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퐁텐
Claire Fontaine

레디메이드의 비밀

ARTIST FOCUS

클레어 퐁텐
이탈리아 출신의 이론가 풀비아 카르네발레(Fulvia Carnevale )와 영국 출신의 미술가 제임스 손힐(James Thornhill )이 함께 설립한 콜렉티브이자 여성주의 작가. 2004년 파리에서 결성, 현재 이탈리아를 기반으로 작업. 영어로 ‘맑은 샘(Clear Fountain )’을 뜻하는 클레어 퐁텐은 마르셀 뒤샹의 작품〈샘〉에 대한 직접적인 경의의 표현으로, 레디메이드 아티스트를 표명하며 레디메이드 전략의 급진성을 회복하고 작품 소유권의 개념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미술 시스템에 도전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음. 제공 : 에르메스 재단

〈무제(분실물)〉 볼라드, 볼트, 유아용 패팅 가변 크기 2024
사진 : 김상태 제공 : 에르메스 재단

레디메이드의
비밀

유진상 | 계원예대 교수

먼저 레디메이드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야겠다. 레디메이드는 1915년 마르셀 뒤샹이 처음 언급한 개념이다. 당시 뉴욕에 머물던 그는 자신이 1913년 파리의 작업실에 두고 온,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물인 의자 위에 거꾸로 고정된 자전거 바퀴에 대해 누이동생인 쉬잔에게 보낸 편지에서 ‘레디메이드’라고 이름 붙이겠다고 밝혔다. 1934년에 출판된〈녹색 상자 (The green box)〉에는 1912년경부터 작성하기 시작한〈큰 유리〉의 기본 개념에 대한 글과 드로잉들이 담겨 있다. 이중 ‘레디메이드’라는 챕터가 있다. ‘레디메이드 규정하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에서 뒤샹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미래의 어떤 순간 (날짜, 요일, 분)에 ‘레디메이드를 기재하다.’ —이후에 레디메이드를 (온갖 지연을 이용하여) 찾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정확한 시간에 이루어져야 하는 진술처럼 시계, 순간성이다. 그것은 일종의 약속인 셈이다. —당연히 이 요일, 시, 분 등을 레디메이드에 정보로 기입한다. 마찬가지로 레디메이드의 수량도 기재한다.” 이 글에는 레디메이드에 대한 두 가지 조건이 내포되어 있는데, 하나는 레디메이드가 준비된 것이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여러 번 만들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이러한 조건들은 ‘신중한 무관심’이라는 태도와 관련된다. ‘무관심(indifference)’은 뒤샹의 작업에 결정적인 요소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주어진 의미들에 대해 초연한 대상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다른 말로 ‘중립’이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의 이 특정한 위치와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뒤샹은 레디메이드를 선택하는 데 있어 마치 연금술이 그러하듯 의미 대신 우연적인 미상의 순간을 특정하는 데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지정된 시간은 레디메이드를 특별하게 도래한 것으로, 선택된 것으로 만들며 동시에 의미의 배제는 그것을 일종의 영점(degreezero)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모든 기의(記意)에 대해 열려있는 기호로 만든다. 이 텍스트 바로 앞부분에는 뒤샹의 유명한 ‘라루스 사전’을 이용한 예시가 있는데 역시 추상적 ‘연사-기호들(signes-étalons)’로 이루어진 임의의 알파벳 만들기에 대해 다루고 있다. 즉 우연에 기반한 새로운 유형의 문법을 통한 언어적 레디메이드, 특히 제목과 관련된 레디메이드 문구들을 만드는 방식들이 이로부터비롯된다. 레디메이드는 대상뿐 아니라 유기성, 기표적 권위, 주체적 맥락으로부터 대상을 분리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매번 새로운 시선과 시점들을 생산하게 하는 방법론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레디메이드가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 속하는 오브제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
LED 알파벳, 프레임 400 × 27cm 2020~2024
사진 : 김상태 제공 : 에르메스 재단

〈Foreigners Everywhere〉 2004~24
Galerie Mennour 전시 전경
사진 : Julie Joubert
제공 : Claire Fontaine

클레어 퐁텐은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단지 구체적 특징이 없는 산업적 산물이 아니라, 불가해하고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소환과 이어진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앵프라-맹스(infra-mince)’에 대해 언급한다. ‘앵프라-맹스’는 ‘초-얇음’이라고 번역할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잠재성이 각각 다른 차원에서 구현될 때 그 경계의 거의 불가능한 위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르네 톰(René Thom)의 ‘파국 (Catastrophe)이나 양자역학에서의 ‘도약(jump)’이 일어나는 지점, 뒤샹에 의하면 n차원과 n+1차원의 접점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경계의 틈은 너무 얇기 때문에 그것을 통과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레디메이드는 그럼에도 어떤 미증유의 경로를 통해 이 ‘앵프라 -맹스’를 통과한 사물이다.

클레어 퐁텐은 이탈리아 출신의 이론가 풀비아 카르네발레 (Fulvia Carnevale)와 영국 출신의 작가 제임스 손힐(James Thornhill) 두 사람이 결성한 그룹의 명칭이다. ‘La fontaine claire’(맑은 샘)라는 불어표현에서 차용한 이 이름은 자연스럽게 뒤샹의 작품〈샘 (La fontaine)〉을 떠올리게 한다. 일명 ‘소변기’로 우리에게 알려진 이 작품은 뒤샹의 대표적인 레디메이드로서 1917년 뉴욕《인디펜던트》에서 R. Mutt라는 작가명으로 공개되어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반(反)미술적이고 전복적인 성격으로도 유명하지만 그 실루엣이 모나리자와 유사해 성적이고 신성모독적인 농담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뒤샹은 이 오브제뿐 아니라, 인디펜던트전 자체를 하나의 레디메이드로 다루었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이 전시의 발기인인 동시에 작가이자 비평가(『The Blind Man』 편집장으로서 그는 이 작품의 비평을 다루었다.)로서 복수의 주체를 구성하고 있다. 클레어 퐁텐에게 주체의 복수성은 그들이 스스로를 클레어 퐁텐의 ‘조수들(assistants)’이라고 부르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대리인(proxy)을 내세워 주체의 자리를 비우는 이런 방식은 뒤샹의 로즈 셀라비(Rrose Selavy)를 떠올린다. 주체의 대리 혹은 대치는 성별, 국적, 개인/집단,작가/조수와 같은 복합적인 정체성의 전위를 일으킨다. 제삼자(third party)로의 위임은 예술가의 창조적 개입이라는 신화를 거리와 기계적 초연함으로 대체한다.

〈이민자들〉 레디메이드 레몬, 폴리스틸렌, 페인트, 플라스틱 가변 크기 2022
사진 : 김상태 제공 : 에르메스 재단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Beauty is a ready-made)》에는 전시의 제목인 문장 외에 또 다른 레디메이드-문구 하나가 더 등장한다. 그것은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로, 여러 가지 의미나 맥락으로 읽힐 수 있다. ‘사방에 외국인들’은 관광객들이 득실거리는 파리나 런던 같은 대도시에서 비유럽인, 비영어, 비서구적 복식, 비기독교 등이 눈에 띌 때마다 현지인들이 반사적으로 되뇌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실은 오늘날의 정치적, 사회적, 인종적 갈등과 긴장을 내포하고 있는 매우 첨예한 맥락에서 읽히는 표현이라고 봐야 한다. 클레어 퐁텐은 수많은 장소에서 부지불식간에 사람들이 내뱉는 이 문구를 단지 ‘채택’함으로써 강렬한 정치적 구동체로 만들었다. 이 문구는 이번 4월에 열리는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주제가 되었을 정도로 커다란 시의성을 획득했다. 2004년에 처음 사용된 이 두 개의 단어는 작가들의 가까운 지인이자 큐레이터인 아드리아노 페드로사 (Adriano Pedrosa)에 의해 수차례에 걸쳐 차용되었으며, 결국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제목으로 채택되었다. 오늘날 외국인 혹은 이방인은 모호한 개념이 되어가고 있다. 자본주의적 요구에 따라 점점 더 많은 노동자가 덜 부유한 국가에서 더 부유한 국가로 이동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휴대전화를 손에 든 채 어느 곳에나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다. 정치적 난민들과 구 식민지에서 종주국으로 이주한 이민자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수백만 명씩 모든 국가로 흘러들고 있다. 전례 없는 이산과 집합이 지난 백여 년간 전지구적으로 일어났다.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는 일종의 밈(Meme)이자 마법의 주술 같은 것으로, 작가들은 여러 국가의 언어로 번역된 이 문구를 네온사인으로 만들어 모든 이가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또한 라이트박스로 제작된 대형 사진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깨진 스마트폰의 액정화면을 촬영하여 크게 확대한 이 작품들은 지오토의〈그리스도의 애도〉를 부분적으로 차용한 〈무제 : 애도〉,  성 프란체스코의 설교 일화를 담은 〈무제 : 새들을 위한 설교〉, 열적외선 이미지를 보여주는 〈무제 : 오직 4도〉이다. 이 작품들은 독특한 질감을 지니고 있는데, 먼저 디지털 액정에 표시된 사진 이미지들을 크게 확대하면서 다소 흐릿해진 화면 위를 깨진 유리의 거미줄 같은 선명한 금들이 뒤덮고 있다. 다시 한번 뒤샹의〈큰 유리〉위에 드러나는 깨진 유리 파편과 금들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뒤샹의 작품에서 이 깨진 유리의 선들은 초월적이고 신화적인 〈큰 유리〉의 시공간에 개입한 현실적, 물리적 시공간을 보여준다. 클레어 퐁텐의 작품들에서도 이 깨진 유리 파편의 선들은 스마트폰이라는 사물과 디지털 정보로서의 이미지의 일상적 재현 위에 놓인 초월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우연적 힘의 현전을 보여준다. 작가들이 한 일은 그림을 망가진 스마트폰으로 찍은 것이고 깨진 액정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고해상도로 재촬영한 것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택의 순간’으로, 뒤샹은 이것을 ‘초고속 노출(Exposition Ultra-rapid)’이라고 불렀고 이로 인해 ‘앵프라-맹스’를 순간적으로 통과한 레디메이드가 성립된 것이다. 이제 흥미로운 것은 지오토의 그림들과 불타오르는 지구의 이미지들이다. 〈애도〉에서 하늘의 천사들이 슬퍼하는 모습은 묵시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절대적 파국(그리스도의 죽음)의 순간과 그 이후의 세계, 그리고 성인이 새들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의 관대함은 기독교의 핵심적 서사이며 부활과 사랑으로 이어지는 종교적 신비 그 자체이기도 하다. 불타오르는 행성 역시 파국과 구원을 비는 탄식과 연관된다. 이 작품들은 레디메이드이면서 동시에 방향성을 지닌 메시지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부분이 뒤샹과 다른 면일 것이다. 클레어 퐁텐에게 레디메이드의 활용에는 그 특별한 역량을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는 일반적 전제가 깔려있다. 전시 전체의 바닥을 이루고 있는〈컷업〉과〈이민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서정적이고 유머러스한 배경을 제공한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팔레르모 집의 깨진 바닥 타일 사진을 붙여놓은 바닥 위에 플라스틱 레몬들이 굴러다니는 풍경은 남부 이탈리아 시실리의 거리를 배회하는 아프리카 이민자들의 싸구려 옷 색깔들과 연관된다. 의도적으로 가장 낮은 곳에 놓인 레몬들을 본의 아니게 걷어차면서 관객들은 새로운 관계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라는 문장에는 미적 취향에 관행적, 역사적, 계급적 측면이 있다는 사실만 담겨있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은 심미적인 것이 특별하기 위해서 어떤 경계를 돌파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건을 선언하고 있다. 그 경계는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극도로 가느다란 틈만을 열어두고 있다. 이 틈을 지나가는 일은 물리적, 상식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 레디메이드는 기성품이 아니라 초월을 위해 준비된 대상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일은 미술만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무제 (오직 4도)〉
인더스트리얼 프레임리스 LED
라이트박스, 펄 비닐 디지털 프린트
277 × 156 × 10 cm 2018
사진 : 김상태 제공 : 에르메스 재단

〈무제(애도)〉
인더스트리얼 프레임리스 LED
라이트박스, 펄 비닐 디지털 프린트
277 × 156 × 10cm 2018
사진 : 김상태 제공 : 에르메스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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