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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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성남의얼굴전 〈성남을 걷다〉

2017.12.8~1.28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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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재 〈어두운 길〉(사진 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130.3×193.9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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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걷는다. 어딘가로 가는 길. 목적도 방향도 제각각 다를 터다. 그 발걸음들이 쌓이면 길이 만들어진다. 길이 나는 곳으로 더 많은 사람이 오고, 간다. 사람이 낸 그 길은, 삶의 조건이자 결과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길 위의 풍경은 결국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 그 길은 오가는 사람들의 삶이 그려낸 풍경이다.

도시는 풍경이 중첩되어 있는 곳이다. 어떤 흔적들이 그 풍경을 이루는지에 따라 도시의 인상이 만들어진다. 성남은 서울 도심 판자촌에 살다 강제 이주당한 사람들의 새 터전으로 시작한 도시다. 강남 개발이 가속화되면서는 대체주거지인 1기 신도시 분당이 성남에 풍경을 더했다. IT 산업의 규모가 자라면서 성남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지식 콘텐츠 산업의 중심지 판교 개발을 통해 풍경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간에 성남은 수도권 개발의 역사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폭넓은 삶의 인과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성남은, 그 어떤 수도권의 도시들 중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예술가들은 놓치지 않고 그 삶의 이야기를 전한다.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은 2006년부터 바로 그 성남이라는 도시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성남의 얼굴’ 전을 진행해왔다. 지난 10년 동안 성남의 많은 작가가 이 전시를 통해 작품을 알렸고, 그들이 속해 있는 도시의 속내를 드러내왔다. 올해는 그 시도가 전시의 주제와 함께 좀 더 세밀해졌다.

15호 크기의 작품 40점이 약 20m 길이로 이어진 김보중의 작품 〈108걸음 중 54걸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전시는 우리가 그 풍경들을 얼마나 무심히 지나쳤는지를 작품을 통해 나지막이 전해준다. 수행하듯, 사람들이 살고 있는장소를 덤덤히 그려내는 김보중의 작품은 엘리베이터나 계단을 통해 진입하는 관객들에게 전시실의 높은 ‘문턱’에까지 이르는 또 하나의 길을 내어준다. 인생의 번뇌를 상징하는 108걸음 중 그 절반인 54걸음까지는 다다랐으니, 남은 길을 가는 동안 힘을 내라는 고요한 다독임 같은 작품이다. 성남시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율동공원과 중앙공원을 비롯, 인근 남한산성의 모습을 기호화하여 표현한 송윤주의 작품에서는 익숙한 장소를 새롭게 보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일상의 공간을 색다른 시각 이미지로 치환하여 살피는 일은 근사한 되돌아보기를 가능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성남 인근에 위치한 남한산성의 오랜 역사를 오늘의 삶으로 이끌어내어 여전히 우리와 함께 진행 중인 역사로 만들어낸 김호민의 작품은 지금 디디고 있는 땅이 어떤 시간을 흘러왔는지를 조용히 사색하게 한다. 오늘 걷는 이 길이 언젠가 다른 그 누군가의 발걸음으로 닦여온 길임을 일러주는 것이다.

허수빈의 작품에서는 가장 개인적인 공간을 빛이라는 요소를 사용하여 재현함으로써, 일상을 이루는 무덤덤한 공간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하는 매력이 느껴진다. 도시 서민의 밀집 주거시설이 늘 그렇듯, 방범창으로 가려진 창가는 빛의 통로를 정작 막아 놓아야만 하는 도시의 삶을 투영하는 창이면서, 동시에 역설적인 희망처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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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자운 〈들고 나는 자리〉 캔버스에 유채 97×194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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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의 도시 성남의 이면을 아득한 먼지 속에 몽환적으로 표현한 이현무의 사진이나, 도시 개발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고가도로들이 기존의 길을 오히려 끊어내고 있는 상황의 역설을 보여주는 장원석의 사진은 성남이 얼마나 많은 욕망이 집결해 있는 도시인지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분절된 도시공간을 한 화면에 담아내어 분열증적인 도시의 속도가 지닌 이면을 매력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하게 드러낸 최자운의 회화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인 삶의 터전으로서 도시가 갖는 숭고한 아름다움을 드러낸 유근택의 〈어떤 장엄한 풍경〉 시리즈는 모두 변화하는 도시 성남에 대한 깊은 애정과 비판적 시각을 담은 작품들이다.

작가들이 성남의 풍경 하나하나를 무심한 듯 섬세하게 들추어낸 것처럼, 이 전시는 인구 100만의 도시, 성남이라는 지역에 오롯이 무게 중심을 두고 성남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성남이라는 도시의 삶을 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성남거주 작가, 혹은 성남 출신 작가를 선별하는 일과 동시에 더 많은 작가의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해 공모심사를 통해 별도로 작가를 선정했다. 전시의 완성도를 위해 일부 작품은 커미션 워크로 새롭게 제작되기도 했다.

이것은 성남시 유일의 공립미술관인 큐브미술관이 비로소 미술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장소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으로 읽힌다. 건강한 큐레이토리얼은 숨은 작가를 대중의 영역으로 이끌어내고, 난해하다 여겨지는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길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큐브미술관이 지금까지 꾸준히 성남의 작가를 소개해왔지만, 이번 전시가 여느 해의 지역 조망 전시와 차별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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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나 〈눈 성〉(사진 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130×160cm(각)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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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시립미술관이 생겨나지 않는 한, 큐브미술관은 문화적 열망이 높은 성남 시민들의 갈증을 해결할 공공의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 공연장 운영과 문화예술 지원사업이 주를 이루는 일반적인 기초문화재단이 갖고 있는 어려움 중 하나는 미술분야 사업에 대한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큐브미술관이 준비한 이번 ‘성남을 걷다’ 전시는 운영 구조상의 난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보려는 치열한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지역 안에 건재하는 작가의 존재를 비추고, 수준 높은 관람객들의 발길을 미술관으로 향할 수 있게 만드는 마중물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의 근본적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물론 더 완성도가 높은 전시로 도약하기까지, 또한 보통의 미술관이 갖는 여러 역할을 수행하기까지, 개관 10년을 넘긴 이 미술관이 지니고 있는 구조적 어려움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보중의 작품 제목처럼 이제 108걸음 중 54걸음은 뗀 셈이다. 그 걸음이 번뇌의 길을 지나 더 건강한 길을 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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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경기문화재단 학예연구사 / 사진:장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