부지기수이고, 성임은 여성에게는 상호의존적/ 보완적이기보다는 상호배타적인 두 길을 동시에 간다. 한창 손이 많이 가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동시에 집과 가까운 작업실에 출근하는 고행이 아이를 낳은 뒤 성임의 일상이다. 전자의 이야기를 ‘밀실’로서의 작업실로 갖고 와 결혼한 여성 일반이 아는 이야기로 동일시/공감을 도모하는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다. 성임은 일상이 자신의 작업에 너무 많이 개입해서, 이야기가 형식을 잠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문학적)이야기와 시각적 형식의 편안한 관계를 끊어내는 게 관건이다. 이것이 성임의 작업의 특이성이다.

디스위켄드룸에서의 개인전 《발끝으로 서기(Standing on tiptoes)》(2020)는 작업실 바깥 성임의 복작거리는 6인 가족, 아이들의 양육자인 성임에 대한 것이지만, 그 이야기는 서사를 거의 지운 채로, 미적으로 번역된 상황으로서만 미술관이라는 비-일상적 공간으로 들어올 수 있게 배치되었다. 집을 개조해 만든 공간 디스위켄드룸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역시 거실이었을 공간이 먼저 있다. 거실은 가족 구성원들이 모이는 중립적인 메인 공간이다. 성임은 거실에 ‘함께’ 모이는 6인의 구성원들을 12개의 ‘다리’로 번역해서 설치물을 만들었다. 천장에서 직선으로 내려와 뾰족한 지지대의 끝이 바닥을 딛고 있는 설치물 〈발끝〉은 우레탄 비닐과 스테인리스스틸, 뾰족한 팽이를 닮은 황동으로 된 지지대로 구성되어 있다. 성임은 이 작품을 두고 “이불 사이로 삐져나온 아이들의 다리”(와 부부의 다리)를 “일상을 지지하는 여러 기둥들”로 해석·형상화한 것이라고 했다. 이불 사이 아이들의 발과 다리는 당장에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전유될 수 있을 것이지만, 언제나 그런 가족주의의 이미지에서 빠져 있는 것은 가사노동자의 “응시”이다. 성임은 가족 구성원의 다양한/친밀한 이야기를 빼고, 대신에 내부의 타자의 시선으로 6개의 몸의 12개의 다리를 차갑고 몰개성적인 12개의 기둥으로 전치시켰다. 말랑말랑한, 다정한 이야기가 투사될 수 없는, 우리가 아는 가족을 둘러싼 서사가 미끄러지도록 추상화된, 등가화된 구조물이 성임이 자신의 가족을 ‘주관화하는’ 방식이다. 관람자가 이야기를 상상하고 경험을 밀어 넣고 주관화할 수 있는 1인칭의 집단적 이야기가 없다.

〈두 줄기〉 황동파이프, 아크릴, 면사 2020

오직 떠받치는 기둥, 간신히 발끝으로 바닥을 딛고 있음의 은유, 나른하고 서정적인 감정이입을 불허하는 단호함이 있다. 거의 드러나지 않는 돌봄 노동으로 편안한 가족의 환상을 보좌하는 여성이 작가의 응시를 경유해서 갤러리로 변한 거실을 “장악하는/몰수하는” 방법이다. 성임은 집에서는 노동자이지만 미술관에서는 “주체”이다.

성임은 좋은 양육자이지만, 그것을 미술관에서 과시하거나 반복할 의향이 없다. 작업실과 미술관은 사회적 문화적 이데올로기가 틈입할 수 없는 배타적 공간이다. 함께 대등하게 발끝으로 서서 유지하는 운명 공동체로 번역된 가족의 풍경에 낭만이나 서정, 구태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예술을 하는 여성은 이기적이다. 성임은 둘이고, 그 둘의 간극을 메우려는 데, 양심의 가책이나 죄의식을 가진 일하는 여성의 위치를 반복하는 데 마음을 두지 않는다. 감내하면서 살아내는 것과 번역하고 해석하는 것을, 그 모순-거리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 거리가 역설적으로 대상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힘, 성찰성일 것이다. 성임은 아이들과 남편에게도 자신이 “응시”하는 가족의 진실, 혹은 가족의 환상 너머를 나누어준다. 자신이 건사하는 가족 6명의 12개의 다리를 뾰족하게 탈-신체화함으로써, 의당 모성에 욕망하는/투사된 사회적 통념을 탈구축한다. 가족은 늘 위태롭지만 함께 그 위태로움을 겪는 공동체라는 것이, 방과 방을 연결하는 거실이라는 중성의 공간에 대한 성임의 해석이다. 아니 성임은 “자기만의 방”에서 가족의 진실을 탈-은폐한다. 그럼으로써 성임은 사랑과 희생의 자리에 은폐된 침묵-묵인의 심연을 번역하고, 그럼으로써 주부 작가의 양가성, 모순을 심미화/형식화한다. 성임은 지금 자신의 사랑과 고통의 진원지인 가족과 자신의 사랑하는 할머니를 연결하면서 혈연관계를 이중화·복수화한다. 성임의 ‘발끝’, “가끔 뛰어내릴 요량으로 베란다 끝에 서 있는 발끝”은 “나를 짓누르는 창살과 같은 십자가, 고관절을 다쳐 누워 계시는 굳어가는 할머니의 발”에서 전승된 것이다. 할머니의 운명을 내가 잇고 있고, 동시에 나는 그 운명을 재전유하는 관점을 확보함으로써 운명을 “긍정한다.” 여기서는 나르시시즘도 연민도 내면화한 사랑도 금지다. 여긴 할머니와 손녀의 고통의 연대, 응시하는 자의 ‘객관성’이 있다.

〈끝없는 나무+Holes〉 철제 프레임, PE 망, 플라스틱 공, Led, 실 720×720×350cm 2024

그리고 이제 성임의 “자기만의 방”이 나온다. 거실 옆 전시장에는 〈황금이불〉, 〈오래된 무늬〉, 〈발끝으로 서기 드로잉〉이 설치되어 있었다. 임신-출산을 은유적으로 전유하는 남성 작가가 확보하는 일정한-균질화된-지속적 시간을 확보할 수 없는 성임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고 데려오고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우는 사이사이 조각난 시간들을 글자 그대로 이어붙이는 작업을 한다. “일상의 시간과 동등한 부피로 시간을 잡는 작업”이 성임이 창안한 미적 형식의 전제이고 구조이다. 성임은 방해받지 않는 집중과 마음이 조건인 작업을 할 수가 없다. 오직 조각난 “물리적 시간들”을 기계적으로 이어서 비-재현적 형식, 풍경을 만든다. 가족을 위한 노동이 5시간이었으면 딱 5시간만큼 나를 위한 노동을 하는 것. 혹은 짬짬이 빈 시간을 확보하려고 노동하기. 늘 깨어 있는/있을 것. 필사적으로 살아내는/있는 것. 그래서 “수개월 짠 황금이불”이나 “45,000개의 공을 양파망에 집어넣는 작업”이나 “빵 끈이나 비닐로 바닥이나 공간을 덮는 작업”이 생성되었다. 감동적인 것도, 스펙터클한 것도 아닌, 그저 시간, 텅 빈 시간, 쓸모없는 것을 만든 시간을 증명하는 것. 성임은 노련한 기술, 그러므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수공업적 작업을 만들지 않으려 했고(그녀가 해 준 말이다), 누구나 감정이입할 수 있는 ‘여성적’ 작업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역설적이지만 가사노동이 의미있는 것으로 재출현하게 될 것이었다- 일상을 몰수하는 작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사노동의 ‘무의미’를, 그것의 기능성을 방증하려면 가사노동만큼의 시간을 할애한 미적 노동도 무의미한 것이어야 한다. 예술이 무의미한 것을 열정적으로 하는 예외적 시간, 공간에 대한 것임은 삶이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고, 그렇게 삶에 제대로 된 예의를 취하려는 인간의 자의식적 행위가 예술이기 때문이다. 주부-예술가는 바로 그런 진실을 일시적으로 유예해야 하는, 그러면서도 그것을 보유하려는 자리, 장소일 것이다. 성임은 이 시간과 저 시간을 잇는 중에 잠시 ‘남은’ 시간, 아이들은 “마블 시리즈를 보라고 영화관에 넣어 놓고”, “수영장에 풀어 놓고” 그 옆에서 작업 노트를 쓰고 잇고 뜨고 짜는 작업을 했다. 그녀의 손이 많이 간 작업은 천방지축으로 뛰어노는 아이들이 “만질 수 있고 망가뜨릴 수 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 가방에서 꺼내 들고 계속할 수 있는 가볍고 값싼 물질로 된 작업, 내가 살아 있음을, 내가 욕망하는 존재임을 ‘바깥’에 알리는 작업, 단지 희생과 헌신에 만족하는, 그렇기에 자신의 욕망을 배려하지 않기로 선택한 여성이 아님을 알리는 작업.

〈빛의 나무〉 철제 프레임, LED, PE 망, 털실, 플라스틱 공, 스틸 고리 220×500cm(×3) 2023

〈황금 이불〉 와이어 타이 250×260cm 2024

성임의 표현처럼 그녀의 작업은 “일상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오직 작업으로 일상을 덮은, 거기서 살아남은 것들”이다. 그녀가 만든 황금이불은 빵 끈으로 만든 이불이다. 황금색인 것은 맞지만 이 이불은 덮을 수 있는 것도 어떤 정서적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작업도 아니다. 그것은 덮을 수 없는 이불이고, 조잡한 빵 끈의 황금색이고, 일상 기능이 제거된 즉물적 개념으로서의 이불이다. 예술이 일상 옆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일상의 값싼 사물들, 오브제들의 기능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탈-기능화하는 전략을 통해 성임은 물리적 참조/인용과 개념적 교정을 도모한다. 평범한 여성으로서, 사회가 요구하는 기능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그 기능을 벗어버린 채 아이들 곁에서건 작업실에서건 부엌에서건 ‘자기임’을 고수하는 전술이다. 사랑하는 가족이건 고된 일상이건 무의미한 삶이건, 그것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오직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만 채워지는 부피나 넓이, 그러므로 물리적으로 자신을 착취하는/쓰는 시간을 장악할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텅 빈 시간의 존재를 증명할 작업을 한다. 자신을 사용하는 집이 아닌 자신이 사용하는 공간성을 가시화하는 일이다. 없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있는 시간에도 충실했던, 그럼으로써 마침내 사이사이에 유예된 시간을 물리적으로 떠내고 증명한, 그것을 드로잉이나 이상한 뜨개질이나 기이한 모여있음으로 채우는 무익한 노동. 집에서 나가지 않은 여자가 집을 장악하는 방법. 예술. 여성 자아, 주관성의 물리적 현시에 불과한. 텅 빈 자리에서의 미적 노동.

* 본 기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2-2023 작가 조사-연구-비평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집 몸 집』 자료집의 일부를 재가공하여 수록한 것으로, 월간미술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작가 연구팀의 협력으로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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