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Curators’ Voice & Critique
《모두에게: 초콜릿 레모네이드 그리고 파티》
《김재관 기하학적 추상: 빛과 색의 그 울림 》
《유영하는 세계: Bed, Bath, Bus》
《내일도 만나》
Curators’ Voice & Critique
《모두에게: 초콜릿 레모네이드 그리고 파티》
수원시립미술관 4.15~8.24
장수빈 수원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크리스틴 선 킴 & 토마스 마더〈Find Face〉(사진 오른쪽) 싱글채널 디지털 비디오, 컬러, 무음, 비닐에 프린트한 벽화 9분55초 가변 크기 가변 설치 2021
이학승〈3층상가〉(사진 왼쪽) 혼합매체 523×490×372cm 2025 수원시립미술관 제작지원
그럼에도 ‘모두’를 말하는 일에 관하여
몇 해 전, 해외의 한 뮤지엄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온종일 걷다 보니 허리에 통증이 몰려왔다. 전시실에 있는 의자에 앉아 상체를 허벅지에 붙이고 휴식을 취하려던 찰나, 경비원이 다가왔다. 그는 단호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나의 움직임을 막았다. 당황했지만 침묵하지 않았다. “허리가 너무 아파 쉬려고 했던 건데요. 제가 만일 병원에 갈 정도로 아파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으면 어쨌을 거죠?”라고 응수했지만, 그는 동료 경비원들을 불러 상황을 키웠다. 당혹감을 넘어 불쾌한 기분이 들었고, “매니저가 누구냐”라고 물으며 과잉 대응이라고 항의했다. 경비원은 그제야 태도를 바꾸며 사과했다.
미술관은 나를 환대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통증을 해소하고자 했던 나의 몸은 교정의 대상이었다. 미술관은 오로지 그들이 ‘규범적’이라고 여기는 방식으로만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자의 신체만을 상정한 듯 보였다. 그곳에서 나는 허리가 아픈 관람객이 아니라, 통제해야 할 존재였다.
이후로도 그 사건은 종종 마음속을 떠돌았다. 미술관 종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전시실에서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고 여겨지며 강력하게 제지를 당한 사실이 어처구니없기도 했지만, 그 안에 속한 나 역시 언제든 그곳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모두’라는 표현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모두’는 언제나 아름답고 바람직하게 들린다. 그러나 ‘모두의 범주에 누가 포함되는가?’라는 반드시 정의해야 할 이 질문은 종종 명확히 정의되지 않아 왔기에, 오히려 책임 없이 반복되는 단어처럼 다가왔다. ‘모두’는 구조 밖으로 밀려난 누군가를 포용하는 듯 보이기 위한 상징적 제스처이자, 누구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음에도 모두가 고려된 것처럼 보이게끔 현실을 은폐하는 수사처럼 느껴졌다.
그날 이후 ‘모두’에 대한 회의는 뿌리 깊어졌다. 동시에 ‘모두를 위한 미술관은 불가능한 것일까? 만일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그 시도를 멈춰도 괜찮은 걸까?’, ‘그렇다면 큐레이터로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생각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질문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모두란 누구인가?’, ‘모두를 위한 미술관은 어떤 조건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전시는 이러한 고민에서부터 출발했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다시 보고, 무엇부터 바꾸어야 할지를 탐색해야만 했다.
공교롭게도, 미술관 개관 10주년을 맞아 ‘모두의 미술관’을 구현하는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미술관’이라는 이상을 구체화하기 위한 큐레토리얼적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전시의 구조뿐 아니라, 미술관이 그동안 축적해 온 관행을 되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무엇보다도 전시가 단순히 포용과 참여를 외치는 데 그치지 않고, 미술관이 스스로 성찰하는 과정을 수반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두’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동안 미술관이 어떠한 방식으로 위계를 만들어오고 무엇을 배제해 왔는지 고백해야만 했다. 누가 이 공간에 환대받으며 들어올 수 있었고, 누가 늘 경계 밖에 머물렀는가를 되묻는 일이 먼저였다. 관람객이 미술관을 어렵고 낯선 장소가 아니라, 재미를 발견하고 흥미를 찾아가는 곳이자 자신의 삶과 맞닿은 공간으로 느끼도록 만드는 일은 그다음의 과제였다.
그렇기에 우선으로 필요한 것은 미술관을 다시 들여다보는 작업이었다. 미술관은 오랫동안 권위를 중심으로 작동해 왔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일반적으로 전문가들의 판단에 따라 이뤄지며, 이 과정에서 ‘미술관에 걸맞은 작품’이라는 가치 기준은 자연스레 자리 잡아 왔다. 전시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전시 구성, 동선 설계, 해설문의 어조까지 모든 것이 전문가의 시선과 판단에 따라 조직되며, 그 절차에서 암묵적으로 ‘정답에 가까운 감상법’이 제시됐다. 이러한 운영 방식은 관람자의 정체성, 신체적 조건, 언어적 역량, 문화적 배경의 다양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채, 특정한 ‘모범적 관람자’를 전제하는 제도를 고착시켜 왔다.
천근성〈수원역전시장커피〉 테이블, 의자, 바, 철제 선반, 브라운관 TV, 커피 도구, 스피커, 형대미술 유튜브 채널 영상, 교환받은 드로잉, Suno AI가 제작한 수원역전시장커피 플레이리스트 가변 설치 2025 수원시립미술관 제작지원
《모두에게-초콜릿, 레모네이드 그리고 파티》 수원시립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제공: 수원시립미술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나니,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로서 다루어야 할 쟁점들이 점차 명확해졌다. 첫째, 미술관이 생산해 온 구조적 위계와 경직된 질서를 인식하고 이를 어떻게 비틀고 전환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둘째, 그동안 미술관이 충분히 배려하지 못했던 다양한 소통 방식은 무엇이었고, 그러한 방식들이 오늘의 미술관 안에서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지. 셋째, 미술관에서 주된 서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우리네 다양한 삶의 방식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마지막으로, 관람자가 전시실 안에서 실질적으로 개입하고 선택할 수 있는 구조는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지. 이 질문들을 네 개의 전시실을 통해 순차적으로 탐색하고자 했다.
전시를 준비하며 마주한 사실은 ‘모두’를 위한 접근이 단지 의지나 선언으로는 충족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 관람객을 위해 점자 캡션을 도입하고자 했지만, 그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점자 캡션의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도록 보행 유도 블록이나 점자 안내도를 함께 설치하고자 했지만,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 다른 예는 쉬운 글 해설문이었다. 어린이와 지체 장애 관람객의 접근성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필요한 작업이었지만, 동시에 쉬운 단어만으로 작품의 맥락과 비평적 의미를 충실히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동반했다. 전시 준비의 모든 단계는 포용을 추구하면서도 완벽한 포용에 도달하지 못하는 현재의 위치를 인식하게 되는 여정이었다. 그저 ‘좋은 시도였다’는 말로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다. 한계를 직시하고 인정함으로써, 더욱더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실천으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다짐한다.
그럼에도 전시가 열린 이후, 관람객과의 접점에서 작지만 분명한 가능성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전시를 취재하러 온 한 신문사의 학생기자단은 “쉬운 글로 쓰인 설명문이 있어서 작품들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고, 휠체어를 탄 채로 체험형 작품을 즐기는 관람객의 모습을 직접 마주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시장 공간에서 펼쳐졌던 참여형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미술관을 찾게 되었고, “평생 미술관에 갈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미술관에서 내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어 즐거웠다”라고 전했다. 무엇보다도 이 전시는 ‘모두의 미술관’을 완성한 결과라기보다, 관람객 각자가 ‘모두’의 이름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자문하게 만드는 장이었다. 그 질문을 통해 ‘모두’라는 말의 결은 보다 다층적으로 드러났다. 전시가 펼쳐지는 이 시점에서, 여전히 ‘모두’가 누구인지 묻고 또 되묻고 있다. 고려해야 할 ‘모두’의 범위는 계속해서 넓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지금은 그 단어를 회피하지 않으려 한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미술관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문턱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 각자의 서사가 무시되지 않도록 자리를 만들고 확장하도록 만드는 일, 그리고 그를 통해 타인의 현실이 흘러들도록 허용하는 일 — 바로 그 실천들이 우리가 ‘모두’라는 단어를 입에 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아닐까.
《김재관 기하학적 추상: 빛과 색의 그 울림 》
황창배미술관 6.2∼28
김복영 미술비평
〈律과 色 25-501〉(사진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릭 91×116.7cm 2025
김재관의 후기시대 기하추상회화의 파노라마
후기 기하추상의 새 변곡점을 찾아서
김재관은 자신의 기하추상을 그의 저서 『우연과 표현의 관계』(청주대 출판부, 1990)에서 보이는 세계의 우연성을 필연성으로 치환하려는 데서 찾고자 한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는 1996년 박사논문 「그리드의 형성과 해체」를 탈고하면서 이러한 생각의 논리적 틀을 확실히 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기하추상회화는 그 이후 한국현대회화의 주지주의 방법론의 ‘환원적 분석(reductive analisis)’이라는 굳건한 화맥을 성장시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의 독자적인 화론은 이후 초기 기하추상시대를 여과해서 21세기 오늘의 최후기에 당도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이르기까지, 특히 2000년대에 들어 평면과 방형입체는 물론 이를 셰이프 캔버스를 빌려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통인화랑전(2020), 청주시립미술관 기획초대전(2021), 일본 교토 소코갤러리 초대전(2022), 서울 흰물결아트갤러리 초대전(2024) 그리고 이번 황창배미술관 기획초대전(2025)에 이르렀다. 그의 일련의 여정은 서구 탈근대주의가 정점에 이르면서 미니멀리스트들이 지향했던 ‘리터럴 오브제’가 해체기를 맞는 시점에 서구 주류 관념론의 종언과 21세기 ‘글로컬리즘’의 시작과 때를 같이하면서 그 자신만이 가능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기했다는 데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그는 이번 황창배미술관 근작전을 앞에 두고 다음과 같이 언급함으로써 그의 후기시대 기하추상의 변곡점을 예고하고 있어 이목을 끈다.
“작품생활 58년을 마감하면서 작품인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진정한 예술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다루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이란 자연의 ‘창조적 과정’과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1
이 언급은 작가 스스로가 근작시대를 ‘위기’라고 말하는 데서 이 시기가 생애사의 일대 변곡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부각시킨다. 이는 그의 언급을 빌리자면 자신의 생애를 걸고 추진해 왔던, 이른바 ‘데카르트주의’를 떠나 ‘라캉주의’의 가능성을 재인(再認)하려는 절절함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그렇다. 그의 다음 언급을 보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하였지만 라캉은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곳에서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무의식적 욕망은 결코 소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술은 자신의 의식적 욕망의 틀을 해체시킬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2
〈律과 色 25-503〉 캔버스에 아크릴릭 80.3×116.7cm 2025
제공: 작가
《김재관 기하학적 추상: 빛과 색의 그 울림》 황창배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사진: 박홍순
그리드의 해체와 상태벡터의 변주에 의한 자연의 율과 색의 복원
그가 자신의 생애에 걸친 기하추상 파노라마의 종점에서 내놓은, 앞서와 같은 강하고 절절한 작심의 언급에는 한마디로 그가 반세기에 걸쳐 추진했던 예술창작에 대한 방법적 해체의 욕구가 묻어난다. 그건 마치 집을 지은 후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짓고자 할 때 ‘부지도(敷地圖)’의 수정을 각오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김재관이 근작전에 즈음해서 제기하는 변곡의 욕구는 무엇보다 그가 지금까지 신봉해온 것과는 반대로 반(反)데카르트주의를 강조하고 라캉주의를 소환하면서 ‘진정한 예술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데서 그 실상이 클로즈업되고 있다. 필자는 그 변곡의 크기를 그가 그의 전기시대에 근거 지으려 했던 치환의 근본 틀인 보이는 것의 배후에 있는 필연성의 해체적 욕구에 근접하는 것이 아닐까 추단한다. 그가 ‘결국 예술은 자신의 욕심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준거의 틀을 해체시킬 수 있을 때 좋은 예술이 가능해진다’고 말하는가 하면,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어려운 과제’라고 실토하는 데서 그렇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근작전에서 그가 말하고 또 보여주고자 하는 ‘어려운 과제’란 무엇일까? 그건 단언하건대 그가 지금까지 추진해 온 형상의 우연성을 필연성의 것으로 치환코자 했던, 이른 바 ‘환원적 분석’의 요체라 할 ‘그리드’요, ‘고대의 플라톤’이 신봉했던 제반 기하입체-4면체에서 20면체에 이르는 방형(方形)의 요소들이 아닐까? 한마디로 ‘정각자질’을 근본 요소로 하는 전 세기의 스키마(Schema) 요소들임에 틀림없으리라. 이렇게 해서 그는 방형의 기하학적 요소들이라 할 수가(數價)와 이것들로 이루어지는 상수(象數)를 둘러싼 해묵은 서구근대주의 창조신화로부터 결별을 시도한다. 이를 근작전의 몇몇 주요 작품명, 예컨대, 〈律과 色〉, 〈From Grid〉, 〈운명〉이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들이 시사하는 건 해체된 그리드를 배경으로 유희가능한 자연의 ‘율(律)’의 복원임에 틀림없다. 이는 결코 고전역학이 신봉했던 물(物)의 결정론적 기하학이 아니라 전사물(前事物)의 불확정성을 지향하는 양자기하학의 시학(詩學)적 ‘율’을 복원하려는 데 뜻이 있을 것이다. 이 경우, 그가 시도하는 기하학적 위상은 종래의 4차원을 떠나 사선(斜線)과 직선의 변주에 의한 ‘양자집합’으로 연산되는 7차원에서 9차원의 묘연(渺然) 그 자체를 시사하는 상태벡터의 차원임에 틀림없다.3 그의 근자의 시도는 이 의미에서 우리 현대미술에 주지주의가 여전히 건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환원적 분석이 방법적으로 위상을 달리해서 존재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 가능성이란 다시 말하거니와 데카르트 이후 근대주의가 가정했던 관념론적 그리드가 아니라 이를 해체한 이후에야 가능한, 이를테면 양자들이 만들어내는 상태벡터4들의 불확정성 원리를 기반으로, 요컨대 고전시대의 스키마를 초월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걸 강조한다. 이야말로 그의 최근작전이 보여주는 새 변곡점이자 새로운 시발이 아닐 수 없으리라.
1 근작전 「자작서문: 새로운 창조작업의 위기에 즈음하여」에서 번안
2 위의 「자작서문」에서 번안
3 김복영 「우리문화예술의 세계화기반연구(1) & (2)」, 대한민국예술원 『예술논문』 Vol. 54 & 55 2015 & 2016 우리 세계관의 「古記」가 내재하고 있는 ‘우주창조의 정보량 표’ 참조
4 이러한 상태벡터는 사선 밑 수직의 세 가지로 나뉘고 이것들의 전진과 후퇴의 위상에 따라 화면의 벡터가 서로를 자율적으로 조율하는 데서 체제가 이루어지는 데 특징이 있다. 이는 사물의 위치를 표시하는 고전역학의 벡터와 달리 양자입자들의 확률적 위상을 표시하는 벡터라 해서 양자과학자들은 이를 ‘상태벡터’라 칭한다. 이는 실수로만 이루어지는 고전역학의 벡터와 달리 실수와 복소수로 이루어지는 특성을 일반화한 용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W. K. 하이젠베르크, S. 호킹, R. 펜로즈의 학설 참조
《유영하는 세계: Bed, Bath, Bus》
세화미술관 4.17~6.29
권정현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김명범 〈키〉(사진 왼쪽) 혼합재료 가변 크기 2018
동시대 초현실주의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현실과 허구의 뒤섞임은 미술에 익숙한 주제다.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동원하는 초현실주의부터 과학적 논리를 토대로 상상력을 펼치는 SF적 작품들, 디지털 시대에 가짜 정보가 넘쳐나는 상황을 다루는 탈진실 주제의 작품들까지, 오늘날 현실과 허구, 실재와 가상의 혼재를 다루는 작품과 전시는 적지 않다.
세화미술관의 기획전 《유영하는 세계: Bed, Bath, Bus》는 그중에서도 초현실주의의 계보를 이어 환상과 현실의 혼재에 더욱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시는 부제가 암시하듯이 잠을 청하거나, 몸을 씻거나, 이동하는 등의 일상 속에서 문득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생각과 감각을 다룬다. 최근 디지털 미디어의 가상성이나 SF적 허구를 다루는 전시와는 달리, 《유영하는 세계》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의 ‘환상’이 일상과 뒤섞인 상황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특정 주제나 매체에 한정하기보다는, 전시 서문에서 언급하듯 “현실과 비현실의 혼재”라는 표현 아래 넓고 다양한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몇몇 작품은 주제뿐만 아니라 표현 방법론 측면에서도 초현실주의의 전통적인 기법들을 동시대적으로 전유하고자 하는 것이 보였다. 김명범의 열쇠가 꽂힌 사과 〈키〉(2018), 해바라기가 핀 전구 〈무제〉(2009), 나무가 자라는 양초 〈무제〉(2009) 같은 작품은 일상적 사물을 낯설게 조합하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적극 활용한다. 이러한 기법은 아주 오래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신선함을 일으키지 못할 법도 한데, 인공지능(AI)으로 생성해낸 기이한 디지털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평범한 사물을 이용한 고전적인 초현실주의 기법의 조각 작품은 오히려 낯설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김명범이 조각으로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시도했다면, 안지산은 회화로 초현실주의적 긴장감과 불안감을 보여 준다. 두 다리만 내놓은 채 먹구름을 타고 어두운 하늘을 유영하는 인물 〈유영〉(2024), 무지개가 뜯어져 나간 채 텅 빈 방 〈무지개와 부서진 의자〉(2018), 에어팟과 에너지 음료, 일렉트릭 기타 같은 동시대적 사물을 지닌 채 비바람을 맞고 있는 사람〈에너지 맨〉(2024), 〈비를 태워라 돌산에서〉(2024) 등 일상적 인물과 사물을 기묘한 상황에 배치하면서 당장이라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한 전조 상황을 연출한다. 특히 동시대 사물과 복장은 인물에 현실감을 불어넣는 동시에, 비일상적 상황과 결합하여 생경함을 증폭시킨다.
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환상, 공상, 꿈 같은 비현실적 요소가 다양하게 변주된다. 장성은과 심래정의 작품은 평범한 일상에 집중하여, 익숙함에서 마주하는 낯설고 기이한 감각에 주목한다. 장성은은 리본, 파도, 구름, 케이크로 이어지는 무의식적 흐름을 언캐니한(묘한) 사진 이미지로 연결하며, 생일이라는 행복한 기념일에 깃든 기이한 불안을 환기한다. 심래정의 설치와 평면 작품은 일상의 몽상과 내면의 불안이 뒤섞인 상황을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태도로 풀어낸다. 한편 로르 프루보와 파이퍼 뱅스의 작품에서는 동물, 식물과 환상적으로 결합하는 상상에 기반하여 세계의 확장을 시도한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유영하는 세계》는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환상적인 세계를 만들어 낸다. 안과 밖이 동일하여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는 문 김명범 〈벽 속의 벽〉(2025)처럼 그럴듯하게 구성된 세계 안의 비논리와 비이성의 작은 틈을 환상적으로 부풀린다.
오늘날 펼쳐지는 이 환상적 세계의 작품들은 자연스럽게 어떤 질문을 도출한다. 초현실주의가 전쟁 이후 사회적 혼란과 이성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되었다면, 이들 작품이 오늘날 환상과 꿈을 호출하는 기제는 무엇인가? 전시에서 문제시하는 작금의 상황은 무엇이며, 이들 작품은 무엇에 대한 반응인가? 결과로서 작품들이 환상을 소환한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자연스럽다.
이 질문에 대한 힌트가 몇몇 작품에서 언뜻 보인다. 로르 프루보의 〈매주 일요일, 할머니〉(2022)에서 할머니는 매주 일요일이면 ‘인간 새’로 변신하여 하늘을 난다. 나체로 자연을 누비는 할머니는 모든 속박을 벗어던진 것처럼 자유롭게 느껴지는데, 이 환상적 풍경이 수많은 할머니가 현실에서 마주했을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반작용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프루보가 아주 오래된 사회적 억압을 다룬다면, 파이퍼 뱅스의 회화 〈연못이 있는 풍경〉(2025)과 〈올리브나무는 무엇을 숨기고 있을까?〉(2023)는 미술사의 오래된 도상을 차용하면서 이를 현재적 문제로 끌고 온다. 뱅스는 누드화의 전형적인 도상을 빌려오되, 인간이 아닌 식물이나 과일, 혹은 상상의 생명체로 이를 그린다. 식물을 닮았으나 식물은 아닌 듯한 존재, 과일의 형상을 했으나 동물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덩어리 등을 통해 기존 누드화의 전통을 깨는 동시에 인간이 아닌 비인간 존재의 생명력을 상상한다. 한선우의 〈통로〉(2024)와 〈에코〉(2024)는 동양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전형적인 도상들을 어색하고 생경하게 사용한다. 전설이나 민담에 등장하는 초현실적인 서사가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을 연출한 것뿐만 아니라, 마치 동양적인 것을 오해하여 차용한 서구 문화처럼 동양적 요소들이 자리를 잘못 찾은 듯 뒤죽박죽 섞여 있다는 점에서 기이하다. 이 기이한 풍경은 그가 이방인으로서, 여성으로서 겪었을 경험을 흔적으로 남긴다. 이빈소연의 작품 또한 허구가 뒤섞인 서사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구조적 불평등을 건드린다.
이들 작품은 초현실주의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암시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을 보는 것은 중요하다. 이를테면 오늘날 동시대 문학과 미술에서 SF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것이 그간 배제되어 온 여성, 퀴어, 장애인, 동물, 식물 등 소수자의 서사이기 때문이다. 한편 가상현실이나 가상과 실재의 뒤섞임을 다루는 작업들은 변화한 기술의 상황과 그로 인한 미디어의 문제에 그 뿌리를 둔다.
장성은 〈불가능한 풍경 10〉(사진 오른쪽)
《유영하는 세계》 세화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사진: 양이언 제공: 세화미술관
그렇다면 《유영하는 세계》가 문제시하고자 하는 상황은 무엇인가. 오늘날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비논리와 비이성에 가까운 일들이 계속됨을 우리는 쉽게 동의한다. 그러나, 그 추상적 언급에서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오늘날 현실에서 허구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말이 함의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더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비현실적 현실’이라는 뭉뚱그려진 말 안에 담긴 문제 상황을 진단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왜 동시대적 초현실주의를 호출하는가? 20세기 초현실주의가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에서 나타난 증상이라면, 과연 오늘날의 초현실주의는 무엇의 증상인가? 무엇이 환상이 뒤섞인 현실을 그리게 하였는지, 그 원인을 함께 볼 때 이들이 한낱 공허한 꿈이 아닌 현실을 사유하는 은유가 될 것이다.
《내일도 만나》Critique
현대어린이그림책미술관 4.29~7.6
정소영 기자
《내일도 만나》 1부 ‘함께하는 오늘’
예술의 질문, 공존의 감각을 위해
‘읽는 그림’ 그림책 예술
포용성과 다양성을 키우기 위한 미술관의 실천 사례 중 하나로 ‘생애주기 고려’가 있다. 이는 노인과 어린이 등 관람객의 연령대를 고려한 전시의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 모든 작품에 관람 대상을 배려해 해석 방식을 달리할 수는 없기에, 미술관 전시는 관객과 작품의 조우에서 발생할 문제를 항상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전시 설명의 친절함을 빙자한 작품 해석의 오독과, 쉬움이 갖는 기만이 문제가 될 때가 있다. 이는 어린이 전시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부작용이다.
놀이와 감각에 중심을 둔 어린이 전시는 예술성이 배제된 체험과 학습 중심의 활동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그림책 전시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스토리를 통한 감정 이입과 해석, 공감에 집중한 그림책은 일러스트레이션이 회화와 분리되는 창작 형태로서 읽는 대상을 고려해 제작된다. 말이 없는 그림책(wordless)이나 성인을 위한 그림책 역시 이미지만으로도 핵심을 이해하기 쉽다. 존 데베스(John Debes)는 이러한 이미지를 보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시각적 문해력(visual literacy)이라고 말했다. 마틴 솔즈베리와 모랙 스타일스는 공동 저자로 참여한 『그림책의 모든 것』에서 존 데베스의 용어를 빌려 “점점 더 시각적인 세상으로 변하는 현대에서 시각 자료를 보고, 감상하고, 해석하는 기술과 같은 시각적 문해력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1고 이야기하며, 그러기 위해 그림책은 좋은 방법이 된다고 주장했다.
《내일도 만나》 전시는 이러한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환경을 주제로 한 그림책 작가들의 작품 170여 점을 그림책과 함께 전시했다. 출판 과정에서의 편집이나 글, 해석 없이 일러스트레이션 이미지가 전하는 직관적인 감상은 예술을 감상하는 이상적인 학습 방식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내일도 만나》 3부 ‘사라지지 않는 오늘’ 현대어린이그림책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제공: 현대어린이그림책미술관
비인간 주체로서의 환경
이번 전시를 주목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환경보호라는 일차원적 메시지가 아닌 ‘환경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이기 이전에 그 자체로 존재해 온 주체’였음을 일깨우는 비인간 중심적 관점에 있다.
팬데믹을 겪으며,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의해 생과 사를 오갔던 경험에서 출발한 비가시적 생명체에 대한 사유인 마이크로바이옴, 또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난 비생명체에 관한 신유물론의 확장은 최근 미술 전시에서 점차 두드러지는 경향이다. 전시의 첫 번째 섹션인 ‘함께하는 오늘’은 이러한 예술의 흐름 안에서 그림책을 통해 환경을 마주하는 우리의 태도를 점검하게 한다.
펠리치타 살라(Felicita Sala)의『나무가 되자』(2021)는 뿌리로 연결된 나무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과 공동체의 의미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분절된 화면 아래로 펼쳐진 나무 한 그루에 함께 살아가는 동식물은,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또한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듯, 함께하는 공동체의 힘은 자연 대상으로서의 나무 존재를 넘어 대상의 감정이입을 통한 위로를 전한다. 이는 앞서 말한 인간이 아닌 비생명체에 대한 관심과 중심의 이동으로서 신유물론적 관점이 반영된 예라고도 할 수 있다.
두 번째 섹션인 ‘사라지는 오늘’은 환경오염이라는 인간 중심 발전이 초래한 지질학적 변화, 즉 ‘인류세’에 대한 성찰이 드러난다.
이명애의 『10초』(2015)는 글 없이 이미지로만 구성된 그림책이다. 이명애는 인간과 자연, 멸종 동물의 교차를 통해 스노볼의 상하가 뒤바뀌는 구 형태의 세상을 그리며, 10초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는 변화의 무질서함과 유한함을 표현했다. 2021년 유네스코와 슬로바키아 문화부, 국제아동도서협의회(IBBY)가 후원하는 브라티슬라바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BIB)에서 황금사과상을 수상한 이명애는, 환경오염으로 형성된 인공 플라스틱 섬에서 살아가는 여러 생명체를 통해 철학적 사유와 예술적 깊이를 동시에 전달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번 작품 역시 한국의 전통 먹의 농담을 활용한 여백의 미와 한층 풍부해진 동식물의 색감을 교차하여, 어린이뿐 아니라 보호자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회화적 완성도를 지닌 작품을 선보였다.
마지막 섹션 ‘사라지지 않는 오늘’은 결국 인간을 위한 환경이 아닌, 공존의 관계 속 미래를 이야기한다. 체코 작가 막달레나 루토바(Magdalena Rutová)의 『나 문어(Já, chobotnice)』(2022)는 바다의 문어가 바다로 흘러든 쓰레기를 통해 인간 문화를 탐색하고 이를 재구성해 쉼터를 만든다는 서사로 구성된다. 환경오염에서 출발해 공동체와 돌봄의 관계로 확장된 이야기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공존의 가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전시장을 벗어난 실천
어린이 전시 특유의 낮은 작품 설치, 체험 중심의 구성, 다채로운 색감은 전통적인 화이트 큐브에 익숙한 성인 관람자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다. 하지만 그림책이라는 예술 매체는 직관적 해석과 감정을 환기시키는 힘을 바탕으로, 감상의 차원을 넘어 일상에서의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 예술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 ‘가장 처음 만나는 예술’이라 말하는 그림책 전시를 통해 바라본 환경은 교육적인 차원을 넘어서 더 이상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아닌, 동행자로서의 환경이라는 시각을 다시금 인식하게 한다.
1 마틴 솔즈베리, 모랙 스타일스 지음 서남희 옮김 『그림책의 모든 것』 시공아트 2012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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