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읽는 동시대 미술의 트렌드Ⅰ

김인혜(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김정현(미술비평)
김해주(싱가포르 아트 뮤지엄 선임 큐레이터 및 레지던시 팀장)
문혜진(미술비평)
박남희(백남준아트센터 관장)
서동진(계원예대 교수)
Special Feature
김인혜(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전시장에서 미술관으로!
한국에 전시장은 많지만, 미술관은 별로 없다. 1969년에 설립될 때 소장품 한 점 없이 시작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역사 때문일까? 우리나라에서는 미술관이라고 이름은 붙였지만, 소장품에 크게 신경 쓰지 않거나, 소장품을 내세우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품 상설 공간이 없으니, 지역의 공공미술관도 대부분 이런 모델을 따르게 되고, 넓은 미술관을 기획전으로 메우기 급급한 형편이다. 이는 대부분의 해외 미술관에서 소장품 상설전이 차지하는 공간 비중이 전체 면적의 약 2/3 정도를 차지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소장품 전시를 한번 열기는 어렵지 않아도, 꾸준히 상설전이 유지되려면 주기적으로 교체될 소장품의 수가 확보되어야만 한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상설관’을 만들지 못했던 한국 미술관들의 사정도 이해할 만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고(故) 이건희 회장의 작품 기증으로 근대 시기 작품의 공백이 상당히 메워졌고, 전체 소장품의 수가 11,800점에 이르게 됨으로써, 드디어 상설관의 조성이 어느 정도 가능한 시점이 되었다. 더구나 이건희컬렉션의 지역 순회를 2~3년에 걸쳐 마친 후 처음으로 다시 국립현대미술관에 안착한 시점이 올해 초. 이에 국립현대미술관은 과천관에 1,000평, 서울관에 470평 규모의 전시장에 상설전을 조성한다. 상설전을 연 단위로 개편하면서, 중요한 작품이나 역사적 공백을 적극적으로 수집하여 채워나가려고 노력하는 데에 미술관의 역량을 써야 한다. 이는 지역미술관으로도 확대되어야 할 ‘전시장에서 미술관으로’의 전환 계기이다.

한편, 올해는 리움미술관에서도 《현대미술 소장품전》을 주요 전시로 내세워서, 그동안 수집된 작품들을 감상하는 기회가 되리라 기대된다.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의 박래현〈작품〉(1971). 전시
《고 이건희 회장 기증품 
국외 순회전》은
미국의 스미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 및 시카고박물관, 
영국박물관으로 순회할 예정이다.

#빅 네임
리움미술관이 최근 몇 년간 굵직한 작가의 개인전을 연달아 기획하면서, 이러한 흐름이 올해에도 계속 이어지는 모양새다. 리움미술관과 호암미술관에서는 피에르 위그, 이불, 겸재 정선, 루이즈 부르주아 등 동서양 고금의 거장들이 라인업을 형성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이대원(덕수궁관), 김창열, 론 뮤익(이상 서울관)이,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는 마크 브래드포드의 개인전이 열린다. 이러한 ‘빅 네임’ 작가의 작품을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특히 오랜 연구에 기반하여,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작가의 세계를 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면 더할 나위 없다.

호주 태생의 하이퍼리얼리즘 조각가 론 뮤익의 아시아 첫 개인전 출품작 〈In Bed〉(2005)
©Gautier Deblonde, Ron Mueck

아트선재센터의 전시 《언두 플래닛》(2024)
출품작 홍영인 〈학의 눈밭〉(2024)의 일부

#인류세
‘예술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화답하는 방식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왔다. 지금의 예술은 지금 인류가 가진 문제를 인식하게 하고, 변화하게 하고, 새로운 사고와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데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인류세’ 이슈는 한동안 끝나지 않는 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지구는 기후 위기를 겪고 있고, 인간과 지구 환경의 공생은 의문시되는데, 뚜렷한 방향 전환은 그다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이 인류에게 각성의 기회를 제공했음에도, 오히려 코로나 이후의 전지구적 경제 상황과 정치적 자국중심주의가 탄소중립 시대를 위한 연대적 실천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이다보니, 여전히 많은 예술가가 인류세 문제를 환기하는 작업을 내놓는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올해 내내 다원예술 프로그램의 주제를 ‘숲’으로 삼았다. 동시대 미술관에서 인류세 이슈를 고민하는 자리로, 숲과 인간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도이다. 연간 10개의 프로그램이 운영되며, 공연, 퍼포먼스, 설치, 워크샵 등으로 이루어진다. 아트선재센터는 《언두 플래닛》을 올해 1월 말까지 지속하고, 연말에는 인간과 환경의 소통을 주제로 한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개인전이 개최된다. 오래 전부터 생태를 주제로 작업해 온 최재은 작가의 개인전이 오래간만에 국제갤러리에서 열려 궁금증을 자아낸다.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토마스 사라세노의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에 대한 제언도 관심을 가질 말하다.

김정현(미술비평)

#증오의 이해
“단순하고 절대적인 악을 보란 듯이 논하는 것은 분명 일종의 사치”(리처드 호프스태터). 1950년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책에서 밑줄 그어놨던 이 구절을 2020년대 중반에 부쩍 자주 떠올리게 된다. 한국 사회의 부패가 극단적인 사건으로 분명하게 가시화된 최근 시국에 비판은 실로 사치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한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별난 ‘저들’의 존재는 국내에서 비교적 소수에 불과하지만, 기성 매체의 극우화를 포함하여 갖가지 현상을 무차별하게 비추는 현대 미디어 현실에서 그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다. 제레미 델러는 다큐멘터리 영화인 〈Putin’s Happy〉 (2019)에서 브렉시트 이후 영국 사회를 조명하며 동시대 극우주의 포퓰리즘의 초상을 포착한다. 사고의 폐쇄성, 지나친 자기 확신, 만연한 증오의 정동이 엿보인다. 그런데 이는 종종 정반대 편에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서도 발견된다. 동시대 미술을 행동주의적으로 재활성화해 나가는 절실한 분노의 동력이, 증오를 증오하는 정동으로 번져 바깥을 배제하고 안락한 내부의 동일성에 매몰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싫어도 모르고 살 수 없는 시대다. 증오의 표정과 말, 행위를 대상화하고 이면을 바라보게 하는 기획이 필요하다.

제레미 델러 〈Putin’s Happy〉(2019, 배너) 외 2024 리옹비엔날레 전시 전경.
다큐멘터리 영화〈Putin’s 
Happy〉와 한 세트로 구성된 동명의 설치용 배너 및 영화에 등장한 다양한 배너가 함께 설치되었다.
해당 
다큐멘터리는 온라인에서 무료로 전체 감상이 가능하다.
https://fourthree.boilerroom.tv/film/putins-happy

#유지관리의 미학
새로운 재료를 주문하지 않고 작품을 만들거나 전시를 꾸밀 수 있을까. (새로운 책을 사서 보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을까). 가능한 한 물건을 새로 사지 않고 창작하는 방법을 고민하다 보면 ‘유지관리’의 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최근 세계 곳곳의 뮤지엄 전시에서 다음과 같은 제스처가 눈에 띈다. 지난 전시의 흔적이 남은 벽에 페인트칠을 새로 하지 않고 노출하거나, 가벽을 재활용하고, 가벽 대신 재사용 가능한 유닛이나 커튼과 같은 재료를 활용하여 공간을 구획하는 전시 디자인을 시도하는 것이다. 뮤지엄의 전통적인 역할 중 하나인 유지관리 업무를 행정적 관점 너머 창작 미학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전시 기획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핀란드 디자인 및 건축박물관 기획 《Fix: Maintenance and Repair》(2024 )). 젊은 세대 건축가들의 새로운 방향으로, 대규모 자본의 투자를 전제로 한 고전적인 ‘건축가-저자’ 모델에서 벗어나 제한된 물자와 환경에서 기존 인프라를 보충하고 전유하는 역할을 강조한 기획도 무척 시의적절해 보였다 (스위스건축박물관 기획 《현재에 만족하세요: 일본 건축의 새로운 방향》(2022)). 2025년에는 국내 미술관의 생태주의적 의식화가 더욱 강화·확산되고, 창작의 관점에서 유지관리의 미학을 흥미롭게 창출한 사례를 자주 마주하기를 바란다.

전시《Fix: Maintenance and Repair》는 대량 생산된 의자에
가득 남은 낙서와 사용 흔적이 그저 바로잡아야 할 오염인지, 상상과 우연의 미학이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지 묻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조성된 낡고 열악한 주거 단지의 환경을 개선하는
소규모 셀프 리노베이션 아이디어를 
무료로 제공하는 플랫폼이다.
스위스건축박물관 
기획 전시《현재에 만족하세요: 일본 건축의 새로운 방향》(2022)에 소개된
유타로 무라지(CHAr)의
〈모쿠친 레시피〉(2009~) 웹사이트(https://mokuchin-recipe.jp/) 

#망각협정
과작으로 유명한 스페인 출신의 영화감독 빅토르 에리세는 근작 〈클로즈 유어 아이즈〉(2024)에서 기억상실증에 걸려 행방불명된 친구를 찾아 나선 영화감독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 주인공도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은 채 은둔한 지 오래되었고, 그가 묻어둔 많은 것, 가령 미완성 영화의 필름이나, 아들의 때 이른 죽음과 같은 고통스러운 기억의 매개체는 모두 낡은 창고에 잠들어있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스페인은 독재 정권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망각 협정(Pacto del Olvido)’을 체결하며 고통의 역사를 침묵 속에 묻었다. 그러다 약 20년이지난 2000년대에 들어서야 기억의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영화는 단순히 망각에서 헤어나 기억을 되찾는 서사를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의 시간성을 통해 망각의 시간을 마주보게 할 뿐이다. 동시대 미술은 기억의 예술이라 할 만큼 역사적 주제 의식과 아카이브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오래전에 잊힌 예술가들에 대한 발굴과 조명에도 부지런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기억에 부쳐진 선별된 소수에 대비되어 망각에 남겨진 폐허의 다수가 존재하는 것이 제도화된 미술 기억의 불가피한 조건이다. 이것도 일종의 망각 협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폐허를 뒤적여 주워 든 것의 텅 빈 얼굴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을까. 망각의 삶은 어떻게 전시해야 할까.

김해주(싱가포르 아트 뮤지엄 선임 큐레이터 및 레지던시 팀장)

김해주는 2024 베니스비엔날레 싱가포르관의 큐레이터로 선임돼
로버트 자오 런후이(Robert Zhao Renhui)의 작업을 소개했다.
로버트 자오 런후이의 작품 〈The Owl, The Travellers and The
Cement Drain〉 속 이차림은 자연과 인공 요소가 상호작용하고,
외래종과 토착종이 공존하며, 과거와 현재가 얽혀 있는 곳이다

로버트 자오 런후이의 작품〈Trash Stratum〉(2024) 속 구조물 안에는
버려진 쓰레기통 형태의 물웅덩이를 방문하는 
다양한 생물들이 12개의 스크린에 담겨 있다.

#회복탄력성
회복탄력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먼저 아랫입술을 잘근 씹는다. 계엄 선포와 탄핵안 가결 이후의 정치적 혼란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지금, 회복을 논하려면 우선 사건의 해결이 전제되어야 한다. 회복의 힘과 노력은 상황이 안정된 이후에야 비로소 고민해볼 문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상황이 곧 안정될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이후의 회복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현재의 정치적 상황이 일단락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든 새로운 난관에 직면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사회적·경제적 혼란, 민주주의의 위기, 충격적인 사고뿐만 아니라, 기후 위기로 인한 재난과 불안정한 국제 정세의 영향 등 일상의 균형을 흔들고 긴장감과 우울을 불러오는 일들은 항상 미래에 잠재해 있다.

나는 ‘resilience’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물리적 의미로는 고무처럼 튀어오르는 동작이나 반발력을 가리킨다. 이를 번역할 때 단순히 회복만이 아니라 탄력이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할 수 있어 기쁘다. 원상태로 돌아가는 회복을 넘어, 그 이상으로 가뿐히 튀어오르는 힘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물리적인 의미를 넘어 정신적, 감정적 회복도 의미한다. 압력이 가해질수록 더욱 강해지는 반작용, 그리고 그 동력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공동체의 지지를 떠올린다.

지난해 회복탄력성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했던 순간들은 자연 및 생태와 관련된 전시를 통해서였다. 생태계가 파괴된 후 원래 상태를 회복하거나 새로운 균형을 찾는 능력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했다. 특히 싱가포르의 이차림1에 관한 작업을 통해서 이 단어를 많이 썼는데, 결국 숲의 회복이라는 개념 역시 인간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겠지만, 적어도 비관적인 전망이나 파괴를 방치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자연의 회복력이 있다는 이유로 현재의 파괴가 지속되어도 큰 영향이 없다는 논리를 지지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생태계의 회복탄력성은 자연이 인간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연은 우리에게 응답하고 반작용을 가하며, 인간 사회는 이러한 반응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자세히 듣기와 오랫동안 보기는 파괴와 재해의 모든 원인 속에서 다시 활성화해야 할 중요한 활동이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미래 지표들 속에서도 가능성을 탐구하고, 파괴를 저지할 힘을 구축하며, 다친 곳에서 다시 회복할 힘을 상상하는 것—이것이 연말과 연초의 트라우마를 넘어 앞으로 나가기 위해 모색할 방법이라고 믿는다.

문혜진(미술비평)

#생태친화적 기술주의
챗GPT를 비롯해 인공지능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네트워크의 감각이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으로 범용화되는 현상을 일컫는 포스트인터넷처럼, 인공지능이 일상화되어 당연시되는 포스트인공지능의 시대는 멀지 않은(어쩌면 이미 도래한) 미래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좌우할 기술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겠지만, 기후 위기와 환경 오염처럼 기술의 진보가 인류에게 디스토피아를 초래할 수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기술에 대한 관심은 생태친화적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자연과의 공존, 생물과 데이터/기계의 연결, 다른 존재(비인간)와의 공생 등 피할 수 없는 기술주도적 환경에서 인간과 지구의 생존을 위해 연대와 공존의 방법론이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비인간 객체나 신유물론 등의 논의는 여전히 유효할 것으로 보이고, 역으로 자동화 과정에서 배제되는 인간과 고유의 속성(상상력, 정신, 영성 등)에 대한 철학적·사회학적 주목도 식지 않으리라 본다. 기술과 관련된 모든 키워드는 존재와 부재, 소멸과 재생이라는 근원적인 테제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권혜원은 생태계와의 지속 가능한 공존을 탐색하는 기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의 작품 〈Sensing Cinema〉(2023)에 등장하는 가상의 관람객은 팔당호에
설치된 다양한 센서들에서 실시간으로 수신된 데이터 네트워크에 접속하고,
관람객들의 몸은 센서이자 프로세서로서 이 데이터들을 증폭, 변환하는 장치가 된다.

#미시서사와 내적 충실
끝없이 맹목 질주하는 자본주의의 전진 아래 인류의 미래가 현재보다 나아지리라는 믿음은 사라진 지 오래다. 불확실성이 뉴노멀로 자리 잡은 시대에 작가들은 추상적인 이념이나 슬로건보다 자신과 자신 주변의 일상에서 출발해 사회와 접속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장애, 여성, 퀴어, 소수자, 비인간 같은 키워드가 여전히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지만, 그것이 거대 서사의 형태보다는 나, 가족, 반려동물, 이웃의 문제를 돌아보며 이를 끌어안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나의 문제의 확장 혹은 연장으로서 사회적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다. 특히 앞 세대에 대한 적극적 저항이나 도전 같은 아방가르드적 태도가 약화된 현재,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나 불확실성 속에서 내일을 구축해야 하는 젊은 작가들은 작지만 확실한 ‘나’의 문제에 충실한 경향이 더 짙다. 이들은 해체나 파괴가 아니라 불안정한 상태로라도 무언가를 구축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외형적 화려함보다 내적 충실을 기하는 현상은 정치적 불안정과 경기 침체와 함께 당분간 지속되리라 본다.

윤일권의 작품 〈Memory〉(2024)에 등장하는 인물은
작가의 초등학교 
졸업앨범 속 동창생의 얼굴이다

#온라인 유사관람
한 해 열리는 전시의 총량이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은 지 오래다 보니,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직접 가지 못한 전시를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등으로 대리 관람하는 추세가 자리 잡았고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 유사관람이 실제 관람을 대체할 순 없겠지만 시간적·공간적 제약을 보충해주는 수단으로는 유효하고, 갈수록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은 2017년경부터 시작된 전시의 양적 증가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온라인 관람 권장이 맞물려 발생한 것으로, 몇 가지 파급 효과를 지닌다. 우선, 실물 못지않게 이미지가 중요해진다. 전시를 사진으로 대신하다 보니 사진을 잘 찍는 것이 설치만큼 비중이 커지면서 이미지의 힘이 강화되었다. 심지어 작품의 실물 관람 없이 인스타그램 이미지를 보고 작가를 섭외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소셜미디어가 홍보의 주된 장으로 자리 잡은 지는 오래지만, 온라인 이미지들이 홍보를 넘어 기록으로 기능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작년만 해도 놓친 전시를 전시 촬영 영상으로 사후 관람한 경우가 여럿 있었다. 특히 젊은 작가나 기획자들에게 전시 촬영 영상의 중요성이 더 커지리라 본다. 가속화되는 한국 미술계의 전시 총량이 줄어들 것 같지 않고 사후 홍보의 비중은 증대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박남희(백남준아트센터 관장)

#초연결(Hyper-Connectivity)
4차 산업혁명 이후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세계로 진입하면서 모든 것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사람과 사물, 공간 등이 물리적, 가상적 경계 없이 서로 연결되어 소통하고 상호작용하게 된 것이다. 2008년 시장조사기업 가트너(Gartner)가 처음으로 사용한 ‘초연결’이라는 말은 네트워크, 센서, 데이터 기술의 발달로 인한 사회 변화를 설명하는 용어가 되었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초지능’이 융합하고, 홀로그램·VR(가상현실)·AR(증강현실) 등의 ‘초실감’이 더해지면서 과학기술·생활·국방·의료·교육 등 사회 전반에 지능형 디지털화가 확산하고 있고 이는 예술의 제작, 소통, 향유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사람, 사물, 데이터가 언제 어디서나 지능적으로 연결되는 세계는 모든 유형의 통신이 동시에 가능한 단일화된 통신시스템 속에서 모든 객체에 작동한다. 초연결 사회로 진입하면서 1973년 백남준이 예견한 개인채널의 초연결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과 사물, 물질, 공간, 생물, 정보, 비즈니스 등이 경계 없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소통하고 상호작용하는 인프라는 현재 태어나는 아기들의 예측 평균수명 140세 시대의 태생적 조건이 되고 있다. 항공·기계 기술에 지능정보처리, 초고속 통신 등의 ICT 기술이 결합해 지능형 제어드론을 만들고, 완전자율주행서비스를 고도화하고, 텔레 이그지스턴스(Tele Existence) 로봇의 음성인식, 감정인식, 자가학습 기능 등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재난, 재해 발생에 대한 예방과 수습의 문제를 줄여나가는 것도 가능하다. 이와 같은 디지털 변혁의 ‘초연결’은 예술계의 조건과 상황으로 각자의 코드와 시스템에 따라 제작과 향유의 무한 선택의 세계로 이어지게 한다. 한국미술은 1990년대 넷아트 제기 이래 융합예술에서 기술과 유기적 결합의 시도에 많은 좌절을 경험했지만 초연결 인프라는 기술 자체의 난맥을 넘어서서 새로운 상상과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정혜선과 육성민의 작품 〈날개의 배낭: 현대신화〉(2021)는
재난 감지를 위해 동물의 데이터를 사용하는 세계를 상정한다

#다성성, 연약하거나 사소한 것들과 함께 (Polyphony with Fragile or trivial things)
다성성(多聲性)은 다양성보다 더 풍부하고 깊은 개념으로, 다양한 정보와 의견이 존재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 용어는 음악과 문학에서 각각 사용 근거를 찾을 수 있는데, 음악의 경우 독립적인 멜로디가 둘 이상의 라인에 동시에 구성되는 어우러짐의 일종으로, 하나의 소리만을 지닌 단성음악(homophony), 그리고 화음이 수반되는 멜로디 어우러짐의 일종인 화성음악과는 반대된다. 단성음악은 ‘동일’과 ‘음(音)’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homos’와 ‘phone’의 합성어로, 하나의 선율과 다성적 화성의 결합인 수직적 차원에 중점이 주어진 선율 양식이나 음악의 구조를 가리킨다면, 다성음악은 음악적 구조의 수평적 흐름과 조합에 중심을 둔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문학에서 이 용어는 러시아 비평가인 미하일 바흐친이 1929년에 출판한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 문제』에서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특수성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처음 사용하였다. 그에 의하면, 전통적인 소설들은 다양한 인물과 관점이 등장하더라도 결국은 작가의 목소리 하나로 통합되었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등장인물들을 작가의 관점에 귀속시키지 않고 다양한 목소리들을 자유롭게 내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결론 대신 개별의 소리를 공존하게 하는 것이 곧 다성성이다. 음악과 문학 모두에서 다성성은 하나로 귀결되거나 강요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소리 가운데 소리, 등장인물 각자의 성격에 귀 기울이는 다성성은 곧 소외되거나 소수여서 차별되는 것들에 대한 존재의 복권을 가능하게 한다. 세계를 이루고 있으나 미약해서 배제되거나 간과되었던 소수, 주변, 식민, 남반구를 비롯해 연약한 것들과 하찮은 것들의 세계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 사라지려 하는 유약한 소수와 주변을 바라보는 일은 그대로 세계를 인식하는 일이다.

이소요의 작품 〈야고(野菰), 버섯 같은 것〉(2022~2023)은 자생력을 가진 기생식물 ‘야고’를
통해 생물 간의 생태적 관계와 우리말 속 종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서동진(계원예대 교수)

#글로벌 아트 그리고 글로벌 사우스
1989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장-위베르 마르탱(Jean Hubert Martin)의 전시 《대지의 마법사들(Magiciens de la Terre)》로부터 시작해 2022년 인도네시아의 콜렉티브 루앙루파(ruangrupa)가 전시감독을 맡은 제15회 카셀 도큐멘타에서 절정에 이르렀던, 그리고 그에 더하자면 2024년 브라질 출신 전시감독 아드리아노 페드로사(Adriano Pedrosa)가 진행한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란 제명의 베니스비엔날레는, 글로벌 미술 흐름의 순환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술 담론의 자장에 한국 동시대 미술 역시 깊이 연계되어 있고 또 이를 예리하게 자각하게 될 것이다.

기념비적 전시로 기억되는 《대지의 마법사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본격화에 조응하는 전시를 알리는 사건이자 원시적 형태의 탈식민주의적 접근을 보여주는 전시였을 것이다. 이는 세계미술(world art)이란 관점에서 비서구 미술을 민속학적인 박물관 속에 유폐하던 데서 벗어나 훗날 널리 제도화될, 이른바 글로벌 미술의 모델로 설계해 주는 사건이었다. 갑작스레 비서구 미술을 ‘현재’의 예술로 등록하는 것은 미술의 역사를 둘러싼 시간적 감각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적 경과 속에 놓여있다는 감각은 모든 곳이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에 완전히 통합된 데 따른 효과였을 것이다.

따라서 《대지의 마법사들》은 아마 동시대 미술의 그리니치 표준시와 같은 시간을 마련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 전역에서 연중무휴로 열리는 비엔날레는 숱한 작가와 작품을 소집하여 그들 사이에 동일한 주제와 서사, 재현 형태, 저자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민족/국민적 차이와 역사적 분할이 있다기보다는 글로벌 미술이 꿈꾸는 기이한 ‘코즈모폴리터니즘’의 환상 속에 미술적 실천을 쓸어 담아 왔다. 우리는 이를 글로벌 미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 전시 전경 2024

카셀 도큐멘타 15 전시 전경 2022

그러나 글로벌 미술이란 환상이 제거하지 못하는 모순은, 글로벌 사우스라는 주제를 통해 끈덕지게 귀환한다. 제3세계란 20세기 후반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유토피아적 충동으로 충만했던 탈식민주의 시대에 통용되던 역사적인 공간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 이름은 ‘글로벌 사우스’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글로벌 사우스란 이름은 세계의 저발전 지역을 망라하거나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를 총칭하는 또 다른 이름이 되어 그 속에 깃들어 있을 역사적, 사회적 문맥을 희석하거나 휘발시켜 왔다. 그런 점에서 15회 도큐멘타는 뒤늦게 당도한 미술 버전의 비동맹회의라고 할 만큼 비서구 미술을 소집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그러나 카셀 도큐멘타는 글로벌 공급 사슬이란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깊이 연계된 글로벌 사우스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재현과 급진적 서사의 생산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미술이라는 자족적 세계에 갇힌 채 미술은 어떻게 공동체와 함께 할 것이라는 주장을 읊조림으로써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거기에 더해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는 새로운 식민적 질서에 갇힌 세계를 다른 문화적 정체성의 군도로 환원함으로써 글로벌 사우스를 문화적 타자로 규정하고 마는 다문화주의적 관점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스펙터클한 전시들이 초래한 많은 한계에도 그런 전시들이 글로벌 사우스를 반복해 상기하는 일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모든 세계를 아우르는 보편적 미술이 있을 것이라는 환영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음을 알려주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이는 미술이 스스로를 정의하는 세계가 곧 바깥의 세계와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글로벌 사우스는 탈식민이라는 정치적, 윤리적 비판을 통해 글로벌 미술이라는 초역사적 미술이 억압하는 역사적 의식과 감각을 공급할 것이다. 동시대미술이 역사와 접속한다면 그것이 글로벌 사우스란 관념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한국의 동시대미술도 응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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