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ST]
.
.
.

Lee Woosung

.

.

“얇은 천에 옮겨 그린 그림들이 당신의 마음에 닿을 수 있기를. 제가 본 것을 담기에는 그림의 크기가 여전히 작습니다.” 작가 이우성이 보내온 노트자료에 적힌 이 문구가 짙은 인상을 남긴다. 지금이란 시간과 그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모든 대상과 그 대상이 남긴 기억, 흔적. 이 모든 것이 이우성에게는 그림을 그리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따뜻하고 친숙하며 반갑다. 그만의 장난기어린 시선에 포착되어 초대된 작품 속 주인공들을 통해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의 연결고리를 발견해보자.

.


.

‘우리’보다 먼저 오는 ‘당신’을 위해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학고재에서 열리는 개인전 치고 이 제목에는 아우라가 너무 없다. 기술복제시대를 맞아 소멸했다는 아우라를(벤야민) 소생시키려 회화가 어떻게든 온 힘을 다해 붙잡고, 변용시키고 있는 이즈음에 말이다. 이우성의 이번 개인전은 너무도 해맑게 부르는 저 초대의 말, 저 첫 말에서부터 아주 예의바르고 겸허하고 소박하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빙글거림이 있다. 수신자들은 묻는다. 정말 나를 위해서 말입니까?

사실 이우성의 그림은 ‘당신’보다는 ‘우리’라는 복수인칭대명사와 더 어울리는 듯 보였고, 그런 가치를 위해 자주 호출되었다. 익명의 ‘청춘들’을 그려온 그는 대표적인 청년작가로 불려왔고, 2014년부터 거리나 골목 어귀에 걸린 그의 천 그림은 1980년대 민중미술의 걸개그림이 세속화된 포스트 버전으로 독해될 수 있었다. 민중(인민),역사, 이념을 제시하는 상징적 형상들이 일상의 파편, 사물, 윤곽선, 리듬으로 대체되고 만화처럼 가벼워진 그의 그림들은 혁명적 파토스나 집단적 주체성으로부터 어느 정도 풀려난 포스트 민중미술의 단면처럼 보이면서도 거기에는 언제나 느슨하지만 어떻게든 결속되어있는 일군의 ‘우리’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의 그림에는 늘 사람들이 등장한다. 뒷모습에 새겨진 인상들의 몽타주 〈방문자들〉(2016)나 안나푸르나의 흰 암벽 〈남벽 아래서〉(2016)도, 심지어 손 위에 놓인 사물들 〈저는 누구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요〉(2017)조차도 그 누구를 향한 기억, 시간, 흔적을 그대로 박제해놓은 의인화된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대개 그만이 아는 특정한 그 ‘누구’들은 얼굴이 없는데, 뒤통수나 ‘배후’로만 떠다니거나 얼굴이 그려져 있어도 마치 푸티지 영상의 한 장면 같은 기시감, 복수성, 익명성을 띠었다.

.

〈무너진 가슴〉 캔버스 위에 과슈 62.1×50cm(각) 2013

.

이우성은 자신에게 “사람은 표정이고 메시지”라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그림이란 “그 사람이 남긴 기억과 시간, 흔적”을 기록한 “이미지 공간”이자 자신에게 오롯이 각인된 감각들의 탁본이다. 그 탁본들에는 욕망 혹은 열기가 끈처럼, 그물처럼 얽혀있다.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에 나오는 대사처럼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이고,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저 소설의 대화자들처럼, 투명한 소주잔을 앞에 두고 교환되지 못하는 의미들을 주고받고 자신만이 소유한 이 도시의 감각들을 셈한다. 〈그날 어디에 계셨나요?〉(2017)라는 물음은 서로 다른 의미의 차이를 종합하지 않은 채 되묻는 소설 속 안(安)의 질문과 오버랩된다. “김 형,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

.

〈정면을 응시하는 사람들〉 캔버스 위에 과슈 259.1×569.6cm 2012

.

이우성의 그림에서는 주로 아주 가까이에서 보는 누군가의 신체가 재현된다. 그 시점의 거리는 때로 너무 가깝고 양자(兩者) 관계 혹은 여럿 안에 들어가 있다. 때문에 작가 자신은 늘 저 ‘우리’라는 개념의 은유인 그림 속 사람들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 같다. 불을 지르고 달아나는 그림자들(〈도망〉(2012))이나 결코 유쾌해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압도적인 빽빽한 남자들의 얼굴(〈정면을 응시하는 사람들〉(2012) 속에, 또는 서로 가깝지만 남모를 게임으로 얽혀있는 얼굴 없는 청년들(〈가위 바위보〉(2013))이나 우스꽝스럽게 비틀거리는 인물들(〈옆으로 걷는 사람들〉(2014)) 속에도. 자화상을 그리지 않는다는 그는 그렇게 주변의 친구들, 인물들, 함께한 시공의 흔적들로 자신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타적인 관계들 안에서 퍼즐처럼 나타나는 그의 자화상은 《앨리스 B. 토클라스 자서전》이란 제목으로 나온 거트루드 스타인의 자서전과 닮았다. 자서전의 메커니즘을 비틀어버린 거트루드 스타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애인 앨리스를 통해 발화하게 함으로써 자신을 타자의 위치에 놓는다.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로서 그녀의 이야기는 오직 그녀를 둘러싼 파리의 예술가들(1910~1920년 나치 침공 전, 파리에서 교류했던 그녀의 친구들; 피카소, 마티스, 르누아르, 마리 로랑생, 로저 프라이 등)의 행위들과 이야기들로 직조된다. 이우성의 자화상은 그렇게 함께한 이들의 관계, 정서, 기억들로만, 다정하고도 무심한 그 시간의 편린들로만 구성된다. 그의 정체는 파티를 함께 하다가 슬쩍 한 걸음 물러서 유일하게 그 장면을 몰래 찍어둔 사진처럼, 내부에 있는 동시에 외부자 혹은 대면자의 시선으로 분열하거나 풍경과 사물들이 되돌려주는 응시로 뒤집히고, 인물들을 휩싸는 가상의 불꽃, 끈, 신체의 부분대상, 생물 및 과육의 흘러내리는 메타포들로 직조되기도 한다.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친구와 마주한 술잔을, 촛불시위에 함께 했던 밤들을, “너와 함께 걷고 싶다”고 되뇌는 여수밤바다 노랫말 같은 열망을 나의 것처럼 떠올린다. 그러나 실상 그 그림들은 우리들에게 동화될 수 없고 복수로 환원될 수 없는 바로 그만의 ‘너’에 관한 장면들일 것이다. 키스마크처럼 그에게 각인된 사적인 순간들, 형상들은 ‘우리’에 속할 수도 있는 공감, 동화를 건네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것들은 수신자들의 경험과 온전한 동질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이우성의 자화상을 직조하는 그 ‘너 /당신’들은 어떤 범주화나 집단적 정체성으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다. 이탈리아 철학자 아드리아나 카바레로는 ‘나’를 구성하는 타자, 곧 ‘너’라는 존재의 성격은 통상의 윤리 및 정치의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나에게 대체불가능하고 반복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바로 그 장면’은 “우리보다, 복수인 너희, 그리고 그들보다, 먼저 오는 ‘너’다.”

.

〈선물〉 〈감전된 오이가 우수수〉 〈나는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강변북로〉(오른쪽부터) 천 위에 수성페인트, 과슈 210×210cm 2015

.

정체성으로부터의 탈주

그렇게 그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이타성의 관계는 너(당신), 나, 우리라는 호명들 사이에 기묘한 긴장을 형성한다. 〈돌고 돌아 제자리〉(2015)에서 강강술래를 연출하는 집단은 일견 민중이라는 명칭의 공동체적 파토스를 자아내지 않는다. 이들의 강강술래는 또 다른 개인전 〈Quizás, Quizás, Quizás〉(아마도예술공간 2017.8.28~2017.9.24)에서 만화 컷들이 자아내는 리듬들, 라이트모티프로 흐르는 일상의 소소한 이미지들과 오히려 닮아 있다. 〈빛나는, 거리 위의 사람들〉(2016)은 2016년 광화문과 종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함성을 5m가 넘는 폭에 담아내고 있지만, 그 형상들은 강렬한 하나됨의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한가운데 자리한 슈퍼문, 깃발, 피켓들이 반사해내는 미미한 빛들의 몽타주다. 종로 3가 어느 높은 곳에서 바라본 전망으로 재구성한 거리의 풍경에서(작가는 그 위치가 현실에는 없는 자리, 3D 모델링으로 재구성한 전망이라고 귀띔한다) 그 빛들은 아름답지만 비현실적이다. 그 빛은 〈세상은 내가 꿈꾸지 않게 한다〉(2014)에서 바다 위 물결의 반사광과 너무도 똑같이 꿈과 좌절의 가능성 둘 다를 내포한다. 그것들은 어떤 ‘밤’, 어떤 곳에서 출현하는 반딧불이의 미광처럼 미약하면서 “결국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어디론가 가버릴”(디디 – 위베르만) 이미지, 그럼에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다시 식별될 수 있는 빛들이다. 그 빛무리 사이로 발견되는 후드 쓴 청년의 뒷모습, 얼굴을 감싼 슬픈 손, 선글라스 쓴 인물들, 낡은 건물 윤곽들과 낙원 오피스텔이란 간판은 저 ‘우리’라는 지평의 모처에서 삐져나오고 침잠하는 ‘당신’이라는 예외와 차이의 가능성들을 출현시킨다.

.

학고재 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전시전경. 〈여진 작가님 핸드폰 빛으로 불을 밝혀주세요〉(사진 오른쪽) 천 위에 아크릴릭 과슈, 젯소 210×210cm 2017

.

이번 학고재 개인전에서는 익명성을 걷어낸 그림들 속에 그의 지인들이 따뜻하고 선명한 형상들로 등장한다. 윤중이, 여진 작가, 세진이… 이름이 “있는”, 분별 가능한 이들이 한 가득 전시장을 채운다. 이 “알아챌” 수 있는 인물들은 마치 그가 부르는 ‘당신’의 주인공들 같기도 하다. 그러나 커튼이자 장막이기도 한 그 인물들은 그 관계 바깥의 수신자, 염탐자에게 어떤 텍스트로도 기능하지 않는다. 이우성의 사적 관계를 구성하는 그들의 분명한 이름들과 존재들은 수신자에게는 실로 닫힌 것이며, 어떤 공적인 공감이나 이미지의 내재성을 엿볼 지평 자체를 삭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텅빈 특정성은 그림의 판매로 귀결될 우아한 상품성을 배신하고, 수 년차 회화 작가의 예술세계가 내뿜으리라 기대해 마지않는 내재적이고도 초월적인 아우라를 배신한다. 시대의 요구, 민중의 요구에 화답하는 민중미술 화가의 신의와 달리 그는 시대의 요구, 미술계의 기대, 큐레이터의 요청에 빙글거리는 약간의 배신을 감행한다.

미니멀리즘과 회화라는 매체의 차이와 엄청난 시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그의 특정성에서 펠릭스 곤잘레스 – 토레스를 떠올린다. 공적인 공간에서 관람자 누구에게나 사랑스런 공통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저것은 무엇이지?’, ‘이건 무슨 뜻이지?’라는 질문을 자극하고 지극히 사적인 내러티브들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말이다. 곤잘레스 – 토레스가 뉴욕 거리의 빌보드에 띄운 침대의 이미지는 어떤 관객들에게 그저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지만, 어떤 마이너리티 공동체가 공유하는 재난과 삶, 사적인 부재와 상실을 환기시켰다. 호세 에스테반 무네즈는 그러한 곤잘레스 – 토레스의 우회하고 모호한 이미지들이 어떤 대중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그 안의 또 다른 내부에게는 보이는 “비스듬한 이미지”로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개념에 도전할 뿐 아니라, 어떤 정체성 그룹에도 배타적이지 않으면서 이들을 가로지르는 탈정체성의 실천이라고 말한다. 그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이우성의 그림들이 품고 있는 작은 수수께끼들, 그것들의 코노테이션은 그의 주변인, 혹은 어떤 내부만이 공유 가능한 ‘감정의 구조’, ‘시점의 구조’를 재현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그림을 바라보는 첫째 당신, 둘째 당신, 셋째 당신들은 사랑, 열망, 연대, 상실의 열기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수신한다.

그가 이를 드러내고 맑게 웃는다.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호명에 확신보다는 질투를 느낀다. 당신이란 부름은 모호하게 당신을 비껴간다. 그는 ‘우리’를 살짝 배신한다.

.


이 우 성

1983년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회화과(2009)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평면전공 전문사(2012)를 졸업했다. 2012년 175갤러리에서 열린 〈불 불 불〉을 시작으로 〈우리가 쌓아 올린 탑〉(서교예술실험센터, 홍은예술창작센터 2012), 〈돌아가다 들어가다 내려오다 잡아먹다〉(OCI미술관2013), 〈앞에서 끌고 뒤에서밀며〉(아트스페이스 풀 2015),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아마도예술공간 2017),〈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학고재 갤러리 2017) 제하의 개인전을 열었다. 2013년 OCI Young Creatives를 수상했다. 현재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다.

글:이진실 | 미학·미술비평 / 사진:장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