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생동하는 물질의 예술:
존재론적 전회와 신유물론적 예술
Art Critique
안진국 미술비평
필립 자흐 〈부드러운 폐허〉 캔버스 및 리넨에 유채와 아크릴 450 × 840 × 840cm 2024 제15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션
제공 : 광주비엔날레
우리는 21세기가 펼쳐짐에 따라
지배적인 미적 매체가
변화하리라 예상해야 한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넷플릭스에서 최근 공개한 8부작 한국 스릴러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매 회차 처음에 반복되는 내레이션이다. 이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 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다. 과연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날까?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소리가 난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17세기 관념론 철학자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최근까지 우리의 사유를 지배했다.
드라마에서 반복되는 이 내레이션은 버클리가 했던 “아무도 없는 숲에서 큰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말에서 따왔다.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지각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무언가가 존재하려면 반드시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 즉 인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질 때 아무도 그 장면을 보고 듣지 않는다면, 그 나무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모든 사물은 인식하는 주체의 의식 속에서만 실재성을 가지며, 이를 통해 비로소 개별적인 의미를 얻는다. 버클리의 철학은 물질의 독립적 실존을 부정하고, 모든 대상을 인간의 정신 속에 존재하는 관념들의 집합으로 본다. 따라서 무언가가 실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의식이 개입해야 한다. 인간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따라 사물들의 존재가 결정된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보는 것으로,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며,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보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저기 있는 달이 내가 보지 않는다면 없다는 것인가?”
상관주의적인 것들이 포스트모더니즘 시기 동안 유지되었다
객체지향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을 주창하면서 널리 알려진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은 자신의 저서 『예술과 객체』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글로 마무리한다. “우리는 21세기가 펼쳐짐에 따라 지배적인 미적 매체가 변화하리라 예상해야 한다. (중략) 관계적인 것, 정치적인 것, 규정된 것, 미적이지 않은 것, 아름답지 않은 것은 모두 지금까지 오십 년이 넘도록 같은 파도를 탔다.”1 이 마지막 서술에는 개념과 관념으로 구축된 현대미술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관계적인 것, 정치적인 것, 규정된 것, 미적이지 않은 것, 아름답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이는 상관주의(correlationism)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에 따르면 상관주의란 “우리는 언제든 사유와 존재의 상관관계에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지 하나를 다른 하나와 분리된 것으로서 접근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2 그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고 주장한 버클리까지 거슬러 올라가 상관주의를 추적한다. 메이야수는 버클리가 상관주의적 사고방식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상관주의가 관념론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상관주의자는 버클리처럼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우리에 선행해서 세계(실재)가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겠지만, 그럼에도 그들 대부분은 “세계는 오직 생각하는 존재에게 주어진 것으로서만 의미가 있다”라고 생각한다. 메이야수는 이런 점에서 상관주의자들을 비판한다.
잭슨홍 〈러다이트 운동회〉 조각 및 설치 가변 크기 2024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2024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이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관계적인 것, 정치적인 것, 규정된 것, 미적이지 않은 것, 아름답지 않은 것”은 인간의 인식과 관계 맺을 때 존재하는 대상, 인간의 인식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 즉 상관주의적인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오십 년이 넘도록”이라는 표현은 ‘포스트모더니즘 시기’를 가리키며, “같은 파도를 탔다”는 ‘유지되었다’, 혹은 ‘주류였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서술을 다른 말로 바꿔본다면, ‘상관주의적인 것들이 포스트모더니즘 시기 동안 유지되었다’라고 할 수 있다.
이 서술은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쉽게 말해, 소변기에 〈샘〉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예술 작품이 되는, 즉 소변기라는 사물이 지닌 역능(力能)이나 생기와는 관계없이 인간 예술가가 명명함으로써 작품이 되는 “관계적인, 정치적인, 규정된, 미적이지 않은, 아름답지 않은” 관념적 예술이 포스트모더니즘 시기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하먼은 이제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서술을 했다. 마지막 서술의 처음 문장을 다시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는 21세기가 펼쳐짐에 따라 지배적인 미적 매체가 변화하리라 예상해야 한다.” 하먼은 『예술과 객체』를 통해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먼이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관념에서 실재로, 인식에서 존재로 나아가고 있는 새로운 철학 운동의 흐름을 살펴봐야 한다.
존재, 실재, 물질의 부활: 언어와 인식의 감옥을 벗어나
관념과 대비되는 개념은 ‘실재(reality)’다. 실재는 인간의 인식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재론은 인간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존재는 의식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을 때, 우리의 인식과 관계없이 쿵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실재론은 존재론과 연결되고, 관념론은 인식론과 연결된다.
고대와 중세의 서구 철학은 존재론에 관심이 많았다. 기원 이전의 철학자들은 물, 불, 공기, 흙 등의 물질에서 존재의 원리를 찾고자 했으며, 데모크리토스나 에피쿠로스처럼 원자와 그 운동을 통해 세상 전체를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근대까지도 힘을 통해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며 물질의 실재성과 객관성에 대한 관심을 여전히 지속했다. 하지만 버클리의 관념론을 지나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에 의해 인간의 인식에서 벗어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론적 전회’(epistemological turn)가 확산되었다. 결코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아내려 했던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는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실재/존재’는 물질적인 것을 벗어나 생각하는 나의 ‘의식’(인식, 지각) 속에 갇히게 되었다. 이것이 ‘유아론(唯我論)’이며, 자기중심주의, 넓게는 인간중심주의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인식론적 전회는 20세기 이후,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이 언어라는 매개물에 의해 구성된다는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로 진일보한다. 현실에 접근하는 인식 과정이 매개를 거쳐야만 하고, 그 인식은 오직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지금껏 자연적, 생물학적, 기술적이라고 여겨온 것들이 실상은 사회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구성물이며, 언어적 인식의 산물이라는 사유를 널리 퍼뜨렸다. “담론, 텍스트, 문화, 의식, 권력 또는 관념들이 실재를 구성한다고 보면서” 실재 그 자체를 외면했다는 점에서 “현상학, 구조주의, 탈구조주의, 해체론,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죄다 완벽한 반실재론의 사례들”이다.3 그 결과 인식론이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언어적 전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인문학을 지배했고, 최근까지도 대세였다.
그런데 ‘의식’을 중심으로 형성된 인간중심주의적 관념은 지구행성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인간은 지구행성을 약탈하고 채굴하면서 행성 전체 행위자의 생존 토대를 침식한 가운데, 제 발등 찍기처럼 이제 인류는 멸종으로 이어질 기후 위기를 맞이했다. 그 경고가 ‘인류세(anthropocene)’고,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적 움직임이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이다. 여기서 부상한 것이 존재, 실재, 물질이다. 포스트휴머니즘에서 물질성은 언어와 대비된다. 인간 이성의 징표인 ‘언어’가 정면으로 부정당하면서, 부상한 ‘물질성’에 대한 관심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기술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통제권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휴머노이드 로봇 같은 객체(object)의 등장도 주요하다. 존재론이 득세했던 근대까지도 물질은 자기결정적 행위 주체가 아니며, 인간(만)이 물질의 본성이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물질은 수동적이며, 비-수행적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자기결정적 행위자처럼 행동하는 객체들의 등장은 물질을 수동적이고 불변하며 정태적인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서 생명력, 능동성, 생산성, 행위자성을 지닌 존재로 여겨지게 했다. 물질 속에서 물질들에 의존하며 물질로 살아가는 인간은 인간 너머의 ‘존재’, 즉 비인간(non-human) 존재의 역량을 발견하고,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포괄하는 물질(객체·사물·실제) 자체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2000년대 들어 물질적 전회(material turn),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 사변적 전회(speculative turn) 등 조금씩 다른 이름으로 본격화되었다. 이를 지칭하기 위해 물질, 존재, 사변 같은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는 것처럼, 여기에 속하는 이론도 신유물론(new materialism),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 객체지향존재론,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등 여러 갈래로 나뉜다.4 각 이론은 강조점이 다르며 때로는 상충하기도 하지만, 최소한 ‘언어와 인식의 감옥’, 곧 ‘상관주의’에서 벗어나려는 공통된 목표를 공유한다.5
물질 예술로의 전회: 새로운 철학 운동의 파도를 타는 물질의 예술
새로운 철학 운동들의 등장과 그에 따른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시대정신 및 감수성의 변화는 미술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후 위기에 대한 관심과 우려는 《디어 아마존: 인류세 2019》(일민미술관, 2019), 《기후미술관: 우리 집의 생애》(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21),《지속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부산현대미술관, 2021) 등의 전시로 표면화되었고, 인간과 자연, 물질의 관계에 대한 성찰은 기술, 인간, 환경 사이의 관계 재정립을 탐색했던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아르코미술관, 2021)나 《포스트네이처: 친애하는 자연에게》(2022) 등의 전시로 나타났다.
권병준 〈오체투지 사다리봇〉 혼합매체 가변 크기 2022 사진 : 박승기 제공 : 작가
《2024 올해의 작가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2024
개념이나 관념의 예술에서 물질의 예술로 전회(turn)하는 것도 최근 예술에서 보이는 하나의 경향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조각의 부상이다. 특히, 2022년은 조각의 부활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해 5월에서 8월 사이 조각을 전면에 내세운 3개의 전시가 동시에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조각충동》(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22),《각》(하이트컬렉션, 2022), 《조각 여정: 오늘이 있기까지》(WESS, 2022)는 하나의 흐름으로 소개되며, 오늘날 조각의 의미를 재고하게 했다. 같은 시기에 조각이 부상한 것을 코로나19로 인한 비접촉의 일상화와 원격현전(telepresence)의 가상화 증가, 시대가 변하면서 비물질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디지털 코드로 모든 환경이 전환되는 상황이 오히려 촉각성과 물성에 대한 갈증을 불러왔다고 진단하기도 한다. 맞는 진단이다. 이에 더해 이 시대의 근저에 흐르는, ‘언어와 인식의 감옥’을 탈출하여 존재, 즉 물질에 관심을 두는 태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존재론적 전회나 물질적 전회, 혹은 신유물론 등 무엇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2022년 조각의 부상 혹은 부활은 2009년 말에 개최된 《조각적인 것에 대한 저항》(서울시립미술관, 2009)을 상기하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이 전시는 ‘탈(脫)조각’을 말하면서 3차원의 덩어리보다는 ‘상황 속 상태’로의 이행에 주목했다. “매스, 중력, 기념비성과 같은 조각의 본질적 요소들로부터 탈주”하겠다는 것이다. 조각이 아닌, 설치 미술에 가까운 형태의 탈조각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것이 최근까지 조각을 대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 미술계를 포함한 전 세계 미술계는 조각보다는 개념이 물질성을 압도하는 설치 미술을 더욱 선호하는 양상을 보여왔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기후 위기라는 인류 멸절의 위기감과 함께 사유의 변화가 일어났고, 새로운 철학 운동들이 등장했으며, 물질, 덩어리감, 물성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고조되는 가운데 최근 조각이 주목받는 것으로 보인다.
《조각여정 : 오늘이 있기 까지》 WESS 전시 전경 2022 제공 : 노해나
물론 2022년에 부상한 조각은 전통 조각과는 조금 다르다. “익숙한 ‘조각’과 닮아있지만, 그 신체성, 이미지, 물질, 위상에서 기존과는 다른 내적 구성 논리”를 가졌다.6 예를 들어, 《조각 충동》에서, 인플레이터블(inflatable, 부풀릴 수 있는 공기 주입식) 소재로, 전시장 1, 2층을 관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압도적인 물리적 감각을 주지만, 공기가 빠지면 부피가 사라지고 2D의 껍데기만 남게 되는 강재원의 〈S_crop〉(2022), 납작하고 가벼운 종이를 입체로 구성하면서 전통 조각의 내적 구조를 바꾸는 황수연의 〈이펙터〉, 〈피셔 1, 2〉, 〈소파쥐〉(2022), 부유하는 도시의 부산물을 모으고 분해해 새로운 질서로 배열한 2차적 작업인 정지현의 〈공공조각파일〉(2018), 거대한 크기의 ‘젖은 흙’을 통해 육박해 오는 생명력의 감각을 주는 김주리의 〈모습: 某 濕_202206〉(2022) 등은 기존 조각과는 다른 감각과 물성을 느끼게 한다. 《각》에서는 가상세계, 게임 속의 아이템을 현실세계로 소환하여 조각적으로 구현한 차슬아의 〈QUAD ALTAR〉(2022), 서로 다른 성질의 재료를 가볍게 얹거나 단순하게 결합하여 이질적인 물질 고유의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조각을 이루는 정지현의 〈바위책〉(2018), 조각 작품으로 향하는 과정의 어딘가에 멈춰서서 그 과정 중에 있는 물질(대리석, 스티로폼)의 형상을 자연이나 인간 행위를 은유하는 대상처럼 전시하는 권현빈의 〈구름〉(2022), 〈수영금지〉(2019)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최근에는 물질성을 초과하는 사물의 다양한 측면을 살피는 전시도 개최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4)를 들 수 있다. 이 전시는 사회시스템과 시대적 환경이 유발하는 사물과 인간의 관계를 다층적으로 드러낸다. 기획 글이나 전시 소개 글에서 ‘포스트휴머니즘’,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존재론’이 등장하는데, 이는 이 전시가 최근의 새로운 철학 운동들에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이 전시에서 드리프트(DRIFT)는 〈머티리얼리즘〉 작업을 통해 일상에서 사용하는 제품을 해체해 그 원재료 수준으로 되돌림으로써 상품과 사물, 지구 자원의 관계에 관해 깊이 있게 사유하게 했다. 김도영은 실재하는 사물을 사진으로 옮기고, 그 사진(종이)을 다시 공간으로 가져와 설치하는 시도를 통해 대상과 지지체의 관계를 새롭게 재해석한 〈80g, #Marble〉(2022) 등을 선보였다. 이는 납작하고 가벼운 종이를 입체로 구성한 황수연의 작업을 떠오르게 한다. 옷과 어패류의 합성어 의패류를 ‘물명체(물체+생명체)’라고 명명하면서 의복을 생명체로 치환한 김한솔의 〈인접한 흉내주기 넘버1〉(2023), 〈모바일 쇼츠 재킷 쉴드〉(2020) 등도 사물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한다.
드리프트 〈AK-47과 총알〉 AK-47, 자작나무, 철, 페인트, 베이클라이트, 탄소강, 석유, 크롬, 총알, 철, 무연 파우더, 예광탄
복합물, 광택제(래커 ), 납, 황동, 스티픈산납, 구리, 종이호일 13 × 27.4 × 26.8cm 2019 사진 : 로널드 스미츠 제공 : 작가
김한솔 〈인접한 흉내주기 넘버1 〉 2023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주위 살아 있는 형상들과의 대화를 통해 동시대 공간을 탐구하는 작가들을 소개”한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9.7 ~ 12.1)은 예술을 “인간, 기계, 동물, 영혼, 유기적 생명체가 공유하는 공간, 우리 모두의 관계적 공간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그 역시 특정한 공간”이라고 말한다.7 인간과 비인간(non-human)의 공유와 관계를 드러내고자 한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비인간의 역능성을 보여주는 작업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그라피티로 뒤덮인 잔해 위로 폐기물에서 나오는 것 같은 검은 물이 쏟아지는 인공 폭포와 구리 도금된 식물 등으로 재창조된 생태계를 보여준 맥스 후퍼 슈나이더(Max Hooper Schneider)의 〈용해의 들판(Lysis Field)〉(2024)은 제인 베넷이 『생동하는 물질』에서 쓰레기 더미를 “퇴적된 한 더미의 활기 넘치고 잠재적으로 위험한 물질”8이라 표현한 것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듯한 느낌을 준다. 동굴에서 박테리아가 번식하는 소리, 곰팡이가 죽은 노루를 분해하는 소리 등 보이지 않는 풍경을 소리로 그려내는 권혜원의 〈포털의 동굴〉(2024)이나 빙하가 진동하는 소리를 데이터로 들려주는 사디아 미르자(Saadia Mirza)의 〈Iceberg Collisions〉 프로젝트 등도 우리가 지각하지 못했던 물질의 능동성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물질의 능동성은 움직이는 기계 장치에서 확연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권병준의 휴머노이드 형상과 사물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로봇이나, 기묘한 기계생명체를 선보이는 최우람, 목재, 실, 전등과 같은 요소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아날로그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양정욱 등이 선보이는 키네틱아트는 물질의 역능을 명확히 시각화한다. 2023년 올해의 작가상을 받은 작가가 권병준이고, 양정욱은 2024년 올해의 작가상 후원작가에 올랐으며, 최우람은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에 《작은 방주》를 선보였다. 이는 기계장치가 보여주는 물질의 능동성이 현재의 시대적·예술적 흐름에서 주목받고 있음을 시사한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쿵’, 소리가 났다
‘지각되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너무도 인간중심주의적 오만으로, 우리는 지구행성을 약탈하고 채굴하면서 지금 인류 멸절이라는 불구덩이를 향해 한발 한발 내딛는 중이다. 우리는 인류 멸절의 불구덩이가 눈앞에 있음을 깨닫고 나서야 지각, 인식, 개념, 언어가 아니라, 존재, 실재, 물질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미술 또한 머리로 하는 미술에서, 직접 접촉하고 덩어리를 느끼며 물질의 능동성을 주목하는 미술로 흐름이 변하고 있다. 물질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는다. 언제나 능동적이며 생기적이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도 ‘쿵’, 소리가 나는 것이다
* 본 원고는 (재 )예술경영지원센터 ‘2024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 진행하는 특별기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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