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위그 Pierre Huyghe
생성하는 세계: 피에르 위그의 예술적 창조
Artist
〈카마타〉기계 학습으로 구동되는 로보틱스, 자기생성 영상, 실시간 인공지능 편집, 사운드, 센서 2024~현재
《리미널》 리움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사진: 박홍순
피에르 위그/ 1962년 파리 출생. 칠레 산티아고에서 거주하며 활동한다. 파리 소재 프랑스 국립고등예술학교 수학.《리미널》(푼타 델라 도가나, 2024), 《키메라》(EMMA, 2023), 《변종들》(키스테포스미술관, 2022),《애프터 움벨트》(루마 재단, 2021), 《움벨트》(서펜타인갤러리, 2018), 《애프터 어라이프 어헤드》(뮌스터조각프로젝트, 2017), 《옥상 정원》(메트로폴리탄미술관, 2015) 등 외 전시 다수. 퐁피두센터, 카운티 미술관, 쿤스트뮤지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 파리현대미술관, 캐나다국립미술관, 베를린국립박물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미니애폴리스 워커아트센터,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주드람 4〉(부분) 수족관, 화살게, 소라게,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잠든 뮤즈」(1910)를 바탕으로 수지로 제작한 소라 껍데기 2011
제공: 리움미술관
피에르 위그는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질문하며, 자신의 작품을 사변적 허구로 간주한다. 그는 학습하고, 변화하고, 진화하는, 생물학적이거나 인공적인 주관성이 서식하는 세계에 대한 여러 형태를 작품으로 제시한다.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기간 동안 피노 콜렉션의 베니스 소재 푼타 델라 도가나에서의 전시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던 피에르 위그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 3월, 리움미술관에서 오픈했다. 월간미술은 매체와의 만남을 최소화하는 그와의 인터뷰를 미술전문지 단독으로 진행했다.
생성하는 세계: 피에르 위그의 예술적 창조
한의정 충북대 교수
한국 팬들이 당신의 개인전을 기다렸다. 이번 전시 제목이기도 한 《리미널》에 대해 설명해 달라.
리미널(liminal)은 이전의 것은 떠나고 앞으로 일어날 것은 아직 오지 않은, 통과하는 순간 또는 그 사이의 순간을 가리킨다. 그리고 우리가 있는 이 공간을 가리킨다. 림보(limbo)와는 다르게, 이 공간에서는 이전의 규칙이나 상태는 지나갔고 도래해야 할 상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이 과도기적 순간은 모든 것이 중지된 상태다. 이러한 상태나 장소에, 규칙이 적용되는 범주 바깥에 관심을 두고 작업한다.
당신의 과거 작품과 최신작이 공존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전시제목이다. 이번 전시에 새로 선보이는 신작들이 그 경계적 성격을 특히 더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번 전시를 하나의 세계로 생각하며 다양한 피조물들 (créatures)이 서로 대화하도록 했다. 신작으로는 얼굴에 큰 구멍이 뚫린 인간 형상의 〈리미널〉, 언어를 생성하는 가면 작품〈이디엄〉, 사막에서 의식을 거행하는〈카마타〉가 있다. 이들은 생성적인 작품으로 시작도 끝도 없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로봇 팔 같은 것이 패턴을 만들어 전체적인 구성을 실행하고, 마스크가 그러한 실행을 감추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각각 동일자들(identités), 준(準)주체(quasi-subjectivités)들이다. 아직 주체는 아니지만 그쪽으로 향하고 있는, 일종의 독립성과 의지를 가진 개체들이다. 작업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듣길 원했고, 그들의 시선으로 보기를 원했다.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는 생태계를 조성하고, 인간과 비인간 관계 탐구는 작품의 지속적인 주제다. 특히 예술이 가진 특권이라고 할 수 있는 ‘가상’, ‘허구’의 상황을 만들어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는 것 같다. 지구 생태계의 현실, 그리고 그것을 예술적으로 가공할 때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무엇인가?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고, 동시에 관객이 사물이나 예술작품과 맺는 관계와 양상, 즉 주체와 대상, 준주체가 의식(rituel)이나 예술 같은 의례적인 형식 안에서 만나는 방식에 대해서 주목해왔다. 우리는 생태계라 말하는 자연에서 우리 자신이 자연과 별개의 존재인 양 자신을 배제해왔다. 우리가 예외적인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그 경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동물의 본능적 행동들, 사물과 사물 사이의 간섭 또는 진동에도 관심이 있다. 다만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예술로 표현한다. 질문에서도 언급한 예술의 특권이라 말한 가상(fiction), 허구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이다.
가상이라는 말은 일상 언어에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이해된다. 문제는 인간 구성(construction)의 한계에 있다. 인간은 세계를 자신이 가진 감각도구로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들뢰즈도, 폰 윅스쿨도 말했듯이, 진드기의 세계는 우리의 것과 다르다. 인간에 의해 지각되는 세계가 현실인 것도, 실재인 것도 아니다. 우선은 종(種)이 있고, 그 후에 인간의 구성이 있다. 그것은 무(無), 카오스, 죽음에 맞서기 위해, 우리의 근원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미지의 것,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혼란을 잘게 나누고, 안심할 수 있는 상세한 범주들을 적용하여 구별, 분류하면서 이 우주를 만들어냈다. 이 우주에 우리가 예속되어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며, 이 설정 자체를 보호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보호하고, 구성하고, 주체가 되는 것 모두는 내러티브의 그물망을 짜는 과정이다. 여기서 모든 것이 가상이지만, 진정한 현실도, 사실도 없다.
〈리미널〉(스틸) 실시간 시뮬레이션, 사운드, 센서 2024~현재
제공: 작가, 갤러리 샹탈 크루젤, 마리안 굿맨 갤러리, 하우저&워스, 에스더 쉬퍼, 타로 나수
〈휴먼 마스크〉(스틸) 영상, 컬러, 사운드, 19분, 스틸 이미지 2014
제공: 피노 콜렉션, 안나 레나 필름
사진: 박홍순
작업에서 자주 사용하는 소재인 마스크도 이와 관련 있을 것 같다. 〈휴먼 마스크〉(2016) 외에도 마스크를 다양한 방식으로, 심지어 속이 빈 얼굴 형태로까지 사용하는데, 마스크가 갖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가?
내가 가면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인간의 가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가상의 구성과 관련해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 구성한 이야기 속 인물들이 되어 가면을 쓰고, 그 인물이 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가면 뒤에 무엇이 있다고 말할 수 있나? 가면 뒤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우리에게 딱 붙어버린 인간 가면이 우리를 안심시켜 줄 뿐이다. 내가 적시적소에 인간 마스크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킨다. 또한 나는 내가 잘 모르는 타인에게, 낯선 이에게 그걸 씌우면 안심이 된다. 우리는 절대자나 미지의 존재를 마주할 능력이 없다. 미지의 존재를 읽어내기 위해서 인간 마스크를 색칠한다. 다양한 종류의 담론들, 믿음의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주드람 4〉, 〈주기적 딜레마〉, 〈캄브리아기 대폭발〉에서는 수족관으로 작은 생태계를 만들었다. 각각에 조성된 분위기와 환경이 다르고, 선택된 생명체와 사물이 다르지만, 그들이 만들어진 환경에서 새롭게 공존의 방식을 찾아가고 진화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각 수족관은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생성이 끝없이 발생하는 ‘매끈한 공간’처럼 보인다. 이러한 영속적인 창조의 과정, 어떠한 위계 관계도 결정론도 존재하지 않는 끝없는 생성의 장이 당신이 만들고자 하는 것인가?
그렇다. 나는 비결정적인 것, 불확정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하여 놀라는 것도 좋아한다. 보통 우리는 인간이든 동물이든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리라 예상한다. 행동의 패턴과 순환이 있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 여기 수족관이라는 공간에는 어떤 방식으로 맺어진, 일종의 의식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있는데,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가정할 수는 있는데, 일어난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불확실한 세계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유지되어야만 한다. 수족관 안의 부분, 돌이나 청동 조각이 아니라 그것들을 품고 있는 수족관, 그 세계를 유지해야 한다.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관심 있는 것에 대해 말할 뿐이다. 불안정한 것들과 마주할 때 흥미를 느낀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생각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에 불안정한 것이라 생각한다. 바로 거기서 아이디어가 탄생한다.
신작에서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생성되는 것들에 대한 탐구가 보인다. 그리고 그것들은 수집, 변환되어 소리, 이미지, 물리적인 현상들로 자가생성하고 출현한다. 그것들이 외부적으로 가시화될 때는 〈마음의 눈(S)〉과〈U움벨트-안리〉처럼 유령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전시 중에도 계속 작품들이 편집, 생성되는 경우가 있지만, 작품을 설계할 때 작품의 최종 형태를 어느 정도 계획하는지 궁금하다.
창조물이라기보다는 작업의 피조물이 고유의 방식으로 어느 정도의 진화 가능성을 보여줄지 정확히 예상할 수는 없다. 물론 작업에 그들의 주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특정 조건을 제공하는 것은 나지만, 그들은 전시의 순간에 반드시 주체성을 구성할 필요가 없다. 주체성의 구성이 반드시 이 현실(réalité)의 계획(plan)에 속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형태를 취하지만, 그 형태를 우리가 규정할 수도, 정의할 수도 없다는 점이 갈수록 흥미롭다. 전시에서 지금의 지각을 뛰어넘는 무엇, 장(場)을 넘어서는 무엇, 세계에 속하지 않는 무엇을 보여주고자 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범주보다 훨씬 큰 어떤 광대함이 각각의 것 안에 존재한다. 우리가 그것들을 지각하는 방식은 그 광대함에 비하면 아주 작다.
〈캄브리아기 대폭발 16〉 수조, 투구게, 화살게, 아네모네, 모래, 바위 2018
《리미널》 델라 도가나 전시 전경 2024
사진: 슈테판 알텐부르거
제공: 작가, 하우저&워스
〈카마타〉(스틸) 기계 학습으로 구동되는 로보틱스, 자기생성 영상, 실시간 인공지능 편집, 사운드, 센서 2024~현재
제공: 작가, 갤러리 샹탈 크루젤, 마리안 굿맨 갤러리, 하우저&워스, 에스더쉬퍼, 타로 나수
들뢰즈의 ‘현실성의 평면(plan)’이 아닌 ‘가능성의 평면’에서 작용하는 차원에 대한 설명 같다. 작업을 보면 철학자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은 것 같다.
들뢰즈는 물론 푸코, 리오타르, 가타리의 카오스모스까지 프랑스 철학자들이 나에게 매우 중요했다. 그 외에도 트리스탕 가르시아(Tristan Garcia), 페데리코 캄파냐 (Federico Campagna) 등 모두 다른 세계로 나가는 문을 열어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고의 한계를 깨닫게 해주고, 기둥처럼 의지했던 것들을 의심하게 한다. 그러한 성찰과 즐거움이 있는 철학책을 읽을 때 정말 편안함을 느낀다.
철학적 깊이도 놀랍지만, 다양한 매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고 결합하는 능력도 놀랍다. 특히 하이테크 기술을 사용해서 다양한 장면을 연출하는데, 그럼에도 어떤 작품은 고대로 돌아간 듯하다. 기술의 빠른 발전 속도와 억겁의 느린 자연의 시간의 중첩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교차에서 발생하는 이질적인 느낌, 당혹감과 같은 것은 의도한 것인가?
평소 자연과 기술에 대한 기사들을 놓치지 않고 보려 한다. 그 자체로 흥미롭다. 벌과 개, 식물 때로는 사람이 사람을 복제하는 규칙, 제로 베이스에서 배울 수 있는 기계에 관심이 가지만, 자연이나 기술 자체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당혹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질문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에 관심을 쏟는다. 다시 말해,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관심 있는 것에 대해 말할 뿐이다. 나는 불안정한 것들과 마주할 때 흥미를 느낀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생각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에 불안정한 것이라 생각한다. 바로 거기서 아이디어가 탄생한다. 그리고 그다음에 이미지를 생각한다. 이미지를 만든다기보다 종종 이미지가 내게로 온다고 표현한다. 여기 있는 모든 작품이 그렇다. 내가 창조한 건 없다. 사막 한가운데에 죽은 사람이 있는 이미지를 보고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또 어느 날 흑백 사진을 봤는데, 벌거벗은 여자였다. 누군가가 펜을 들고 그녀의 얼굴을 지웠다. 나는 그것이 얼굴의 구멍으로 여겨졌고, 결과적으로 끔찍한 형상이 나왔다. 원숭이도 15살 때 카페에서 사람들이 보던 비디오 영상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식으로 나는 어떤 이미지들에 사로잡힌다. 거기에는 쉽게 추론하거나 분류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더 길게, 더 크게 만들어서 더 오랜 시간 공유하려고 하는 것이다.
《리미널》은 많은 내용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철학, 생태학, 인류세, 탈인간중심주의, 네트워크이론, 비인간 존재론과 같은 이론은 물론, SF문학과 영화 같은 분위기도 그 기조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복잡한 내용들을 전시장에 풀어놓을 때, 각 관의 연결고리를 생각하는지, 어떻게 서사를 구축하는지 궁금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내가 할당받은 공간의 성격(qualité)에 따라 다르다. 공간은 뮤즈처럼 노래한다. 다시 말해, 그 장소에 이미 주어진 것이 있고, 또 거기서 어떤 것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전시는 별개의 시공간으로, 나는 현실의 시공간과 전시의 시공간이 겹쳐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곳에서 어떤 것이 펼쳐지도록 한다. 만약 공간이 허락한다면, 가능한 동선을 상상해본다. 물론 첫 번째 볼 것, 두 번째 볼 것을 정하는 것은 어렵다. 한 장소에 들어가는 입구가 여러 개 있는 편이 낫다. 독점적인 하나의 경로만 존재하지 않도록, 종종 갈림길이나 되돌아가는 길 같은 형태를 찾으려 한다. 선형적인 형태를 벗어나려고 하지만, 공간이 허락하지 않을 때도 많다.
이번 전시에서 AI 기술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작품들을 볼 수 있었는데, 사실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도 AI 예술에 대한 호불호가 나타나고 있다. 창의적으로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서 예술가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동시대 예술가들, 특히 한국의 젊은 예술인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무엇을 하고 싶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도, 예술계에도 규칙은 없다. 하지만 이런 말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기술의 사용자들, 일러스트레이터들이다. 한편, 기계로 들어가서 그걸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아예 기계를 필요에 따라 다르게 작동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테크니컬 일러스트레이션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내가 기술을 사용했다고 해서 갑자기 새로운 어떤 것이 나온다고 믿지도 않는다. 내가 어떤 기술을 사용하는 순간이 있지만, 그 기술이 작품의 질로 평가받는 것은 원치 않는다. 우리는 기술을 가지고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의 영역이 아니라 시학(poétique)의 영역이다.
특히 요새 관심이 가는 분야가 있다면? 구상 중인 차후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형이상학에 관심이 간다. 결국 그것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에 대한 문제다. 주체는 무엇으로 어떻게 구성되는지? 우리는 정말 창조자가 아니라 피조물인가? 와 같은 우리의 정체성은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한 문제들이다. 인류는 어쩌면 또 다른 인류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 나는 이 또 다른 인류에 관심이 있다. 또 다른 인류는 변형되어야 할 인류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될지 모르지만, 장편 영화 작업을 하고 싶다. 천천히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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