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월간미술대상 기획자들의 시선:
동시대의 질문과 응답 I
1.능수능란한 관종
2.물의 왕: 동학과 화엄의 두물머리
3.김법: 바위가 되는 법
4.조각 모음
5.앉음과 일어섬의 상[象]에 대하어
Special Feature
1.능수능란한 관종
부산현대미술관 3.16~7.7
인터뷰어 장진택(독립큐레이터)
기획자 최상호(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능수능란한 관종》 부산현대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제공 : 부산현대미술관
전시 《능수능란한 관종》은 미술의 역사에 (끊임없이 ) 등장하는 다양한 층위의 관종을 살펴봄으로써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관심의 역사를 탐구했다. 그 탐구의 과정에서 관종은 단순한 자기 과시의 주체가 아니라 타자의 시선을 통해 자아를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자신의 위치를 전략적으로 구축하는 역동적인 존재로 드러났다. 전시는 어느 정도 관종이 되어야 하는 동시대 사회의 압박을 직시하면서도 능수능란한 자기 연출의 기술을 통해 타인의 시선을 조정하고 더 나아가 그로부터 해방될 가능성을 제안했다. 전시의 참여 작가였던 장진택 독립큐레이터가 최상호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를 인터뷰했다.
장진택 《능수능란한 관종》이 목표하는 바를 감안하면서도 관종이라는 말이 품은 현혹성을 제하고 나면 결국 본 전시는 어떤 대상이나 장을 향한 큰 실험형의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보인다. 동시대 미술이라는 맥락에서 그것의 사회적 역할이나 위상과 연관해 당대적으로 나름의 조정을 거쳐 해당 주체들이 도달해야 할 균형을 이 기획이 시사하고 있다고도 생각된다. 전시의 소회가 있다면.
최상호 이 전시의 기획을 통해 ‘관종’이라는 단어를 국공립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사용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월간미술대상 수상 자리에서도 “관종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라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본래는 ‘관심종자’의 준말인 ‘관종’이라는 표현을 국공립 미술관에서 걸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상황을 예상했다. 실은 그러한 과정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는데, 실제로는 너무나 유연하게 수용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좀 신기하기도 했고, 어떻게 보자면 드디어 제도가 그러한 실상을 포용할 충분한 준비가 된 건가 싶기도 했다.
장진택 관련해서 학예사가 점유하는 제도적 지위와 그 큐레토리얼 실천의 차원에서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 직조하는 당대적 서사, 그리고 그것과는 사뭇 이질적 개념인 《능수능란한 관종》 사이의 아슬한 상관관계가 흥미로웠다. 다만 그 실현에 있어서는 학예사의 의지와 함께 그 실현의 주축을 이루는 조직 구성원과의 관계 및 지역성에 따른 문화의 특정 분위기 같은 요소가 영향을 미쳤을 것도 같다. 그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본 기획이 장의 확장을 기대할 수 있게 하는 까닭은, “관종” 단어를 제목에 사용함으로써 동시적인 현장성과 그를 충실히 읽고 반영하는 전시라는 형식이 대중과 전문성 사이에 어느 정도로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합당한가의 문제를 상기하기 때문이겠다.
최상호 전시 기획 과정은 그야말로 선택의 연속이다. 이상의 질문을 생각하자면, 권위 있다고 여겨지는 이른바 빅 네임 예술가들을 초대한 걸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크리스 버든(Chris Burden )이나 피에로 만초니(Piero Manzoni ) 혹은 아나 멘디에타(Ana Mendieta ) 같은 일종의 지지체( support)가 있었기에 권시우 비평가나 장진택 큐레이터를 전시에 포함할 수 있었다. 미술사적으로 성취를 이룬 이들이 여러 층위로 뒷받침될 때 전시가 유의미해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또한 그 뒤를 이어 토마스 허쉬혼(Thomas Hirschhorn )이나 성능경이 그 역할을 함께 해주는 구조다. 이로써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동시대적이기에 한없이 가벼워질 수도 있었던 개념에 적정한 무게를 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장진택 본 전시에서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역시나 ‘참여 작가’로 총칭할 수 있을 다양한 층위의 예술계 구성원들인 것 같다. 그로부터 본 기획의 연작화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게도 됐다. 특히나 권위를 표상하는 국공립 기관에서 행해진 당대 큐레토리얼 기획이라는 차원에서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최상호 ‘관종’의 개념과 관련해서 사실 고대의 시공으로부터 그 미적 가치를 돌이키고자 했다. 그렇게 보면 각기 다른 시대에 나타났던 ‘관종’들의 의미를 조명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그 방대한 역사를 몇 개월의 한정적인 연구와 전시로 아우를 수 있을까를 이번 전시를 만들면서도 고민한 바 있다.
장진택 결국 본 전시도 전문가 집단과 비예술인을 더해 국공립 미술관을 방문하는 특정 관람층을 대상으로 선보여져야 했을 텐데, 이 부분은 기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고려되었나.
최상호 그래서 충격적 작품으로 미술사에서 기념비적 지위를 점유할 수 있었던 크리스 버든이나 근래 화제가 됐던 조영남과 같은 작가들을 전시의 구성원으로 포함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장진택 전시의 물적 구성은 어떻게 구상했나.
최상호 어떤 자연스러운 관람의 리듬을 생각했다. 미술사적으로 큰 무게를 이루는 예술가들로부터 동시대 작가들로, 다시 대가들로부터 당대의 현장으로의 패턴을 반복하다, 마지막 큐레토리얼 지점을 표상하는 장진택의 자리에까지 이르는 식으로 어떤 흐름을 이뤄내고자 했다.
장진택 전시에 대한 반응이 어땠는지도 궁금하다. 보자면, 학예사의 기획에서 큰 획을 긋는 제도 자체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갖던 이들과, 반대로 그것에 아예 관심이 없이 ‘관종’이라는 핵심어가 창출하는 스펙터클에 흥미를 두고 본 전시를 향유하는 이들의 반응이 달랐을 것 같다. 이들을 두고서 본 기획이 일으킨 미적 상호작용은 무어라고 생각하나.
최상호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양측을 포함해 모든 관객에게 관종 개념의 역사적 근거를 확인해줌으로써 예술의 범주에서 “당신도 해보라”, 즉 “그러한 예술가가 되어보라”는 것이었다. 전시장의 입구에 배치한 큰 거울 벽면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해당 설치가 이상의 내용과 관련한 하나의 제스처가 되기도 했다.
장진택 그렇다면 본 기획은 예술이 예술임을 자기 증명하는 당대의 속성이자 역할 혹은 태도이자 역량으로서 소위 관종력을 발휘하는 미적 주체의 작업들을 관객에게 제안하면서, 그로부터 동시대에 유효한 정체성의 형상을 그려냈다고 할 수 있겠다.
최상호 그렇다. 나는 피에로 만초니의 좌대 위에 관객이 올라가 모두가 작품이 되어보기를 바랐는데, 막상 그런 행위를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더군다나 미술관이라는 제도 안에서 관종 개념의 역사적 유효함을 조명함을 통해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하고 싶기도 했다.
장진택 관객은 이 전시를 향유하는 방식으로써 미술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기관 입장에서는 역시나 이미지의 차원에서 나름의 자기 경종을 울리는 뜻도 시사할 수 있었겠다.
최상호 실은 그것이 전시가 지향하는 바였다. 어떤 맥락도 없이 관객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거다. 관종이라는 단어를 국공립 기관 전시에서 사용하는 것 자체로써 일종의 자기 비판적인 측면에 서 본 것이기도 하다. 미술관이라는 제한된 조건에서의 허용치가 어디까지인지를 고민하기도 했다.
장진택 그렇다면 이제 전시라는 형태로 국공립 미술관의 역사에 기획이 아카이빙될 텐데, 이로써 기관의 차원에서 그 한계성을 확인하는 역할을 본 전시가 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최상호 그렇다. 이제 더는 작가의 지위가 아니어도 전시에 참여할 수 있고, 미술관이 모든 것을 제한 없이 포용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그러한 장에 관객을 어떻게 유입시킬 건가에 대해서도 재고해야 한다.
《능수능란한 관종》 부산현대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제공 : 부산현대미술관
장진택 이번 기획은 분명 환기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이 구축한 제도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마는 이른바 관습으로 인해 관객을 주요한 대상으로 하는 기관의 목표가 그 실제 현장으로부터 괴리를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미술관의 구성원들을 소외시키는 자기 조건들을 형성해 다시금 이를 실현 불가능한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제도적 모순의 상황을 향해 변화를 직시하라는 전언을 매개하는 역할을 본 전시는 했다고 볼 수 있겠다.
최상호 그렇다.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시도함으로써 이제 진정한 관종이 되는 거다. 그리고 그들이 갖춘 ‘능수능란함’이 역시나 동시대 관객이 되기 위한 필수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제도라는 차원이 미술이 갖는 역동성을 많이 상쇄한다는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 미술관이 그 대표적인 기관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장진택 환언하자면, 관종의 개념을 위시해 예술 본래의 역동적이고도 창의적이면서 독창적인 속성을 일종의 ‘ –되기’라는 특유의 큐레토리얼 실천의 시도로 그것이 보이는 구조 및 구성원들, 그중에서도 효율적 통제를 목표해 권위로부터 교육받은 경직된 관객과 그 당사 주체로서의 제도 모두를 향해 사회적 및 정치적 해방의 차원에서 새로움을 체험케 하는 것이 이번 전시와 기획의 목표였다고 할 수도 있겠다.
최상호 맞다. 관종이라는 용어가 그런 역할을 한 것 같다.
장진택 전시 《능수능란한 관종》이 제도에서 자발적으로 시행하는 건강한 자성의 사례로 부디 미술관의 역사에 확고히 아카이빙되기를 바란다.
최상호 꼭 ‘건강’한 것은 아니어도 될 것 같다. (웃음 )
2.물의 왕: 동학과 화엄의 두물머리
자하미술관 2023.11.3~28
인터뷰어 양진호(인문학교육연구소 소장)
기획자 김남수(안무비평가)
《물의 왕 : 동학과 화엄의 두물머리》자하미술관 전시 전경 2023
전시는 우금치 이후 동학 재건의 모임 ‘수왕회(水王會 )’에서 출발했다. 수왕회는 해월 선생의 지지하에 여성 리더 이수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모임으로, 미래의 새날을 위해 동학과 화엄불교 등이 융합되는 소위 ‘수왕동학’을 지향했다. 여기서 물은 여성, 어린이, 달과 같은 주변부 행위자들 사이의 싱크를 증폭하는 매체였고, 새 역사의 주인공으로 솟구쳐 오르게 하는 동력이었다. ‘산정의 물더미’와 물줄기 둘이 만나는 ‘두물머리’로 ‘물의 왕의 역사’가 유유히 흘러가고 안으로 숨어들었다. 전시는 이러한 역사의 징험을 추적하고 답사한 수왕회의 활동 궤적 위에서 동학사상 내부의 여성적 영성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비전을 탐색했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수천 년 누적되어 온 ‘축의 시대’ 남성 정치의 통치성, 근대문명의 폐해, 기후변화, 인류세를 비롯한 재앙의 조건에서 근본물음에 그치지 않고 이 땅에서 길어 올린 슬기를 모색하고자 했다. 양진호 철학자가 김남수 기획자의 인터뷰를 맡아 전시 과정과 맥락을 상세하게 펼쳤다.
양진호 ‘안무비평가’라는 타이틀을 주로 쓰고 스스로도 그쪽이 본령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과정을 거쳐 미술 전시 기획에 이르렀는가?
김남수 내가 서울대를 두 번 중퇴했다. 세간의 인식은 실패라고들 하는데, 내 나름대로는 플랫폼이었다고 생각한다. 1990년대 여행 자유화와 문화 대개방의 흐름을 타고 1세대 오타쿠가 형성되었는데, 나는 그 일원이다. 특히 영화를 통해 당시 한국의 초기 팝 컬처를 익혔다. 영화가 진력이 날 때쯤 무용에 눈을 뜨게 되었고 무용을 영화의 반대말로 재발견하게 되었다. 무용평론가로 정식으로 등단하고 나서 ‘몸’과 ‘따님’과 ‘숨’이라는 키워드들을 가지고 활동했다. 그런 와중에 2007년 겨울 백남준미술관 추진위원회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이듬해 10월 개관할 때는 백남준아트센터가 공식명칭이었다. 그곳 개관을 목표로 입사했는데, 사실 들어갈 때는 영문을 몰랐다. 시기적으로는 다원예술 분과가 만들어지던 때였던 것도 같다. 아무튼 거기 합류해서 백남준의 예술세계에 입문하는 과정에서 미술과 무용 사이에 공통분모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급조하듯 만든 타이틀이 안무비평이었다. 미술 작가가 오랫동안 하나씩 하나씩 붓칠을 쌓아 올린 내공과 원로 무용가가 펼치는 백조의 노래 같은 춤사위가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이었다. 몸의 기억과 몸의 지혜를 열어 보이는 방식에 주목하고 싶었다.
양진호 이 전시의 특이점들을 나열하겠다. 우선 전시회가 2023년 11월에 열렸다는 점이다. 올해 동학혁명 130주년을 맞아 여러 기획자들이 동학 전시를 준비만 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전시는 미리보기 같은 느낌이었다. 다음으로, 이제는 사람들이 잘 언급하지 않는 김지하, 특히 후기 사상이 시작된 『수왕사』를 텍스트로 정했다. 더하여 ‘수왕 동학’, ‘여성 동학’이라는 키워드도 있다.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키워드들인데 어떻게 전시로 엮어낼 생각을 했나?
김남수 김지하 시인의 『수왕사(水王史 )』 (2013 )는 그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절대 고독의 상태, 그야말로 정신적 인간의 기조에서 쓴 책이다. 2014년 처음 읽었을 때는 그냥 날것으로 들어왔고 소화도 되지 않았다가, 2022년쯤에 다시 정독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는 많은 것이 달라 보였다.
양진호 전시의 부제로 이야기를 풀어보자. ‘화엄’, ‘동학’, ‘두물머리’가 있다.
김남수 내게는 ‘화엄’이 늘 매력적이었다. 럭셔리한 꽃밭이 아니라 이름 없는 들꽃들의 꽃밭, 생명의 꽃밭. 그 정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김 시인이 말하는 화엄은 우주의 변화에 따라 시적인 모델을 통해 기존의 화엄 질서를 바꿔내는 것이었다. 이른바 ‘화엄 개벽’이라고 하는 것이다. ‘두물머리’는 정약용이 조선(朝鮮 )이란 말의 기원을 이야기했던 서사구조를 김지하 시인이 가져온 것이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산수(汕水 ), 즉 북한강이 수심정기(守心正氣 )의 ‘동학’이라면, 석회암 지대에서 영양화되었다가 영월, 충주 등을 거치며 모래로 정화되는 습수(濕水 ), 즉 남한강이 ‘화엄’이다. 이 두 물줄기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양평의 산수(汕水 ), 즉 북한강이 수심정기(守心正氣 )의 ‘동학’이라면, 석회암 지대에서 영양화되었다가 영월, 충주 등을 거치며 모래로 정화되는 습수(濕水 ), 즉 남한강이 ‘화엄’이다. 이 두 물줄기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양평의 두물머리에서 그야말로 대회전을 한다. 하지만 두 물은 쉽게 하나 되지 않는다. 일통(一統 )하지 않는다. 물 분자는 각자 배타적인 영역(exclusive zone ), 텃세가 있다. 끊임없이 길항하며 맞붙어서 싸우고 나서야 하나가 된다. 다산은 이것을 ‘치열하게 맑은 물(洌水 )’이라고 했다. 그렇게 각고의 과정을 거쳐서 나오는 것이 ‘수왕 동학(水王 東學 )’이다. ‘어떻게 물의 지혜로부터 21세기 한반도발 새 사상이 태동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김 시인은 스스로 시적 허용을 품은 역사가로서 빼어난 답을 제시했다. ‘여성 동학’에서 ‘여성’은 우선은 예컨대 두타산 무릉계곡처럼 깊은 계곡의 저 밑바닥에 있는 어둠이다. 하지만 마치 역학의 도수 원리를 따라 우주에 어떤 환절기가 오듯이, 언젠가 그 깊은 어둠이 스스로 밝은 지혜를 열 것이다. 이 ‘그 깊은 어둠’은 여성 신체와 관련이 있다.
양진호 ‘여성 신체’라는 용어가 여러 가지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김남수 내가 여성은 아니지만, 들뢰즈가 ‘여성-되기’라는 표현을 썼다. 내가 여성 신체를 끌어들이는 맥락은 초기 프로이트나 지나치게 모성을 강조한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환원론적인 신체론’이라 비난받았던 사례와는 다르다. 신체도 하나의 은유이다. 사실상 G. 레이코프와 M. 존슨이 이야기하는 ‘마음속의 신체’이다. 객관적인 신체가 아니다. 김지하 시인도 인지적 단계에서 재발견되는 마음속의 신체를 자주 이야기했다. 다시 돌아가서, ‘그 깊은 어둠’은 여성 신체에서 보자면 ‘애’를 말한다. 애가 끊어진다, 애가 탄다고 하는 표현이 깃든 부분, 이른바 약손의 마사지에 공감할 줄 아는 기관, 즉 창자를 말한다. 이것은 자궁하고 밀접하고 자궁과 이어져 있는 소뿔 모양의 나팔관은 미생물 네트워크로 연결된 우주이다. 여성의 회음혈을 지향하는 횡경막 호흡은 사실은 애와 자궁 사이의 대화에 해당한다. 거기서 태어난 아이가 배냇-지혜를 가지고 블라블라 얘기를 하는데 그걸 현람성(玄覽性 )이라고 한다. “가믈고 또 가믈토다(玄之又玄 ).” 현람성은 3천 년 동안 짓밟혀서 이제 절망과 히스테리밖에 없는 여성 가까이에 있다. 화병(火病 )으로 전환되지 않은 여성의 정념, 감흥, 정동은 시김새로 넘어간다. 이것을 애월성(涯月性 )이라고 한다. 애월성이 현람성과 만나서 결국은 여성 동학이라는 진수를 빚어낸다. 김 시인은 여기까지 본 것 같다.
《물의 왕 : 동학과 화엄의 두물머리》 2층 전시 전경 2023
양진호 여성 동학, 현람-애월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수왕사』에 등장하는 천민계급 출신의 여성 리더 ‘이수인’에만 집중된 것이 아니라, 은유적인 의미에서의 여성 신체 및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대자연의 호흡 등이 함께 맞물려서 앞서 말한 화엄개벽이랄지, 동학 자체의 새로운 혁신이랄지, 이런 것들을 견인하고 있다고 보는 것인가?
김남수 기독교에 비유하면, 먼저 온 세례요한과 나중에 완성하러 오는 막달라 마리아 사이를 공백(blank )으로 두는 것, 생성을 돕는 무의미(non-sense )로 남겨두는 것이 중요하다. 전시할 때 여성 작가가 많았냐 적었냐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여성-아이 친화적이었던 해월 선생의 사실적인 행적, 그 속에 있는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여 전시로 도입하는 게 중요했다. ‘이수인’도 그런 맥락에서 호출된다. 북극성과 칠성신을 두루 걸치고 있는 ‘해월의 초상’이, 아이를 안고 있는, 하지만 강의 신으로 화해가는 ‘이수인 초상’과 서로 마주보는 형국, 그런 비스듬한 구도가 중요했고 그에 따른 자연적인 논리에 의해 작가가 선정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양진호 기억에 따르면, 전시장 입구에 앞서 말한 ‘소뿔’ 코드가 매달려 있고, 그 오른쪽에 ‘이수인 초상’이 있고, 이수인의 초상이 마주 보는 쪽에 ‘해월의 초상’이 있다.
김남수 맞다. 소머리가 그 둘 사이에서 염화미소처럼 작용한다. 소머리는 여성고고학자 마리아 김부타스가 제시한 인지고고학적인 신체 모델이다. 자궁이 있고 그 자궁에 나팔관이 뿔처럼 달려있는데, 그 뿔들의 동시적 공존 속에서 여성적 화엄우주가 모래시계를 꾸리고 있다. 전시 자체가 이런 식으로 마주 보는 대칭 구조 안에서 생명서판을 짜넣는 작업 과정이었다.
양진호 전시장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보자. 방금 말한 것은 1층의 스토리인데, 2층과 1층 사이는 어떤 서사 구조로 연결되는가?
김남수 1층은 동학에 접속을 하는데, 전통적인 입장에서의 동학을 김지하 시인 고유의 서사로 드리블을 해가는 과정이다. 천도교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가상의 역사, 하지만 사실 어쩌면 가능한 역사, 가능성의 극한으로서의 역사, 시학적인 역사를 최대한 배치하는 기획이었다. 2층은 그 모티프를 가지고서 좀 더 자유롭게 그런 부담을 덜고 시선을 확대하는 것이다. 2층 끝방에는 그것이 왜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해명하는 기록 필름이 돌아가고 있었다. H. G. 프랭크퍼트가 철학적 개념으로 말하는 “개소리”라는 게 있다. 그런 것이 최대한 허용되지 않으면, 동학은 그저 동어반복적인 윤리적 억압에 지나지 않겠는가.
양진호 전시와 연계된 부대 행사들이 꽤 있었다. 강연, 퍼포먼스 등등.
김남수 일단 김종길, 양진호, 좌계 김영래 선생같이 자기 사유로부터 연대할 수 있는 분들과 답사를 했고 워크숍도 열었다. 별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흩뿌리는 작업이랄까? 별을 생성할 수 있어야만 살아있는 은하라고 할 수 있다. 북극성이란 부동점이 있지만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 )이라고 했다. 끊임없이 사용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근본이 있다. 부동본이 있지만 만왕만래(萬往萬來 )의 두레박 운동이 필요하다( 『천부경(天符經 )』 ). 그랬을 때 “묘하게 생명이 만연한다(妙衍 ).” 질서를 잘 잡아 딱 박아놓는 것은 죽은 우주다. 『수왕사』나 ‘물의 왕’ 전시를 옹호하냐 마냐 그런 문제가 아니고 소위 별밭 운동이 문제다. 각자가 별이 되고 나아가 각자가 별을 낳아 은하를 생기롭게 하는 것.
양진호 답사가 왜 중요한가?
김남수 답사라는 것은 정말 철저하게 길을 열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눈과 귀를 그물의 벼리처럼 당기는 사람들이 쌓아가는 우정의 커뮤니티, 무연(無緣 )하게 어떤 인과관계 없이 뱉는 말들의 산이다. 그렇게 쌓인 지혜가 결국 이 전시를 만들었다고 본다. 기획자로서 상을 탔지만 독식할 수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전체이고 그 각각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양진호 요새 관심 분야나 차후 계획은?
김남수 헤겔-마르크스가 만든 역사철학의 모델과 함께 진보적인 예술 운동이었던 모더니즘은 멸망했다. 이제 모더니즘은 가묘 상태인데 아직 끝물은 남아있다고 믿고 이것을 연장하는 가상 속의 미술 작업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기후 변화랄지, 지구 자기축의 거대한 변동이랄지, 또 불의 고리에서 조산운동이 일어난달지… 대지가 예술의 토대인데, 이 거대한 흐름을 의식하지 않는 미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거대한 운동이 파국과 폐허를 가져온다 할지라도, 또 인간종이 여섯 번째 멸종을 맞는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마주할 첫 세계에 밑돌을 놓는 미술이 필요하다. 정초하는 미술 운동이 필요하다. 전미래 시제라는 예감을 가지고 스스로 믿음 속에서 작업하는 작가가 누구인지, 늘 찾아보고 또 지켜보고 있다.
《물의 왕 : 동학과 화엄의 두물머리》 1층 전시 전경 2023 사진 : 박홍순
3.바위가 되는 법
리움미술관 2023.7.27~12.3
인터뷰어 이설희(쿤스트할 오르후스 큐레이터)
기획자 김성원(리움미술관 부관장)
작가 김범
《김범 : 바위가 되는 법》 리움미술관 전시 전경 2023 사진 : 이의록, 최요한 제공 : 리움미술관
1990년대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김범의 작품세계를 포괄하는 대규모 서베이 개인전. 초기 회화부터 해외 소장품 등 국내에서 만나볼 기회가 없었던 작품을 포함하여 총 70여 점을 볼 수 있는 전시였다. 김범은 다양한 매체를 가로질러 보이는 것과 그 이면의 간극을 드러낸다. 그의 모순과 해학은 흥미로운 상상으로 그치지 않고 현대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관습과 체제를 성찰하게 만든다. 김범의 전시《Water from Ganges River in the Cup Made with Newspaper from Congo》를 기획하고 그의 책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 (워크룸, 2024 출간 예정 )를 총괄 기획하며 작가와 인연을 맺은 이설희 쿤스트할 오르후스 큐레이터가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과 김범 작가를 인터뷰했다.
이설희 먼저, 월간미술대상 전시 부문 수상을 축하한다. 수상 전시인 리움미술관의 《바위가 되는 법》은 13년 만의 김범 국내 개인전으로, 김범을 “기다렸다”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참여 작가 선정이 기획자의 정체성을 말해주며, 시기적절한 작가 선정이 전시에 당위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김범의 지난 30여 년간( 1990~2020년대 ) 작품세계를 망라하는 대규모 서베이 전시를 기획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김성원 김범의 1990년대 초기 작품부터 최근작까지 70여 점을 한자리에 모은 국내외 최초 대규모 개인전이다. 김범은 다작을 하는 작가도 아니고, 적극적인 전시 활동을 통해 작가적 명성을 쌓아 올린 사람은 더군다나 아니다. 반면, 우리는 그의 예술 실천이 현대미술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주요한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자주 혹은 직접 작품을 볼 기회는 없었어도, 그를 아는 이들은 김범 예술 실천의 독자적 스타일과 그 의미에 감탄한다. 한편, 요즘 젊은 작가나 미술대학 학생들은 이러한 김범의 작업세계를 간접적으로만 접해 궁금해하기는 하지만 제대로 알아 갈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번 서베이 전시가 김범 마니아에게는 회고를 통한 새로운 전망을, 그리고 김범 초보자에게는 진지한 입문의 길이 되기를 기대했다.
이설희 해외에서는 2019년 덴마크의 쿤스트할 오르후스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간 여러 상황으로 국내 전시 개최가 다소 어려웠던 듯 보인다. 이번 리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김범 부족한 작품들인데 많은 분께서 전시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했다. 실은 이 전시 전까지 오랫동안 건강 문제 등으로 큰 전시는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김성원 부관장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지난 작품들을 한데 모으는 기회를 만들 수 있고, 이를 돌아보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라 말해줘서 나 또한 이러한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전시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설희 김범의 작업을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무엇보다도 이번 전시는 그간 이미지로만 봐왔던 작품을 직접 ‘본다’는 것이 큰 선물을 선사받은 듯했다. 국내외 기관/개인의 소장품을 대여받은 노력과 정성이 돋보였다. 특히 개인 소장인 1990년대 초기 회화 및 오브제를 직접 본 감동은, 이내 다시 보기 어려울 수 있다는 아쉬움으로 치환되어 양가적 감정을 자아냈다. 영구 소장품이 전시와 연동하여 작가의 작업세계를 포괄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 같다. 소장품을 선보이는 과정에 어려움은 없었는지, 혹은 계획했지만 대여가 성사되지 못한 작품이 있다면 말해달라.
김성원 이번 전시는 신작 없이 기존 작품, 즉 작가, 개인, 기관 소장품만으로 구성되었다. 기관 소장품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관람객에게 공개되지 않으며, 개인 소장은 일반인이 접할 기회가 없다. 이번 리움미술관 전시가 아니었다면 한 장소에서 김범의 70여 점에 달하는 대표작을 볼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미술계의 대규모 서베이 전시들에서 간혹 기관이나 개인 소장가가 작품 대여에 응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소장품 대여를 둘러싼 다양한 에피소드가 나오기도 한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그런 에피소드는 없었다.
이설희 작가 입장에서도 약 30년 전 작품을 다시 접하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어떠했는가?
김범 젊었을 때부터 작품이 잘 관리되지 않고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어서, 과연 그 작품들을 모을 수 있을지가 이번 전시의 관건이었다. 미술관에서 노력을 해줬고, 감사하게도 여러 소장가들도 작품을 기꺼이 대여해줬다.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한자리에서 보는 것은 나에게도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물론 감회가 깊었고, 때론 불완전한 내 작품들을 선보이는 게 좀 창피하기도 했다. 오래전 남긴 설치 메모들에 따라 작품을 설치할 때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김범 〈두려움 없는 두려움〉 종이에 잉크, 연필 가변 크기 1991
©김범 촬영 : 이의록, 최요한 제공 : 리움미술관
이설희 다양한 매체를 다루는 작가의 전시는 큐레이팅의 구성/ 환경에 있어 더욱 많은 질문을 자아낸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김범이 여러 유형의 매체를 다루는 이유는, 작품의 각기 다른 내용에 맞춰 그에 적합한 물리적 몸체를 찾고자 한 데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현실의 부조리, 사회적 고정관념 등을 조용하고 유머러스하게 말하지만 비관된 어조를 유지하고 있는 김범 특유의 감각을 전시에 녹여내기 위해 기획 전반에 중점을 둔 부분이 있는가?
김성원 이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미슐랭 스타 셰프 혹은 장안의 최고 맛집 셰프를 초청해 요리를 부탁한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물론 셰프 초청 이유, 맥락을 기본적으로 제안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셰프가 그의 기량을 백분 발휘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배려하고 지원해야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전도 동일한 접근이라 생각한다. 김범을 초청하며 제안했던 것은 ‘회고적 파노라마’, 즉 과거를 소환하면서 미래를 전망하는 전시다. 전시 구성과 작품 선정은 이러한 틀 안에서 작가와 함께 진행했다. 디스플레이는 전적으로 김범의 제안을 수용하며, 그의 생각이 최대한 잘 반영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볼거리〉(2010 )로 시작한 전시는 〈폭군을 위한 인테리어 소품〉(2016~)으로 마무리됐다. 이 두 작업의 주제가 서로 연결된 하나의 원처럼 ‘순환’ 구도를 그리고 있으며, 작가는 이 두 작품을 사이에 두고, 1990년대 초부터 최근까지 관람객이 30년이란 시간을 순차적으로 만날 수 있게 공간적 배치를 했다. 나는 작가의 제안에서 순환 구도 안에서의 선적 움직임이 마음에 들었다.
이설희 회화, 드로잉, 조각, 설치, 영상, 책 등 다양한 매체로 구성된 총 70여 점의 작품을 한 전시에서 선보이는 데 여러 가지 고민을 했을 것 같다. 작품 선정 및 전시 구성에서 중점적으로 고려한 부분이 있는가?
김범 전시 구성에는 당초 기획자인 김성원 부관장의 방향 제시가 큰 도움이 되었다. 내 작업은 마치 어떤 과도기의 실험/질문들처럼 많이 헤매고 찾아 다니는 과정의 연속이었기에, 시기적인 부분 이외 매체와 주제별로도 그 다양성이 보이도록 구성하고 싶었다. 아울러, 그 전반의 주제로 살아온 작가 한 개인의 행위와 그 결과물로서의 작업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설희 미술 작업을 회화부터 출발해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인지적 회화 연작, 수공예적 기법의 물성이 두드러진 이미지의 회화 등 20여 점이 이번에 돋보였다. 〈자화상〉( 1994 ),〈무제〉( 1995 ), 〈풍경 #1〉( 1995 ) 등이 한 공간에 정직하게 전시된 점, 세로가 약 5m인 〈무제(친숙한 고통 #13 )〉(2014 )를 보았을 때, 양쪽 벽에 함께 보이는 작은 그림 〈무제〉( 1995 ), 〈자동차 열쇠#3〉(2003 )는 작품 감상의 재미를 더했다. 당시 회화 디스플레이 아이디어를 묻고자 한다.
김범 그림도 내가 몇 가지 다른 방식과 내용으로 그려왔듯이, 전체적으로 나의 작업은 서로 분열되어 있기도 하고, 또한 다른 모습, 다른 매체의 작업끼리 서로 통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작품을 한 곳에 전시하는 것이 구성의 문제에서 쉽지 않게 느껴진다. 그 경우는, 작품들에 맞추어 구획을 적절히 나누고 벽을 세우는 등 원하는 대로 공간을 계획할 수 있어서 좋았다. 두 가지 성격의 그림들을 두 공간에 나누어 한쪽에 인지적인 형상의 그림들을 전시하되, 전체적으로 그림의 주제와 성격에 따라 거기에 공존할 수 있는 오브제 작품들을 가까이 또는 함께 전시하고 싶었다.
이설희 현재 준비 중인 전시/프로젝트가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월간미술대상에 한 말씀 부탁한다.
김성원 김범 작가가 역대급으로 최고의 ‘맛’을 내고 많은 분들에게서 감동적인 전시라는 평을 받을 수 있어서 기쁘다. 그리고 리움미술관이 작가의 이러한 여정에 동참하며 소정의 역할을 할 수 있어 그 의미가 각별하다. 미술 현장에서 전시는 타이밍이다. 필요한 시기에 적확한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리움미술관의 김범 개인전도 아마 이러한 맥락에서 월간미술대상을 수상할 수 있던 것이 아닐까. 그동안 김범 도록을 기다린 분들께 희소식을 알린다. 올 12월 초, 오래 준비한 김범 책이 나올 예정이다. 전시 프레임인 ‘회고적 파노라마’와 맥을 같이하지만 단순 도록이라기보다는 김범의 작업 30여 년을 조망하는 일종의 이미지/텍스트 앤솔로지와 같다. 1990년대 이후 김범 작업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비평 텍스트와 새롭게 커미션한 총 12편의 글이, 전시 출품작 및 글에 언급된 작품들과 모여 방대한 양의 콘텐츠로 구성된 전작 도록에 가까운 책이다. 마지막으로, 리움미술관은 2025년 2월 피에르 위그 개인전과 현대미술 소장품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많은 관심 부탁한다.
김범 오래도록 작품을 활발히 제작하지 못했지만, 여건이 허락하는 한 몇몇 작업들을 진행하고자 계획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STPI 레지던시에서 시각적 인지에 관련된 판화도 제작 중인데, 약 2년 후 싱가포르에서의 개인전 이외 계획된 큰 전시는 아직 없다. 불확실한 의미들을 바라보고 사는 작가로서, 수많은 전시들 가운데 나의 전시가 감히 월간미술대상을 받게 되어 무척 송구하다. 큰 격려가 되는 영광스러운 상을 받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또한 그 전시를 도와주신 모든 분께, 그리고 전시를 봐주신 모든 분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김범 : 바위가 되는 법》 리움미술관 전시 전경 2023 사진 : 이의록, 최요한 제공 : 리움미술관
4.조각 모음
문래예술공장 2023.9.2~26
인터뷰어 황재민(미술비평가)
기획자 박주원(독립큐레이터)
《조각 모음》 문래예술공장 전시 전경 2023 사진 : 월간미술
2023년 언폴드엑스 기획자캠프 선정 프로젝트. 조각과 기술이라는 주제를 공유하며 곽인탄, 안민환, 오제성, 장준호, 정성진, 주슬아, 홍자영 등 7명의 작가가 3D스캔/프린팅과 VR기술, 전통적 조각기술을 사용하여 다른 조각을 선보였다. 한편 이전까지 기술을 시도해보지 않았던 작가들도 기술을 작품에 접목해보면서 새로운 방법론을 찾는 실험적 전시로 기능했다. 또한 screenxyz, SUJANGGO수장고와의 협력을 통해 온오프라인에서 느낄 수 있는 조각의 성질을 전시 안에서 배열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최근 조각 전시에서 등장했던 조각에 관한 이야기에서 나아가 현재 조각가들이 기술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과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그 안에서의 고민까지 함께 드러냈다. 도록 필진으로 참여했던 황재민 미술평론가가 박주원 독립큐레이터의 목소리를 담았다.
황재민 스스로 ‘독립 큐레이터’라고 소개하고 있다.
박주원 나를 소개하면서 ‘독립 큐레이터’라는 호칭을 쓰기까지 무척 오래 걸렸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다. 내가 기획의 주체로서 활동을 오래 한 것도 아니고, ‘독립 큐레이터’라는 정체성을 제대로 개념화한 것도 아니고. 과거 한창 일을 할 때 임신을 하게 되었고, 건강이 좋지 않아져서 일을 정리하게 되었다. 그 이후 활동을 어떻게 지속할지 막막했는데, 정말 어쩌다 겹친 우연과 주변의 도움으로 글도 쓰고, 전시도 열 수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독립 큐레이터’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지속해보자고 용기를 내게 되었다. 여전히 부담스럽긴 하지만, 일단 해보자는 마음이다.
황재민 2023년에 《대발생》과 《조각모음》이라는 두 개의 전시를 열었다. 조각에 관한 전시라는 점에서 연관성이 엿보이기도 했다.
박주원 동일한 작가가 참여하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겹치는 고민도 유사했다. 《대발생》을 기획할 당시 작가와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때 흥미롭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처음 조소과에 들어가면 세우는 연습을 한다고 하더라. 땅에다 조각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 이렇게 세울 건지 저렇게 세울 건지. 그게 제일 중요하다는 거다. 그때 둘째 아이가 6개월이 채 안 되었을 때였다. 나는 아기띠를 하고, 갓난아이를 안고 작가를 만났다. 그런데 작가들의 이야기가 절절하게 와닿는 거다. 조각을 세운다는 게 육아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육아할 때 누운 아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이 많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나도 엄마니까, 아무것도 못 하는 갓난아이를 내가 안아주어야 한다. 이 사람들도 뭔가를 세우는 것에 인생을 투자하고/걸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지는 미술이라는 게 되게 추상적이었다. 그런데 조각을 세운다는 말이 내 이야기 같고,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미술이 부피와 무게를 가진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고 그게 되게 상쾌한 느낌이었다.
황재민 2023년 기획한 전시 《조각모음》으로 월간미술대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기획자의 입장에서 전시를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박주원 《조각모음》은 조각이라는 매체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을 고민한 전시다. 앞에도 말한 것처럼, 비슷한 시기에 《대발생》이라는 전시를 기획했다. 참여한 작가(곽인탄, 안민환, 오제성 )와 이야기를 나누다 세대에 따라 조각을 이해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대가 변하면서 사용하는 재료도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3D 같은 새로운 기술까지 들어오는 상황이다. 조각이 물질적인 재료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재료까지 포함하게 된 거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원본성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미술사에서는 원본성이라는 개념이 이미 사라졌다고 보지 않나. 그런데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전과 전혀 다른 방향에서 원본성에 대한 물음을 던져야 하는 순간이 생긴 거다. 이런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했다.
황재민 《조각모음》은 조각이 주제이기도 했지만, 기술이 주제이기도 했다.
박주원 참여 작가는 조각가라는 공통점을 가졌지만, 기술을 받아들이는 양상이 다 달랐다. 전시를 통해 3D 등의 기술을 처음 써보는 작가가 있는 반면 기술에 익숙한 작가도 있었다. 그런 차이가 재미있었다. 기술은 이미 정의된 단어처럼 보이기 때문에 낯섦을 느끼기 쉽다. 하지만 낯설어 하던 작가도 한번 기술을 사용해보면 자신의 작업과 어울리는 것을 자연스럽게 찾아서 활용하게 된다. 예술가는 원래 다양한 기술을 사용해왔는데, 기술이라는 단어 때문에, 무조건 새로운 걸 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겁을 먹었던 게 아닐까? 전시를 마친 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황재민 특히 3D 기술이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 같다.
박주원 처음엔 고민이 많았다. 3D 스캔이나 3D 프린팅이 이미 대중화된 기술이다 보니, 과연 신선할까 싶었다. 하지만 3D 기술을 적용해 나온 결과물이 언뜻 유사하게 보일지 몰라도, 작가마다 기술을 사용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게 중요했다. 똑같이 3D 스캔을 한다고 해도, 스마트폰을 이용할 수도 있고 전문 업체와 협업할 수도 있다. 동일한 기술을 활용하는 여러 방식이 있는 거다. 작가가 기술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사유하느냐에 따라, 재료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작업 과정부터 결과물까지 전부 달라진다. 동일한 기술일지라도 그걸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고 작업 과정에 반영했는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이다. 캔버스에 유화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유구한 역사를 갖지만, 시기마다, 작가마다 다른 스타일이 나타나는 나타나는 것처럼, 기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황재민 참여 작가를 선정할 때 신경 쓴 부분이 있었을까?
박주원 기술을 쓰는 것에 부담을 갖지 않는 작가. 그게 먼저였다. 기술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작가들도 있으니까. 3D라는 기술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고, 작업 과정을 변화시키는 것에 열려 있는 작가를 섭외하려고 했다. 자신의 매체를 얼마간 변형해야 하는 전시였기에, 여기에 거부감이 없는 작가가 우선이었다.
황재민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박주원 전시를 만들 때마다 작가에게 빚을 진다고 느낀다. 나 한 사람의 생각으로는 전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긴 시간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작업 중 생기는 고민을 공유하고 숙고해야 겨우 전시가 만들어지더라. 작가는 다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명확한 단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작가가 가진 재미있고 신기한 생각이 있는데,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느낌이다. 나는 전시를 만들 때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생각을 하나씩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황재민 최근 전시 《상응》(2024, 신한갤러리 )을 열었다. 안민환, 홍자영 등 《조각모음》의 참여 작가들이 함께했는데.
박주원 작가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하다 보니 전시가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상응’이라는 제목은 샤를 보들레르의 시 「상응(Correspondances )」( 1857 )에서 가져왔다. 여기서 보들레르가 보는 사람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과 자연이 나누어져 있는데, 자연은 상징의 세계다. 자연에 무수한 상징이 있는데, 그걸 시인이 해석해서 인간에게 전달해 준다고 말한다. 시를 읽으며 내가 작가를 바라보는 관점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전혀 볼 수 없는 어떤 것을 작가는 예민하게 바라본다. 《상응》의 주제는 풍경이었지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작가의 이런 바라보는 능력에 대한 것이었다. ‘자연(自然 )’을 풀이하면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인데, 풍경은 자연과 달리 어떤 시점이 전제된 단어다. 누군가의 시점이 있기 때문에 풍경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건데, 그런 의미에서 풍경이라는 주제어를 선택했다. 작가의 시점으로부터 배운 것이 많다. 내가 작가를 몰랐다면 몰랐을 것이 많다. 그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황재민 마지막으로, 요즘의 관심사가 궁금하다.
박주원 삶과 분리되지 않은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삶의 현장성을 담은 예술에 대해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조각 모음》 문래예술공장 전시 전경 2023 사진 : 월간미술
5.앉음과 일어섬의 상[象]에 대하어
김종영미술관
인터뷰어 신양희(아마도예술공간 큐레이터)
기획자 박춘호(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작가 연기백
연기백 〈대지 속으로〉 흙, 수집된 사물 외 가변 크기 가변 설치 2023 제공 : 김종영미술관
연기백은 김종영미술관 오늘의 작가 수상전에서 ‘근대’라는 키워드로 전시를 준비하며 그동안의 태도와 방법론을 성찰했다. 그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가로지른 사물과 기록을 소재로 작업해왔다. 전시에서는 2014년부터 수집한 버려지고 주변화된, 근현대를 지나온 실재 사물들을 소재로 삼아 조각, 설치, 사운드, 아카이빙 형식으로 표현했다. 연기백은 작업 과정에서 대상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수용적 태도(앉음 )와 능동적 태도(일어섬 )에 주목하며, 근현대 시각에서 중력(힘 )을 다루는 방식을 탐구했다. 박춘호 큐레이터는 연기백의 ‘근대’를 ‘앉음’과 ‘일어섬’이라는 상반된 술어를 나란히 두고 ‘다의적’이면서도 ‘중층적’으로 살폈다.『연기백 ( )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 (2024 )의 책임연구원이었던 신양희 아마도예술공간 큐레이터가 연기백과 박춘호 학예실장을 인터뷰했다.
신양희 연기백을 김종영미술관의 ‘오늘의 작가’로 초대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박춘호 우리 미술관은 매년 창작지원작가전, 초대 개인전, 오늘의 작가전, 김종영 전관 기획전을 진행한다. 조각과 입체 쪽에서 활동하는 모든 연령대의 작가를 격려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다. 김종영은 교육자로 있을 때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본인의 길을 갈 것을 누누이 강조했고, 당신도 평생 그런 태도로 작업했다. 그렇기에 김종영의 작가관(觀 )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작가들에 관심을 두고 전시를 추진한다. 오늘의 작가 참여 작가들의 연령대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이 많다. 미술계의 관심이나 지원은 적지만 가장 중요한 나이대라고 생각한다. 연기백은 작업을 진행하면서 방향을 찾아간다는 점이 독특하다. 청년 시절 떠돌이 생활도 해보고, 시류에 개의치 않고 자기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그런 여정을 겪은 또래 작가가 별로 없을 거다. 작업의 수준이나 질도 중요하지만 작가의 태도를 중요하게 본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꾸준하게 작업하고 있었기에 우리 미술관에서 초대 개인전을 갖게 되었다.
신양희 전시를 준비하면서 작가와 어떻게 소통했으며, 전시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박춘호 오늘의 작가전은 미술관의 신관 전관을 사용하기에 작가가 규모 있게, 원하는 대로 진행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고 크게 관여하지는 않았다. 작가가 원 없이 펼칠 수 있는 미술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주요한 역할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작업 과정도 상당히 치밀하고, 전시장에서의 연출력도 뛰어났다. 여러 작품이 다른 듯하면서도 묶이고, 개인적인 이야기 같은데도 또 한편으로 조각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중층적인 작업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신양희 오랜만에 미술관에서 연 개인전이다. 어떤 고민을 했는지 궁금하다.
연기백 미술관에서 처음 제안했을 때부터 고민을 많이 했다. 작업이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장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김종영미술관이 주로 조각을 전시하는 공간이고, 추상 조각을 하셨던 분을 기리는 미술관이기 때문에 그 부분도 고민했다. 그동안 했던 작업이 조각의 외연에 해당하는 일, 혹은 조각의 확장일 수도 있을 텐데, 그래도 조각적인 태도로 작업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물성을 다루거나 사람들과 프로젝트를 할 때 실행력을 중시한다. 물질이든 사람이든 직접 부딪치고 마주했던 부분을 생각하면서 조각적인 것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했다. 그즈음 그동안의 작업을 연구자들과 훑어보는 작가 연구도 함께 진행했다. 오십대가 되기도 했고, 전체적인 것을 살펴보게 되는 상황이어서 중간 정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관에 새겨진 김종영의 “…조형의 본질, 형체의 의미 등에 관한 그동안의 실험을 종합할 수 있다면 오십이란 나이는 결코 헛된 세월은 아닐 것이고 목표에 한걸음 가까워지는 셈이 될 것이다”라는 말이 와닿았는데 그런 심정이 나에게도 있었던 것 같다.
신양희 전시명이 ‘앉음과 일어섬의 상(象 )에 대하여’다.
연기백 근대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했고, 앉음이라는 수동적인 것과 일어섬이라는 능동적인 것 두 이야기 혹은 운동을 담고자 했다. 역사적으로 근현대에서 그런 움직임들이 있었던 것 같고, 현대미술 안에서도 그런 움직임들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어디에 치우쳐서 생각한다기보다는 두 작용을 바라본다는 생각으로 작업했다. 그동안 주변화된 이야기를 꺼내면서 작업을 많이 해왔다. 다양하다고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내가 보는 세상의 지형이 있고,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주변화된 운동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걸 한 지형에서 읽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당김과 밈’, ‘앉음과 일어섬’이 단순하게 이분화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의도적으로 두 가지를 같이 하려고 했다.
신양희 근대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것이 흥미롭다.
연기백 기획자와 근대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근대라는 개념이 대상화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했기 때문에 생각하는 데 도움되는 부분이 있었다. 근대, 현대, 컨템포러리와 같은 단어들이 동양과 서양에서 서로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경우에 따라 모호하게 사용되는 것 같았다. 나도 근대를 다시 사유하면서 그간 서양적인 사고로 바라보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박춘호 ‘modern’의 번역어로서의 근대와 원래 한자의 뜻으로 통용되던 근대가 한데 섞여 쓰이는 것이다. 마치 영어 ‘nature’의 번역어인 자연과 노장사상에서 이야기하는 자연이라는 개념이 부딪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번역어 쪽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연기백 내가 감춰놓은 키워드들이 있는데 그중에 조각적인 이야기가 있다. 김종영의 조각을 해석하는 여러 견해가 흥미롭게 읽혔다. 예를 들면 김종영의 1953년 국전 출품작 〈새〉를 방망이라는 구체성으로부터 새를 깎았다고 해석하거나 순수 추상 조각으로 보기도 하고, 서양 조각과는 다른 동양적인 의미에 대한 해석도 있었다. 나는 어떤 견해를 이야기하기보다 우연히 내가 빨랫방망이로 작업한 것이 있어서 〈새〉라고 제목을 짓고, 여러 해석에 대해 ‘사이를 줄인 새’라고 생각했다. 미술관의 양해를 구해 김종영 작품이 놓이던 좌대를 전시에서 사용했다.
박춘호 김종영의 작품에 대해, 내적 필연성이 있는 독특한 추상인데 서양의 추상과 비슷한 작품이 있어서 해석이 다양하다. 그분이 평생 서예를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예를 이해하는 것이 그분의 작품을 이해하는 첩경이라 생각한다. 서양미술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우세하지만, 그분은 그 시대에 동양과 서양 전체를 아우르려고 했다. 공통분모로 찾은 것이 추상이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서예에서 추상을 경험한 역사가 있고, 서양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추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서양이 환원적인 추상이라면 김종영의 추상은 동양철학의 생성론이다. 생성론에 입각한 조형론이 무엇인가를 찾아 나간 것이다.
신양희 작가의 조형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박춘호 중의적이기 때문에 여러 군데 발을 디디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기에 상당히 어려운 전략이다. 그걸 다 아우르려면 머릿속도 복잡하고 피곤할 거다. 작업이 상당히 다면적인데 기획하는 사람들이 한 면씩 보고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 특이한 면이다. 전위적인 작가이고, 원론적인 면에서 문제의식도 상당히 충실한 작가다.
신양희 작가로서 이번 전시에서 성취감을 느낀 부분과 아쉬웠던 부분이 있다면?
연기백 전시하고 나면 항상 아쉽다. 내 작업에 관심 있는 젊은 친구들이 이번 전시를 보고는 작가가 공간에 밀렸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젊은 층들의 공간에서 전시할 때 연배는 있지만 형식적이지 않아서 좋다고 하던 젊은이들인데, 이번 전시는 너무 차분해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또 누군가 이전에는 야성적인 면이 있었다면 이번에 언어적으로 정리되었다는 식으로도 이야기를 해줬다. 나는 이번에 종합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조금은 갈무리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동안 사물이나 사람들 이야기 안의 시공간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번에 나무로 만들어진 물건들을 태우는 작업을 하면서 사물 안 자연의 시간도 살피게 되었다. 나무의 결이나 나이테 등을 보면서 인간의 시간뿐 아니라 자연의 시간에 대해서도 고민해 본 시간이었다.
연기백 〈시간의 지연〉 3채널 사운드, 장판, 혼합재료 가변 크기 2023 제공 : 김종영미술관
신양희 앞으로의 활동이나 전시 계획을 말해달라.
박춘호 미술관에 있는 동안 내 50대는 참 즐거웠다. 김종영을 만났으니까. 내가 대학 입학하기 직전 퇴임하셔서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학과 사무실에 가면 〈전설〉 작품이 있었다. 젊은 시절 혈기도 왕성했고 민중미술이 불길처럼 번질 때여서, 그분이 그 시대에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작품을 하겠다고 했을 때는 딴 세상에 사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훗날 그분의 미술관에 와서 근무하게 될 줄을 몰랐지만. 그 시대에 본인이 감당해야 할 역할을 온전하게 했기에, 우리의 조각 예술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는 근간이 생겼다는 생각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여기 있는 동안 나도 그런 정신을 이어가려고 하고, 우리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작가들에게도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연기백 전시 작업 중 〈당김과 밈〉이나 나무 태우는 작업을 만들 때 즐거웠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것이 조형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실험을 더 하고 싶다. 그리고 도배 작업처럼 그간 해오던 작업을 좀 더 하게 될 것 같다. 기회가 되면 도배 작업은 외국에서도 진행해 보고 싶다. 작업의 외연을 더 넓히기보다는 내가 했던 일들을 하나씩 꺼내어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을 하게 될 것 같다. 지금까지 벌였던 일을 다시 바라보면서 정리할 것은 정리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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