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찰의 재미, 수류산방 책 4선
강재영 기자
ART BOOKS
해찰의 재미, 수류산방 책 4선
총체적이고, 압축적이며, 꽉 차있는 책. 수류산방이 만드는 책을 접할 때 항상 받는 인상이다. 지식과 정보를 독자적인 체계에 따라 한 페이지도 허투루 하지 않고 꼭꼭 눌러 담은 책에는 편집자와 동료의 고뇌의 시간이 고스란히 쌓여 있다. 내용과 흐름에 따라 고르고 또 골라진 종이와, 정갈한 선 안에 담겨있는 주석을 읽다 보면 심세중 대표의 말처럼 길을 잃으며 탐색하는 ‘해찰’의 즐거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수류산방이 20여 년간 만들어 온 책 4권을 꼽아 월간미술 독자에게 소개한다.

이응노의 집, 이야기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 개관준비위원회+수류산방 기획
200쪽 · 2012
수류산방 · 29000원
『이응노의 집, 이야기』는 현대 한국화의 거장 고암 이응노(1904~1989)의 생가에 세워진 기념관 ‘이응노의 집’을 만든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은 일반적인 전시 기념 도록이나 건축 자료집과는 다르게, 이응노의 회화와 그가 남긴 흔적, 기념관 건축의 의미를 담아 다각도로 접근한다. 이응노의 회화와 ‘이응노의 집’ 건축 공간이 교차하며, 이미지와 글이 한 페이지에 병치되어 서로 다른 매체를 겹쳐 가며 새롭게 읽는 방식을 제안했다. ‘풍경의 복원’을 주제로, “기념관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 “고암에게 고향은 무엇”이며 “그의 삶은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가”와 같은 질문을 품은 ‘이응노의 집’ 개관 과정을 담았다.
“미술과 건축, 글과 도판, 과정과 결과, 편집과 디자인이 팽팽하게 교차하는” 이 책은 이응노의 태도, 그리고 이응노의 집을 건축하는 태도를 형식적으로도 품고 있다. 얇은 표지를 넘겨 마주하게 되는 두껍고 거친 질감의 첫 장에서부터 재료 간의 긴장과 조응을 섬세히 짜냈음을 바로 실감하게 된다.
책은 ‘이응노 이야기’, ‘만든 이야기’, ‘집 이야기’, ‘홍성 이야기’ 등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장은 이응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조망하며, 그의 예술적 변화와 시대적 맥락을 설명한다. 두 번째 장에서는 이응노의 집이 만들어진 배경과 의의를 개관준비위원인 김학량, 유홍준, 이태호 등의 글로 조명했다. 세 번째 장에서는 ‘이응노의 집’의 건축적 특성을 세세히 살핀다. 또한 대표 작품과 소장 유품이 소개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장에서는 이응노의 고향인 홍성에 대한 르포를 담아, 그의 삶과 작품을 홍성에 닿지 않은 이들도 이해하기 쉽게 구성했다.
『이응노의 집, 이야기』는 한 예술가의 기념공간을 조명하는 동시에, 기념관이라는 공간이 지닌 의미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술적 대화를 주도 한다. 수류산방만이 할 수 있는 ‘해찰’의 재미를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책이다.

해찰: 언저리의 미학 · 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
윌리엄 켄트리지 · 수류산방 엮음
888쪽 · 2016
수류산방 · 50000원
『해찰: 언저리의 미학 · 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2015~2016) 전시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세계적인 예술가 윌리엄 켄트리지는 독재, 인권 탄압, 식민지 역사 청산 등의 문제를 예술적으로 탐구하며, 이를 회화, 애니메이션, 연극, 오페라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표현해왔다. 이 책은 그가 한국에서 개최한 전시의 의미를 담아, 전시 기록을 넘어 비평적 고찰을 포함한 독립적인 아카이브 성격을 갖춘다.
이 책의 기획을 관통하는 개념은 ‘해찰’이다. 수류산방은 해찰을 단순히 딴짓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확장하는 태도로 해석한다. 주석이 본문을 보조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독자가 새로운 방향으로 빠져들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본문과 주석, 도판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예상치 못한 경로를 발견하고 작품을 새롭게 이해하는 과정을 설계한 것이다.
윌리엄 켄트리지의 작업 방식과도 맞닿아 있는 이 편집 전략은 도록이 전시 기록에 머물지 않고, 연구서로 기능해야 한다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켄트리지의 예술 세계는 시간성과 장소성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의 작품들은 특정한 역사적 맥락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를 반영하기 위해 작품 도판을 배치할 때도 책 전체의 흐름을 고려한 세부 조정이 페이지마다 이루어졌다.
이 책은 전시가 끝난 이후에도 ‘살아있는 문서’처럼 기능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작품이 전시장 내에서 어떻게 설치되었고, 관객이 어떤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되는지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책의 제작 과정 또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작품의 실제 배치도를 제대로 담기 위해, 현장을 수없이 확인하며 도록의 내용을 수정해야 했다.
『해찰: 언저리의 미학·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은 전시 기록을 확장하여, 예술과 사회, 역사적 맥락을 연결하며 한국적 관점에서 윌리엄 켄트리지의 작품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작품을 나열하는 방식을 넘어, 켄트리지의 ‘주변적 사고’를 반영하며 독자 스스로 사고의 경계를 확장할 수 있는 ‘해찰’에 빠져드는 책이다.

김택상, 색, 채의 건축술
김택상 작품 · 김원식 홍가이 성신영 최재혁 코멘터리 · 이지웅 권오열 박상일 사진
432쪽 · 2020
수류산방 · 35000원
『김택상, 색, 채의 건축술』은 한국 단색화의 전통을 확장하며 독자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해온 김택상의 작품세계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책이다. 2020년 서울 리안갤러리 개인전 《색과 빛 사이에서》를 중심으로, 작가의 최근 작업과 작업실 풍경, 제작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홍가이, 김원식 등의 미술평론이 더해져, 김택상의 회화가 지닌 조형적·개념적 특성을 다층적으로 분석한다.
김택상의 회화는 색의 층위가 쌓이고 스며들며 시간이 응축되는 작업이다. 『색, 채의 건축술』은 이러한 그의 작품세계를 충실히 담아내기 위해 새로운 방식으로 기획된 책이다. 일반적인 도록이 작가의 작품을 정리하는 데 집중한다면, 이 책은 김택상의 회화를 ‘경험’할 수 있는 하나의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도록의 디자인은 김택상의 작업 방식 자체를 반영하는 실험이었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보이는 것은 작품의 측면이자 외곽이다. 잔잔히 사라지는 캔버스의 그라데이션을 포착해 전달하는데, 이는 색채가 쌓이고 흐르며 변화하는 김택상의 작업 방식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구성이었다.
또한, 수류산방은 이 책이 하나의 오브제로서 기능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일반적인 종이에 인쇄하는 대신 얇고 반투명한 종이를 사용해 페이지를 넘길 때 색의 겹침이 보이도록 설계했다. 김택상의 작업이 색의 층위와 투명도를 핵심 요소로 삼듯, 책도 단순한 평면이 아닌 색과 빛이 중첩되는 공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주석과 편집 방식에서도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보통 도록은 작품 설명을 나열하는 방식이지만, 이 책은 관람자가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색과 공간을 따라가도록 유도한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색의 흐름이 변하고, 개별 작품이 아니라 색과 색의 관계가 강조된다. 432쪽에 걸쳐 펼쳐지는 『색, 채의 건축술』은 김택상의 작업 방식과 철학을 온전히 담아내는 책이다. 색이 공간을 만들고, 책이 회화가 되는 순간을 경험케 하는 도록이다.

문신: 우주를 향하여- 모노그래프 일시 一始- 코멘터리 무종 無終
국립현대미술관 · 수류산방 편집
각 384쪽, 792쪽 · 2022
수류산방 · 각 32000원, 48000원
『문신, 우주를 향하여』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동명의 전시(2022~2023) 도록으로, 조각가 문신(1922~1995)의 예술세계를 깊이 있게 조명하는 두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노그래프 일시 一始』는 전시 개막과 함께 출간된 안내서로, 문신의 작품과 예술적 원리를 조망하는 데 중점을 둔다. 『코멘터리 무종 無終』은 이를 확장하여 다양한 논고와 전시 기록, 작품의 세부 이미지를 수록하며 문신의 조형 언어를 다층적으로 분석한다.
이 두 책은 문신의 예술적 여정을 총체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모노그래프 일시 一始』는 문신의 조각과 회화, 드로잉을 아우르는 대표 이미지를 통해 그의 창작 세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작품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며, 전시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한다. 『코멘터리 무종 無終』은 문신의 작품을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학술적 접근을 시도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협업하여 기획된 이 책은 문신 조각의 조형 원리, 현대 조각사에서의 위치, 그가 영향을 받은 국제적 미술 환경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책의 구성과 편집 방식 또한 문신의 작품세계를 반영한다. 수류산방은 조각의 입체감을 강조하기 위해 정면뿐 아니라 총 8개 각도에서 촬영한 이미지를 수록했다. 전시 공간에서의 배치를 기록하여, 작품이 환경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코멘터리 무종 無終』에서는 문신이 활동했던 일본과 프랑스의 미술적 맥락을 탐구하며, 현대 조각의 흐름 속에서 그의 작업이 지닌 의미를 조명한다. 이와 함께, 문신의 주요 작품이 설치된 공간인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과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등도 소개하며, 그의 예술이 남긴 흔적을 따라간다.
『문신, 우주를 향하여』는 조각의 형식과 의미를 탐색하는 수류산방만의 시각을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문신의 예술이 한국 근대 조각에 미친 영향을 면밀히 검토한다. 두 권의 책은 서로를 보완하며, 독자들이 문신의 조각과 그의 삶, 예술을 직접 마주하는 듯한 감각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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