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읽는 동시대 미술의 트렌드Ⅱ

심상용(서울대 교수, 서울대 미술관 관장)
심소미(독립큐레이터)
안진국(미술비평, 홍익대 초빙교수)
유원준(영남대 부교수)
유진상(계원예대 교수)
이대형 (Hzone 대표)
Special Feature
심상용(서울대 교수, 서울대 미술관 관장)

#트럼피즘
더 위험한 지정학(Geopolitics)이 귀환 중이다. 냉전 종식 이후 사라졌던 강대국 간 패권, 권력정치가 부활하고 있다. 그 기류의 산물이자 중심에 트럼피즘이 있다.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슬로건이 대변하듯 민족주의, 보호무역주의, 반이민 기조 아래 여성 행동, 다문화, 기후변화 대응 철회 등 ‘세계질서’라 불리던 것의 파괴, 정치적 올바름의 후퇴가 목하 진행 중이다. 글로벌리즘에 반하는 고보수주의 ( Paleoconservatism)의 득세로 반세계화, 극우 포퓰리즘이 쇄도하고 있다. 그 결과는 결코 덜 재앙적이지 않을 것이다. 왜곡된 로컬리즘은 왜곡된 글로벌리즘의 또 하나의 반향일 뿐이다.

기존 글로벌리즘으로의 복귀도 대안일 수 없는 이유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가 ‘마이너스 글로벌’로 명명한 글로벌화 말이다. 1985년의 플라자합의, 엔화의 100% 절상과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30년’의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던 시기를 환기해 보라. 좋지 않은 생각이다.

진퇴양난 상황에 대한 자각이 글로벌 아트의 인식에 적용되어야 한다. ‘마이너스-글로벌 아트’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합당한 질문이다. “모두 새로운 비용을 들여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 몽유병자들이 막무가내로 달려들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을 부숴버리기 전에.” 2025년을 마이너스-글로벌 표준화된 예술에서 벗어나, 체념했던 ‘플러스-글로벌 아트’를 설계하는 원년으로 삼으면 어떨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동안 눈을 가렸던 ‘마이너스-글로벌 아트’의 안대를 풀어야 할 것이다.

미국이라는 우산 밑에서 역사로부터 안온하게 도피하는 가능성이 감소하고 있다. 가랑비조차 피하기 어려운 시간이 올 수도 있다. 미국은 세계의 보호자 역할극에 권태를 느끼고 자국중심주의로 돌아선다. 하지만 뜻하지 않았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비바람을 맞더라도 역사에 개입하는 길이 열릴 수도 있다. 근대화의 온갖 짓밟힘을 견뎌온 사람들에게 지도에 없었던 길을 찾는 기회일 수도 있다.

우리가 이제껏 그런 질문에 답하려 시간을 쓴 적이 없거나 거칠게 간과한 길, 시몬 베유(Simone Weil)의 비유를 빌리자면, 우리에게 양식을 대주는 논밭에 경의를 표하는 길, 가족, 조국 같은 영혼의 양식을 주는 것, 우리로 진정으로 살아있도록 하는 것도  결국 그 땅의 소산이다. 다른 대체재가 없는 독창성의 이름, 미래 세대에게 줄 양식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지상에서 인간의 영원한 운명과 직접적인 연관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영광인 땅의 예술로 난 길을 설계하는 기회! 트럼피즘의 반글로벌주의, 정체성 정치의 태풍에 휩쓸리겠지만, 그 속에서 땅의 문제에 결부된 것으로서 예술에 새롭게 눈을 뜰 수도 있다.

《강술생: 씨앗의 희망》 갤러리 비오톱 전시 전경 2021

강술생〈무당벌레 꽃이 되다〉제주시
도남동 2004-2005

#인공지능(AI) 예술
인공지능 시대의 예술, 근본적인 도전이 될 것이다. 생성형 AI의 기술적 정교함, 무분별한 수용과 사용은 진실과 거짓을 구한다는 지성의 정언명령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다. AI 그림인지 인간의 그림인지 전문가도 식별하지 못한다. 딥 페이크 기술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더 흐리게 할 것이다. 첨단 기술의 효과에 매몰된 미술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진다. 시각적 유희, 하지만 분열적인 유희다. 아니 신화로서의 유희라 해야 옳다. 알맹이가 종잇장처럼 얄팍하고 공기만큼이나 가벼운 것을 은폐하는 유희다.

예술의 수준을 결정짓는 것은 결과물 이상으로 동기와 과정이다. AI는 지능이되, 존재적 유한성(죽음)과 실존적 한계, 역사 기반으로 자신을 반추하는 인간의 지능과는 다른 지능이다. 이 차이가 문명을 번영으로 이끌지 아니면 파괴로 인도할지는 현재로선 불확실하며, 그것을 결정하는 주체는 결국 인간이다. 쉽게 부패하곤 하는 소수 엘리트로부터 지시를 받는 기술 자체의 속성을 주의해야 한다. 이 시대 신성화의 중심은 기술이다. “기술은 구원하는 신이다. 기술은 본질적으로 선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설득되지 않기를! 과거에는 자연이 신성한 가치의 근원이었지만, 통제되고 위협이 아니게 되면서 기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AI에게 예술의 미래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게 미래를 물어야 한다. 미술관은 단순히 미술품을 향유하는 장소를 넘어, 혼란한 시대에 내던져진 인간을 백업하는 보루를 자처해야 한다.

심소미(독립큐레이터)

#연결과 연대, 공공 영역의 확장
2024년 연말의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사회적 참사라는 비극 속에서 더없이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안전한 세상을 위해, 서로에게 힘이 돼주기 위해 거리에 모인 사람들, 국가권력과 폭력에 맞서는 시민의 소식이 SNS의 피드와 미디어의 기사로 쉼 없이 올라왔다. 멀리 해외에서 거리감을 두고 있는 나는 집회에 나가는 친구와 동료들의 안부를 물으며 그네들의 말과 기록을 매일같이 살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맨손으로 탱크 앞에 선 시민, 경찰에게 손난로를 건네는 시민, 케이팝 응원봉을 통해 결집한 형형색색의 빛들, 이른바 ‘덕후’의 정체성을 행동주의로 드러낸 다채로운 깃발까지. 공권력에 맞선 여러 투쟁의 현장을 기록해 온 주용성 작가가 2024년 12월 13일에 촬영해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에는 응원봉에서 퍼진 빛망울들이 하나하나 단단히 맺혀 따뜻한 빛의 연대를 이룬다.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여의도에서의 집회 현장을 기록한 그는 이 장면을 〈빛나는 마음이 모여든 풍경〉(2024)이라 부른다.

2030 세대 여성을 중심으로 확산한 최근의 집회에서 돋보이는 것은 연결과 연대의 감각이다. 케이팝 팬덤 문화에서 확산하여 투쟁의 깃발과 손팻말로 퍼져 나간 “00야,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 줄게”라는 문구는 ‘최애(가장 사랑하는 멤버)’에서 시작하여 친구이자 동료를 너머 미래의 시민들을 향한 연대 의식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 과거 거대조직이 주도한 ‘적폐청산 사회대개혁’의 동시대 버전의 언어로서 비장함보다는 평화의 의지를, 거시적 선언보다는 미시적 변화의 의지를 담아 권력과 폭력에 맞선다. 페미니즘으로 기성 사회에 맞서온 2030 여성들의 커뮤니티는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새로운 정치 주체의 발현으로 이들이 문화 정치의 새로운 챕터를 이끌고 있다. 각자도생의 삶 속에서 소시민들의 연대, 허약하고 소외된 개개인과 소수자들의 용기있는 드러남은 연결과 연대의 가능성, 이로부터 구축된 공공 영역이야말로 부당한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시민들의 공간임을 증명해 보인다. 그러한 가운데 한남동 대통령 관저 근처에서 있었던 집회 현장에서는 한밤에 집회에 나온 사람들을 위해 화장실을 내어준 수도원과 전시장을 집회 참여자들을 위한 쉼터로 개방한 갤러리 영상이/사진이 SNS에 올라오면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예술 작품 주위로 은박담요를 몸에 두른 시민들이 공존하는 장면은 오늘날 예술 공간이 민주주의에 어떻게 참여하고 공공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러 시사점을 남긴다.

권준호의 시국선언 포스터 2025 ‘시대 정신’ 프로젝트

김어진의 시국선언 포스터 2025 ‘시대 정신’ 프로젝트

2000년 이후 동시대 전시는 만남, 교류, 집회 등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참여의 장을 마련하고자 노력해 왔다. 새로운 시민성의 발현과 문화정치의 역량이 대두되는 시기에 전시라는 플랫폼은 어떻게 현실 세계와 연결되어 소통해 나갈 수 있을까? 앞서서 언급한 갤러리의 사례처럼 유연한 공공영역으로서 전시장에 진입한 관계가 갖는 잠재력은 어떠한 실천으로부터 연장이 가능할까? 쏟아지는 질문들은 전시라는 형식에 대한 관습을 탈피하는 것에서부터 답을 찾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전시에는 예술을 세상과 연결하는 방법론 및 예술 제도, 예술 규범, 관람객과의 소통 방식, 그리고 상상력이라는 잠재력 사유와 대안적 사고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공공영역의 민주적 조직이 모색되는 현시점에서 전시는 관습적인 형태를 넘어 기성 제도와 규범에 맞서 대결하면서 미래를 상상하는 대안적 영토로서 재조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질문과 고민 속에서 얼마 전 그래픽디자인 63팀이 연대한 ‘시대 정신’ (일상의실천 기획) 프로젝트는 동시대 디자이너들의 시국선언 작업이 SNS, 웹플랫폼(1월 24일 오픈, https://manifesto.ing), 오프라인 전시(2.24~3.17)로 전개되어, 대항적 시각문화와 사회참여의 확산을 기대하게 한다. 미학과 정치 사이에서 존재하는 가능성을 시민 동료와 현실 세계로 확장하고, 예술 내부의 패권적 공간을 벗어나 공공 영역으로 변화해 나가는 실험은 2025년 전시라는 형식 너머의 과제로 주어져 있다.

주용성 〈빛나는 마음이 모여든 풍경〉(2024)

안진국(미술비평, 홍익대 초빙교수)

하종현 〈Conjunction 24-27〉 삼베에 유화 130×97cm 2024 사진: 안천호

#레트로토피아
민화와 현대미술을 접목한 전시 《알고 보면 반할 세계》(경기도미술관)가 진행 중이며,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고미술 기획전인 《조선민화대전》은 3월에, 호암미술관의 《겸재 정선》 전시는 4월에 열릴 예정이다. 그런가 하면 국립현대미술관은 소장품 상설전을 부활시켰다. 개인전에서도 과거를 재조명하거나 이미 명성을 쌓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전시가 이어질 예정이다. 단색화 1세대 작가 하종현의 전시는 아트선재센터와 국제갤러리에서 연달아 열리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물방울 화가’로 알려진 김창열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 리움미술관은 이불의 대규모 서베이 전시를 준비 중이며, 국제갤러리와 호암미술관은 루이즈 부르주아의 전시를 기획했다. 또한, 호주 출신 극사실주의 조각가 론 뮤익의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처럼, 올해 주요 전시들은 과거의 미학적 이상향을 재조명하거나 이미 널리 알려진 작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불확실성과 불안이 팽배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미래보다는 과거에서 희망과 위안을 찾으려는 레트로토피아 경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과거로부터 영감을 받아 미래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향수는 때로 유토피아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아일랜드 시인 오스카 와일드는 “진보란 유토피아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불안과 불확실성은 지금껏 우리가 성취한 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상상을 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뒤흔든다. 이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유토피아를 매장하고, 진보의 자리에 향수를 놓는다. 살얼음판 같은 미래로 발을 내딛기보다는 이미 지나온 탄탄한 돌다리로 되돌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우리는 17세기에 향수(鄕愁)가 질병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바르셀로나 카탈로니아 폴리테크닉 대학교 캠퍼스에 위치한
토레 지로나 예배당(Torre Girona Chapel)에 자리한 슈퍼컴퓨터 센터

#테크그노시스
논리적 사고에 기반한 테크놀로지와 비논리적인 마법, 신비주의, 영성, 초월적 깨달음은 겉보기에 물과 기름처럼 상반된 개념으로 보인다. 하지만 비교철학자 마송 우르셀이 “주술은 사실상 기술의 첫 번째 표현”이라고 언급했듯이, 기술과 영성은 공존한다. 기술이 인간의 편의와 안정을 추구하는 활동이라면, 주술은 이를 신에게 의탁해 실현하려는 행위로, 일종의 기술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수십억 개의 파라미터를 지닌 LLM(거대언어모델)에서 (단순하게 말하면) 논리적 연산을 통해 답변하는 생성형AI는 알고리즘의 산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그 반응 속에서 인간적인 숨결을 느끼는 기이한 경험을 한다. 온라인이라는 거대한 가상공간이 작고 가느다란 랜선 안에 on/off 신호로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초월성이 느껴진다. 로봇청소기는 생명체처럼 장애물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이고, 공기청정기는 냄새를 감지하면 마법처럼 팬의 속도를 맹렬히 높인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되지 않는다.” SF작가이자 미래학자였던 아서 클라크의 말이다.

문화평론가인 에릭 데이비스는 ‘기술(technology)’과 ‘영적 지식(gnosis)’을 결합하여 ‘테크그노시스’라는 신조어를 제안했다. 이 개념은 기술이 단순히 물질적 도구나 과학적 진보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초월적 욕망, 신화적 사고, 영적 탐구과 밀접하게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올해 8월 열리는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이러한 기술과 초자연적·영적 현상의 교차를 탐구하는 장이 될 것이다. 안톤 비도클, 할리 에어스, 루카스 브라시스키스가 공동 예술감독으로 참여한 이번 비엔날레는, 신비주의, 오컬트, 애니미즘, 인공지능, 가상현실을 주요 키워드로, 기술과 영적 세계의 교차점을 새롭게 조명할 예정이다. 또한, 생태학에서 기술과학에 이르는 다학제적 접근 속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공존을 탐구하는 피에르 위그의 전시나, 인간과 기술의 관계, 유토피아적 모더니티, 인류의 진보주의적 열망과 실패를 다뤄온 이불의 전시 등에서는 현대 기술을 넘어서는 초월적 현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시들은 기술과 영성,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탄생하는 새로운 상상력을 보여줄 것이다.

유원준(영남대 부교수)

#비-인간 주체의 예술
지난 10여 년간 예술의 주제 및 소재로 제시되고 활용되었던 키워드들은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제기된 ‘타자’의 영역을 구체화하는 맥락에 속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키워드들은 예술의 영토에서 가시화되기 이전,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의식으로 나타났다. 살펴보자면, 서구와 비서구의 구분, 인종 이주민(노동자), 젠더, 환경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현재까지도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가 지속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들은 소외되었던 주체의 바깥 영역에 관한 관심을 소환하는 사회적 이슈와 공명하였는데, 이와 같은 흐름은 현재의 시점에서 그 영역을 보다 확대하여 타자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그 밖의 영역, 즉, 인간 중심의 담론에서 탈구한 ‘비인간 주체-대상’에 관한 관심으로 확장되고 있다. 최근의 ‘인류세(人類世)’와 같이 환경에 관한 키워드에는 인간 중심의 사유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시선이 전제되어 있으며 반려-동물이나 인공적-기술적 대상들에 관한 관심은 우리 주변의 비-인간 주체들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이러한 경향 역시 비-인간 주체/대상으로의 주제 이동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최근의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은 다양한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는데, 예술 영역에서도 매우 뜨거운 이슈로 조명되고 있다. 다만 이러한 기술적 단계를 살펴보는 시선의 온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혹자는 이들을 단순한 도구적 차원으로 이해하는 한편, 다른 이들은 과거의 예술 개념을 다른 차원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로 상정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 제기는 비단 ‘한국미술의 키워드’로만 제한되지는 않을 것인데, 최근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가 제기되고 있는 ‘사변적 실재론 및 신실재론’ 등의 철학적 지류와도 연결성을 갖는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주관적 경험 및 인식과 관계없이 사물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분과인데, 이들 논의가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상관주의를 극복하는 방식’으로서의 사물에 대한 관심은 인간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서의 사물이 예술의 주체의 입장을 점유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예술이 지닌 혼성적 주체성에 관한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만약 과거의 실험적인 예술의 시도들이 인간과 비인간의 협력적 관계 속에서 구현된 주체의 분화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이었다면, 현재의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은 보다 근본적인 주체의 탈인간화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인공지능은 이처럼 예술의 잠재적 영토에 관한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동시에 해당 논의를 협소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인공지능을 하나의 기술적 대상 및 도구로서의 의미로 이해하는 경우는 안타깝게도 후자에 해당된다. 이 경우, 기술은 단지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주체의 보조적 수단의 의미로 국한되며 그것이 지닐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봉쇄당한 채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예술의 의미를 일차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러한 시도로부터 파생되는 본질적인 질문들로부터 현재까지의 예술이 제기해 온 근본적인 물음을 소환하는 방식으로 비-인간 주체(의 예술)에 접근할 것을 예상해본다. 이는 결국 예술의 범주와 정체성을 묻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질문 안에 현재의 이슈들을 다시금 정박시키겠지만, 그럼에도 이는 시대를 관통하여 예술이 스스로의 존재 양식을 굳건히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예술은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으로부터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왔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전시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2024)는 사물을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함께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존재로 바라보고
사물과 인간이 함께 만드는 대안적 
시나리오를 제안했다

신재은은 인간과 가축 간의 위계를 불식시킨다. 신재은 〈이상한 꿈〉 돼지 피, 비닐, 체인블럭
100x200x300cm 2020

유진상(계원예대 교수)

#독자적 세계관
한국의 동시대 미술이 현재 당면한 이슈들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첫째, 정치적, 이념적 대립으로 인해 반으로 나뉘어 거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는 한국 사회에 예술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문제를 다룰 때 스스로 특정한 진영을 선택하거나 정치적 선명성을 내세우는 것 외에, 더 높은 차원의 포괄적인 메타 인지를 가동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진정한 어려움으로 남아 있다. 동시대 미술, 나아가 현대미술사 전반은 특정한 정치-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즉각적 논평 못지않게 긴 호흡으로 개별적 사태를 낳게 하는 구조적 얼개에 대해 언급해 온 사례가 많았다. 아마도 이것은 예술작품이 견뎌야 하는 긴 시간적 주기의 압박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한국의 민중미술이나 멕시코의 벽화운동과 같은 예술가들의 직접적인 정치적 저항도 있으나 다다, 플럭서스, 포스트 미니멀리즘과 같은 기성 전체주의, 독재, 착취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철학적, 예술이론적 바탕에서 저항하는 운동들도 있었다. 표현의 자유, 반전-반폭력, 착취와 양극화에 대한 비판, 반-독재, 반-환경파괴 등과 같은 핵심적 가치를 전 지구적으로 표명하는 일에 예술은 중요한 의의를 두어왔다. 한편 한국의 정치, 사회적 현실은 예술가들을 이중구속(double-bind)을 넘어 다중적 구속(multi-bind)의 함정에 상시 노출시켜 왔다. 어느 한 진영을 일방적으로 편들 수 없게 하는 다층적 범주들의 모순적 얽힘과 국내외를 아우르는 전략적 복잡성의 내재화가 극에 달하고 있다. 그래서 정치 계급의 현재적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예술가들이 각자에게 부여된 시간을 통해 독자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일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서구에서 수백 년에 걸친 전쟁과 혁명의 역사를 거치면서 미술사가 무엇을 남겼는지 참고할 수도 있다. 특히 이에 관해서는 전시적 결과들이 입장과 시각의 다양성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에, 비평은 그에 대한 객관적이고 심도 있는 접근을 통해 그 영향력과 효과의 수월성에 대해 평가할 것이다.

조현서는 본인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1만 개의 이미지를 수합해서 인공지능에 학습시킨 다음,
그 결과로 나온 
이미지를 사전으로 만들었다.
사전 속 
이미지의 레이아웃, 형, 색 등을 똑같이 따라 그리면서
학습하고 본인에게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가능성으로부터 배운다고 밝혔다.
조현서〈Palette 
Dictionary: 10,000 Data 10,000 Images〉(2022~2023)

#선도적 미술시장
두 번째로 미술시장에 대한 예술적, 비평적 접근이 있다. ‘선도적 미술시장’ 혹은 ‘실험적 시장’이라고 부를만한 공간들이 생겨나고 이를 중심으로 향유자, 소장자, 후원자들이 비범한 선도그룹을 형성하는 것이 당면한 중요한 과제이다. 이는 실험적, 철학적 동시대 미술의 영역과 주류 미술시장에서 요구하는 상업적으로 지배적인 미술 사이의 점점 더 크고 뚜렷해지고 있는 간격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는 지적으로 활발하고 문해력이 뛰어나며 더 훌륭한 예술적 소통의 경험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새로운 세대의 상업공간은 상업영역(private)으로 전통적인 비-영리적 영역(public)을 연결하는 교두보가 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예술 콘텐츠의 철학적, 비평적, 실험적 수월성을 미술 대중에게 알리고 실제로 시장에서 작동시키는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현재의 미술시장 콘텐츠에 더해 동시대 미술의 최전선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그를 통해 생산되는 작품들이 일반 대중에게 이해되고 지지를 받아야 한다.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고자 시작된 지갤러리의 Great Exhibition은 올해부터 기획자
매칭 프로그램으로 확장해서 기획자들과 신진작가들이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도모할 
예정이다.
확장된 첫 번째 프로젝트로 장은하 기획자를 초대해서
송예환의 개인전 《인터넷 
따개비들》(2025)을 개최했다

#인간에 대한 질문들
세 번째는 과학과 기술의 범주적 변화에 대한 동시대 미술의 대응에 관한 것이다. 주지하듯, 인공지능과 기술적 특이점의 도래가 현실화하고 있다. 예술은 앞으로 한동안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까지 세계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다룰 것이다. 자율 장치, 인간형 로봇, 지구환경 관리, 지속가능한 에너지, 가상 자본, 기술적 양극화 등과 같은 거대한 주제들이 맥락의 파도를 이루며 다가오고 있다. 이들 모두가 기회인 동시에 절대적 위기이다. 미술은 인류의 가장 차원 높은 지적 활동의 일부이자 인간 그 자체를 함축하는 일련의 결과물들로 채워져 있다. 전시가 이런 논제들을 다룬다는 것은 시각적 대응물들을 생산하는 것이 아닌 서사와 담론들을 창조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과학, 철학, 예술은 자본과 잉여의 순환 밖에서 인류를 규정해온 원천적인 분야들이다.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면 인간을 성립시킬 수 없다. 이러한 서사와 담론들을 전시를 통해 생산하는 데 있어 2025년은 다가올 격변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해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이대형 (Hzone 대표)

#제너레이티브 아트
인류는 오랜 시간 예술을 통해 고정된 미적 가치와 양식을 탐구해왔다. 작가의 정체성과 시대적 배경이 결합된 작품들은 역사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고유한 미학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데이터와 기술이 결합된 새로운 미학이 등장하며 이러한 고정된 틀은 빠르게 해체되고 있다. “제너레이티브 아트”는 알고리즘과 실시간 데이터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적 미학을 제시하며, 관객과 상호작용하고 환경과의 관계를 재정의한다. 이 새로운 예술 형태는 단순히 기술적인 실험에 그치지 않고, 변화와 흐름 그 자체가 작품의 본질이 된다. 과거의 고전적 미학이 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제너레이티브 아트는 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시스템의 아름다움을 탐구한다.

제너레이티브 아트는 이제 단순히 미술관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실질적인 사회적, 환경적 문제 해결로 그 응용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는 공기 질 데이터를 시각화한 프로젝트가 대기 오염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고, 도시 계획자들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다. 한편, 런던의 ‘Weather Systems’와 같은 제너레이티브 아트 프로젝트는 기후 변화 데이터를 기반으로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디지털 설치물을 만들어 관객이 환경 문제를 더 직접적으로 체감하도록 했다. 이러한 예술 작품들은 데이터가 가진 추상성을 극복하고, 복잡한 사회적 문제를 가시화하며, 정책 입안자와 대중 사이의 소통을 가능케 한다. 또 다른 예로, 실시간 교통 데이터를 활용한 시각적 예술 작품이 교통 체증 문제를 시뮬레이션하고, 이에 따른 대안을 시각적으로 제시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접근은 도시 문제를 보다 명확히 이해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큰 도움을 주며, 단순히 데이터를 해석하는 것을 넘어, 데이터를 예술적으로 재구성해 감성적 경험을 제공한다. 데이터 기반의 미적 경험은 관객이 사회적, 환경적 문제를 보다 감각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행동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한다.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자연에 특화된 오픈소스 생성형 AI 모델인
〈대규모 자연 모델(Large Nature Model, LNM)〉 개발 과정

제너레이티브 아트의 가능성과 중요성이 증대되며, 알고리즘과 인간 창의성의 경계는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 알고리즘이 예술 창작에서 필수적인 도구로 자리 잡으면서 인간의 역할이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가 존재한다. 그러나 제너레이티브 아트는 인간과 기계의 협업을 통해 예술의 역할과 소통방식에 새로운 장을 확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술가는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데이터를 선택하며, 이를 통해 원하는 메시지와 미학을 구현한다. 결국, 알고리즘은 도구일 뿐이며, 인간의 창의적 개입이 없다면 제너레이티브 아트 역시 단순한 데이터의 시각화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 분야에서 인간의 창의적 개입은 여전히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가까운 미래의 어느 도시. 가로등은 실시간 데이터에 따라 색조를 바꾸고, 빌딩 벽면은 공기 질과 온도 정보를 기반으로 한 유동적 영상작품을 투사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걷는 거리가 주변환경 데이터와 상호작용하며 변화하는 것을 경험한다. 제너레이티브 아트는 단순히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단계를 넘어, 도시 그 자체를 거대한 인터랙티브 캔버스로 탈바꿈시킨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기후위기, 교통혼잡, 에너지 소비와 같은 복잡한 문제들이 제너레이티브 아트를 통해 공감각적 방식으로 표현된다. 예술작품은 관객에게 문제를 단순히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데이터의 맥락 속에서 해법을 체험하게 한다. 가령, 대중교통 이용률이 하락할 때마다 거리에 설치된 디지털아트는 점점 희미해지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동이 도시의 예술과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즉각적으로 알린다. 그러나 이 미래에는 새로운 도전과제도 존재한다. 데이터 소유권과 알고리즘 편향성 문제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난제로 남는다. 예술이 도구화되는 위험성도 제기된다. 그럼에도, 제너레이티브 아트는 인간의 창의성과 기술이 함께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 즉 데이터와 사회의 이야기를 엮어내며, 새로운 미학과 공공의 가치가 융합된 세상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LNM은 레픽 아나돌과 스튜디오 팀원들이 지난 십여 년간 수집해 온 대량의 자연계 데이터와학문 기관들이 소장하고 있는 데이터, 이와 더불어 전 세계 16곳의 우림에서 수집한 사진, 소리, 3D 스캔 데이터 등을 학습한 인공지능 모델이다.
레픽 아나돌의 〈살아있는 아카이브: LNM〉(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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