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민 Sungmin Hong
시간예술의 자장 속 홍성민의 궤적과
한국미술계의 만남에 관하여
Artist
홍성민/ 1964년생. 홍익대 서양화과 및 뉴욕대 대학원과 시카고예술대 대학원 시간예술 전공을 졸업했다. 199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비디오아트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거의 유일한 한국 작가로, 귀국 이후 한국 미술계에 시간예술 및 비디오아트의 개념을 선구적으로 도입했다. 초기에는 사진, 미디어를 넘나드는 실험적 작업을 선보였으며, 1992년 국내 첫 개인전 《대중매체와 다중매개체》를 비롯해, 1990년대 중반부터는 단채널 비디오, 멀티미디어 퍼포먼스, 설치 등 복합 매체를 통한 사회·문화적 비판 작업을 이어왔다.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2004년 부산비엔날레, 2005년 후쿠오카 트리엔날레 등 다수의 국내외 비엔날레와 주요 전시에 참여했으며, 2005년 쌈지길에서의 대형 실험극으로 문화예술위원회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했다. 이후 벨기에 앤트워프 레지던시(2009), 인천아트플랫폼(2011) 입주작가로 활동했으며, 멀티미디어 실험극 및 다원예술, 퍼포먼스 분야에서 독창적인 실험을 지속해왔다. 현재 계원예대 융합예술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순환문화/에스켈레이터(더욱 편안한 내일을 향하여)〉복합 설치 1991
시간예술의 자장 속 홍성민의 궤적과
한국미술계의 만남에 관하여
문혜진 미술비평
1. 홍성민이 시카고예술대학에서 시간예술을 전공하고 1993년 귀국했을 때, 그는 당시 비디오아트의 중심지였던 미국에서 제대로 비디오아트를 공부한 거의 유일한 한국인이었을 것이다. 1990년 3월 『월간미술』의 특집 기사인 「비디오예술의 현황과 그 전망」은 당시 정황을 잘 보여준다. 백남준, 볼프 포스텔, 브루스 나우먼, 피터 캠퍼스, 빌 비올라 등 서구의 주요 비디오 작가를 소개하고, 상업 TV의 보수적인 미학에 반발해 태동한 비디오아트의 출발 맥락을 전하며, 비디오아트의 미학적 경향과 형식적 특징을 나름대로 세세히 분류한 기사의 내용은 성실하지만, 기사는 조앤 조나스, 비토 아콘치 같은 미국의 1960~1970년대 개념적 비디오아트를 매체 자체보다 주제를 중시하는 휴머니즘으로 해석하는 등 꽤 많은 오류도 내포하고 있다.1 사실상 서구 비디오아트에 대한 첫 소개에 해당하는 이 기사 이후 비디오아트에 대한 기사는 간간이 실렸지만, 국내에서 비디오아트의 맥락이 비교적 정확하게 이해되는 시점은 2000년대 초반이라고 보아야 한다.2 1998년에 쓰인 한 글을 보면 당시 비디오아트에 대한 국내 미술계의 이해도가 드러난다. 김현도는 당시 열린 주요 비디오아트전을 언급하며, 비디오아트가 전시장에서 조형적 공간 예술과 동일한 방식으로 전시되고 있으며 관객은 비디오아트를 그림이나 조각처럼 20~30초 안팎으로 스쳐 지나간다고 개탄한다. 관람시간을 30초에서 3분으로 늘이는 철저한 시공간적 프로그래밍이 필요하다는 그의 제안은 아직 시간성에 입각한 단채널 비디오를 온전히 관람하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지 않음을 암시한다.3 이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서 비디오아트를 공부한 홍성민의 이력이 국내 신과 비교해 얼마나 앞선 것이었으며, 비디오아트에 대한 한국미술계의 이해도와 홍성민의 간극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은 시간예술로서 비디오아트를 바라본 선구자로 홍성민의 작업을 분석하고, 그의 작업과 한국미술계의 관계를 조망하여 한국비디오아트사에서 홍성민의 역할과 의의를 생각해보는 자리다.
2. 홍성민이 유학을 떠난 것은 그룹 ‘뮤지엄’의 창립전(1987) 직후다. 뉴욕대 대학원 조형과에 진학한 그는 사진과 회화 작업에 주력하다가 우연히 1970년대 비디오아트의 거장 피터 캠퍼스(Peter Campus)의 수업을 듣게 된다.4 퍼포먼스와 미디어를 중심으로 했던 이 세미나 수업에서 그는 빌 비올라, 게리 힐 등 동시대 작가들을 접하게 되었고, 여기에 흥미를 느껴 시간예술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시카고예술대학으로 재진학하게 된다. 시카고예술대학은 한국과 달리 회화, 조소, 사진 식으로 나뉘어진 것이 아니라 2D(회화, 사진), 3D(조각, 공예, 섬유), 4D(필름, 퍼포먼스, 사운드, 비디오, 홀로그래피, 컴퓨터)로 분류된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었고, 홍성민은 그중 4D의 여러 매체를 오가며 두 가지 장르 이상의 작업을 하는 학생을 위한 융합학과인 시간예술(Time Arts)과에 진학하게 된다.5 시간예술과에 다니면서 홍성민은 학교 수업 못지않게 시카고에 위치한 유명한 비디오 아카이브인 비디오데이타뱅크(VDB)에서 비디오와 퍼포먼스 영상을 하루종일 보며 시간예술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비토 아콘치, 브루스 나우먼, 조앤 조너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로버트 윌슨, 로리 앤더슨 등 당대 주요 작가의 작업을 섭렵했던 이 시기가 그의 비디오 및 퍼포먼스 작업의 토대를 닦는 역할을 한다.
홍성민의 국내 첫 개인전은 시카고예술대학의 석사학위를 끝내기 전 연 《대중매체와 다중매개체》(동방 플라자미술관, 1992)이다. 이 전시는 향후 홍성민의 관심사와 매체에 대한 입장이 명확하게 드러난 선언과도 같은 전시였다. 작가는 일방적으로 보여지는 대중매체(TV)와 작가가 조작해서 소통이 가능한 다중매개체(작업)를 대비시키며, 오늘날 제2의 자연이 된 TV와 대중문화에 대한 입장을 밝힌다. 그는 순수예술과 대중문화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말하며, 일상생활의 한 부분으로서의 예술을 강조한다.6 상업공간인 백화점 내의 미술관에서 전시를 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상 속 더 많은 관객에게 노출되어 미술과 일상의 거리를 좁히고 싶다는 의도는 장소 선정뿐 아니라 작품의 내용에도 반영된다. 예를 들어, 광고와 여성의 성 상품화를 다룬 〈신선하고 깨끗해요〉(1992)는 백화점 이라는 공간의 용도와 맞물리고,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기울어진 라이트박스 속 이미지와 비디오 모니터로 제시하는 〈순환문화/에스컬레이터(더욱 편안한 내일을 향하여)〉(1991)는 백화점에서 관찰한 소비자본주의의 속성(인간과 상품이 동일하게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순환)을 지적한다. 홍성민의 두 번째 개인전인 《사우나/사운드》(미도파백화점 상계점, 1994)도 초대전 형식으로 백화점미술관에서 열리는데, 비디오, 슬라이드, 사진 등 당시 미술시장에서는 판매가 거의 불가능했던 뉴미디어 작업으로 구성된 홍성민의 작업이 백화점미술관에서 환영받은 것은 판매보다 기업 이미지 재고와 문화서비스 제공에 초점이 맞춰졌던 당시 백화점 미술관의 특수성과 무관하지 않다.7
위 〈만.네.킨〉(스틸) 마네킹, 비디오 프로젝션 1994
가운데 〈바이킹〉(스틸) 싱글채널 비디오 1995
아래 〈Window’s 95〉(스틸) 2채널 비디오 1995
1990년대 초반의 홍성민의 작업은 형식적으로는 복합매체, 내용적으로는 사회문화적 발언으로 요약된다. 다매체적 속성이 잘 드러나는 작업으로 컴퓨터 출력 사진과 비디오, 슬라이드 프로젝션, 스피커가 혼재된 〈Audiology I:체육-육체-체육〉(1992), 200개의 스피커와 4대의 모니터, 슬라이드 프로젝션, 사진을 사용한 〈당신은 대통령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1993)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일차적으로는 장르 융합을 강조하는 시간예술을 전공한 영향이겠지만, 이 특징이 국내 미술계에 수용된 방식과 작가의 의도 사이의 간극은 당시 한국미술계의 특징을 드러낸다. 《대중매체와 다중매개체》의 인터뷰에서 홍성민은 자신에게 매체는 “매개체”이지 목적이 아니라고 명시하며, 당시의 테크놀로지 예술과 자신의 작업이 맥을 달리한다고 지적한다. 그의 작업은 “대중매체에 대한 모순, 모호함, 심미적 거리, 아이러니들을 의도적으로 조작해 매체가 우리 사회를 조장하는 허실을 폭로하거나 더욱 강조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는 것”이다.8 예를 들어, 유학 시기 그의 대표작인 〈청각 이데올로기: 차용의 차용〉(1992)은 시각적·청각적으로 이중의 차용을 한다. 시각적으로 작업은 리히텐슈타인의 〈Diptych(Swimmers)〉(1962)를 벽화와 스피커로 재연해, 만화를 차용한 원작을 다시 한번 차용한다. 한편 망점을 대신한 800개의 스피커에서 에이즈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며 청각적 메시지는 낭만적인 사랑을 표현한 시각적 메시지를 배반하며 원작을 뒤집는다. 여기서 매체는 사회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구현하는 수단으로 내용과 한 몸을 이룬다. 하지만 기호의 의미화 과정이나 재현의 구조 같은 후기구조주의적 접근에 익숙하지 않았던 한국미술계에서 아이러니나 역설 같은 홍성민의 방법론은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듯하다. 홍성민의 초기 작업은 사회정치적 현실에 대한 비판, 대중매체의 이데올로기 폭로 등과 같은 메시지 중심으로 이해되거나 매체에 의거해 첨단기술 작업으로 수용되었다. 실제로 초기작의 경우 사회적 발언이 강했기 때문에 메시지 중심의 이해가 이상한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중반의 대표작인 〈만.네.킨(Man and Queen)〉(《젊은 모색 ’94》출품, 1994), 〈바이킹(By King Bye! King)〉(《싹》 출품, 1995), 〈Windows’ 95〉(《Info Art》 출품, 1995)는 모두 사회문화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만.네.킨〉은 남성 중심의 권력 체계와 여성을 성 상품화하는 광고 이미지의 세계를 대립시키고, 〈바이킹〉은 권력의 허망함과 역사의 반복을 바이킹의 왕복 운동으로 빗대며, 〈Windows’ 95〉는 1995년 발매되어 전 세계의 운영 체계를 바꾼 윈도우 95의 시스템 독점을 사회적 폭력으로 풍자한다. 하지만 ‘맨앤퀸(man and queen)’과 마네킨을 발음의 유사성으로 연결하고, 이것이 다시 남성 대 여성이라는 주제로 변환되며, 최종적으로 여성 성 상품화의 영상이 실제 마네킨에 투사되는 의미의 지속적 전환은 당시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왕이 권력을 행사하지만(by king) 결국 권력은 유한하다는(Bye! King) 역사의 진리를 놀이기구 바이킹과 발음의 유사성 및 대상의 운동으로 중의적으로 전달하는 〈바이킹〉의 기호 유희, 윈도우의 사전적 의미(창문)를 차용해 문, 창문, 블라인드가 갑자기 열리고 닫히는 광경을 시청각적 폭력에서 사회적 폭력으로 치환하는 〈Windows’ 95〉의 환유적 의미 전환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1990년대 초반 ‘93 대전엑스포’ 등 영상산업진흥을 표방하는 정부시책과 새 시대에 대한 기대와 맞물려 테크놀로지 아트가 붐을 이루면서, 홍성민의 작업은 좁게는 테크놀로지 아트, 넓게는 설치미술로 간주되곤 했다. 실제로 홍성민은 한국의 설치미술을 총망라하는 대형 기획전에 두 번이나 참여했는데,9 참여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당시 비디오 주제 전시가 거의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고 답했다.10
위 《틈》(아트선재센터, 1998) 출품작 〈빠지다 빠지다 빠지다〉 1998 설치 전경 2층
가운데 《틈》(아트선재센터, 1998) 출품작 〈異夜記(이야기) – “TV는 사랑을 싣고…”〉(스틸) 1998 지하 극장 스크리닝
아래 《The Cross: Exhibition for Videography》(동숭시네마텍, 1999) 출품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스틸) 1999
3. 시간예술로서의 비디오와 대중문화 비틀기라는 홍성민의 방식이 어느 정도 공감대를 얻는 것은 1996년 이후다. 당시 붐을 이루던 CF와 케이블 TV의 영향으로 영상 세대라고 불릴 수 있는 젊은 작가들이 형성되고 이들이 독학으로 간단한 영상 촬영과 편집을 배우면서 단채널 비디오 작업이 비로소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효시와도 같은 전시가 《T-V》(공평아트센터, 1996)이다. 퍼포먼스 및 영상 작가 이윰이 기획한 이 전시는 김세진, 이윰, 강영민, 이중재 등 국내 단채널 1세대 작가와 CF 및 애니메이션 감독(차은택, 이성강), 그 외 회화, 사진,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의 작가가 TV로 상징되는 영상문화에 반응한 대규모 기획전 이었다. 홍성민은 이 전시에 기고한 글에서 그레고리 배트콕을 인용하며 비디오아트를 형태적으로 분류하고, 그중 단채널 비디오를 내용적으로 구분하며, TV와 영화, 비디오아트가 교차되고 갈라지는 지점에 대해 논술한다. 이번 전시회가 국내 최초의 테이프비디오(단채널비디오) 전시이며, 비디오 조각과 비디오 설치뿐인 국내에서 백남준의 존재를 떨쳐버리고 자생적인 비디오아트를 개척해야 한다는 홍성민의 주장은 당시 정황을 짐작케 한다.11 이 시점에 홍성민은 비디오아트를 이론적으로 소개하고 분석하는 또 다른 글을 쓴다.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을 차용해 비디오아트를 시간의 몽타주(테이프 작품), 공간적 몽타주(폐쇄회로 비디오 설치), 시간과 공간의 몽타주(비디오 설치)로 구분한 이 글에서, 홍성민은 비디오의 경우 디지털 후반 작업을 통해 쇼트와 쇼트의 연결뿐 아니라 프레임 내에서도 몽타주를 만들 수 있다며 비디오아트의 창조적 가능성을 역설한다.12 전술했듯 당시 잡지에서 비디오아트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 글이 2000년 즈음에야 나오기 시작했음을 고려하면, 홍성민의 이 글들이 상당히 앞서 있으며 단채널 작업에 관심있는 국내 젊은 작가들에게 나름의 정보가 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홍성민은 귀국 직후부터 계속 영상 강의를 해왔지만, 주요 미대가 아닌 계원예대, 경원대, 대전 전문대 등에서 강의를 했기에 이른 귀국에도 1990년대 말이 되기까지 직접 후학을 양성하지 못했다.13 홍성민은 귀국 당시 간단한 비디오 편집기를 직접 사왔다고 증언했는데, 이처럼 1990년대 중반까지는 개인 차원의 비디오 편집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주요 미대에 비디오 강의가 생겨서 학교에서 영상 교육을 받은 작가들이 배출되기 시작한 것 또한 2000년대가 넘어서이므로, 영상문화에 대한 이해와 감수성, 장비 및 제도의 확충이 갖춰져 단채널 비디오 작업의 여건이 갖춰진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홍성민이 복합매체가 아닌 단채널 비디오 작업을 하기 시작한 것도 1990년대 중반부터다. 그의 첫 단채널 비디오 작업은 《젊은 모색 ’94》전을 취재한 ‘EBS 미술관’의 인터뷰를 그대로 작업화한 〈circulation〉(《미음완보》 출품, 1995)이다. 방송을 소재로 만든 작업(〈만.네.킨〉)이 방송을 타고 그것이 다시 미술의 장으로 돌아오는 순환이 실제 대중문화와 미술의 관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후 홍성민은 《틈: 싱글채널 비디오》(아트선재센터, 1998)전과《The Cross: Exhibition for Videography》(동숭시네마텍, 1999)전에서 본격적인 단채널 비디오 작업을 제작한다. 홍성민과 서현석, 박화영의 공동 기획인 《틈》은 “설치의 성격을 덜어내고 영상만으로 관객과 대면한다는 측면에서 비디오아트의 본질과 미학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14 공동작업인 〈빠지다, 빠지다, 빠지다〉(1998)는 남자 둘과 여자 한 명 사이의 삼각관계를 소재로 작가들이 각기 다른 인물의 관점에서 각본을 작성하고 이를 각자 영상으로 찍어 3채널 설치로 연결한 작업이다. 겉으론 상투적인 TV 드라마를 연상시키지만, 관람 시점과 위치에 따라 관객이 파편적인 시청각 정보를 재구성해 자신만의 서사를 구축하게 되므로 작업은 TV의 동질화와 반대로 매번 달라지는 비선형적 서사를 실험하게 된다.15 여기서 홍성민은 나, 남, 우리의 세 가지 이야기 중 우리 파트를 맡아 인터폰을 통해 세상과 접촉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았다. 포교하는 아줌마, 신문 세일즈맨, 짜장면 배달원, 애인 등 세상을 인터폰을 통해서만 만나는 주인공의 일화는 매체가 세상을 보는 매개체라는 홍성민의 생각을 가시화한 것이다. 매개체의 개념은 작가 이상현의 추억을 매개로 한 유사 다큐멘터리 〈異夜記(이야기)-“TV는 사랑을 싣고…”〉(1998)에서도 구현된다. 이상현의 회상 중 계속 등장하는 카메라를 든 작가의 모습은 사실이라 믿는 것도 매체를 통해서 구축된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현실과 가상, 나와 남, 사실과 기억의 경계를 흐트러뜨린다.
한편, 《The Cross: Exhibition for Videography》 출품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99)는 통합적 내러티브에서 자유로운 단채널 비디오가 이질적 쇼트의 독립적 구성에서 영화보다 유리하다는 홍성민의 주장을16 떠올리게 하는 작업이다. 허구(동화)와 실제(키우던 토끼의 사망)를 연결하는 엉뚱하고 파편적인 서사와 함께 눈에 띄는 것은 매체의 형식 실험이다. 화면은 수직으로 올라가는 스크립트와 수평으로 이동하는 이미지로 구성된다. 이는 마그네틱 테이프를 수평으로 읽는 리더기와 주사선이 수직으로 적층되어 이미지를 형성하는 모니터를 암시하는 한편, 한 이미지 위에 다른 이미지를 적층시켜 이미지를 감상하는 통상적 방식과 달리 수평으로 이미지를 제시해 감상 방식을 비트는 효과를 낳는다. 비디오의 제작 및 감상 방식에 대한 의식적 인지는 서구에서 매체의 구조를 제대로 공부한 결과일 것이다. 비디오 상영의 물리적 구조에 개입하는 작업은 이외에도 많다. 초기 작업인 〈청각 이데올로기: 차용의 차용〉, 〈TV Cogito〉(1993)에서 이미 소리와 이미지의 분리를 실험했고, 〈이창, 해치지 않는다니까!〉(《호랑이의 눈》(엑시스미술/일민미술관) 출품, 1997)에서는 스크린의 역방향에서 영사해 스크린의 이면(이창)을 보게 만들었으며(관음증을 주제로 한 작업이라 영화 〈이창〉을 차용한 것),〈Peeping/People〉(《ICC 도쿄비엔날레》 출품, 1997)의 경우 비디오 프로젝터의 맞은편에서 빛을 투사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한 후 관객이 지나가며 그림자가 생기면 그것이 스크린으로 작동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대중문화에서 출발해 이를 원천으로 작업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화려한 시각효과나 감각적인 감수성이 두드러지던 당시 국내 작가들과 달리 홍성민의 작업은 대중매체를 반영하기보다 대중매체의 재현 방식을 차용해 그 작동 원리를 드러나게 하는 쪽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유희와 성찰, 매혹과 냉소, 유머와 진지함이 뒤섞인 홍성민의 감성과 대중매체를 비판적으로 전유하는 그의 전략은 동종 업계보다 최정화, 이상윤, 김형태, 이불 등의 신세대미술 작가들과 상통한다.
위 〈7 Characters〉(스틸) 싱글채널 비디오 2004
아래 〈Palimpsest Operarara〉 퍼포먼스 안양예술공원 2006
4. 기호를 해체하고, 현실과 가상을 뒤섞으며, 대중매체를 원용해 대중문화를 비판하는 홍성민의 방법론은 현실을 다르게/제대로 보기 위한 것이다. 《이야기(異夜記)》(대안공간루프, 2004)는 단채널 비디오에 머물던 홍성민이 적극적으로 스크린 속 공간과 스크린 밖 세계를 넘나들며 현실과 허구의 혼종을 창출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 전시다. 2003년 1년간 오산의 전원주택에 머무르면서 관찰한 한국의 통속적 기호들(신도시의 간판, 지자체 캐릭터, 골프장, 모텔 등)은 홍성민이 쓰는 ‘다른 밤들의 이야기’로 직조되어 기묘한 초현실적 사실주의를 형성한다. 일례로 영화 〈피고인〉의 재판 장면을 차용한〈기억의 지속〉(2004)은 이미지와 내레이션을 분리해 종잡을 수 없는 하이퍼텍스트 코믹극을 만든다. 판피린 걸과 우루사 곰을 소재로 단군신화, 토끼와 거북이, 애국가, 살바도르 달리의 동명의 그림,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뒤섞은 비디오 옆에는 영상에서 묘사된 것처럼 빨갛고 하얀 튜브를 목에 감은 곰을 탄 땡땡이 원피스의 소녀가 있다(〈곰 위의 소녀〉(2004)). 스크린 속 이야기와 스크린 밖 오브제를 번갈아 보던 관객은 “곰이 꾼 꿈인지 당신이 꾼 꿈인지”를 추궁 당하는 주인공처럼 사실과 허구가 무엇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한국인 어린이들이 미국의 스윙 재즈를 부르고 중동 의상을 입고 아라비안나이트를 노래하는 기이한 풍경은 현실이지만 허구 같고(〈West/Middle/East〉(2004)), 노래하고 춤추는 녹차 요정과 느타리 요정, 옥천군청 송알이는 허구지만 엄연히 실존한다(〈7 캐릭터〉(2004)). 이후 홍성민은 실험극을 통해 허구와 현실의 교차에 박차를 가한다. 같은 해 열린 멀티미디어 실험극〈컬트로보틱스〉(정미소, 2004)17에서 홍성민은 현존하는 퍼포머의 육체와 무대 위 소품을 영상과 병치해 혼성되는 시공간의 범위를 확장하고 “공간에서 역동적인 표현의 가능성”을18 강화한다. 이어지는 〈Total Theater Alice〉(쌈지길, 2005), 〈Palimpsest Operarara〉(안양예술공원, 2006)에서 총체극 실험은 기호의 왜곡, 파편성, 우연성, 비합리성, 멀티미디어, 하이퍼텍스트 같은 홍성민 작업의 속성을 증폭시켜 장르의 해체와 통합으로 나아간다. 외견상 변절로 보일 수 있는 총체극 실험은 “연극의 형태들이 현실에 대한 이념들과 유기적인 관계”19를 맺기 위해 총체적 스펙터클을 지향하는 아르토 정신의 구현으로 실상 복합매체로 늘 현실을 재매개해 이면의 진실을 드러내고 매체를 통해 현실과 허구를 교직하던 기존 작업과 무관하지 않다. 비디오, 퍼포먼스, TV 방송, 음악, 애니메이션, 멀티미디어 공연 등 홍성민이 소재로 활용하고 작업으로 만든 모든 장르는 시간예술로 귀결된다. 홍성민의 실험극은 그의 비디오가 그랬듯 이후 ‘스프링웨이브 페스티벌(2007)’, ‘페스티벌 봄(2008~2013)’ 같은 다원예술의 번성을 예고하는 선구적 역할을 한다. 그 과정은 한국현대미술이 나아간 궤적을 약간 앞지르면서도 늘 혼잡한 한국적 현실에 발을 딛고 있었다.
〈컬트 로보틱스〉(2004) 공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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