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의 언어로 가꾸는 정원
김서울 Seoul Kim
노재민 기자
Up-and-Coming Artist

김서울/ 홍익대 판화과를 졸업하고 일본 타마미술대에서 회화전공(판화영역) 석사 학위와 미술 전공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판화의 평면을 입체로 확장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으며, 시간·빛·지지체의 실험을 심화했다. 아트팩토리(파주, 2023), MHK갤러리(서울, 2023), 봉산문화회관(대구, 2022)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포스코미술관(2025), 소마미술관(2024), 뮤지엄 SAN(원주, 2022)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아세안문화재단 국제 레지던시 (태국, 2023), 예술발전소 레지던시(대구, 2021)에 참여했고, 노보시비르스크 국제 현대 그래픽아트 트리엔날레 전통판화 부문 특별상(러시아, 2021), 제78회 요우카이 공모전 판화부문 대상(일본, 2012), 제7회 고치국제판화트리엔날레 고치현립미술관상(일본, 2008) 등을 수상했다.
판화의 언어로 가꾸는 정원
노재민 기자
최지목은 회화를 ‘감각적 경험의 총합’으로 재정의하고, 회화의 개념적 경계를 부수고 확장하는 작업에 집중한다. 작가가 추구하는 회화의 확장은 “회화의 권력이 작가의 손에서 관객의 감각으로 옮겨지는 것”을 목표로 하며, “작가의 경험에서 관객의 회화로 옮겨지는 행위 자체가 회화 자체의 확장을 시도”하는 실천으로 완성된다. 작가는 기존 회화가 작가의 취향을 관람자가 일방적으로 보는 구조였다고 진단하고, 관객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신체에서 발현된 색을 보는 상호적 소통 방식으로 전환하고자 시도한다.
아크릴의 투명한 판이 겹겹이 서 있는 자리에서 관객은 평면을 본다기보다 평면이 공간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체험한다. 김서울의 작업은 판화가 가진 간접성판 위에서 일어난 행위가 다른 지지체로 옮겨져 비로소 보이게 되는 매체의 운명을 끝까지 밀고 가되, 그 논리를 시간·빛·레이어의 변수로 확장한다. 그는 작업실에서 평면으로 사고하고, 전시장에서는 입체적 체험을 설계한다. 이 전환의 실마리는 판과 판 사이, 레이어와 레이어 사이, 즉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간격에 있다. 그 간격은 빛이 머물고 공기가 색을 띠는, 말하자면 판화의 숨겨진 지층을 관객의 동선으로 드러내는 장소다.

《공존: 낙원풍경》 IBK아트스테이션 전시 전경 2025
김서울이 선택한 도구는 실크스크린이지만, 그것은 단지 기술이 아니라 규칙이다. 색을 분해하고(분판), 순서를 정하고(레이어), 두께와 투명도를 조절한다는 규칙. 이 규칙을 어기지 않는 한에서 지지체는 종이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 유리, PET, 아크릴, 패브릭, 심지어 석고에 이르기까지지지체가 바뀌어도 규칙은 유지되고, 바로 그 지속이 작업의 일관성을 만든다. 판화의 간접성은 빛을 만나며 공간적 체험으로 비약한다. 김서울은 잉크의 투명 베이스를 선택한다. 불투명 잉크가 그림자를 만들 뿐 빛을 통과시키지 못한다면, 레이어 사이의 시간은 드러나지 않는다. 투명 잉크는 빛을 통과시키고, 빛은 각 레이어의 색에 반응해 시간대마다 다른 공기의 색을 만든다. 같은 물건이어도 아침과 오후, 흐린 날과 맑은 날이 다르고, 관객이 오른쪽으로 한 발 비켜서느냐 왼쪽으로 두 발 물러서느냐에 따라 형상은 살아 움직인다. 작가는 조건을 설계할 뿐,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빛과 관객이라고 믿는다.
이 믿음은 전시 공간에 대한 태도로 이어진다. 김서울에게 전시장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또 하나의 지지체다. 그는 설치 전 사전답사로 창의 위치, 자연광의 궤적, 조명의 색온도와 입사각을 읽고, 좌대·바닥·매달림을 혼용해 하나의 인상을 구성한다. 판화가 제작 단계에서 요구하는 치밀함과는 달리, 설치는 현장에서의 즉흥성을 허용한다. 계획과 우연을 병치하는 이 이중 리듬은, 판화의 제작(계획)과 관람의 행위성(우연)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모든 미학적 선택은 고립과 적응이라는 그의 서사와 분리되지 않는다. 서울과 도쿄, 그리고 귀국 후의 낯섦을 지나며 그는 고립을 결핍이 아니라 충만으로 재정의했다. 팬데믹 시기 외부와의 관계가 끊긴 시간 속에서 오히려 “나로 가득 찬 시간”을 확인했으며, 그때 손에 쥔 것이 식물이었다.
화분의 식물은 한정된 흙과 빛, 우연한 바람과 습도에 형태를 바꿔 적응하며 살아간다. 김서울의 레이어 또한 그러하다. 레이어의 간격과 순서, 색의 깊이와 투명도를 바꾸며 환경에 반응하고, 그 과정이 곧 작품의 내용이 된다.

〈My Greeny-Money Tree〉(부분)
아크릴판에 실크스크린 60×35×28cm 2022
이는 전환기의 몇몇 작업을 통해 선명히 보인다. 동판 에칭으로 주로 작업했던 과거에는 〈Way Home II〉( 2017)와 같은 작품을 통해 도시인의 페르소나와 밀집된 일상을 다루며 공간의 은유를 구축했고, 팬데믹 시기에 제작한 〈상자〉(2020~2022) 연작은 고립이 자연스러운 일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홀로상자일기〉(2021) 연작에서는 내면의 방과 사적인 물건들이 평면에 펼쳐졌고, 〈반려 식물〉(2022) 시리즈의 식물 레이어는 개인적 고립에서 공유 가능한 정원으로 시선을 돌린 선택이었다. 내밀함이 보편성으로 환원되는 지점, 공감이 이해보다 먼저 도달하는 지점에서, 작가는 다시 평면을 세워 공간으로 번역한다.
그 결정체가 IBK아트스테이션 로비에 설치된 전시 《공존: 낙원풍경》(2025)이다. 초고층 빌딩의 차갑고 투명한 로비와 빌딩 숲을 그는 역으로 깊은 숲으로 채운다. 방법은 특정 종(葉)의 묘사를 세밀히 늘리는 것이 아니라, 색의 구조를 재배치하는 일이다. 맨 뒤 레이어에는 푸른기와 보랏빛을 풍부하게 깔아 전면의 초록을 밀도 높게 띄운다. 바닥·좌대·매달림이 뒤섞인 다양한 지지 방식은 다양성이 하나의 인상으로 수렴하는 숲의 법칙을 따른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그렸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깊이를 만들었는가”다. 색은 빛 없이는 존재하지 않기에, 그는 색을 빛의 함수로 다룬다. 투명 잉크의 두께, 레이어 간격, 관람 동선이 삼각 구도를 이루며, 보색의 대치(예컨대 보라-초록)는 숲의 음영을 감각적으로 증폭한다. 관객은 정면에서 색의 층을 읽고, 사선으로 비켜서면 레이어 간 공기가 두드러지고, 후퇴하면 공중 레이어의 수직적 긴장이 보인다. 정면-사선 후퇴-재접근의 반복 속에서 숲은 한 장면의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시퀀스로 경험된다.

〈Parade All Together〉(2023)는 타이벡에 인쇄해 봉제·착용하며
판화를 움직이는 지지체로 확장했다
제공: 작가
이러한 확장은 재료의 변주로도 이어진다. 그는 최근 동판의 이미지를 석고에 떠내 조각성과 결합하는 시도를 통해, 판 위에서 축적된 시간을 물질의 질감으로 번역한다. 평면 판화의 ‘환영’을 실재의 표면으로, 인쇄의 결과를 다시 물성으로 환원하는 길이다. 다만 이 변주는 판화적 사고 분해와 겹침, 간접성과 지연가 재료를 바꾸어도 지속된다는 점에서 규칙의 탈주가 아니라, 규칙의 논리적 귀결이다.
김서울은 판화의 언어로 정원을 짓는다. 간접성을 버리지 않고 레이어와 간격으로 외화하며, 빛과 시간을 공저자로 맞이하고, 장소와 관객을 구성원으로 초대한다. 그래서 그의 정원은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조건의 합이다. 오늘의 빛, 관객의 발걸음, 우리가 사는 도시의 시간이 매번 다른 완성을 덧쌓는다. 그렇게 그의 작업은, 고립을 충만으로, 제한을 가능성으로, 평면을 살아 있는 풍경으로 전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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