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GHT & ISSUE

아트스펙트럼 2022

6년만에 돌아온 리움미술관의 청년작가전

리움미술관은 2022년 첫 전시로 〈아트스펙트럼 2022〉를 열었다. 젊고 역량 있는 작가들을 주목하고 지원하기 위해 시작한 〈아트스펙트럼〉은 2001년 호암갤러리에서 청년작가 서베이 전시로 시작해 변화를 거듭하며 현재까지 맥을 이어왔다. 2016년 이후 6년만에 다시 문을 연 〈아트스펙트럼 2022〉에는 김동희, 김정모, 노혜리, 박성준, 소목장세미, 안유리, 전현선, 차재민이 참여했다. 리움미술관은 5월 중 아트스펙트럼 작가상 수상자 1인을 선정할 예정이며, 전시는 7월 3일까지 진행된다. 《월간미술》은 각자의 서사를 하나의 공간 안에 풀어낸 여덟 명의 작가와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나무를 만지는 세미, 혹은 혜미 - 소목장세미

소목장세미의 본명은 유혜미다. 조소과를 막 졸업했을 때 그는 동기들과 구산동 슈퍼집 지하에 작업실을 얻었다.
좋은 가구는 비쌌고, 공장 가구는 눈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작업실 옆에 있던 목재소에서 저렴한 나무를 사다가 직접 테이블과 책장, 2층 침대까지 만들었다. 친구들이 그 가구를 얼마에 살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작가는 처음으로 가구를 만들어서 팔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때부터 혜미는 소목장 세미가 되었다. 누군가는 작가가 요원하고 배고픈 조각가의 길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고 말하겠지만, 작가는 분명 고난도의 노동력을 요하는 목공 작업을 통해 여성 예술가이자 소목장으로서 자신을 단련하며 새로운 예술적 행위와 사유를 만들어냈다.

전시공간의 중앙에 자리 잡은 〈체력 단련 활동장〉은 나무로 만들어진 기구로 이루어진 설치작업과 여성 서커스 아티스트가 곡예를 하는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커스 아티스트의 퍼포먼스를 통해 일반인이 할 수 없는 곡예 기술로 이미 한계를 넘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인간은 어느 날 짠   - 한계를 넘은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서킷으로 단련된 인간이다.” 작가의 말에서 우리는 유추할 수 있다. 서커스 아티스트의 신체와 움직임은, 나무를 다루는 자신의 몸을 단련하며 작업의 한계를 넘어가고 있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소목장세미〈체력단련활동장〉 혼합매체 600x800x800cm 2021~2022 Ⓒ소목장세미

회화가 공간에 스며들 때 - 전현선

전현선의 작업은 벽에 걸린 전통적인 의미의 회화 작품이라기보다 공간을 구성하는 건축 요소와 합일된 공간의 일부에 가까워 보인다. 공간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며 ‘그림벽’, 혹은 ‘그림기둥’이 되어 장소 특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작가의 회화는 예상 가능한 감상의 방식인 관객의 몰입이 아니라 자유롭게 형태를 변형하는 시도로서, 캔버스의 평면성과 공간  -  사물 사이의 긴장감을 내재하고 있다. 〈나란히 걷는 낮과 밤〉과 〈두 개의 원기둥과 모서리들〉은 공간 속에서 크게 서로 마주보고, 그림벽의 그림 앞 / 뒷면이 서로 불완전한 대칭을 이루는데, 각각의 작업이 서로를 반영하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한다. 관객들은 정적인 감상이 아니라 거대한 그림 속을 가로지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림을 그릴 때 화면 속에 규정하기 어려운 틈과 간격들을 남겨두려 한다. 회화가 흰 벽에 속하지 않고 그 자체로 공간 속의 벽이 되었을 때, 회화가 조금 더 자유로운 자세로 서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그의 회화는 전시 공간의 틈새를 자유자재로 채워가며 관객의 시야를 벗어나는 새로운 시각적 경험 그 자체이다.

(사진 왼쪽부터) 전현선
〈손잡은 모서리2〉 캔버스에 수채 170x40cm( 각) 2021
〈손잡은 모서리1〉 캔버스에 수채 170x40cm( 각) 2021
〈나란히 걷는 낮과 밤〉 캔버스에 수채 590x400cm 2021

공간과 조응하는 건축적 설치 - 김동희

김동희의 〈리버스 마운틴〉은 가벽, 검은 기둥, 벤치, 핸드레일, 조명, 위치표지, 동선, 장소등록, 웹상의 비디오, 지정된 시간에 작동되는 블라인드로 이루어져 있다. 리움미술관이라는 건축물이 가진 요소를 드러내기 위해 이전 전시들을 위해 막았던 천장을 걷어내 아주 높은 천고를 확보했고, 전시가 열리는 전시장의 구조를 층층이 살펴보면서 건물 안에 건물이 떠있는 것 같은, 렘 콜하스의 조각처럼 느껴지는 ‘블랙박스’를 작업의 중요한 요소로 삼았다. 이전 전시들을 위해 가려놨던 천장을 걷어내어 거대한 검은 구조물의 입체감을 되찾고 바깥 건물 외벽을 두른 창을 통해 자연광이 전시장 내부까지 들어오도록 계획했다. 그다음, 전시를 위해 임시로 세우는 가벽들의 위치와 각도를 일부 조정해 관객이 깊은 골짜기를 지나는 듯한 경험을 하게 했다. 이 작업은 작가가 계획한 구조물보다는 그 구조물을 통과하면서 보이는 전시장 내부의 풍경에 방점이 찍혀 있다. 검고 하얀 구조가 교차하는 풍경, 벽 구조물 너머의 빛을 보거나 잠시 앉아 다른 호흡으로 전시장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이 작업이 전시 기간 동안 정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리움미술관의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계정을 전시장 삼아 물리적인 작업 주변의 정보들을 불특정한 주기로 올릴 예정이고 전시기간 내 임시로 정해둔 시간에 블라인드가 열리고 닫힌다. 해의 각도에 따라 작동하는 시간은 지속적으로 변경되며, 날씨가 맑은 날에는 빛이 검은 벽면과 전시장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감상할 수 있다.

김동희 〈리버스 마운틴〉
가벽, 검은 기둥, 벤치, 핸드레일, 조명, 위치표식, 동선, 장소등록, 웹상의 비디오, 지정된 시간에 블라인드 작동 가변크기 2022 Ⓒ김동희

지명할 수 없는 경험의 기록  - 차재민

〈네임리스 신드롬〉에는 병명을 알지 못하는 질병을 겪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작품은 내레이션으로 전달되는 여러 래퍼런스를 통해 정의되지 않는 질병을 앓는 여성들이 사회적, 감정적, 신체적으로 어떠한 통증과 편견을 겪어왔는지를 이야기한다. 작가는 2009년부터 2016년까지는 작업의 주제로 자본주의의 일반을 다뤘지만, 이후부터는 자본주의와 돌봄, 질병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실은 내 가족의 질병과 간호 경험으로 인해 이러한 주제로 빨려 들어왔다. 〈네임리스 신드롬〉은 나의 어머니와 주변의 여성들, 그리고 나 자신이 겪고 있는, 진단받기 어려운 증상으로부터 시작된 작업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처럼 〈네임리스 신드롬〉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 맞물려 신체와 정신의 관계, 신체라는 사적 공간  -  이미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작업의 주요 레퍼런스도 인상적인데, 이는 앤 보이어의 책 《언다잉》과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책 《징후들:  실마리 찾기의 뿌리》 등이다. “〈네임리스 신드롬〉은 ‘언어가 필요한 세계’를 다루고 있기에 ‘텍스트’와의 만남이 중요한 작업이었고, 내레이션은 이 작업의 리서치를 하면서 주워 모은 문장들로 만든 구조물”이라고 작가는 설명했다. 영상 뒷부분에 각주를 다는 작업에 신경을 쓴 이유는 자신이 직접 쓴 문장이 아니라, 마주친 문장들을 가져와 직조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작가는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점점 축소되는 무지와 미지의 영역을 보존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모순을 찾는 연구를 지속할 예정이다.

 차재민 〈네임리스 신드롬〉 싱글채널 비디오 4K 24분 ⓒ차재민

관객의 체험이라는 비물질적 자산  - 김정모

관객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데 쓴 시간만큼 작품의 지분을 받을 수 있는 〈시간   -   예술거래소〉는 작가의 이전 작업과 마찬가지로 완성된 결과물을 제시하기보다는 전시 기간에 불특정 다수와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작가가 관객의 참여를 통해 비로소 작품이 완성되는 형태의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2015년 여름에 참여했던 베를린 레지던시 프로그램이었다. 스페인 출신 퍼포먼스 작가 디에고 아굴로(Diego Agullo)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리더를 맡고 있었는데, 프로그램이 종료하는 날 전시 대신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형태의 퍼포먼스를 진행해 볼 것을 제안했다. 퍼포먼스 종료 후 작가는 자신이 직접 촬영한 사진의 뒷면에 관객들이 빼곡하게 적어놓은 글을 발견했다. 그 글을 읽었을 때, 작가는 비로소 이 작업이 완성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간  -  예술 거래소〉 역시 관객들이 줄을 서고 계약서를 작성하는 행위를 전제로 하는 관객참여형 작업이다. 작가는 “자본과는 상관없이 관객 모두가 평등하게 대기 시간을 통해서만 미술작품을 거래하는 경험을 제공하고 있고, 그 경험 또한 일종의 미적 체험”이라고 말한다. 이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상당한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는 리움미술관이라는 점도 이 작업의 주제를 강조하는 요소다. 물론 이 작업이 특권을 전제로 하는 미술품 거래와 소장, 미술시장의 개념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작업이 관객에게 제공하는 계약서는 분명 “관객의 미적 체험이라는 비물질적인 자산” 으로서 미술관과 관람자의 관계, 미술품과 소장자의 관계를 재고하게 한다.

김정모 〈시간-예술 거래소〉관객의 참여와 시간 가변크기 2022 Ⓒ김정모

모든 것은 시에 저항한다  - 안유리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과 삶을 이어가는 네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스틱스 심포니(Styx Symphony)〉는 역사적 사건, 신화와 설화 그리고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해 온 작가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과거에 발생한 사건들이 현재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충돌하는가를 탐구할 때 작가가 가장 중요한 매개로 사용하는 것은 시다. 작가는 “문장으로서의 ‘시’가 아니라 사운드와 이미지를 불러오는 이야기의 발화지점”이라고 말한다. 〈스틱스 심포니〉는 4명의 여성 시인의 문장들과 4번의 시기에 발생한 역사, 정치적 사건이 얽혀 있다. 4명의 시인은 20세기의 주요한 사건들의 경험을 시어로 남겼다. 이들의 시어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 우리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 오래된 시어를 우리의 현재와 엮어가면서, 작가는 존 버거가 《아픔의 기록》에서 썼던 문장을 떠올렸다. “시는 사실 앞에서 무력하다. 무력하지만 인내력을 잃은 채 무력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시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안유리 〈스틱스 심포니〉 2채널 영상설치 15분 51초 2022 Ⓒ안유리

사건의 틈새에 적힌 이야기들 - 노혜리

노혜리 작가의 〈폴즈〉는 거대한 사건이 개인의 삶의 부분들과 겹쳐지는 지점들을 보여준다. 거대한 사건이나 거시사 또한 결국 여러 사람의 결정과 선택이 모여 생긴 사건이고 직접적으로 개개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퍼포먼스, 조각적 오브제, 연계 영상으로 구성된 〈폴즈〉는 각각 개별적인 작업의 나열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작가는 퍼포먼스가 조각적 오브제 또는 전시 설치에 부수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했다. 퍼포먼스 역시 말과 사물, 움직임이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되 어느 것 하나가 주가 되지는 않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작가는 이처럼 역사와 개인, 거시와 미시, 공과 사, 밖과 안 등 일반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과 상대적으로 소소하거나 이차적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의 ‘사이’에 주목했다. 주된 것과 부수적인 것으로 가르는 이분법, 사적 서사를 넘어 사회적 이슈를 다뤄야 한다는 흔한 이야기, 더 우선순위의 가치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구조에 대한 의문이 작업의 시작점이 되었다.

노혜리 〈폴즈〉 2022 혼합매체 가변크기 Ⓒ노혜리

개인적인 동시에 역사적인 무대 - 박성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다섯 글자를 크게 인쇄해서 비싼 액자에 넣어 걸어둔 집은 과연 화목할까? 아무도 이미 가진 것을 갈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지나친 강조는 되레 결핍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작가의 오브제와 연극적 무대는 우리의 역사와 개인적 경험의 틈새를 파고드는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경험과 감정 그 자체를 상징한다. 빗자루, 자개장, 유리 조각이 꽂힌 담벼락, 병풍, 재떨이와 같은, 용도가 명확한 사물로서의 정체성과 근대의 역사적 상흔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물건들과 사운드는 개인적인 경험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작업에서는 현재진행형인 세대와 계층 간 갈등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엿보인다. 각자의 경험이 작품을 감상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감안했을 때, 10~20대 관객들은 이 작업의 의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세대와 계층의 갈등과 몰이해를 전제하는 작업이지만, 관객들의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경험과 인식의 충돌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박성준 〈가화만사성〉인터랙티브 설치 혼합매체 가변크기 2022 Ⓒ박성준

염하연기자
사진 박홍순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 기사 자세히 보기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월간미술》 2022년 4월호 월간미술  ARTIST REVIEW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