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Critique
《Walking Korea: Cut Pieces》
《김병호: 탐닉의 정원》
《김나영&그레고리 마스: 파라노이아 파라다이스》
《2024 부산모카 플랫폼_미안해요 데이브 유감이지만 난 그럴 수 없어요》
고원석·최윤정·장진택·황수진
《오지호와 인상주의 : 빛의 약동에서 색채로》
전남도립미술관 전시 전경 2024
Walking Korea: Cut Pieces
더 윌로 2024.12.8~1.12고원석 미술비평
김옥선 〈인터뷰〉(스틸)
다채널 비디오 2024 제공: 작가
경계인의 가위질, 시공간을 재구성하기
일반적인 전시와는 조금 다른 배경을 가진 이 전시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널리스트 폴 살로펙(Paul Salopek)이 11년 이상 해온 “Out of Eden Walk” 프로젝트의 연장으로 기획된 것이다. ‘느린 저널리즘의 실천’을 모토로 인류의 이주 역사를 걸음으로 기록하는 이 프로젝트는 2013년 에티오피아에서 시작, 중동과 인도, 중국을 거쳐 지난해 7월 한국에 당도했다고 한다. 독립기획자 임수영이 폴 살로펙과 협업하여 기획한 이 전시는 인천항에서부터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이어지는 아시아의 테두리를 걷는 프로젝트의 의미와 과정을 전시의 형식으로 기술한다.
범주를 초월하고 경계가 교차하는 동시대 미술의 실천에 익숙해진 오늘날, 하나의 전시가 이러한 인류학적 프로젝트와의 협력으로 조직되는 것이 그렇게 특수한 예는 아니다. 그러나 인류의 시간과 대지의 존재를 사유하며 대륙을 오롯이 걸어서 관통해온 한 저널리스트의 단단한 결기와 확신을 마주한 전시기획자가 그러한 주제를 기반으로 하는 전시를 기획하는 과정은 생각만큼 간단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 주어진 서사를 공유하고 그 해석을 확장하여 하나의 독립된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일은 익숙한 협업의 형식이나 일방적 오마주의 태도를 넘어 복잡한 구조와 상황을 사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시의 서문에는 처음부터 ‘주제와 발언보다 만남과 움직임이 앞섰던’ 전시의 언어가 어떻게 이 긴 걷기의 여정을 서술할 수 있을지에 대한 기획자의 고민과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이 전시는 참여작가와 기획진이 선행하는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과정을 통해 경계인의 시선을 획득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서사를 풀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위질이라는 행위는 경계인의 관찰이자 참여를 상징한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대체로 이러한 경계인의 공통분모 위에서 각각의 시선과 실천을 풀어낸다.
카자흐스탄 출신의 알렉산더 우가이(Alexander Ugay)는 고려인 3세라는 태생적 특성을 기반으로 스스로 경계인적 삶에서 체득된 사유의 결과를 지속적으로 풀어내는 작가다. 우가이라는 성(姓, 김가 이가 박가를 러시아 관리가 왜곡해 표기 등록) 하나만으로도 복잡한 이주사의 흔적이 드러나는 작가는 〈Unknown Return〉(2023)을 통해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이주사를 다루고 있다. AI를 거쳐 처리된 이미지들은 공식적 아카이브와 개인적 서사가 교차하는 것들인데, 현실적이지만 실체가 불분명한 AI처럼 공감을 통해 형성되는, 모호하면서도 강력한 집단 기억을 다루고 있다. 한편 피사체의 행위들로 구성된 영상작품 〈셀 수 없이 많은〉(2020)은 한국으로 이주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다룬다. 모더니즘과 산업화를 상징하는 반복의 움직임은 긴 시차를 두고 경계인의 행위로서 지금 여기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 같다.
역시 역사적 맥락에서의 이주사를 경험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영래는 다양한 지역을 탐험하며 인간과 환경의 서사들을 수집한다. 저널리스트로서 왜곡 없는 사실 전달의 태도가 몸에 밴 그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경동시장의 약재를 보며 떠올린 개인사적 기억과 향수를 재구성한 사진 작업을 선보였다. 처방을 위해 조합된 말린 약재를 분해하고 개별 인자들의 조형미를 대형 사진으로 표현한 그의 작업은 지극히 자연적인 관점으로 아픔을 치유했던 과거의 시도가 여전히 현실적 방법론으로 기능하고 있는 경동시장의 한가운데 위치한 전시장의 존재와 흥미롭게 조우한다.
오랜 시간 주변부의 경계인들을 주로 피사체로 담아온 김옥선은 신작 〈인터뷰〉(2024)를 통해 근대적 시공간의 무게를 감내하고 경계인의 삶을 살아온 세 여성의 삶을 추적하고 있다. 동명의 정치인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리서치는 스스로 경계의 위치에 서서 분투하며 살아온 인물들의 기억과 흔적의 조각들을 모으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거대하고 복잡한 삶의 시공간을 앞에 두고 고민을 토로하기도 했던 작가는 결국 자신의 이전 작업들과의 관계성을 통해 시공간의 퍼즐을 맞춰 나갔다. 이 때문에 작품은 세 인물의 서사를 충실하게 재현하거나 재단하려고 하지 않고 피사체와 관찰자의 시선이 병존하는 방향으로 수렴되었다. 작가의 이전 영상 중 일부가 이 작품과 나란히 전시되고 있는 이유다.
차지량 〈내세(After Life)〉
(스틸) 단채널 비디오 31분 43초 2020
제공: 작가
경계인으로서 스스로의 존재성과 중첩된 시선을 보여주는 위의 작가들과는 달리 아래 작가들은 비교적 관찰자의 위치에서 경계적 시공간과 관계를 맺으며 비일상적인 서사들을 펼쳐내고 있다. 주로 인식의 불확정성과 추상성을 다루는 손현선은 어떤 대상의 본질을 감지하는 과정에서 촉발하는 감각들을 다양한 매체로 묘사해왔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수년 전부터 시작한, 대지와 신체를 이어주는 지팡이의 존재성에 주목했던 작품을 선보였다. ‘땅과의 협업’이 있기에 걸음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매체로 선택한 지팡이는 신체와 땅을 이어주는 것에서 나아가 자신과 외부세계를 연결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작품의 핵심은 작가에 의해 이미 제작된 형식의 배열이 아니라 전시 기간 전시장 주변 시장을 걷고 탐색하며 발견한 사물들을 활용해 새로운 지팡이를 제작하는 과정일 것이다. 퍼포먼스의 과정에서 제작된 독특한 형식의 지팡이들은 새로운 조각적 언어를 획득하며 다양한 시공간을 직결하는 발화의 지점으로 기능하고 있다.
차지량은 인구소멸의 위기에 처한 시골 지역에서 빈집을 활용하게 하는 프로그램을 체험하며 제작한 작품 〈내세(After Life)〉(2020)를 선보였다. 일상적인 여행자의 시간보다는 길지만, 여전히 한정된 시간에만 머무르는 임시적 경계인으로서 하루하루의 일상을 기록한 이 작품에는 팬데믹의 분위기 속, 개인적인 투병과 치유의 과정이 갖는 비일상적 감각들이 중첩되어 있다. 마을의 이름이 중의적으로 내포한 시간적 감각은 작품의 레이어들을 더 두껍게 만들고 있다.
전진경의 회화는 스스로 속해 있는 집단의 문제의식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감각하고 발언하는 경계인과 연대해왔다. 복직을 위해 투쟁하는 해고 노동자 아내의 이야기를 비롯한 일련의 연작들을 발표해온 작가는 우연히 마주치는 낯선 이들을 묘사하며 그 이면의 대화를 상상하는 회화작업을 선보였다. ‘견디는 힘은 정신력이 아닌 근육에서 온다’라는 작가의 언급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섬뜩한 반복을 견뎌내야 하는 고독한 투쟁을 목도한 사람의 처지에서 대지를 오롯이 두 발로 걸어가는 폴의 수행적 과정에 이입할 수 있는 경험적 기반을 보여준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 전시는 ‘가위질’이라는 행위가 은유하는 여러 의미를 주요한 방법론으로 활용하고 있다. 오랫동안 느리게 걸어온 행위의 궤적은 신체가 딛고 서 있는 감각과는 전혀 다른 비율로 축소된 대륙의 지도 위에 선으로 표현된다. 대륙의 형태를 절개하며 그어진 그 선을 따라서 행하는 가위질은 대륙과 국경을 관통하며 우리의 관념 속에 익숙하게 자리 잡은 경계의 질서를 와해시킨다. 오리고 다시 덧붙이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지리감각이 형성되는 것이다. 세계지도에서 여러 국경부분을 오려내어 다른 대륙 위에 겹쳐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대륙의 감각이 얼마나 큰 왜곡 속에 있는 것인지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가위질을 행하는 사람들은 정주자가 아니라 여행자들이다. 느리게 걷는 여행자가 오랜 정주자들로 구성된 시공간을 관통할 때, 그들은 경계인들이자 관찰자들이다. 경계인의 시선은 처음 보는 풍경들을 바쁘게 눈에 넣으며 새로운 정보들을 분주하게 촉지(觸知)하기 마련이다. 그들이 담아낸 시공간들은 유동하는 체계 속으로 들어가 경계인만이 할 수 있는 발상과 해석을 만들어낸다. 도보여행이 촉발시키는 이 독특한 시선은 저널리즘과 창작의 실천이 공유하는 교집합이다.
김병호: 탐닉의 정원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2024.12.26~2.8최윤정 미술비평
인공세계 시스템과 구조, 필연적 속성과 생성의 원리
정원-구조와 서사, 상상적 생성의 장소
김병호는 금속조형 작업을 통해 산업화된 현대문명과 인간의 관계를 치밀하게 탐구한다. 그의 작품은 물질 환경과 제도적 시스템을 향한 비판적 시선을 담고 있으며, 첨단기술과 전통적 노동이 결합된 결과물로 문명과 자연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보인다. 특히 금속이라는 재료를 통해 공간과 시간을 확장하고 압축하면서, 우리가 인식하는 질서와 혼돈의 경계를 탐구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강조한 ‘정원’이라는 개념에 주목해 본다. ‘정원’은 일반적으로 자연을 통제하고, 계획된 형태로 배치하여 인간의 이상적 공간을 만드는 행위를 의미하지만, 김병호의 ‘정원’은 단순히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넘어 인간이 만들어 낸 인공적이고 구조화된 세계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이는 ‘인공적인 자연’이자 사회적 규범, 법규, 제도, 산업화된 시스템과 같은 우리가 살아가는 구조적 환경을 암시한다. 정원은 우리의 상식적인 이해를 넘어 예술체험 속에서 ‘욕망과 쾌의 장소’이거나, 시적 경험과 여운이 머무는 사적인 장소로서 미적 상상을 자극한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이번 《탐닉의 정원》 곳곳의 서사를 재해석하고 덧입히는데 관람자의 측면에서 유효하다. 또한 반짝이고-날 서고-맺히고-반사하며-증폭하는 특유의 조형성을 통해 작가가 심미적으로 관철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추구점을 예측해볼 수 있다.
필연적 생성의 장면들
김병호는 “화려한 물질문명의 혹”을 통해 인공적 세계의 안정적인 기하학적 구조를 탐구한다. 직조처럼 수평과 수직, 직선과 평면의 구조는 작가에게는 이미 현대문명이 약속한 고요한 질서이자, 토대로서 읽힌다. 그러나 작가는 그로부터 불안과 두려움을 일으킬 수 있는 구조적 불안전성을 찾아내어 안정된 구조를 균열시키고, 이윽고 그 단면/본질에 접근하고자 한다. 직선에 비해 이질적인 형상을 증식의 모티브로 보여주는 ‘혹’의 형상이기도 하고, 평면을 자른 단면 ‘두께’에 주목하여 사물의 본질, 인공적 세계의 본질에 대한 상징적 폭로를 감행한다.
‘혹’은 일종의 바이러스, 안정된 인공세계에 변이를 만들어내는 존재들이다. 직선과 평면의 계획적이고 인공적인 환경에서의 변종인 것으로, 작가는 이를 ‘문명의 혹’이라 칭한다. 이 형상 자체는 맺혀지고 망울진 모양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개별 혹은 공동체의 삶에 편재한 허황된 욕망의 형상이자 강렬한 욕망의 대상으로 상징된다. 각 맺힘들(혹)이 서로를 반사하며 발하는 그 휘황찬란함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현혹한다. 이는 물질, 권력, 제도권 등 자본주의의 부산물로 수동적으로 빠져드는 ‘탐닉’의 주된 서사를 완성한다.
한편 그로부터 해석의 확장적 국면이 움트는데, 확고한 구조와 모듈화된 세계 속에서 혼성적 변이로 생성되는 이 문명의 혹들이 욕망의 대상이자 형상으로 간주되는 것이라면, 특히 하나의 완결된 구조와 미적인 형상으로서 우리 사회의 구조를 조형적으로 담아내는 그의 작품들은, 인공적이면서도 필연적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는 세계의 원리 원칙, 그 과정을 관조하도록 제3자에 의한 재해석의 과정을 강렬하게 유도한다. 모듈화된 세계의 부분이자 부산물인 문명의 혹들을 생성되고 가치를 부여하는 다양한 주체의 잠재성으로 여겨볼 수 있는 여지, 확고한 구조로 칭해지는 필연적 세계 속에서 마땅히 또한 필연적으로 발현되고 외화되는 ‘내재성’을 발견한 듯도 하다.
〈수평정원〉(2018)에서 이 혹들은 문명이 쌓아온 합리적 구조 속에서 비정형적으로 튀어나오는 요소로, 작가는 이를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욕망의 결정체로 해석한다. 이러한 돌기 혹은 혹과 같은 형상들은〈수평정원〉, 〈수직정원〉과 같은 작품에서 특히 두드러지며, 이는 직선적이고 규격화된 질서 속에서도 분열과 비규칙적 요소가 여전히 존재함을 암시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증식하며 또한 자체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형상으로 이 세계의 유기적인 구조와 구성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각 조형들, 맺힘의 형상인 혹들 사이 강렬한 금빛 반짝임과 동시적으로 비추고 반사하며 뿜어내는 ‘기운’은 탐닉을 넘어 이윽고 미적 감관(感官)을 열고 새로운 해석의 국면으로 관람자를 능동적으로 이끈다. 고정된 규칙 속에서도 세계는 이와 같은 형태로 생성되고 가득 차오르며 우리가 이 형태를 감각하는 순간 또 다른 내재원인, 다양한 욕망의 주체들로 서사화된 또 하나의 내적인 세계를 마주하고 이야기를 보태게 되는 것이다.
김병호 〈정원의 단면-4S.MB1〉 (사진 오른쪽) 알루미늄 아노다이징 161×120×180cm 2024
《탐닉의 정원》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전시 전경 2024
제공: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두 개의 충돌〉(2024)에서는 작가가 물질의 표면을 어떻게 다루고 해석하는지 명징하게 보여준다. 각자의 회전축을 중심으로 유광의 은빛 조형과 무광의 검은색 조형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되 만나지 못하고(교차 혹은 충돌) 축이 고정된 위치에서 동일한 속도로 운동을 감행한다. 이 움직임은 필연적 구조를 연상하게 한다. 반짝이는 은빛 조형으로 상징화되는 욕망의 대상과 아득함 자체를 본질로 삼는 모든 색을 품은 현(玄)색의 조형이 세계의 속성과 본질을 상징하며 한 공간에서 존재하되 닿기가 어려운 우리 인식의 한계에 대해 시각화하고 있다. 무광의 현(玄)색 조형에는 은빛 조형의 반짝임이 결코 닿지 않는다.
작품 중에 〈정원의 단면〉(2024)이 있었는데 각각은 수평으로 수직으로 연결된 각 면이 안정적인 구조로 놓여있기보다 사선으로 서로 괴고 이는 방식으로 여러 점이 배치되어 있다. 알루미늄을 기초로 무광의 검은 칠이 되어 있는 각 작업은 인공적 평면을 휘어 곡면을 생성하고, 앞면과 뒷면 사이 물질 및 세계의 실체로 상징되는 것으로 ‘두께’를 강조하여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이는 자른 듯한 단면으로 알루미늄 본연의 색이 강조되어 그 효과를 강화하였다.
여기서 작가의 인공적 구조체, 세계를 관찰하는 데 있어 기하학적 질서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앞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는 인공적 세계의 기초를 이루는 직각과 수직, 수평의 구조를 바탕으로 한 질서를 탐구하면서도, 그것을 교란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창작해 왔다. 말하자면 그의 작품에서 종종 불안정한 각도를 통해 나타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안정적 구조 속에서 느끼는 우리 존재의 불안함과 긴장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며, 직선과 곡선, 평면과 돌출된 혹들이 충돌과 조화를 이루는 바를 보여주는 듯하다. 또한 이는 우리가 구축한 사회적 공간이 규범과 질서로 이뤄져 있되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생성되는 반대급부의 것들이 항시 등장할 수 있음을 가능태로 내보이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김병호의 작업들은 냉소적이고 화려하면서도 일종의 토템적 요소까지도 상기하게 하는 등 강렬한 미적 자극을 제공한다. 개인과 사회, 자연과 문명 사이에서 발생하는 질서와 원칙, 그의 조형물은 모듈화된 부품들이 철저히 규격화된 방식으로 조립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 이질적인 비정형의 혹이나 촉수가 나타나면서 현대사회에서 개별 인간들이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서로 맞물리고 충돌하고 발산하는 과정, 운동성을 추상적으로 시각화한 형상들이다. 구조적 한계와 틀로부터 필연적인 또 다른 ‘생성’의 가능성을 이어주는 흥미로운 서사들을 자연히 상상해본다.
김나영&그레고리 마스: 파라노이아 파라다이
아뜰리에 에르메스 2024.11.22~2.2장진택 미술비평
김나영&그레고리 마스
〈작업실에서의 힘든 하루-코니숑이라 불린 케서방, 작업실에서의 힘든 하루 1~5〉
도자기에 유약, 혼합매체
사진: 김상태 제공: 에르메스 재단
일반 임의의 미학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부상한 ‘재–(Re–)’의 코드는 기존 제도와 관례의 무효화를 목표로 하며, 이제 핵심은 무엇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의 문제가 아닌,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의 문제로 전환됐다. 다만 이 공식의 기저에 복제나 반복과 같은 당대 매체 환경의 지지체로서 특정한 실천의 미학화 과정이 필연적으로 뒤따랐는데, 이는 애초에 이미 형성된 조직의 해체를 선제함으로 곧 ‘임의’의 조건을 용인하는 소위 ‘미완’의 뜻과는 무관한–‘과도형’ 예술을 가능케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라면, 설령 해당 기조에의 강한 부정성(negativity)을 주요한 제 성립의 요건으로 삼았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언젠가는 마주했을 불가피한 자기 제도화의 과정에서 그 본래의 의미와는 상반하는 ‘일반’의 속성을 스스로 경화(硬化)하고 말았다는 사실일 테다. 이후 창작의 주체들은 그 어떤 전통의 제약으로부터도 구속당하지 않는 상태로 해방의 환희를 잠시나마 만끽하는 와중에, 다른 한편 무한의 자유라는 또 다른 과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이 때문에 임의는 ‘정립’될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를 터, 예술의 범주로 그러한 논의를 한정할 때 그 실현의 성질은 한층 명징해진다. 넓게는 철학, 좁게는 사회학의 아카데미아(academia)로부터 주관과 객관의 상호 역사는 기술되어 왔다. 미술사와 미학을 포함하는 예술 담론의 층위에서는 오랫동안 이를 ‘주체(성)(subject(ivity)’(이)라는 개념으로 호명하기를 더 선호했으며, 그것의 창의성(creativity)을 독창적 원본으로 다시금 승화하기를 계속해서 시도하는 중이다. 양시론(兩是論)적 협의를 통해 상충하는 대비의 공존을 용인함으로써 평화적 균형을 조장한 것을 제 유산으로 삼을 수도 있을 테지만, 사실 이를 두고 발화하는 쟁의의 중심에는 ‘취향’의 요인이 서려 있다. 다만 이 취향의 작동은 ‘유행(trend)’의 요인과 동기화(activation)함으로써 일정한 ‘문화’의 흐름을 형성해 낸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인과 집단, 주관과 객관, 미시와 거시의 상관성 등지로 ‘관계’는 상정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어떤 무엇보다도 크고 무거운 수평의 들보로 충실히 기능한다.
김나영과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을 처음 접한 것은 2008년 그들이 설립한〈킴킴 갤러리(Kim Kim Gallery)〉의 존재를 통해서였음을 기억한다. 어디에도 고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비고정성의 영역으로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는) 갤러리이자 비영리 단체 혹은 하나의 미술 작품으로서 제안된 “킴킴 갤러리”는 효율성을 지향하는 현대미술의 소비 구조에 조응하는 형식 아닌 형식을 지향함으로써, 그로부터 당대 대중성의 차원과 그 형성에 적극적으로(또는 주체적으로) 개입하고자 한 작업이다. 이들이 회의하는 ‘구조’란 철저히 모던, 어쩌면 포스트모던까지도 관통하는 시대의 제도를 향한 반언(反言) 문법의 개념이자 형식으로, 그것이 예술이라는 일종의 중간 지대적인 양가적 아이데이션(ideation) 활동과 연계돼 상부 구조 또는 하부 구조로서 구체적 현실의 양상 실재에 실질적인 실현의 가능성을 촉발하는 것으로 완결한다. 그와 같은 실행의 예술 형식을 통해 대안적 이상의 구현이 실제화될 수 있는 필요 충분의 균열이 결코 변화를 반기지 않는 사회적 인식의 규범이나 체계에 발생할 수 있게 된다. 마르크스주의(Marxism)의 구성을 따라 물적 토대의 이해를 전제함으로써 생산과 소비, 나아가 권력의 부여와 행사에 이르는 정치적 논쟁의 지점에까지 예술의 영향력을 펼침과 동시에 예술의 사회적 책무가 제정되고, 이어 시행될 수 있음의 파급 효과를 창발한다. 더불어 예술가 개인 혹은 예술사라는 사회 일반이자 학술 및 당사의 경계 또한 확장되는데, 그처럼 예술의 적극적이고도 명료한 역할 설정으로 김나영과 그레고리 마스의 미적 실천은 귀결한다고 하겠다. 해프닝(Happening)적 선언의 태도로부터 출범하는 역학 구도에서의 기본 단위를 근본적으로 다시 구축할 것을 제안하는 이들의 미학은 시스템과 함께 연동하며, 이로써 포스트모던에서의 그것과 유비하는 탈역사에 의한 재맥락화를 지향한다. 이는 다시금 특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로서 주체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계보의 측면에서도 무엇을 온전히 부정하는 차원이라기보다 어떤 방향을 모색하려는 시도에 더 가깝다고 할 수도 있을 테다.
《파라노이아 파라다이스(PARANOIA PARADISE)》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의 미적 의지는 이른바 ‘조합’의 방법론을 통해 집약되며, 그 시각화의 과정을 통해 해당 사유는 언어와 사물 간 그 유희적 관계의 재편성으로 현현한다.1 작가들이 제시하는 기획의 틀에서 이 언어와 사물의 관계는 문화적 코드의 수집과 그 행위로 기꺼이 재료가 되기를 택한 부유하는 파편의 상징들로 변신해 발화의 기초를 이룬다. 그렇게 역사는 축조의 예시들을 무작위로 생산할 수 있게 되며, 이는 동시에 다른 한편의 경향, 바꿔 말하자면 ‘소비’의 의지를 표상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생산된 결과로서의 사물(여기서는 미적 오브제 또는 완결된 설치) 그 자체일 수도, 그것에 붙여진 언어(또는 그 통상적 개념)일 수도, 그 두 요소를 이루는 환경적 요인의 구축 방식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그 모든 것의 부정 명제나 그러한 상황이 존재할 수 있음의 조건이 또한 논점의 중추가 될 수도 있겠다. 이때 예술 범주의 내에서 윤활과 연화를 담당하는 벡터가 곧 놀이 행위를 수반하는 유희의 속성이 되고, 이는 다시금 조합의 원리를 일반 임의의 모듈로 스스로를 단위화함으로써 해방을 위한 반전의 전복을 마련한다. 그와 같은 당대 실용주의적 대응의 도상적 신기념비로서 축조된 일정한 ‘상태’는 사물의 형상을 차용한 ‘예술 작품(artworks)’으로써 직조되고, 이에 붙여진 이름은 그들의 뜻대로 특정한 역학 관계의 현상 속에서 귀중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겠다. 피상과 본질의 차이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듯, 보편에 대한 규명도 동시대 관념의 이중적 성질에 따라 ‘관점’과 동기화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자명하게 할 때, ‘에피스테메(epistēmē)’의 무효화는 성립된다. 형성의 리는 언제나 상대적이라는 진리를 표명하는 일은 이렇게나 지난하다. 혼종적으로 혼재된 일체의 사물을 ‘아는’ 일은 그렇기 때문에 전혀 주요치 않음이 소명된다. 설령 자동기술(Automatism)의 수준에 달하는 정도일지라도, 이제 모든 실재의 핵심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미셸 푸코의 말처럼, “문제화(Problematization)”하는가, 그 비중의 문제로 집결한다.
이로써 예술과 정치의 교차는 나름의 유효한 분기를 사회라는 합의체의 맥락에서 창출할 수 있음이 비로소 밝혀진다. 인상적인 건 물적 신체의 유한한 감각 차원으로 그것이 이전되는 변환의 과정에서 생성된 (상대적으로) ‘주변부적’이라 할 수 있을 미적 감각의 예술성으로, 이는 권력 지향의 구조에서 형성하는 평범이나 보통의 준거를 다시 세움에 일조한다 (엄밀하게는 재건할 수 있는 것임을 상기하는 것에 가깝겠다). 따라서 당장에 해당의 형상은 ‘이질적임’을 지칭하는 형용의 외연으로 점철하겠지만, 도래할 시공을 이들 미적 주체는 응시하고 있음을, 그러므로 잊지 않을 필요는 있을 거다. 끊임없는 실현을 목표하면서도 막상 실현된다면 갑작스레 신기루가 되고 말 유토피아의 개념과 유비하듯, 주체됨을 갱신하는 것이 그들이 새로운 주체임을 증명하는 것이면서도 그것이 여전히 주체의 사명으로 돌이켜져야 하는 것임을 그레고리 마스와 김나영의 작업은 그렇게 우리에게 시사한다. 이미 자기 충돌의 연쇄로 자신을 증명하는 다단하고 복잡한 시대 가운데 개인, 나아가 예술 실천 및 그 영향의 가치를 되새긴다는 점에서 이들의 제언은 분명 유의미하다.
2024 부산모카 플랫폼_
미안해요 데이브 유감이지만 난 그럴 수 없어요
부산현대미술관 2024.11.30~4.13황수진 기자
타카 〈수퍼솔리드〉 (사진 가운데) 인터렉티브 미디어
설치, 멀티채널 비디오, 철제프레임에 패널 가변 크기 2024
경계 없는 연결, 융합된 존재
디지털 네트워크는 보이지 않는 실처럼 우리 일상을 감싸며 감각과 관계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기술의 융합과 디지털화는 단순한 효율의 증대를 넘어, 인간 경험의 가장 깊은 층위에 스며들며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의 방식을 다시 쓰고 있다. 부산현대미술관의 연례전 《2024 부산모카 플랫폼_미안해요 데이브 유감이지만 난 그럴 수 없어요》는 기술, 인간, 환경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변화와 긴장을 전시의 언어로 풀어낸다. 2023년 첫 번째 부산모카 플랫폼이 ‘환경과 생태’를 주제로 인간과 자연의 근본적 관계를 탐구했다면, 이번 전시는 디지털 지능과 기술 환경이 결합된 생태계로 논의를 확장한다. 전시 제목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서 할 9000과 데이브 보우먼의 대립을 떠올리지만, 취소선이 그어진 ‘데이브’는 특정 개인을 넘어 디지털 시대의 긴장 속에 놓인 우리 모두를 상징한다. 전시는 기술적 자동성과 인간적 감수성이 교차하며 빚어내는 긴장, 창조와 오류, 진실과 불완전함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시각화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네 팀의 공모작이 관객을 맞이한다. ‘판테온의 사도들’은 AI를 통해 인간의 신념과 사회 질서가 어떻게 재편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며, 미래의 종교 체계를 상상한다. ‘초원지 건축사무소’는 부산의 자연에서 채집한 소리를 인공지능과 결합해 도시를 청각적으로 재구성하며, 지속 가능한 공간을 제안한다. ‘예술 감각 혁신 공장’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서 불확실성과 복잡성을 탐구하며 새로운 연결 가능성을 실험한다. 마지막으로 ‘서소’는 한국적 정서인 ‘한’을 현대의 소통 방식과 결합해 정서적 응어리를 해소하고 위로와 공감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네 작품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술 문명이 우리의 현실과 관계의 의미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시도들은 기술 인간-환경을 둘러싼 논의의 출발점을 제시한다.
올해 전시는 공모작 외에도 국내외 초청작가 16개 팀의 작품 56점을 선보이며 논의의 폭을 넓혔다. 마리오 클링게만의 〈행인의 추억 1〉(2018)은 인간 창의성과 기계적 학습의 경계를 흐리며, 기계가 창조라는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초상화를 학습한 인공지능이 실시간으로 생성하는 초상은 인간의 기억과 정서를 흉내 내지만, 동시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을 자아낸다. 이 작업은 창조와 모방, 인간적 감수성과 비인간적 알고리즘 사이의 긴장을 시각화하며, 창조의 본질에 대한 사유를 유도한다.
클링게만이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학습된 기계의 창조적 가능성을 탐구했다면, 양숙현과 조영각은 동양 전통의 지식 체계와 인간 고유 경험을 기술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새로운 관계망을 드러낸다. 양숙현의〈OOX 2.0(Object Oriented X 2.0)〉(2024 )은 서구적 사고에서 비논리적이고 미신으로 치부되었던 동양의 명리학과 천문학을 인공지능의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한다. 조영각의 〈현상적 이유의 추이적 문장들〉(2024)은 인간 경험의 정수를 담은 격언을 인공지능으로 새로운 맥락 속에서 변형하고 확장한다. 두 작가는 정제된 데이터의 질서 속에 오류와 결핍, 비논리, 지혜와 같은 인간적 요소를 결합해 예기치 못한 결과물을 도출한다. 이러한 작업은 시각적 편향성을 낯설게 드러내면서도, 비인간적 관점에서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빌 비올라와 블라스트 씨어리는 기술과 인간 경험의 상호작용을 보다 주체적인 차원에서 탐구한다. 빌 비올라의 〈밤의 여행〉(2007~2018)은 느린 탐사의 리듬 속에서 플레이어가 자신의 움직임과 선택으로 서사를 만들어가는 게임 형식의 작업이다. 이 작품은 비올라의 기존 비디오 작업들을 재매개하며, 원형적이고 몽환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한다. 정형화된 서사 대신 조각난 기억의 파편과 유영하듯 흐르는 시간이 맞물리며, 플레이어는 자아를 탐구하고 내면과 세계의 관계를 재구성한다. 이 작업은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내적 성찰과 자아 발견의 매개체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승현 〈Mirror Dimension〉 LED Display Panel, furniture, wood wall,
electronic device, light sensor, 2-channel sound, dimensions variable
250×600×250cm 2023
조영각〈정직원〉 미디어 설치(로보틱스), 딥러닝
프레임워크, 로봇팔, 키보드, 모니터, 스피커 180×400×90cm 2024
제공: 부산현대미술관
블라스트 씨어리의 〈먼지를 가르며 우리는 나아간다〉(2023)는 기술을 매개로 도시의 환경과 기억을 감각적으로 재구성한다. 관객은 스마트폰 음성 메시지를 따라 맨체스터의 구석진 장소들을 걸으며, 과거와 현재, 미래가 중첩된 도시의 서사를 경험한다. 이 과정에서 화려한 과거와 쇠락한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의 물리적 구조와 정서적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작업은 기술을 통해 공간과 기억, 정체성의 관계를 새롭게 읽어내는 방식을 제안한다. 두 작업은 기술이 인간 경험과 환경을 사유하고 재정의하는 장치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밤의 여행〉이 내면으로 향하는 성찰적 여정을 제안한다면, 〈먼지를 가르며 우리는 나아간다〉는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환경과 시간의 결을 되새기게 한다.
전시는 기술과 인간, 환경이 얽히며 만들어내는 긴장과 가능성을 조명하며, 그 경계에서 탄생하는 새로운 교감과 통찰의 순간을 관객에게 건넨다. 부산모카 플랫폼은 기술적 생태계와 인간 경험의 본질을 탐구하며 동시대적 문제의식을 확장해가고 있다. 이제 2회차를 맞이한 이 연례전은 미술관이 들어선 을숙도라는 독특한 장소성과 생태적 조건을 바탕으로 고유한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다. 앞으로도 생태와 환경을 중심으로 한 폭넓은 담론과 실험적인 접근을 통해 부산현대미술관이 연례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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