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 문신과 함께한 최성숙

EXHIBITION & THEME

성대한 100주년 기념 전시가 열리기까지 최대 공로자는 마산과 숙대의 문신미술관을 이끌어온 최성숙 관장이다. 그로부터 문신의 생애와 작품 활동, 프랑스에서도 계속되는 추모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에서 만난 최성숙 명예관장 (사진: 박홍순)

최성숙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명예관장,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관장

먼저 100주년 기념전을 축하합니다. 감회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창원시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문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진행되고 있어요. 문신 선생님이 작업한 것을 보면 제가 열심히 안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일을 안 하면 직무유기지. 선생님과 함께 미술관 짓고 나서 바로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그간 많은 것을 했네요. 1999년 국내 대학미술관 최초로 문신미술관을 숙명여대에 설립했습니다. 2006년에는 독일월드컵을 기념해서 조각전 〈MOON SHIN in Baden-Baden〉과 함께 추모음악회도 열렸고, 2018년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에서는 〈문신과 최성숙이 함께한 40년: 예술과 일상〉을 열었어요. 2019년에는 아르떼문신을 설립해서 아트상품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정말 많이 하고 있죠? 혼자는 다 못해요. 창원시를 비롯해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프랑스 발카레스 시장님의 열의에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문신 선생님과 첫 만남은 1978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첫 만남부터 결혼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나는 독일 유학 중이었어요. 그러다 문신 선생님의 작업실에 갔는데 작업이 너무 좋았습니다. 첫 남편과 사별도 했고 선생님과는 나이 차도 있어서 일만 도와주려고 했어요. 문신 선생님이 결혼하자 하는데 처음엔 싫다고 했어요. 한국에서는 이미 내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나 있었고,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결혼을 하게 됐어요. 아버지께 1976년도 전시 카탈로그에 나온 문신 선생님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과 결혼할 거다” 했어요. 아버지가 사진 보시고는 “명은 길겠다” 하시고는 별말씀 안하셨어요. 집에서 가족들과 조촐하게 식사하면서 기도드렸어요. 그렇게 결혼했어요. 둘 다 초혼도 아니었고. 특별한 것이 없어요. 나는 맨몸으로 문신 선생님과 같이 마산에 왔어요. 나도 괴짜네요. 겁이 없었어요. 문신 선생님과 결혼 할 때 내가 콩나물 장사라도 해서 먹여 살릴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때나 지금에나 겁이 없어요.

예술가의 아내이자 작가, 미술관 관장으로서 희생을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관장님의 이야기를 해주세요. 문신 선생님은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라요. 작업만 해요. 갤러리에서 전시하자고 오면 내가 계약하고 살림을 다 했어요. 나는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그동안 내가 살아온 시간을 희생이라고 생각 안해요. 다 내 일입니다. 내 작업도 하고. 문신 선생님 작품도 관리하고 바쁘게 살았어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미술관을 짓기 위해 온 힘을 쏟았어요. 문신 선생님도 나도. 그리고 문신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유언대로 해나가고 있습니다.

프랑스 체류시절 문신 선생님 삶이 궁금합니다. 정말 힘들게 살았어요. 1961년 생계비도 없이 프랑스에 갔다고 했어요. 차에 기름이 없어서 걸어 다니고. 밥도 잘 못 먹고 했어요. 노동을 하고 돈도 못 받고 그랬어요. 고성(古城)인 라브넬성(Chȃteau de Ravenel)을 수리하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져 오랜 시간 누워있기도 했어요. 고성 수리가 추상적인 조각 작업을 하는 데에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입니다. 전시도 많이 했지만 재료비 자체가 비싸고 그래서 여유가 있는 삶은 아니었어요. 또 작업실에서 한번 도난을 당한 적이 있었대요. 그 후부터는 작업일기, 보내는 편지까지 모두 보관하고 기록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드로잉뿐만 아니라 원고가 잘 남아 있어요. 이걸 다 내가 보관하고 있다가 미술관에 기증했어요.

문신 선생님은 조각 작업을 하시면서 회화에 미련을 두시지 않았나요? 그 이야기 가끔 했어요. 그리고 같이 고민도 했어요. 그래도 미술관에는 조각이 있어야 했어요.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는 회화를 했던 시기니까 마산 바다를 많이 그렸어요. 도불 이후 다시 돌아오시고는 살아생전 마산 바다를 그렇게 그리고 싶어 하셨는데 그것을 못하고 가셨네요. 프랑스에서 잠시 병상에 누워있을 적 드로잉도 많이 했고, 또 조각 작업하기 전에 드로잉을 많이 했어요. 발카레스에서 〈태양의 인간〉을 작업하기 위해서 1년을 드로잉을 했다고 해요. 이 이야기는 작년, 발카레스에 가서 들었어요.

귀국하자마자 바로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신 것 같습니다. 미술관 건립 이야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미술관은 작은 타일부터 모두 선생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어요. 정원 바닥 타일 드로잉 봤어요? 선생님의 그간의 모든 예술이 다 들어간 곳입니다. 저도 선생님도 14년 동안 직접 산을 깎고 돌을 쌓아 만든 미술관이에요. 미술관 설립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하려면 시작도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귀국하자마자 바로 시작했어요. 내가 먼저 한국에 나와서 문신 선생님 작품도 팔고 내 작품도 팔고 그렇게 미술관 짓는 비용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선생님은 늘 고국을 그리워하고 고향 땅에 미술관을 세우는 꿈이 간절했어요. 1948년에 선생님이 돌을 쌓아 놓은 게 있어요. 선생님이 훗날 미술관을 짓고 싶어서 그걸 사두었다네요. 그 돌은 안 쓰고 내가 보관하고 있어요. 고향에 미술관 짓는 소망을 일찍이 갖고 계셔서 그걸 같이 꼭 해드리고 싶었어요.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에는 조각품 뿐만 아니라 미술관 건축을 위한 설계도와 작품하기 전에 그린 드로잉이 소장되어 있고 또 문신원형미술관을 2010년에 건립하여 116점의 석고 원형작품을 전시하고 있어요.

문신 선생님 작업의 특징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문신 선생님 작업은 ‘대칭’이 가장 큰 특징이라 생각해요. 모든 자연은 대칭이라 봤어요. 하지만 선생님의 작품은 완벽한 대칭이 아니에요. 양쪽에 차이가 있어요. 문신 선생님도 대칭으로 작업을 했지만 자로 재서 하지 않아요. 자연적으로 완벽한 대칭이 되지 않고 또 선생님도 자연스럽게 작업을 했어요. 그리고 선생님의 작품은 다 연결이 되어있어요. 1960년대 드로잉 이미지가 1980년대 조각 작품으로 만들어져요. 늘 기록하고 그려진 이미지는 조각으로 제작됩니다.

작품 재료를 흑단, 스테인리스 스틸로 선택한 연유가 있을까요? 힘들게 살면서도 가격이 비싼 흑단으로 작업했던 이유 중 하나는 흑단이 정말 다루기가 어려워서예요. 그래서 흑단으로 작업했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한국에서는 스테인리스 작업을 시작했어요. 또 큰 작업을 해야 하는데 빛에 따라 느낌이 다른 현대적인 재료를 선택한 것이에요. 제작비가 많이 들긴 하는데 조형물을 만드는 데 적합한 재료였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작품을 제작해서 기증도 하고. 미술관 하려면 조각을 계속 해야 했어요. 선생님은 재료가 달라도 마감을 정말 완벽하게 처리했어요. 정말 고된 노동 끝에 작품들이 나왔어요.

1988년 서울올림픽 작품 제작 당시 이야기를 해주세요. 마산 전국체전 때 조형물을 제작하려 했는데 무산됐어요. 그런 일 있고 나서 88올림픽기념 조각을 제작하게 되었어요. 그때 제작된 작품이 〈올림픽 1988〉입니다. 신동아에서 후원을 하고 그 당시 금성전선 공장에서 100일 넘게 작업을 했어요. 날짜도 다 기억해요. 9월 10일에 연못을 만드는데 일하는 아저씨가 그랬어요. “문신 선생님이니까 다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저도 매일 일하시는 분들 막걸리, 음료수, 식사 꼭 챙겼어요. 그렇게 고생하고 설치된 모습을 보면 지금 생각해도 감격스러워요. 스테인리스가 빛에 따라 변하는 신비로움, 하늘 높이 뻗어 오른 작품의 경이로움이 정말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선생님도 좋아하셨어요. 늘 도시환경과 조형물에 고민을 많이 하셨어요. 지금은 아쉽게 연못이 없어졌지만 그 연못까지도 선생님이 다 생각해서 만든 겁니다.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외에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아르떼문신 등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각각 어떤 곳인지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숙대문신미술관은 제가 관장으로 있습니다. 문신의 조각, 드로잉, 유화, 석고원형, 도자기, 유품, 자료 등 총 1,8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단일작가 미술관이에요. 숙대 이경숙 전총장님과의 인연으로 문신미술관 설립 계획에 따라 1999년 문신미술연구소를 개소하였고, 2004년 5월 10일 문신미술관을 개관했습니다. 개관 이후 다양한 기획전과 문신 전시를 열고 있어요.

㈜아르떼문신는 문신의 예술적 가치를 알리고 젊은 작가들과 함께 아트상품을 개발하는 곳입니다. 지역 미술가들과 프로젝트를 통해서 문화적 향유를 도모하기도 해요. 저는 아트상품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트상품 에디션을 만들어 문신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부담 없이 작품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흑단으로 만든 아트상품을 100개 한정으로 제작했어요. 컵받침, 열쇠고리, 드로잉한 그릇과 같이 다양한 아트상품을 만들었어요. 앞으로도 계속 아트상품을 개발할 거예요.

마지막으로 미술관 향후 계획과 작가로서 앞으로의 계획 말씀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문신 선생님의 뜻대로, 제가 할 수 있는 한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현재 창원시에서 잘 운영하고 있어 제가 특별한 계획을 하고 있지는 않아요. 다만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서로 협조하며 잘 이끌어가고 싶어요. 제가 암 수술을 두 번 했습니다. 지금 그래도 건강해요. 내년에 전시할 계획이 있어요. 그래서 계속 작업 열심히 하고 있어요.

정리=이혜민 객원기자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거장의 다이어리〉(4.27~10.26)
라브넬성 앞에서 문신과 최성숙 (제공: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야외정원 전경. 프랑스에서 영구 귀국 후 문신은 1980년부터 14년간 미술관 설계 및 건축에 매진했다 (사진: 박홍순)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상설전 〈Moon Shin 1922-1995〉 전경. (제공: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오른쪽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시공 현장에서의 문신과 최성숙. (제공: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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