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규칙들,
그리고 예술에 점수 매기기

조형빈 무용비평

Special Feature

규칙과 예술 

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스포츠에서 공정성을 담보하는 것은 언제나 ‘규칙’이다. 올림픽이 내세우는 헌장은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힘차게”다. 여러 사람이 모여 각자의 육체가 가진 기량을 개인 혹은 단체의 단위로 겨루기 위해서는 모두가 비슷한 (결코 ‘동일한’이 될 수 없는) 선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에는 아주 세밀한 수준의 규칙들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매우 견고하게 스포츠의 형상을 빚어내기 마련이다. 누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몸으로, 어떻게 던지는지/뛰는지/차는지 결정하는 일은, 곧 그 스포츠가 무엇을 추구하고 인간의 어떤 역량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규칙은 스포츠에 있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안내해 주는 표지판이자, 스포츠 자체의 형상을 결정하는 테두리다.

그런데 이처럼 경기의 구조, 나아가 해당 경기가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까지 결정하는 경기의 규칙들은 우리가 흔히 규칙과 규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달리 매우 유동적이다. 경기의 형태를 단단하게 고정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규칙들이지만, 실상 인간의 몸은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규칙이 정한 경기의 한계들을 뛰어넘고자 하는 선수들의 노력과 욕망, 다양한 시도들은 언제나 그 규칙들을 꿰뚫기 때문이다. 공정성의 측면에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라 판단되는 새로운 ‘시도’들은 규정집에 추가될 새로운 항목들을 부르고 또 엄격하게 제한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 시도들이 제안한 경기의 방식이 오히려 그 경기 자체를 뒤집기도 한다. 형상을 고정하기 위해 만든 규칙을 회피하거나 뛰어넘음으로써, 새로운 형상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몸을 다루는 예술인 무용의 변화 과정은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그 안에 어떤 몸의 규범들이 변화를 추동해 왔는지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참조점이 된다. 단순히 몸을 소재로 한다는 공통점을 갖는 것뿐만 아니라, 무용과 스포츠는 어떤 영역에서는 일정한 ‘규칙’ 아래에서 서로 ‘경쟁’하고 자원을 ‘획득’하는 공통적인 성질을 갖고 있기도 하다. 몸을 쓰기 때문에 세계가 요구하는 몸의 형상을 그 안에 반영한다는 공통점과 더불어, 일종의 경쟁 체계 아래에서 더 우수한 것을 선발하기 위해 개인의 물리적 기량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이미 두 영역은 교차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최근에는 무용의 장르 중 하나였던 ‘브레이킹’이 2024년 파리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무용과 스포츠가 각각 사회 안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고 그것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들이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는 예술로서의 브레이킹이 스포츠의 규범 안에 포함되면서 그 몸에 작용하는 규칙과 평가의 방식들이 어떻게, 왜 작동하는지, 예술에 있어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시몬 포르티 〈Slant Board〉(1961)
출처 : 아트뉴스 홈페이지 (https://www.artnews.com/art-news/news/objects-and-bodies-at-rest-and-in-motion-at-moderna-museemalmo-sweden-5644/)

몸의 규칙들

무용이라는 예술 장르에 있어 역사의 커다란 변환점마다 언제나 몸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의 전환이 있었다. 모던 댄스라고 부르는 현대무용의 기원이 된 1890년대 이전까지, 예술의 한 장르로서 인식되는 무용의 대명사는 발레였다. 발레는 현대에도 그렇듯 다섯 가지 발의 포지션을 기반으로, 움직임의 거의 모든 부분을 패턴화하고 분절적인 동작으로 나누어 용어만으로도 춤을 구성할 수 있게끔 구조화된 무용의 장르다. 궁정에서 시작되어 소수에 의해 향유되던 발레가 이러한 특성을 가지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 춤이 하나의 예술 장르로서 인정받고 기능하기 위해 ‘안무’의 개념을 도입했던 것과 궤를 같이한다. 춤은 언제나 즉흥적으로 (그 시간 그 장소에 생성되는 퍼포먼스로서) 추어지고 그것이 시공간을 점유하는 바로 그 순간 휘발되어 버리는데, 이처럼 춤이 실체가 없는 감정과 정념의 발산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의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붙잡아 기록하는 방식이 필요했다. 그러한 측면에서 안무는 감정과 표현의 단순한 발흥이었던 춤을 미적 감각과 사상을 실을 수 있는 ‘무용 예술’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근대적 기획으로서 탄생했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발레는 규칙에 의한, 규칙을 위한, 규칙의 춤이 되었다.

1900년대 초반 등장한 현대무용은 이러한 발레의 경향으로부터 저항하며 생겨났다. 발레에 연극적 속성이 더해졌던 초기 발레 이래로 발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극의 내러티브를 표현하는 무용수의 표현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충분한 기량이었는데, 모던 댄스는 발레가 추구하던 몸의 가동성, 가벼움을 표현할 수 있는 물리적 역량, 감정을 풍부하게 실을 수 있는 표현력과 같은 ‘규칙’들을 위반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체화했다. 특히 1950년대 나타났던 미국 뉴욕 저드슨 처치(Judson Memorial Church)의 예술가들은 그때까지 통용되던 춤의 규칙들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그때까지 자연이나 감정, 삶을 ‘표현’하는 것에 그쳤던 몸을 도구에서 주제로 끌어올려, 몸 그 자체에 담겨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저드슨 처치의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실험을 저드슨 처치의 예배당에 공연으로 올리면서, 그때까지 무용 공연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전형들 —무대 위에서 공연될 것, 숙련된 무용수에 의해 구성될 것, 자연스러운 몸의 감각들을 표현할 것 —을 깨고자 했다. 게임의 룰을 설정하고 그것으로 작품을 만들었던 시몬 포르티(Simone Forti)는 작품을 어떤 이야기로 간주하기보다, 규칙을 정하고 그것을 지켜냈을 때 몸이 보여주는 개별적인 국면들을 하나의 공연으로 이끌고자 한 안무가였다. 포르티의 작업〈Slant Board〉(1961)는 말 그대로 45도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판(Slant Board)을 만들고, 꼭대기에 대여섯 가닥의 밧줄을 늘어뜨려 서너 명의 무용수들이 번갈아 가며 밧줄을 붙들고 있음으로써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버티는 작업이었다. 경사판의 기울기가 만들어 내는 비탈의 중력을 버텨내면서, 또 서로의 몸을 부대끼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기에 무용수들은 어쩔 수 없이 어떤 ‘자세들’을 취하게 된다. 여기서 이야기의 주제는 중력도, 몸의 자연스러운 감정도 아닌, 부딪히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움직이게 되는 필연적인 몸의 행태들이 되었다. 포르티는 간단한 규칙 몇 가지를 섞음으로써 몸을 상황 안에 밀어 넣었고, 몸이 어떤 표현을 위한 대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몸 그 자체가 일으키는 상황적 반응을 무대(여기에서는 아주 작은 경사판)의 이야기로 삼은 것이다.

포르티가 규칙을 작동시키는 규칙으로써 기존의 규칙들을 넘어선 것처럼, 함께 저드슨 처치에서 활동했던 이본 레이너(Yvonne Rainer)는 무대 위에 훈련된 몸과 훈련된 움직임이 올라가야 한다는 규칙에 제동을 걸었다. 레이너는 아주 일상적인 동작들도 공연의 맥락 안에 담을 수 있다고 보았고, 그렇게 했을 때 몸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맥락을 제대로 짚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Trio A〉(1978)에서 레이너는 일정한 영역 안에서 천천히 걷거나, 앉거나, 팔을 휘두르는 등 전혀 ‘무용적이지 않은’ 움직임들을 수행함으로써 예술 안에 일상성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무용수’의 ‘예술적’인 움직임들만이 무용으로서 인정받던 당대에, 주류로부터 밀려난 안무가들은 오히려 ‘예술이 아닌 것’에서 예술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규칙이 제한하는 테두리 안에서 예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규칙의 바깥에서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이런 관점을 공유하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저드슨 처치에 모여 실험을 이어갔고, 이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사회적 몸의 규칙들은 무용 안에서 통용되는 몸을 바꾸었다. 근대적 기획으로서의 안무 개념이 예술을 옹립하고 일상적 몸들을 끊임없이 몰아내던 와중에, 이들은 오히려 몸 그 자체에 집중하고 몸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실험함으로써 현대무용의 물줄기를 바꾼 것이다. 1950년대에 무용을 넘어서서 예술 전반에 불어닥쳤던 몸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과 더불어 이들은 현대무용의 규칙을 움직였고, 이때 만들어진 현대무용의 유산들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규칙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고, 예술은 이 규칙을 통해 계속해서 다시 쌓아 올려질 수 있었다.

이본 레이너 〈Trio A〉(1978)
출처 : 시애틀 뮤지엄 홈페이지 (https://samblog.seattleartmuseum.org/2018/04/object-of-the-week-trio-a/)

예술에 점수 매기기

이렇듯 몸에 대한 사회적인 규범은 예술 안에서 통용되는 언어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왔다. 몸을 매개로 하는 예술인 무용은, 그렇기 때문에 몸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을 끊임없이 반영하고 몸에 세계를 담아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이는 몸의 기량을 측정하는 스포츠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흥미로운 것은, 경쟁, 기록, 잠재력 향상을 목표로 삼고 있는 스포츠에서 ‘규칙’을 매개로 어떤 특정한 몸에 ‘점수를 매기는’ 과정이 반드시 동반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포츠의 어떤 장르에서는 ‘몸의 예술성’을 평가하는 항목을 포함함으로써 어떤 몸이 더 ‘탁월한지’ 평가하기도 한다. 여기서 몸은 단순히 어떤 물리적인 성과들(시간, 높이, 거리)에 의해 평가받는 것과는 조금 다른 기준에 의해 ‘점수 매겨’지고, 사회적 규범을 담고 있는 몸을 측정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예술과 몸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이 출현하는 것을 목도한다.

1904년 런던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래 동계올림픽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며 꾸준히 사랑받아온 스포츠인 피겨 스케이팅은, 스포츠라는 틀 안에 있으면서도 그 평가 방식에 일종의 ‘예술성’을 포함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피겨 스케이팅의 채점은 선수의 기술에 대해 기본적인 평가를 내리는 기술점(Technical Element Score, TES)과 흔히 ‘예술 점수’라 불리는 구성점(Program Component Score, PCS)의 합산에 감점 요소(Deduction)를 더해 이루어진다. 구성점의 평가는 스케이팅 기술(Skating Skills), 구성(Composition, 안무 및 연결 동작 포함), 표현(Presentation, 연기 수행 및 음악 해석 포함)의 세 가지 요소로 나누어 이루어지고, 그 요소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구성점은 선수가 경기 동안 펼쳐 보인 스케이팅에 대해 심판이 종합적, 주관적으로 평가하게끔 되어있다. 따라서 여기에는 심판진이 피겨 스케이팅을 수행하고 있는 선수의 퍼포먼스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과연 그 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점수 산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나 인종과 관련된 몇몇 사례에서 보듯이 피겨 스케이팅이 어떤 ‘특정한 몸’의 형상을 이상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비판은, 스포츠가 단순히 몸의 기량이나 잠재력을 판단하는 것을 넘어서서 몸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을 평가의 척도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올해 2024 파리올림픽에서 새롭게 추가된 스포츠 종목인 ‘브레이킹’은 예술과 몸에 대한 더 적극적인 질문들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브레이킹은 경기 안에서 선수가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특정한 기술들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춤이 이루어지고, 또 기술들이 개인의 역량이나 개성에 따라 끊임없이 변용/변주된다는 점에서 개별 기술에 대한 단일한 기준을 세우기 어렵다는 난점도 가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제댄스스포츠연맹(World Dance Sport Federation)이 채택한 올림픽 종목 브레이킹의 심사체계인 트리비움 밸류 시스템(Trivium Value System)은 여섯 가지의 세부 지표로 이루어져있다. 신체적 특성에는 기술(Technique)과 다양성(Variety)이, 해석적 특성에는 표현력(Performativity)과 음악성(Musicality)이, 예술적 특성에는 창의성(Creativity)과 개성(Personality)이 지표로서 담겨있다. 심사위원에 의한 주관적 평가가 문제를 불러일으킨 사례는 올림픽의 역사 안에서 여러 차례 찾아볼 수 있으나, 이런 문제의 가능성들을 차치하고 채점 기준만을 보았을 때에도 여러 가지 흥미로운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다양성(Variety)은 어떤 동작들이 어떤 속도로(혹은 어떤 느낌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어질 때에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창의성(Creativity)의 범주는 어디에서 어디까지이며, 척도를 넘어서는 정도의 창의성은 감점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을까? 브레이킹에 있어서 표현력(Performativity)은 신체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을 의미할까? 이 모든 질문은 결국 ‘선수 개개인이 가진 예술적 역량을 어떻게 수치화할 것인가?’라는 커다란 질문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정말 예술을 ‘줄 세울 수’ 있는가?

규칙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또 변형된다. 하나의 스포츠 종목 안에서도 규정집이 끊임없이 개정되기 때문에, 전통과 역사가 오랜 스포츠라 할지라도 100년 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규칙들의 변화는 시대의 요구, 몸의 위상, 사회적 배경과 그 가치에 따라 이루어져 왔다. 때로는 더 대중적으로 어필하기 위해(올림픽에서 관중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규칙을 변경하는 경우 등), 혹은 몸에 대해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들을 반영하기 위해(선수의 성별을 어떤 기준에 의해 판단하는지 새로운 규정을 만드는 경우 등) 규칙을 변경한다. 규칙은 멈춰 서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그 모습을 바꾸는 역사적 체계다. 역사는 몸을 구성하는 것처럼 규칙을 구성하고, 규칙은 역으로 몸을 틀 짓는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규칙과 그것의 개정이 드러내는 것들은 지금 우리의 예술, 스포츠, 몸이 처해있는 현안들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문제들이 곧 규칙의 문제들이다. 규칙은 그 자체로 몸을 규정하지만, 몸은 결코 거기에 순응하지 않는다. 규칙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단 하나의 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은 찌그러지고, 늘어나고, 확장하고, 풀어진다. 이 다양한 몸들을 규칙 안에 넣을 때 거기에는 어떤 뻑뻑함이 발생하고, 여기서 발생하는 불편함은 또 다른 규칙을 구성한다. 우리의 흘러넘치는 몸이 세계의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떤 몸이 더 ‘적합한지’, 혹은 어떤 몸이 더 ‘예술적인지’를 판단하는 일은 예술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거칠게 축소시키는 것 같지만, 실상은 몸이 담고 있는 세계의 모습을 열어젖히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세계가 우리의 몸을 통해 재구성되는 과정, 규칙이 세워지고 다시 무너져 내리는 이 순간들을 주시하고 이해해야만, 우리는 규칙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균열의 힌트들을 놓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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