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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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 ABCDE

2017.12.8~2.10 페리지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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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DE〉 전시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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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설명할까요. 나는 글쓴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든 이에게 동참하고 싶습니다. 아마 A, B, 또는 F가 벌인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G’가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료의 재활용자 혹은 재생산자의 역할을 상상했던 것이 제가 생각하는 이 지면의 당위가 되었습니다. ‘친절한 분석과 설명’은 적어도 지금 하고 싶은 일이 아닙니다. 오늘의 독자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읽고 계신 지면의 가장 적합한 변명이 있다면… 그것은 변명이자 고백에 가까운 일입니다.(이 글의 몸을 둘로 쪼갤 방법이 있다면 참 좋겠군요) 열심히 말해 봤자 그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와 같은 싱거운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습니다.

A와 B가 동의한, 간단하지만 너무나 복잡한 규칙 1은 실상 매우 관능적입니다. 매력이 넘칩니다. 다수의 사람이 긍정하는 전시는 불안합니다. 규칙은 좀 부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협업이라는 개념, 그 말, 그 행위의 출발 이전에도 나는 여전히 그것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여전히 그것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획자의 역할과 전시라는 기능은 나에게는 매우 강하게 작동하고 있지만 나 외에 누군가에게 도달하는 그것의 성과와 사명에 대해 그리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늘 누군가의 러닝메이트, 또 다른 상황이라면 ‘간단하지만 복잡한’ 규칙을 만드는 프로그래머, 혹은 F에 가깝습니다. 가끔은 안무가나 작곡가의 위치가 부럽기도 합니다. 댄서나 연주자가 없다고 해도 그들의 작업은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어떤’ 연주자를 상상하며 곡을 쓰기는 할 것입니다. 연주자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이미 작고하여 나의 악보를 마주할 수 없을 수도 있겠지만요. 당신이 작가라면 건초더미에 숨어 있는 바늘 찾기처럼 이 세상에서 나와 일할 ‘어떤’ 기획자를 아직 찾고 있거나 아예 (가상으로 하지만 매우 현실적으로) 한 명 만들어내야겠다는 상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기획자가 꼭 필요하냐고 질문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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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욱 〈they are untitled〉 연작 설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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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한 단 한 명의 구체적인 동료를 위해 이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명확하지만 애매한 규칙은 적어도 A와 B-그리고 F-에게는 참 재미있는 출발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전시장에 들른 관객은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 궁금합니다. 나조차도 전시장 안에 서 있기가 난감한 기분이었습니다. 다른 연인의, 이제는 흘러가버린 연애사를 참고 들어야 하는 지루함 같은 것이었을까요?

지루함이 전시의 실패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전시는 늘 그렇게 흘러가니까요. 누군가 ‘G’에게 당신의 큐레토리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많은 말 중에 “전시 개막일의 4시 59분, 또는 5시 59분 59초”라는 대답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오픈 직전까지 나눈 모든 살아 있는 대화의 긴급함은 그것이 현실의 ‘전시’가 되는 순간, 막상 관객들이 차기 시작하면 식어버린 피자 같은 것이 되고 맙니다. 5시 59분 59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지금은 10시 52분입니다. 다시 다가올, 또 다른 ‘짝사랑’을 기다리는 시간쯤 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지능을 연구하는 학자에게 개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작고 작은 뇌 속에 어떻게 그 깊은 굴을 파는 토목과 건축의 지식과 의지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지식은 작디작은 신체의 세포 안에 존재하는 것일까요? 개미의 토목지식은 개미의 몸 밖에 있습니다. 다른 개미와 페로몬을 교환하는 순간, 대화를 나누는 개미와 개미 사이의 허공에서 우리의 지식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술가란 결코 무리 속에서 성장하지 않는다. 그건 개미들이나 그렇다. 싹을 틔우기 시작한 예술가에게는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이 문제들과 씨름할 특권이 있다.” B씨의 편지 2에는 개미가 등장합니다. 저는 따옴표 안의 말만큼은 동의하기도 부정하기도 어렵습니다. 고독과 무리는 같은 말입니다. 어찌 보면 무리가 있을 때 비로소 고독은 탄생하니까요. 그것은 특권을 키우는 가장 긍정적인 토양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글은 A와 B, 그리고 F의 대화에 관한 관객 G의 응답입니다)

1 페리지 갤러리는 연례적으로 작가와 기획자 공모를 진행한다. 공모에는 작가와 기획자가 따로 지원해야 하며, 서류심사와 인터뷰심사를 거쳐 작가 1명, 기획자 1명을 개별적으로 선정한다. 선정된 두 사람은 1년간 팀을 이뤄 주제와 형식에 구애하지 않는 기획 및 창작을 진행하고 전시의 형태로 그 결과물을 제시한다.

2 핸리 밀러의 말을 인용한 B편지 중 발췌. 《2017 페리지 팀프로젝트》 도록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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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단지 | 전시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