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애 : 기러기 GIROGI
2018. 3. 16 – 5. 13
아뜰리에 에르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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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앉은 새
하늘을 숭배했던 사람들에게 새는 저 높은 곳으로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가 없는 인간은 중력을 거슬러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를 동경했다. 인류학자들과 신화학자들은 인간 내면에는 ‘원초적으로’ 높은 곳을 향해 날아오르고 싶은 갈망과 비상의 행복이 내재해 있다고 지적한다. 비상을 꿈꾸어 온 인간에게 새(비상을 가능케 하는 날개를 가진 존재)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 존재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는 초월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퍼드덕거리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를 감지하며 어두운 전시장에 들어서면 강한 한줄기 빛이 벽면을 따라 천천히 회전한다. 강렬한 빛은 어두운 벽면 위로 새의 형상을 반복적으로 드러내고 감춘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새들의 힘찬 날갯짓 소리가 연상시키는 부산한 움직임과는 달리, 밝음과 어둠이 반복적으로 교차하는 전시장 벽면 위의 새들은 얼어붙은 듯 멈춰 있다. 미처 공간으로 튀어나오지 못하고 2차원 벽면에 가로막혀 움직이지 못하는 듯, 새들은 전시장 벽면 위로 희미하게 형상의 흔적을 드리운다. 움직이지 못하는 새, 날아오르지 못하는 새. 상상을 벗어나 현실로 내려앉은 새.
참새(Sparrow), 비둘기(Pigeon), 갈매기(Seagull), 닭(Chicken), 오리(Duck), 청둥오리(Mallard), 거위(Goose), 캐나다구스(Canada Goose), 백조(Swan). 전시장의 새들은 신화 속에 존재하는 새가 아니라 길들여진 새다.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삶을 영위해서 날고 있음에도 날개가 있음을 망각해버린 새다. 김민애의 새는 날아오르는 새가 아니라 내려앉은 새다. 전시장 벽면에 갇힌 듯 움직이지 않는, 길들여져 비행 감각을 잊은 새들은 높은 하늘과 가까운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한없이 낮은 지면으로 내려온 하찮고 비루한 신세로 전락한다. 그래서 세 채널의 음향이 무작위로 조합되어 어느 한 순간도 동일하게 들리지 않는 부산한 날갯짓은 전시장에서 새의 부동성과 한층 이질적으로 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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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전시장
1973년, 밀라노(Milan)의 토셀리 화랑(Toselli Gallery)에서 한번, 그 이듬해인 1974년에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의 클레어 코플리 화랑(Claire Copley Gallery)에서 다시 한번 관람객들은 텅 비어 있는 전시장을 마주했다. 무언가(정확하게는, 예술 작품)를 보기 위해 전시장을 방문한 관람객들에게 마이클 애셔(Michael Asher, 1943-2012)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텅 빈 전시장을 제시했다. 이 놀랍도록 아무것도 아닌 광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마이클 애셔(Michael Asher, 1943-2012)는 전시장의 벽과 천장을 덮고 있던 흰색 페인트를 모두 벗겨내 콘크리트 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화랑의 전시 공간과 사무 공간을 분리하고 있던 칸막이를 제거하고 벽의 깨진 흔적을 매끈하게 보수하여 서로 다르게 기능하던 두 공간을 균질한 하나의 공간으로 변형했다.
마이클 애셔의 텅 빈 전시장은 관람객들에게 그 어떤 ‘미술’(이라고 간주되는 사물/대상)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미술’을 둘러싼 가장 핵심적인 지점을 문제삼았다. 과연 ‘미술’이 무엇인가. 미술은 ‘미술임’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마이클 애셔는 ‘전시장’(gallery)을 대상화함으로써 이 근본적인 질문을 가시화했다. 여기에는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감상하는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는 전시장이 거꾸로 미술을 규정하는 틀로 둔갑하는 지점 즉, 미술을 전시하고 관람하는 공간이 전시장이 아니라, 전시장에서 전시하고 관람하는 것이 ‘미술’이 되어버리는 위상의 전복에 대한 질문이 전제되어 있다.
‘볼 것이 별로 없는’ 김민애의 전시장은 이러한 선례들에 대한 김민애식 화답이다. ‘미술’을 떠받치는 역사와 담론, 관습과 관행의 무게 속에서 미술은 여전히 스스로를 ‘미술’로 정의하고 ‘미술’임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알리바이를 만들어낸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것처럼 보이는) 과정에서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들은 억압되거나 감춰지고 종종 과감히 삭제된다. ‘미술’에 대한 피로감, 혹은 불신으로부터 출발한 김민애의 전시는 자신이 경험한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사건과 그로부터 촉발된 불명확하고 모호한 감정을 ‘미술’로 ‘그럴싸하게’ 둔갑하는 일련의 과정을 시험한다.
전시장 벽면에 희미하게 드러나는 (가짜) 주인공들의 형상, 그 형상과 부딪치며 이질적인 환영을 덧입히는 음향, 벽면의 형상을 하얗게 지우는 강렬한 조명이 구현해내는 ‘전시’라는 결과물은 미술 안팎에서 미술을 규정해온, 혹은 미술에 부여해온 ‘그럴싸한’ 모습들을 보다 날 것으로 드러낸다. 전시장 안에서 모든 것을 보고 그래서 모든 것을 알아야 하지만, 지나치게 밝은 빛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얗게 지워버린다. 전시의 주인공(제목)인 ‘기러기’는 전시장에 존재하지조차 않는다. 많은 새들의 날갯짓 소리는 들리지만 참새도, 비둘기도, 갈매기도, 닭도, 오리도, 청둥오리도, 거위도, 캐나다구스도, 백조도 존재하지 않는다. 김민애의 전시장은 텅 비어 있다.
하지만, 실제 전시장에서 김민애의 작업만큼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업도 흔하지 않다. 전시 내용을 담아내는 물리적인 틀인 ‘전시장’의 구조를 의태하는 김민애의 작업은 단순히 전시장에 놓이는 오브제의 규모를 벗어나 종종 건축적 규모로 확대되고, 심지어 형태마저도 너무나 구체적이기에 그 (물리적) 존재는 결코 간과될 수 없다. 그러나, 너무나 명확하고 너무나 구체적인 그 정체성은 오히려 ‘전시’라는 맥락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많은 변명을 만들어야만 하는 딜레마를 초래한다. 이것은, 지나치게 밝은 조명이 형상을 드러내기는 커녕 오히려 알아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눈앞에서 하얗게 지워버리는 이번 전시 기러기의 역설로 연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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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 아뜰리에 에르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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