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Curators’ Voice & Critique

《화조미감》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
《김정은: 스핀-스팟》
Curators’ Voice & Critique
《화조미감》
대구간송미술관 4.30~8.3
이랑 대구간송미술관 책임학예사

 〈향사군탄向使君灘〉종이에 엷은 색 23.3×30.7cm 18세기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꽃이 되어 새가 되어 | 나태주

지고 가기 힘겨운 슬픔이 있거든
꽃들에게 맡기고

부리기도 버거운 아픔이 있거든
새들에게 맡긴다

날마다 하루해는 사람들을 비껴서
강물 되어 저만큼 멀어지지만

들판 가득 꽃들은 피어서 붉고
하늘가로 스치는 새들도 본다

대구간송미술관의 첫 번째 기획전 《화조미감》은 16세기부터 19세기에 제작된 조선시대 화조화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전시이다. 꽃(花)과 새(鳥)는 우리 주변에 가까이 존재하며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사랑스러운 동반자이다. 전통회화에서 산수화나 인물화의 경우 성리학적 가치나 관념을 형상화한 예가 많다면 화조화는 시대나 가치를 초월해 보편적이며 일상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이들은 저마다의 형태와 색채, 향과 소리를 지녀 오감을 자극하는 ‘미의 화신’들로 새는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상서로운 존재로 여겨졌으며, 꽃은 피어나고 열매 맺는 특징으로 생명의 순환을 상징한다. 옛 선인들은 화조화를 감상하며 자연의 이치를 헤아렸을 뿐 아니라 도상이 지닌 상징성을 바탕으로 부귀영화나 자손번영 등 일상의 행복을 염원했다. 넓은 범주에서 인간의 탈속적 이상과 세속적 바람을 모두 충족시키는 화조화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화풍으로 발전해 왔으며 이러한 흐름을 이번 전시에 담고자 했다.

전시에서는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각 시대의 미감을 담은 화조화 77점을 3부에 나누어 소개했다. 먼저 1부 ‘고고(孤高), 화조로 그려진 이상’에서는 16~17세기에 활동한 문인들의 수묵화조화가 전시되었다. 조선 중기에는 왕실의 종친이나 혼란한 정치 상황을 피해 은거했던 선비화가들이 문인의 이상을 담은 화조화를 활발하게 제작했다. 이들 그림은 고요하고 담담하게 선비의 뜻을 담은 사의(寫意) 화조화로 이들이 추구했던 이상적 삶과 도덕적 가치를 보여준다.

2부 ‘시정(詩情), 자연과 시를 품다’에서는 화조화의 황금기를 이룬 18세기 작품들을 소개한다. 당시 한양으로 문물이 집중되고 도시 속의 원예가 유행하면서 현실 속 이상향으로서의 정원이 주거지에 조성되었다. 시속을 떠나 강호를 따르던 산수 애호사상은 자신이 선호하던 자연의 요소를 정원 안에 이식하는 방향으로 변해갔고 이와 더불어 산수 배경의 화조화도 정원풍경으로 대체되었다. 이 시기 화단에는 문인화가와 함께 뛰어난 기량의 화원화가들이 등장하며 화조화 제작에 황금기를 이뤘다. 심사정과 강세황, 이인상과 같은 문인화가와 더불어 직업화가인 최북과 변상벽, 김홍도는 생기와 정감이 넘치는 화조화로 명성을 얻었다. 전시공간에는 양태오 디자이너가 정선의 〈독서여가〉(1740~1741)를 참고해 초당을 재현하여, 초당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는 정선의 마음으로 그림 속 자연을 관람객이 감상할 수 있다. 3부 ‘탐미(耽美), 행복과 염원을 담다’에는 행복을 기원하는 길상적 의미와 장식성이 겸비된 19세기 화조화가 전시되었다. 18세기 말, 현실 정원을 대체할 만한 의례용 화조병풍의 수요가 늘어났다. 이들 그림은 시들지 않는 상서로운 꽃으로 길상적 의미와 장식성을 겸비해 중인층의 수요를 만족시켰다. 당시 화조 병풍의 유행을 이끈 장승업의 작품과 이를 다양하게 계승한 안중식, 조석진의 그림을 통해, 조선 말기 이후 근대 화단으로 이어진 화조화의 미감을 담았다.

《화조미감》 대구간송미술관 전시 전경 2025 ⓒ 태오양스튜디오

각 시기의 화조를 살피다 보면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변해가는 과정이 흥미로운데, 꽃이 아닌 그 꽃이 놓인 자리를 보면 당대의 자연관이 보이는 듯하다. 17세기 깊은 산속에 핀 꽃과 물가에 새가 주를 이뤘다면 18세기 화조에는 정원에서 키워진 원예식물이 대거 등장한다. 19세기에 유행한 기명절지화에는 화병에 꽂힌 꽃가지가 그려진다. 화조의 배경이 자연에서 정원으로, 다시 화병으로 옮겨지는 것은 식물이 점차 흙과 멀어지고 뿌리를 잃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그림 역시 화가의 뜻을 꽃과 새에 의탁해 동화되던 시기를 지나 점차 생태적 특징이나 회화미에 치중하고 종국에는 장식적으로 소비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미감은 각 시대를 대변하는 것으로 그 자체를 도덕적으로 판단하거나 우열을 나눌 수는 없다. 그러나 근대 이후 화조화의 존재감이 점차 약화되는 현실을 보며, 화조화의 본래 가치가 풍만한 생명성과 다양성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시를 통해 환기시키고 싶다.

한편, 이번 전시에서 정선과 김홍도의 작품을 ‘진경시대의 화조화’로 특별 공간에 소개한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진경산수화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두 대가는 화조화에서도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는데, 전시된 그림은 ‘진경화조’로 불릴 만한 작품들이다. 한국적인 화조화가 우리의 풍경과 정서를 생생하게 담아낸 그림이라면 이들 작품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정선의 『화훼영모화첩』은 최근 수리복원 과정을 거쳤고 이번 전시에 최초로 전체 화면이 공개되었다. 이 화첩은 정선의 만년작으로,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널리 알려진 정선이 산수화뿐 아니라 살아 생동하는 화조화에도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탐스럽게 열린 가지와 오이밭에 숨은 개구리와 두꺼비 등, 주변의 소소한 일상이 경탄을 자아내는 필치와 채색으로 되살아났다. 금강산과 같은 주요 명승지가 아닌 주변의 소소한 일상으로까지 진경의 범주가 확장된 사례를 보여준다.

18세기 전반기에 정선이 사생화풍 화조화의 흐름을 주도했다면, 김홍도는 사실적인 묘사력과 서정미를 담아낸 화조화로 18세기의 대미를 장식했다. 김홍도는 진경산수화 안에 새를 날려 보내듯, 향토색 짙은 산수풍경 안에 아득히 날아가는 새의 뒷모습을 즐겨 그렸다. 『산수일품첩』(18세기 말~19세기 초)에 실린〈향사군탄〉은 당나라 시인 이백이 친구를 떠나보내고 쓴 시의 내용을 그린 것으로 넓은 들판에 백로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없앤 한적한 자연에 작은 새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여운이 그림의 한계를 벗어난다. 이는 노승의 뒷모습을 그린〈염불서승〉(조선 후기)을 떠오르게 하는 그림으로 함축된 조형언어로 초탈한 듯한, 단원의 경지를 보여준다. 나태주 시인과 진행한 큐레이터 토크 시간에 이 그림을 「꽃이 되어 새가 되어」(2007)라는 시와 함께 감상했다. 시인이 병고 끝에 삶을 떠나보내는 마음으로 병실에서 쓴 이 시는 김홍도의 그림과도 잘 어울렸다. 시인은 고통과 상처를 자연으로 치유하고 떠나보냈다. 덧없이 흘러가는 인생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 다시 꽃은 피고 새는 날아간다. 그림과 시가 우리를 이렇게 위로하는 듯하다.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
아마도예술공간 6.27~7.27
정소영 기자

권은비 〈새로운 천사의 알레고리〉아크릴, 철, 모터, 와이어, 스포트라이트 조명 가변 크기 2025

자본의 표면 아래서

산업화 이래 자본시장이 낳은 여러 갈등과 문제에 예술도 예외일 수 없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 미국에서는 작가와 비평가를 포함한 예술인들이 창작자가 아닌 노동자의 신분으로 처우받는 제도를 비판하는 운동을 벌였다. 줄리아 브라이언 윌슨은 『미술노동자』(2009)에서 미술 활동가 루시 리파드, 칼 안드레, 로버트 모리스, 한스 하케의 작품과 활동을 예시로 들어 예술의 행동주의적 실천과 사회에 대한 개입 시도를 서술했다. 윌슨은 제작과 창작의 간극을 나타내는 미니멀리즘, 설문과 연구조사를 바탕으로 한 제도비판 예술을 소개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이중성을 예술 작품을 통해 되돌아보게 했다. 결국 형상주의 중심의 예술이 비가시성의 형태로 변화하게 된 배경에서 예술조차 자율성을 제한받는 사회 현실을 꼬집는다.

그렇다면 2025년, 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노동에 대한 예술의 해석과 조형적 변화는 어떤 양상을 띠고 있을까.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은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 중 하나인 사회적 분업에서 시작해 자본주의에 따라오는 기술과 동력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조형성의 실험을 전시로 담아냈다.

2022년, 2023년, 2025년 제빵공장에서 일하던 어린 노동자들이 지금이 21세기인지를 의심할 만큼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적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고용노동부의 보고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대한민국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한 이는 589명이다. 이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높은 지수로 산업재해 사고 전반으로 확장하면 더 높아진다. 안성석의 작업은 이런 대한민국 노동 현실을 반영하고 세계를 확장한다. 영상 작업 〈세계의 균형〉(2025)은 자본주의 논리에서 끊임없이 내몰리는 비참한 인간의 모습과 함께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꼭대기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현실을 꼬집는 다.

재료의 속성에도 시대가 반영된다. 김덕희는 산업사회의 대표적 물질인 석유에서 추출한 파라핀 왁스를 작품의 재료로 사용한다. 앞서 언급된 칼 안드레와 로버트 모리스가 산업 재료를 작품으로 소환하면서 전통적 개념의 예술과 산업화의 이면을 모두 해체했다면, 김덕희의〈레퀴엠〉(2025)은 파라핀과 철 소재의 탄생이 갖는 산업성과 더불어 소재를 이용한 조형적 형태의 확장을 보여준다. 거대한 기계의 절단면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톱니바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검은 파라핀은 강도의 차이와 함께 온도, 형태의 자유성이 갖는 소재적 특성을 이용해 견고한 자본주의 구조와 인간의 연약함을 물질적 특성으로도 표현했다. 반면 지하에 놓인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캐논〉(2025)은 바닥을 메운 차가운 흰색 파라핀 왁스 위에 절단된 손 조각을 놓았다. 조각에 관객의 온기가 닿으면 내부의 열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은 자본주의의 단절이 아닌 연대의 온기로 희망을 이야기한다.

김덕희 〈레퀴엠〉 파라핀 왁스, 염료, 철, 히터 239×105×105cm 2025

오로민경 〈선물, 선물 시간 가게–용기와 목소리가 얽히는 책상〉 테이블, 사운드센서, 혼합매체 75×60×100cm(테이블) 가변 크기 2025
제공: 아마도예술공간

시대의 악순환을 분리와 배척이 아닌 협력으로 끊어야 함은 오로민경의 작품에서도 읽힌다. 그의 작품은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관에서 생명의 교류와 회복을 전하는 스치는 방, 밝은 방, 어두운 방이라는 세 곳으로 나뉘어 구성된다. 밝은 방에서 누군가에게 용기를 전하는 목소리와 같은 작은 실천적 움직임은 스치는 방을 지나 어두운 방의 빛으로 표현된다. 바람, 빛, 소리와 같은 자본이 아닌 물질로 채워지고 움직여지는 세 방은 결국 인류가 잊지 않아야 할 인간 자체의 연결과 리듬을 만들어낸다.

권은비의 〈새로운 천사의 알레고리〉(2025)는 분업화된 노동의 결과물로 생겨난 비극의 신체가 산업 기계의 절단면과 같은 아크릴에 새겨져 빛으로 드러난다. 여러 조각이 모여 완성되는 게슈탈트의 합은 결국 불완전하고 상실된 감각으로서의 알레고리 개념을 조형에 포함한다. 반복적인 기계 움직임을 보이는 작품의 시각적 질서는 해독이 가능한 질서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해체된 감각과 단절된 노동의 파편들을 통해 판독할 수 없는 역사적 감각을 드러낸다. 작품명으로만 겨우 유추할 수 있는 이런 간극은 크레이그 오웬스가 ‘알레고리적 충동’의 이론에서 이야기한 의미가 분절된 채로 공존함으로써 해석을 유보하게 만들고, 도상학적 판독을 무력화하는 알레고리 전략의 실천이다. 결국 권은비의 작품에서 부분의 알레고리는 자본주의의 이탈, 소외, 부조리성을 이야기함으로써 작품으로서의 비평을 완성한다.

파열의 방식으로의 전시
전시를 기획한 신양희 큐레이터는 전시 서문의 제목을 “사회에 반응하고 개입하고 반성하는 조형들”이라 지었다. 이는 작품으로 현실을 재현하거나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사회적 구조와 인식의 틀을 해체하고 다시 쓰는 행위로 전환한 작품에 대한 집합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나의 전시가 시대를 대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반복적 형태의 전시 방식은, 결국 전시가 더 이상 상징적 조화나 자율성의 공간만이 아니라 알레고리적 파편과 불연속성을 통해 역설적으로 현실의 진실을 드러내는 스크립트1가 됨을 의미한다. 이는 이번 전시가 말하는 것과 같이 자본주의 시간 속에서 은폐된 고통의 신체와 노동의 역사들을 다시 호출하며, 오늘의 미술이 ‘읽히는’ 것이 아니라 ‘깨어지는’ 방식으로 세계에 개입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은 단절된 노동, 파편화된 신체, 균열된 감각을 통해 예술이 자율적 형식의 미학에 한정되지 않는 비평적 실천의 장이자 사회 구조의 해석학적 알레고리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사회적 목소리로서 오로민경의 작품과 같은 희망의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다. 변하지 않은 사회 가운데 변화한 조형의 해석은, 사회와 예술, 그 어느 곳에서도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는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의의겠다.


1 Craig Owens “The Allegorical Impulse: Toward a Theory of Postmodernism” October Spring Vol.12 The MIT Press 1980 p.84

《김정은: 스핀-스팟》
씨알콜렉티브 6.17~7.26
황수진 기자

《스핀-스팟》씨알콜렉티브 전시 전경 2025

진동하는 거리, 진동하는 기억, 진동하는 감각

기자 역시 그 거리를 걸어본 적이 있다. 주말이면 서울 한복판을 우회하는 버스들 탓에 어쩔 수 없이 차선을 따라 걷기도 하고, 때로는 인파에 밀려 걷기조차 힘들어 결국 지하도로 내려가야 할 때도 있었다. 김정은은 2024년 겨울, 동십자각에서 광화문 부근까지 길을 걸으며 낯선 풍경들과 마주했다. 하나의 길 위에서 충돌하는 목소리, 걸음을 멈추게 하는 바리케이드, 길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움직임, 신호등의 빛과 응원봉, 안전복 같은 현장의 색채, 그리고 도심 곳곳에 설치된 CCTV까지 이 거리의 감각은 일종의 진동이자, 축적된 감정의 흔적에 가깝다. 김정은의 개인전 《스핀-스팟》은 바로 그 감각에서 출발한다. 걷는 행위, 공간을 읽는 방식, 그리고 그 속에 남겨진 익명의 기억을 시각화한 전시다.

진동 1
전시장에 들어서면 높낮이가 다른 펜스와 구조물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마치 지도 위의 기호처럼, 이 구조물들은 도시의 물리적 경계와 이동의 제약을 시각화하는 상징체계로 작동한다. 걷는 이의 동선을 유도하거나 막고, 때로는 우회하거나 이탈하게 하면서 통제와 규율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몸으로 체감하게 만든다. 원래 이들은 도시의 질서를 구성하는 익숙한 기물이지만, 작가는 비일상적인 거리의 풍경 속에서 펜스, 경계석, 회전문처럼 도시를 구획하는 구조물들을 민감하게 포착해 전시장 안으로 끌어온다. 그리곤 이를 원래의 쓰임에서 살짝 비틀어 놓는다. 땅에 단단히 고정돼 있어야 할 구조물이 공중에 떠 있고, 반듯하게 세워져야 할 것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식이다. 이처럼 조금씩 어긋난 구조물들은 관객의 동선을 교란시킨다. 어떤 이는 그것을 통과하고, 어떤 이는 에둘러가며, 자연스럽게 몸으로 반응한다. 그렇게 전시장을 걷다 보면 어느새 이곳에 감도는 미묘한 불편함과 긴장감, 그 진동의 정체가 도시 구조 속에서 마주해온 익숙하지만 낯선 감각임을 깨닫게 된다.

진동 2
김정은은 오래전부터 도보 이동자로서 도시를 경험해 온 감각을 작업의 핵심 동력으로 삼았다. 작가는 자신의 보폭, 반복되는 경로, 특정 장소에서의 개인적 기억을 모눈종이 트레이싱지, GPS 데이터로 기록하며 ‘셀프 매핑(self mapping)’을 시도해왔다. 이번 전시 역시 걷는 신체의 비물질적 흔적들을 따라간다. 다만 이번에는 그 지도를 작가 개인의 경험에 한정하지 않고, 도시를 구성하는 수많은 익명의 몸들로 확장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공공 CCTV 영상을 바탕으로 ‘블롭 트래킹(blob tracking)’ 기법을 활용한다. 이는 영상 속 특정 색상과 밝기값을 가진 픽셀 덩어리(blob)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방식이다. 구현 과정은 기술적이면서도 수작업을 수반한다. 작가는 영상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과 차량, 신호등의 흐름을 트레이싱지에 하나하나 마스킹하며 추출했고, 이 선들을 바탕으로 코드를 구성해 다시 시각화했다.

그 결과 흰 화면 위를 떠도는 푸른 점의 떨림은 도시의 시간과 공간, 감각이 남긴 유령 같은 흔적들을 호출한다. 이 지도는 더 이상 단일한 개인의 경로가 아니라, 도시를 구성하는 수많은 익명의 몸들이 만들어낸 미세한 진동과 흔들림, 방향 없는 감각의 흐름으로 이루어진다. 작가는 블롭 트래킹을 통해 CCTV 영상 속에 흔적으로만 남은 도시의 떨림을 파란 점으로 되살림으로써, 통제된 질서와 구조 안에 가려졌던 신체의 움직임과 감각의 잔상을 드러낸다. 이는 도시 공간에 남겨진 보이지 않는 흔적들을 공동의 기억으로 소환하려는 시도이자, 시간과 공간, 감각 속에서 여전히 생성되고 있는 사건의 상태를 시각화하려는 작업이다.

〈드리프트 서킷 6〉 LED TV, 편광필름, 아크릴 패널, 모터, 스틸 12분 단채널 반복영상, 사운드 115×85×25cm 2025 《스핀-스팟》
씨알콜렉티브 전시 전경 2025 제공: 씨알콜렉티브

진동 3
전시장 곳곳에 스며든 파란색은 〈블루 닷(Blue Dot)〉(2018~)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놓이며, 하나의 ‘장(場)’이자 ‘지대(zone)’로 작동한다. 작가가 밝히듯, 파란색은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물리적 현상인 ‘레일리 산란(Rayleigh scattering)’에서 출발한 색이다. 초기 작업에서 파란 점은 작가 자신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자가 추적 기호였으나, 이번 전시에서는 그 점들이 흐트러지고, 겹치고, 떨리며 하나의 지대로 확장된다.1 파란색은 조형의 표면이자 감정의 배경으로서 전경을 이룬다.

이 파란색은 감시 카메라나 열 감지 장비의 화면처럼 통제 시스템의 시각적 언어를 떠올리게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 감시의 색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비틀고 교란함으로써 감시에 스며든 감각을 증폭시키고, 동시에 그 틈에서 벗어난 움직임의 흔적, 흐릿하게 남은 잔상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전환한다. 전시장 한가운데에는 사람의 형상을 추적하는 듯한 스마트폰이 걸려 있으나, 그 기능은 꺼진 상태다. 작가는 이 파란색이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으면서, 관찰되는 동시에 흐릿하게 벗어나는 상태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2 그리하여 이전의 ‘블루 닷’이 도시를 마치 위성에서 바라보는 시선이었다면, 이번 전시의 파란 지대는 도시 내부에서 진동하는 몸의 흔들림, 곧 신체적 감각과 정동의 밀도로 작동한다.

이번 전시는 작가 개인의 이동 경험에서 출발한 셀프 매핑에서, 도시 속 공동의 감각과 집단적 기억의 차원으로 이행하고자 하는 의도를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도로 위 통제된 질서 속에서 반복적으로 축적된 불안과 갈등의 풍경은, 작가의 작업 안에서 하나의 고정된 사건으로 수렴되기보다는 끊임없이 진동하며 호출되는 감각의 잔여로 남는다. 전시장에 구성된 지도는 이러한 감각의 잔여를 구조화한 장치이자, 관객의 몸을 움직이게 하고 멈추게 하며 때로는 머뭇거리게 만드는 긴장의 환경이다. 펜스와 회전문, 감시 시점으로 변형된 조형물, 실내를 감싸는 파란 조도는 마치 무언가를 둘러싼 통제 구역에 진입한 듯한 인상을 남기지만, 이 감각은 결코 고정되지 않는다.

질서는 작동하는 동시에 새어 나가며, 그 틈 사이로 감정의 흔적과 예외의 움직임이 흘러든다. 미셸 드 세르토가 “질서는 체(sieve)와 같다”고 말했듯, 모든 질서에는 걸러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스핀-스팟》은 바로 그 빠져나간 것들인 도시의 뜨거움, 팽팽한 긴장, 불안정한 열기, 그리고 일상에서 돌연 발생한 비일상의 사건들을 따라간다. 작가는 이 예외의 순간을 붙잡고 그 흐름과 진동을 따라 감각이 미끄러지고 흘러가도록 하나의 장을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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