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Curators’ Voice & Critique
《재, 꽃잎, 풀림의 의례》
《텐 바이 팀서화_사이시공 생태계》
《고정수의 부드러운 조각 놀이터》
Curators’ Voice & Critique
《재, 꽃잎, 풀림의 의례》
민주화운동기념관 M2(구 남영동대공분실) 8.20~9.28
김현진 전시기획
2층 자료실 내에 군집화하여 설치된 지화
《재, 꽃잎, 풀림의 의례》 민주화운동기념관
M2 전시 전경 2025 사진: 홍철기
돌아보면 돌로 변한다는 두려움 속에 저승에서 아내 에우리디케의 손을 잡고 어두운 지하 계단을 오르던 오르페우스의 신화처럼, 자신의 작업을 스스로 말한다는 것은 자꾸 돌아볼수록 죽어버리는 느낌을 갖게 하기 마련이다. 이런 ‘돌처럼 굳어지는 돌아봄’은 작업을 설명하는 말의 한계, 그리고 자신의 작업에 대한 애착과 불안과 얽혀있다. 구구절절한 설명은 결국 눈앞에서 경험하는 시간의 풍요로움과 구체성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의적 차원의 되돌아봄은 다르다.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무수한 슬픔의 겹을 서서히 헤치는 것, 돌처럼 굳은 시간을 풀어 하늘로 떠나보내는 시간이다. 이 전시는 바로 그 풀림을 향한 제의적 행위였다.《재, 꽃잎, 풀림의 의례》라는 제목 속 ‘풀림’은 곧 ‘해원(解冤)’을 뜻한다. 해원은 한국 민속과 종교에서 원한을 정화하는 의미로 쓰이지만, 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존재의 균열을 메우려는 소망, 부정의의 상태를 인지하고 이에 응답하려는 행위이기도 하다.
전시는 다여 스님의 지화 작업과의 조우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어느 날 이솔 뉴욕 스토니브룩대 교수를 따라 조계사의 작은 방에서 열린 다여 스님의 지화 전시를 보게 되었고, 짧은 땅설법 연행도 목격했다. 땅설법은 민중의 언어와 노래, 지역의 문화를 흡수하여 그림을 이용한 강의, 노래, 연행의 방식으로 불교를 전하던 고대의 포교 방식으로, 오늘날 거의 사라졌지만 삼척 안정사에서 전승되고 있었다. 다여 스님은 절 주변을 관통하는 도로 확장 철회를 요구하고 저항하는 1인 시위 등을 하면서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기도 했다. 특히, 1,000년 이상 사찰에서 만들어오던 수많은 지화가 현재 소멸 단계에 있는 가운데, 100여 종의 지화를 불교 전통 그대로 전수하고 있는 독보적인 장인이자 살아있는 아카이브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불교에 대한 기본적인 친밀감은 있었지만 깊은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니었기에 내가 이끌린 것은 당시 본 팔길상공양, 오지여래화, 불과화, 영락화 등의 지화가 조각적 조형으로 볼 때도 흥미롭다는 점에서였다. 이후 안정사에서 큰 의례와 연행을 지낼 때마다 방문하여 땅설법의 다양한 연행과 기물들을 보면서 전시와 공연이 연계된 동시대 미술 프로젝트를 구상해 보던 중이었다. 그러다 올 초 민주화운동기념관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이 공간의 상흔 치유에 가장 필요하고 적합한 것은 미술작품을 초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바로 종이꽃을 통한 의례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에 중앙정보부를 창설했고 박정희의 측근이던 김종필이 요청하여 건축가 김수근이 디자인한 건물로, 1970년대에는 간첩 조사 용도로, 1980년대에는 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는 정치인, 언론인, 학생, 일반인 등을 잡아와 조사하고 그 과정에서 고문, 폭행, 사건 조작이 벌어진 공간이다. 무엇보다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으로 알려진 국가 폭력의 장소이다. 한국 근현대 모더니즘의 대부 같은 존재인 김수근이 디자인했다는 점도 파장이 크지만, 그 내부 건물의 면면이 공포와 고통을 위한 장치로 고안되어 있다는 점 또한 매우 무거운 진실이다.
이 전시는 우선 다여 스님이 만든 100점 가까이의 지화들의 의미를 각각 살핀 후, 각 층의 서사나 상설 전시와 경쟁하기보다는 조응하도록 배치하였다. 꽃을 바치는 헌화는 가장 단순하지만 고통 속에 있는 자, 죽은 자들을 위한 고전적인 위로의 행위이다. 한편으로는 다여 스님의 장인적 수행 속에 만들어진 그 많은 지화들이 고통받는 중생을 위로하는 꽃으로 그 역할을 다하며 세상과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의 1층부터 5층까지 기념관에서, 나는 각 층의 내러티브를 기반으로 지화들을 선별하고 배치하기도 하고, 2층과 3층의 일부 공간들은 색과 길이를 통해 군집을 구성하기도 했다. 2층 공간에는 영락화, 우담바라, 보요화, 산개화, 약사여래칠불공덕화 등 신성한 의미와 형태를 가진 총 12점의
지화를 민주화 과정에서 절대적인 일시적 공동체가 되었던 시간들을 형상화하듯 군집으로 놓았다. 3층 반장실은 가장 고심한 공간이다. 과거 반장실은 가해자인 고문경찰과 조사자들이 외부 풍경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쉬던 공간이라 처음에 이 공간에 꽃을 놓는 것이 부적절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지화의 의미를 살피는 과정에서 청정심, 지혜의 회복, 악을 벌하고 선을 장려하는 의미 등의 지화들을 발견하여 이들을 배치하였고 외부의 경치를 가리는 번가사를 창에 배너처럼 연결하여 자기반성의 의미를 부여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4층 87년 민주화운동을 기록하고 기리는 공간에는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사상을 담고 있는 법신화, 불교적으로 우주적 질서를 뜻하는 만다라화, 신성한 대만다라화 등을 놓았는데, 전국적 봉기로 가장 치열했던 87년의 정신을 기념하고자 했다. 총 15칸의 수감실이 있는 5층(조사실)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가장 무거운 공간으로 특히 박종철 열사의 방이 있는 곳이다. 한편에 설치한 팔길상공양은 전체 층을 아우르며, 각 방에는 영혼을 인도하는 지화들, 그리고 점차 궁극적인 해원과 평온한 열반의 의미를 향하며 다양한 꽃들을 설치하였다.
우리 사회는 외면적으로 빠르게 성취한 발전 이면에 근현대사의 격동이 만든 상흔들이 중첩되어 있다. 이는 해결되지 않은 채 작게는 한 가족사에 고통으로 순환하고, 개인의 경험은 다시 내 이웃과 주변으로, 그리고 결국 공동체로, 위 세대로부터 아래로 흐르고 순환한다. 부당한 죽음들을 인지하고 위로하는 장면은 그렇기에 악순환을 끊고 공동체의 선순환을 위한 가능성을 향하는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한편, 고통이나 폭력을 전시하는 것은 고통과 폭력을 노출하고 경험케 하는 일이기도 하다. 메모리얼 공간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 기억이 폭력의 순환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이런 생각들 때문에 마침 연이 닿은 다여 스님의 아름다운 지화로 일시적이나마 어떤 ‘풀림의 의례’로서의 전시를 이 공간에 필요한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난 2~3년간 짧지 않은 휴지기에 있었다. 이후 현장에 돌아와 준비하는 첫 전시가 나에게도 낯선 형식이고 미술기관이 아닌 곳에서 스님과의 전시라는, 기존의 미술 경계를 벗어난 작업이라는 점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주 자문해야 했다. 오래 익힌 미술 안의 익숙함은 잘 작동하지 않았고 나아가 예상치 못한 여러 위기로 전시 취소까지 고민하기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끝내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전시서문에 “‘풀림의 의례’는 바로 우리의 기억을 감각적으로 정위치시키는 행위”라고 적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이 전시의 여정 전체가 결국 내게도 그러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르페우스는 죽음의 지하 공간에서 계속 앞만 보고 나아가야 자신의 아내를 살릴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결국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충분한 애도를 통해 죽은 이들을 제대로 놓아주고, 우리의 시간을 정위치시키는 일도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어떤 돌아봄이 필요할까. 어떤 돌아봄도 완벽하지 않고, 현실 속의 돌아봄이 완벽한 화해를 이루기는 어렵다. 다만 악순환을 넘어서는 작은 풀림의 순간을 함께 목도하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전시를 통해 그려본 하나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텐 바이 팀서화_사이시공 생태계》
용산 KCS 부지 내 K1, K5+K6, K3, K9 8.22~10.30
팀서화 큐레토리얼 프로덕션

김휘아〈What If Two Eyes Don’t Work Together?〉
랩탑, 웹캠, 모니터, 파이프, 컴퓨터 비젼 시스템 가변 크기 2021/2025
《텐 바이 팀서화_사이시공 생태계》
K3 전시 전경 2025
세계적인 건축가가 설계한 대기업 본사 사옥, 웅장하게 솟은 상업 지구와 주상복합 빌딩, 이제는 글로벌 트렌드를 이끄는 서울 최상위 부촌, 용산의 발전과 변화는 눈부시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서울시가 제출한 청사진에 의하면 바로 이 용산이 서울의 미래라고 한다. 물론 ‘미래’라는 거창한 타이틀의 근거가 이미 빛나고 있는 용산의 스카이라인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금은 텅 비어 있지만 훗날 무엇인가를 지어 올릴 수 있는 대규모 (재)개발 구역이 서울의 지리적 중심인 이곳에 존재하는 데 근거한다. 분절되지 않은 과거와 미래의 청사진이 중첩되는 그 비움의 공간이야말로 상상, 기대, 꿈, 욕망 등으로 채울 수 있는 우리의 미래인 것이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 미술 생태계의 생리와도 비슷하다. 제도권 미술기관과 미술시장의 화려하고 번쩍이는 불빛들 사이에는 틈 생태계가 존재한다. 언뜻 가라앉은 듯 보이지만 그것은 주변의 빛이 너무 밝아서일 뿐,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움의 열망이 꿈틀대는 젊은 미술인들의 치열한 현장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과거를 자양분 삼아 미래를 향해 움직이는 공간이며, 분명 존재하지만 무명(無名)으로서 부재한, 그래서 비움의 공간이다. 그 비워진 틈이야말로 상상, 기대, 꿈, 욕망으로 채울 수 있는 우리 미술 생태계의 미래인 것이다.

김민훈 〈신부〉(사진 앞쪽)
생활 폐기물 위에 철망 위에 시멘트 위에 숯으로 염색한 밧줄 235×45×45cm 2023
《텐 바이 팀서화_사이시공 생태계》 K5+6 공간 설치 전경 2025
전시 《텐 바이 팀서화_사이시공 생태계》는 바로 이 두 틈의 생태계를 은유적으로 연결하고자 한다. 도시의 지정학과 자본의 역학 사이에서 자라난 도시의 틈 생태계, 그리고 제도권 미술기관과 미술시장 사이에서 존재하는 젊은 예술인들의 틈 생태계. 기록되지 않은 사용 이력과 끊임없이 갱신 중인 계획들이 한데 겹치며 ‘미분류의 시공’을 만들어내는 이 두 생태계는 서로 놀랍도록 유사하다. 다시 말해, 이번 전시를 위해 탄생한 조어 ‘사이시공(In-between space time)’은, 시간·공간·자본의 틈 속에서 변이적으로 형성된 문화지형과 도시지형의 틈 시공간을 의미한다.
이번 전시는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가 후원하는 차세대 신진작가 프로모션 사업이 선정한 프로젝트이다. 40세 이하의 주목할 만한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기획된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는 강건, 김민훈, 김휘아, 방소윤, 배재민, 연경석, 이승희, 장시재, 조이, 조이솝이다. 텐(10) 바이 팀서화라는 제목처럼 고심 끝에 선정한 열 명의 차세대 예술가. 이들은 주로 관계와 경계의 인식된 기준을 묻는다. 사회적 경계와 혼종의 사회심리학적 기준을, 균형과 위계의 관계와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을, 체화된 서사와 거절된 내러티브 사이의 기준을, 그리고 정동과 물질의 역학적 관계와 인간 존재의 존재론적 기준 등을 묻는다. 그렇게 물질·관념·신화·젠더·사회적 인식의 좌표를 의도적으로 교란하며, 메가시티의 효율성을 떠받치는 우리의 사고 구조에 작은 균열을 열망한다. 이 균열 속에 어쩌면 또 다른 ‘사이시공’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지도 모르겠다.
이번 전시는 용산 재개발 구역 내 위치한 KCS(Kumsung Cultural Space)가 보유한 네 채의 건물과 카페 ‘흙’, 그리고 외부의 마당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구역 전체를 하나의 전시장으로 구성했다. 특히 네 곳의 메인 전시 공간은 재개발 구역 지정 이후 오랜 기간 방치되어 원래의 용도와 사용 이력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비가 오면 건물 내부에서는 한강 물이 들어차고, 시커멓게 불탄 천장과 시멘트가 부서져 툭툭 떨어지는 벽들이 무너지기 직전의 위용을 자랑했다. 우리는 전시를 위해 이 공간들을 다시 설계하고 대대적인 개보수를 진행해 미술 생태계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그동안 끊임없이 장소를 이동하며 전시를 개최하는 일종의 노마딕 기획 프로덕션으로서, 우리는 ‘공간과 분리된 문화예술은 없다’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지속해서 검증하는 방식으로 활동해 왔다. 여기서 말하는 공간이란 역사적 맥락 속 전시 공간이 위치한 지역의 지정학적 콘텍스트를 의미함과 동시에, 실제 관람 경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전시장의 건축 양식과 공간 구조를 뜻한다. 쓰러져가는 재개발 구역의 허름한 건물 내부에서 마주한 미술 작품과 층고 5m의 순백색 화이트큐브에서 접한 미술 작품은 설령 같은 작품일지라도 그 내재 텍스트는 상이하다. 이 해석의 다름 역시 작품 자체의 힘일 수도 있겠지만, 공간 구조가 우리 사고의 흐름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의 증명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를 공간이 이끄는 ‘감상 안내 지침서’라고 부른다. 만약 전시를 기획하기에 앞서 이 감상 안내 지침서부터 손을 댈 수 있다면, 전시의 텍스트는 더욱 넓어지거나 혹은 그 반대로 좁고 깊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공간을 해체하고, 재조합해 리모델링하고, 때로는 오직 전시만을 위해 건물과 구조물을 새로 건축한다. 폐점한 해수목욕탕, 술집으로 쓰였던 상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한옥, 비어 있는 교회 건물, 스러진 호텔, 폐가로 버려진 마을 노인회관, 역사성을 품은 공공 대지 위에 건축한 파빌리온 건축물 등, 공간이 품은 장소성과 지각에 개입하는 공간 요소들을 재구성해 우리는 우리의 가설을 검증 중이다. 미술 전시 하나 개최하자고 건축부터 손대는 팀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래서 우리는 기획자라는 정체성보다는 프로듀서라는 설명을 선호한다.

《텐 바이 팀서화_사이시공 생태계》
K9 카페 흙 마당 전시 전경 2025
동시대 미술의 다양성과 확장성은 제도권 미술기관의 권위와 경직된 시장 논리로만 지탱할 수 없다.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는 수많은 실험과 가능성들이 바로 이 둘 사이의 ‘사이시공’에서 태어나고 또 증식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사이시공’ 생태계의 활성화가 동시대 미술의 지속 가능성과 직결되는 과제임을 알리는 데 미력하지만 힘을 보태고자 한다. 제도권 미술기관과 미술시장이 분화되어 있지 않다는 건 프리즈 서울이 주도하는 미술주간이 증명하고 있다. 아무리 가볍더라도 관심은 무관심보다 나은 법이다. 지금 한국 미술계에 번지고 있는 변화의 지속성은 끊임없는 실패와 이름 없음의 설움을 먹고 성장하는 축축하고 끈적이는 생태계만이 담보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전시를 통해 알리고 싶은 핵심은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고정수의 부드러운 조각 놀이터》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 7.29~10.31
김소정 기자

고정수〈한마음 한가족〉 공기조형물 350×339.1×250.7cm 2025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 제작지원
《고정수의 부드러운 조각 놀이터》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 전시 전경 2025
人, 같이 기울고 서로 기대는
경기도 양주 석현천을 따라 장흥계곡으로 올라가는 길목,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 입구에서 반달가슴곰 가족이 가을볕을 맞고 있다. 높이가 3.5m에 달하는 커다란 곰 두 마리가 우뚝 서 있고 어린 곰 세 마리가 그 앞에서 앉거나 매달리며 옹기종기 모인 모습이다. 한평생 청동과 돌로 여성의 풍만한 신체를 표현하여 한국 조각사에서 여체 조각의 개척자로 알려진 원로 조각가 고정수가 가족 간의 애정을 형상화한 공기(空氣) 조형물 작업 〈한마음 한가족〉(2025)이다. 작가는 작품이 설치된 미술관 정문 앞 야외 공간을 ‘조각 놀이터’라고 이름 지었는데, 각각 원색에 가까운 강렬한 색상과 풍선처럼 부푼 몸을 가진 곰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몸짓을 보여주는 덕분에 미술관을 찾는 방문객들은 유희적인 경험을 맛보며 이 푹신한 조각을 놀이처럼 즐기게 된다. 본 작품은 실제로 시각장애인, 어린이 등을 포함한 관객층이 만지면서 감상할 수 있는 촉각 조형물로 전시되고 있다.

고정수〈한마음 한가족〉공기조형물 350×339.1×250.7cm 2025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 제작지원
《고정수의 부드러운 조각 놀이터》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 전시 전경 2025
고정수에게 구상조각은 이처럼 대상의 형상뿐 아니라 인간의 내적 정서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장르다. 그는 1976년에 구상조각회를 창립하며 다름 아닌 ‘인간성’을 형상화한다는 취지를 내세웠는데, 이후 한 토크 프로그램에서 이를 술회하며 구상조각은 “사실조각과 명백히 다른” 영역의 표현임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단순히 비구상의 반대되는 개념임을 벗어나 인체에서 풍경으로 그 폭이 확장되는 최근의 현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 이와 같은 그의 예술관은 작품의 소재를 여체에서 곰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잘 나타난다. 50여 년간 가족과 모성애를 투영한 여성의 신체를 돌연 곰의 형상으로 바꾸면서 재료 역시 전통 재료인 돌이나 청동에서 바람을 불어넣어야만 형태를 갖출 수 있는 공기 조형물을 다루는 데까지 이르렀다. 작가 스스로 이를 “모험”이라 부르면서도 예술가의 자유로운 표현에 무게를 두어 자신의 새로운 방향을 고수한 것이다.

고정수〈자매-Ⅱ〉79×50×60cm 브론즈 90kg 1982
《앉거나 서거나 누워있는 2부》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제공: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
잘 알려진 대로, 그가 곰을 작업 주제로 삼게 된 직접적 계기는 2006년 세종시 베어트리파크의 조각 설치 전권을 위임받은 일이다. 당시 새끼 곰을 직접 데려다가 키우기도 하면서 모성애가 강하기로 유명한 이 동물의 속성을 자세히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곰과 여성은 의외로 여러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다. 먼저, 형태상 그간 여체를 과장될 정도로 풍만하게 묘사해 온 작가의 독자적인 표현 방식은 곰의 체구를 형상화하는 과정에서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고정수는 또한 여성 신체를 고집한 이유에 대해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하는 모성을 그 근본적인 아름다움으로 보기 때문이라 피력한 바 있는데, 유달리 모성적 본능이 강하고 동면기에도 오롯이 양육에만 집중하는 곰의 습성이 작가에게 남다른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곰이 삼칠일(21일)의 인내 끝에 여자로 변해 환웅과 결혼하고 한국인의 조상이 되었다는 단군신화 역시 곰의 특별한 양육 방식이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를 떠올리면 고정수의 이러한 ‘이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편, 민복진미술관에서는 《앉거나 서거나 누워있는 II : 1970-80년대 한국 구상조각가의 인체조각》제하의 기획전이 함께 진행 중이다. 고정수, 백현옥, 이정자, 황순례, 민복진이 빚어낸 다양한 인체의 변주가 전시장을 가득 채우며 인간의 존재와 관계 개념을 깊게 탐구한 조각가들의 고민과 애정을 발현한다. 고정수는〈좌상〉(1975)을 비롯해 〈김복진 부조〉(1995)와 〈두상〉(1988)을 통해 인간을 사유의 대상으로 묘사했다. 그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대표 연작 〈자매-Ⅱ〉(1982), 〈자매-Ⅸ〉(1981)는 인간관계의 첫 관문이자 경험인 가족에 대한 작가의 한평생에 걸친 성찰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본 단체전에 선보인 고정수의 작품들은 청동, 오석, 시멘트라는 무거운 재료를 통해 심도 있는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미술관 문밖에서 만날 수 있는 다섯 마리 반달가슴곰 가족이 전하는 가볍고 유쾌한 인상과 묘하게 대조되는 분위기다. 그러나 작가가 이미 여러 번 강조한바, 작품의 주제나 재료를 막론하고 그의 모든 작업은 가족애가 실현되는 인간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에 뿌리를 둔다. 고정수는 〈한마음 한가족〉은 다양한 배경과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 모인 오늘날의 사회를 표상한다고 말하며, 과열된 경쟁에 뒤처져 패배 의식으로 괴로워하는 사회 구성원에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형태로” 위로와 응원을 전달하고자 했다고 밝혔다.2 미술관이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주로 찾는 지역에 위치한다는 점 역시 그의 작품이 내포한 상생의 메시지가 더 넓은 관객층의 공감을 이끌도록 돕는다.
심오한 미술 이론이나 풍부한 평론이 가미된 진중하고 무게 있는 작업을 보여줄 수 있는 위치를 점한 원로작가가 이처럼 ‘현생’에 맞닿은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사실은 고정수의 작업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참된 의미를 찾는 여정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접근은 그의 작품이 예술적이고 심미적인 가치를 지닌 대상으로 존재하는 미술사의 영역을 넘어서 인간과 사회, 관계와 공감에 대한 탐구를 유도하는 실천적 토대에 자리 잡았음을 비추는 것이다.
1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은 2023년 10월 21일 ‘라운드 테이블: 1970~1980년대 한국 구상조각’ 제하의 프로그램을 개최했다. 김이순 미술사학자가 사회를 맡은 가운데 고정수, 백현옥, 이정자가 참여하여 모더니즘과 추상 경향이 미술계의 주류로 떠오른 시대에 구상조각의 의미과 전개 양상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작가들의 폭넓은 이야기가 전개됐다. 미술관에서 추후 제작 및 간행한 『민복진 연구 제2집』에는 본 프로그램의 녹취록이 정리되어 있다 pp.17~18 참조
2 전시를 개최하며 진행한 양주시립미술관과의 인터뷰 내용으로 보도자료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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