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OCI YOUNG CREATIVES
박신영 : 출구 없는 도로에서OCI미술관
2019. 6.20 – 7. 13
현실과 상상의 중간지대, 21세기 몽유도원도
“작가로 살아간다면, 작가로 살겠다고 결정하면 혼자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시간들은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사회에서 주목하는 작가의 연령대가 너무 낮아졌어요. 이제 막 시작한 단계인데 자신의 스타일을 굳힌다거나, 주변의 반응을 고려해 유행을 여과 없이 쫒아갑니다. 호흡이 너무 빨라요.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놓치는 게 아닐까요?”
– 유근택 『지독한 풍경 – 유근택, 그림을 말하다』 북노마드, 2013
박신영의 그림 이야기에 앞서 작가 유근택의 말을 먼저 인용한다. 작가로서의 ‘태도’와 관련된 의견이자 조언이다. 자칫 일반화의 오류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요즘 (일부) 젊은 세대 작가에게 흔히 발견되는 조급함과 미성숙에 대한 현상을 날카롭게 지적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세태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100% 동의한다.
이런 전제에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신영은 유근택이나 내가 우려하는 그런 작가가 아니다. ‘호흡이 너무 빨라서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젊은 작가’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좀 느리고 심지어 또래 작가들에 비해 뒤처진 것처럼 보이기도 할 지경이다. 대기만성(大器晩成)! 박신영은 천성이 무덤덤하고 조바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성격이다. 그러니 남이야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다. 주변 상황에 아랑곳없이 자신만의 속도로 묵묵히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대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박신영이 유근택이나 김동유처럼 ‘지독한’ 작가는 또 아닌 것 같다. (2010년 성곡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타이틀이 ‘지독한 그리기’였다.) 박신영은 그저 그림 그리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좋아하고 재미있고,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인지 억지로 그리지도 않는다. 그림은 이미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박신영에게 그림 그리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습관과도 같다. 아니, “독서는 습관이 아니라 쾌락이다”라고 주장한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박신영에겐 그리기가 습관을 넘어선 쾌락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좀 고리타분한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일컬어 ‘운명(運命)’ 혹은 ‘숙명(宿命)’이라고 하나 보다.
아무튼 나는 박신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몇 차례 전화통화를 했고 작업실을 두 번 방문한 게 전부다. 그러면서 아주 무미건조하게 ‘용건만 간단히’ 식의 대화를 싱겁게 나눴을 뿐이다. 그 흔한 커피는커녕 물 한 잔도 같이 마시지 않았다. 시간도 길지 않았다. 그럼에도 앞서 밝힌 것처럼 나는 박신영이라는 인물의 캐릭터를 나름대로 단정 졌다. ‘평생 동안 꾸준히 그림을 그릴 사람’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판단은 정확하지 않고 틀릴 수도 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피상적인 선입견일지도 모르니까. 그럼에도 이런 배경을 전제로 박신영의 그림을 찬찬히 살펴본다. 그가 그린 그림은 도통 알다가도 모를 요지경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림 그리는 재미를 뜯어보는 또다른 재미
박신영 그림의 첫인상은? 불친절하다. 구체적 형상이나 내용이 한눈에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보면 뭘 그린 그림인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그저 그린(green) 계열 컬러와 붓 터치만 먼저 보인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 일정 시간 동안 그림 앞에 서서 구석구석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그러면 보이지 않던 형상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와 가로수, 건물과 벽돌로 쌓은 벽, 공원과 그 안에 있는 불분명한 오브제 등이 뒤엉킨 도시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캔버스 크기는 달라도 모든 그림이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프나 소재도 많다. 찻길과 자동차가 대표적이다. 둥근 접시모양 위성안테나, 유류저장 탱크 혹은 폐기물 처리장처럼 보이는 동그란 형상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군데군데 송전탑도 있고 나무와 숲, 부엉이도 보인다. 그리고 뜬금없이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로봇도 그려져 있다. 이런 요소는 인과관계나 동일한 스토리로 엮여 있지 않다. 서로 아무 상관없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을 뿐이다. 특히 인물도 잘 보이지 않는데, 설령 있더라도 주변 풍경과 섞여 있어서 마치 온몸을 위장한 채 은폐하고 있는 군인처럼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 박신영의 그림은 가까이에서 보면 뭐가 뭔지 잘 모른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봐야한다. 그러면 붓질의 흔적과 컬러 속에서 무엇인가 어렴풋하던 형상이 조금씩 구체적으로 드러나 보이기 시작한다. 박신영은 이처럼 알쏭달쏭한 자신의 그림을 ‘풍경화’라고 명쾌하게 정의한다. 그런데 이 풍경은 실재하는 풍경이 아니다. 사실과 허구, 현실과 상상이 뒤섞여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초현실적인 풍경처럼 보인다. 하지만 개념적으로는 사실적인 풍경화다. 이것이 박신영 그림의 진짜 정체다. 도시에서 포착한 이미지를 모티프로 한 박신영의 그림은 수수께끼처럼 비밀이 많다. 실제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에 의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사실과 상상으로 만들어낸 도시 풍경은 SF 영화처럼 낯설고, 공상과학 만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사회적 이슈나 이념적인 주장이 담긴 메시지를 담고 있지도 않다. 평소 도시풍경을 보면서 경험한 느낌을 고유한 회화적 언어로 형상화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말로 직접 설명할 수 없는 도시의 느낌과 전통적인 풍경화가 지닌 ‘숭고미’가 관객들에게 전달되길 원한다.
박신영에게 유화는 아주 적합한 기법이다. 그는 처음으로 그린 붓 자국과 그 흔적에 반응하면서 또 다른 붓질을 중첩하고 쌓아간다. 그림이 그려지는 중간에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셈이다. 이런 제작방식은 즉흥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심리적 풍경화
한편 이번 개인전에 출품된 대형 작품, 즉 크기가 가로 680cm × 세로 180cm에 이르는 <출구 없는 도로에서>를 보면서 안견이 그린<몽유도원도>를 보았을 때 기억이 오버랩 됐다. 현재 일본 덴리대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몽유도원도>원본은 지난 2009년 가을,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특별전>에서 단 9일 동안 일반에게 공개된 바 있다. 그때 나는 이 그림을 가까이에서 직접 봤다. 그래서 박신영의 그림을 보면서 <몽유도원도>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안휘준 명예교수는 우리 고미술의 우수성을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키워드로 짚어냈다. 그리고 그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산수화로 손꼽은 그림이 바로 <몽유도원도>다. 안 교수는 “동양의 두루마기(卷) 그림에서는 이야기가 오른쪽에서 시작되어 왼쪽으로 전개되는 것이 통례인데 반하여 <몽유도원도>는 그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편으로 이어져서 색다르다. 그것도 왼쪽 하단부 구석에서 시작하여 오른편 상단부의 구석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사선(斜線) 혹은 대각선을 따라 전개되고 있어서 매우 특이하고 독보적이다. 또한 이 사선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편 상단부로 옮겨 갈수록 점점 웅장감이 더 커지고 고조된다. … 고원(高遠), 평원(平遠), 심원(深遠)의 삼원법이 갖추어져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밖에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도원을 넓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부감법을 구상하였고, 가장 가까운 근경에 위치한 산의 높이는 대폭 낮추어 표현한 사실에서 안견의 뛰어난 기지를 엿볼 수 있는 점도 괄목할 만하다”고 해석하고 평가한다.
다소 긴 인용이었지만, 이런 해석을 박신영의 작품 <출구 없는 도로에서>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옆으로 긴 화면을 직선 도로가 수평으로 가로지르며 화면을 위아래로 나눈다. 그리고 이 도로를 중심으로 상상의 도시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몽유도원도>의 시선이 복합적이듯 <출구 없는 도로에서> 역시 정면, 측면, 위에서 내려다본 장면이 한 화면에 등장한다. 풍경이 뒤죽박죽이듯 이야기도 초현실적이다. 이처럼 박신영의 <출구 없는 도로에서>와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상상의 풍경화’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더불어 풍경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표현하는 작가의 시점, 그림 속에 등장하는 초현실적 요소 등 여러 측면에서 두 그림은 시대를 초월해 교감하는 점이 많다. 관객은 박신영의 그림 앞에서 실제 도시 공간을 거닐 듯 좌우, 상하로 눈길을 옮겨 가며 찬찬히 내용을 읽어 내려가게 된다. 어쩌면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보았다는 안평대군처럼 비현실적인 공감각을 체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친김에 이런 사족을 덧붙여 본다. 안견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해주었던 안평대군이 OCI미술관 전시장에서 박신영의 그림을 본다면 과연 어떤 말을 할까?
글: 이준희(건국대 겸임교수)
사진 제공: OCI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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