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ORS’ VOICE & CRITIQUE

김성우 | 큐레이터, 프라이머리 프랙티스 디렉터
김선형 | 탈영역우정국 대표
양은희 | 미술사
최선주 | 코리아나미술관 *c-lab 큐레이터
하도경 | 기자
노재민 | 기자

노스탤직스 온 리얼리티
타데우스 로팍 서울 1.26~3.9

타데우스 로팍에서 처음 기획 의뢰 얘기가 나온 때는 2022년 하반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한국에 지점을 낸 지 얼마 되지 않은 갤러리로서 한국(계) 작가의 전시를 개최하려는 계획 단계에서 간단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고, 당시의 논의는 결국 타데우스 로팍 서울이 자체 기획을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한국에서 처음 새해를 맞이하는 외국계 갤러리로서 갤러리의 특정 취향과 결을 보다 분명히 외부에 공표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당연한 결정이라 여겼다. 그렇게 한 해가 또 지나 2023년 하반기 다시 기획 의뢰가 들어왔다. 흥미로운 것은 프리즈 서울의 발족과 함께 좀 더 많은 외국계 갤러리가 한국에 지점을 열었고, 공교롭게도 불문율처럼 새해에는 해당 갤러리들이 어떤 한국 작가의 전시를 꾸릴지가 관심사가 되었다. 그렇게 전시 의뢰를 수락하게 되었고, 몇 가지 질문을 안고 기획에 착수하게 되었다. 단출하게 정리하자면, 첫째는 ‘전시를 기획’하는 입장에서 영리와 비영리의 경계에 휘둘리지 않고 지켜야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었으며, 둘째는 상업 갤러리가 표방하는 시장적 가치 평가의 기능과 역할 아래 어떠한 작가들과 함께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먼저 전시 기획의 차원을 들여다보자면, 오늘날 종종 이루어지는 전시의 형태, 즉 작가와 작업을 선별하고 나열하는 식의 ‘소개’ 중심 전시는 큐레이터의 입장에서 피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문맥 없이 개인의 출신 등으로 엮여 결국 ‘소개’로 귀결되는 전시는 다른 어떤 작가가 대타로 들어와도 쉽게 수용될 수 있는, 하지만 좀처럼 결속되지 않는 의미망으로 인해 구멍이 숭숭 뚫린 포장지와 같다. 동시대 미술이라는 수식이 함께하는 ‘전시’는 시각적인 심미성을 넘어 오늘의 담론과 함께 그 의미와 가치를 견인해야 한다. 그것은 영리와 비영리의 구분을 넘어서 오늘날 ‘전시’라는 이름에 내재하는 본성에 대한 문제일 수도 있겠다. 작품은 다성적이다. 그리고 전시는 각 작업이 지닌 다층적 맥락의 일면들을 면밀히 파악하고 담론과의 접점 안에서 언어적으로 엮어내어 문맥을 구성하는 일인 동시에 시공간의 조건 위로 감각적인 질서와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이러한 고민을 배경으로 한 본 전시는 노스탤지어가 아닌 노스탤지어적인 것, 즉 지난 과거의 사실과 시간에 한정된 것이 아닌 현재에 각인되어 오늘을 충동하는 다른 시공간의 것들과 그렇게 재인식된 현재의 풍경, 더 나아가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의 이원론에서 벗어난 조금 다른 미래상의 제안이라 할 수 있다. 구조적으로는 작가별로 작품을 모아두지 않고 뒤섞어 보여주고 있다. 앞서 작품은 다성적이라 말한 것처럼, 작업들은 여러 공간적 조건 속에서 서로 다른 작업들 – 이미지와 연쇄하며 숨겨진 층위의 서사적 · 감각적 · 해석적 함의를 꺼내어 놓는다. 이는 전시가 하나의 키워드나 이미지로 귀결되기보다는 복수의 풍경, 서로 다른 동시적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노스탤직스 온 리얼리티》는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며 결국엔 이 모든 것이 중첩된 모종의 시간대 – 더 리얼한 복수의 현재 – 를 시각화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작업이 이미지라는 외피를 뒤집어쓴 다층적 의미의 컨테이너라면 관객은 그사이를 거닐고, 신체로 소화하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감응의 순간을 경험하리라. 이는 시각적 감흥만을 충동하는 동시에 능동적 사유를 마비시키는 전시와는 다르다. 오히려 작품에 내재하는 언어적 층위를 협소하게 일축하기보다는 입체적인 경로를 가설하여 의미의 지평을 더 넓게 확장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전시는 수행적(퍼포머티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관객은 움직이고, 작품과 상호 작용하며 감상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계속된 의미의 발견을 경험하게 된다.

양유연 〈섬광〉(사진 오른쪽) 장지에 아크릴릭 148×209cm 2024 제공: 타데우스 로팍

권용주 〈슬링벨트 외〉 각종 전선, 로프, 실리콘, 우레탄폼, 점토, 슬링벨트, 석고 캐스팅 153×125×41cm 2018
《노스탤직스 온 리얼리티》 타데우스 로팍 서울 전시 전경 2024

작가 선정을 살펴보자. 최근 미술시장에 큰 관심이 쏠리면서 자본 중심으로 일부 미술을 노출시키고 있다. 때때로 수요와 공급의 평가지표는 미술이 추구해 온 고유의 의미와 가치를 상회하는 힘을 지니며, 시장 중심의 편중된 미적 취향을 생산한다. 일부는 수용되지만, 일부는 거기에 섞이지 못함으로써 영리와 비영리 사이에는 이전과는 또 다른 공고한 선이 그어진다. 물론 프리즈 서울의 시작과 함께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많은 갤러리는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경향을 포용하려 한다. 하지만, 전시가 곧 판매로 직결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시도 역시 나름의 한계는 있다. 본 전시에 참여하는 모든 작가는 이미 미술계의 주요 전시에 참여하며 주목할 만한 이력을 쌓아온, 하지만 시장에는 노출된 적이 거의 없는 (일부 미디어의 말을 빌리자면) ‘참신한 얼굴’일 뿐이다. 동시대 미술의 가치는 시장에서의 성패와는 별개로 사회, 문화, 정치, 역사 등의 담론과 결부되어 의미를 생산하고 가치를 평가받는다. 그런 면에서 본 전시는 미술계에서 이미 인정받아 온 작가들과 함께 함으로써 수요와 공급의 시장 원리에서 벗어나 ‘동시대 미술’에 적용되어야 할, 혹은 적용할 수 있을 가치 평가의 조건과 원칙을 살피고, 더 나아가 현재의 시스템을 재고할 기회가 되길 바라는 면도 있다.

‘큐레이터스 보이스’라는 이름으로 기획된 본 지면에서야 밝히지만, 텍스트로 기입된 전시 해설서에 전시의 뼈대가 되는 큐레토리얼 방법론과 언어, 그리고 기획 동기의 일부로 작용하는 윤리적 책무나 의의까지 담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이 언어로 명시되는 순간 마치 매뉴얼처럼 관객의 자유롭고 능동적인 사유와 관람의 범위가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시의 내용과는 별개로 큐레이터 개인의 목소리가 너무 비대해지는 순간 개방되었던 작품과 전시의 해석적 경로 위에 거대한 장막을 드리우는 형국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전시의 내용 아래 구사된 전시적 언어, 그리고 방법론적 차원에서의 전략과 전술에 내재하는 수행성에 대한 고민은 정치의 전시가 아닌 전시의 정치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김성우 | 큐레이터, 프라이머리 프랙티스 디렉터

정유진 〈Earthmovers-lifting〉(사진 가운데) 플라스틱 시트, 스테인리스 스틸, 스테인리스 호스밴드, 러스트 액티베이터 273×270×360cm 2024
《노스탤직스 온 리얼리티》 타데우스 로팍 서울 전시 전경 2024 제공: 타데우스 로팍

이중:작동:세계:나무
탈영역우정국 1.19~2.18

덴마크와 한국 작가들의 영상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 《이중:작동:세계:나무》는 그동안 탈영역우정국을 운영하면서 쌓아 올린 궤적과 상당히 맞물려 있다. 우체국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프로젝트는 어느덧 9년 가까이 지났다. 미국 유학 시절부터 막연히 다양한 예술 신(scene)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이어오던 터에 덜컥 우체국 건물을 임차하여 문화예술 플랫폼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행히 이곳은 수많은 예술가와 기획자가 다양한 형식의 예술 활동과 목소리를 내는 장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자체적으로 진행한 RTA(Real-Time Arts), 포스트사이트, 지하도프로젝트 등 장르적, 형식적, 공간적 실험을 하는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느끼고 작가들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공간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 2~3년은 특히 영상 작업을 온전히 볼 수 없는 미술전시에서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작은 상영 전용관을 운영해야겠다고 궁리해 합정동에 미디어룸.sbb(mediaroom.sbb)라는 이름으로 여섯 평 남짓한 지하 공간을 구성하고 기획 준비를 하던 시기였다. 2022년 6월, 덴마크 아티스트인 소피아 이완누 게딩의 포트폴리오를 소개한 이메일을 받았다. 3D애니메이션과 3D 프린팅을 사용한 조각들로 이루어진 현대적이며 고고학적인 시선의 작품들이 역사적 토대 위에 쌓아 올린 가상 세계관을 담은 전시를 탈영역우정국 안에 그려보며 이 작가의 개인전을 지원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렇게 소피아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2023년 4월에 소피아의 개인전 《LOAD: 미래채집수렵사회》를 덴마크 예술재단을 비롯해 여러 기금을 받아 개최했다. 소피아의 파트너인 마크 톨랜더도 디스이즈낫어처치 (TINK)에서 영상 전시를 한다는 소식에 방문했고, 전시를 위해 소피아와 마크가 집에서 머무르는 동안 한국 문화를 경험하며 덴마크와 한국 간 문화 차이나 여러 가치에 대한 태도를 나눠 볼 수 있었다. 그때 그들에게 상영 전용관에 대한 포부를 얘기했다. 덴마크 작가들의 영상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획을 해보자는 취지였다. 소피아는 덴마크와 주변 유럽 작가 7인의 작업을 제안했다. 유럽 영상, 영화 예술 신에서 자신을 확립하고 있는 떠오르는 목소리를 찾는 데 초점을 맞추고 한국 미술 신에서 유럽 영화 예술의 새로운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음에 열의를 보였다. 그의 시선에서 다양한 현대적 논쟁의 중요 시점을 대표하며 현재의 정치적 맥락에 제스처를 취하는 작업을 선별했다. 루나 스케일스와 토어 할라스는 몸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개념에 비판을 제시한다. 마크 톨랜더와 마리아 마이닐드는 다양한 공동체를 살펴보며 우리의 시스템 내에서 작동하는 권력과 편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준다. 린다 라미냥, 소피앙 아델, 그리고 맥시밀리언 스메짜는 역사적 사실과 개인의 경험이 교차하는 층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에 따르면 이런 부분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대안적인 해석을 비추며, 성별, 계급, 기관 및 국가가 오늘날과 같은 권력을 가지지 않는 대안적인 미래로의 탈출 경로를 제시한다고 한다. 이 작품을 공유하고 우리는 이전과 같이 덴마크 작가들이 받을 수 있는 기금들을 지원했고, 다행히 덴마크 예술재단과 뉴 칼츠버그 재단의 기금 선정으로 생각보다 규모 있는 전시를 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정지수 〈로리, 엘라이자, 클로이, 루비〉 8분 11초 가변 설치 2018 《이중:작동:세계:나무》
탈영역우정국 전시 전경 2024 제공: 탈영역우정국

시점에 다른 대안적 모임 공간 준비를 같이 진행하던 윤소린, 김한울과 전시 기획 운영을 같이 도모해보기로 했다. 윤소린은 ‘동시상영’이라는 스크리닝 프로젝트로 미디어룸.sbb에서의 상영과 탈영역우정국에서의 개인전 개최로 인연을 맺었다. 도전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그의 태도에 믿음이 가던 차였고, 여유 있는 순발력이 인상적인 김한울과는 새로운 공간에서 주된 운영 방향인 환경적 이슈에 대한 관심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동료들과 회의하고 작업들을 살펴보면서 덴마크 작가들의 작업에서 생태적인 정체성 혹은 시스템, 나무와 같은 모습이 그려졌다. 신화적으로 세계관을 연결하고 근간을 이루는 월드 트리와 같은 모습으로 노르딕 월드 트리인 ‘위그드라실’에서 떠오른 아이디어로 소피아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소피아는 이에 생태학자인 안드레아스 헤이놀의「Arts of Living on a Damaged Planet」 글과 함께 답신했다. 이 글은 이중으로 작동하는 메타포와 생명이 선형적 복잡한 진보를 정의하고 세계를 재구성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전시 큐레토리얼의 주요 기조로 ‘이중:작동:세계:나무’가 세워졌다.

기획 초기에 스크린 하나를 두고 선보이는 미디어룸.sbb에서 작가들의 작업을 상영 스케줄에 따라 보여줄 수 있는 포맷을 고려했으나 영상 작업의 흐름과 전시의 설치 요소들을 구성하고 싶은 마음에 탈영역우정국 전관 설치로 전향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 작가들의 작업도 유럽 작가들과 그 뿌리에서 같이 하는 작업으로 선보이고자 했다. 탈영역우정국에서 전시했던 작가 중 이후 행보를 주목해 온 무니페리, 정지수 그리고 홍민키와 윤소린의 추천으로 염지혜의 작업을 선정했다. 이전 《횡단》 전시에서 비거니즘과 소수자성에 관심을 보인 무니페리는 존재와 윤회에 관련된 이야기를 한국적 요소인 판소리와 낭독으로 전달했다. 정지수는 성차별적인 스마트홈 가전제품을 관찰하고 젠더와 노동, 자본주의적 욕망을 사물에 빗대어 구술했다. 홍민키는 사회 정치적 쟁점에 초점을 맞추어 장소와 그곳에서의 사람들에 주목했다. 염지혜는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재난 상황을 돌아보는 사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총 11명의 영상 작업을 구성, 설치하는 것은 도전이었다. 모두가 동일한 영상 매체, 각각의 러닝 타임을 지니고 청각적 간섭이 있기에 상영 및 관람 조건을 맞추는 것에 주안점을 두어 구성 했다. 1층 주 전시장 스크린에 세 작품의 교차 상영과 제한된 관람을 위한 지하실, 2층의 세 개로 나눠진 방과 거실에 그리고 바깥이 보이는 발코니에 여섯 작품을 프로젝터와 모니터로 설치했다.

공간적, 매체적이라는 두 가지 고민의 방향이 《이중:작동:세계:나무》를 만들어내는 데 결과적으로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나무를 심고 가지와 뿌리를 지탱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여 세계관을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하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과 같다.

김선형 | 탈영역우정국 대표

수피앙 아델 〈빛이 떨어지다〉 9분 23초 가변 설치 2018
《이중:작동:세계:나무》 탈영역우정국 전시 전경 2024 제공: 탈영역우정국

박소빈 용의 신화, 무한한 사랑
광주시립미술관 1.10~3.24

작가는 어디에서 영감을 얻는가? 여성 작가의 영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박소빈: 용의 신화, 무한한 사랑》을 보면 한 가지 답을 얻을 수 있다. 광주 출신의 작가 박소빈이 국내에서 여는 첫 회고전인 이 전시에 전시장을 압도하는 작품 하나가 있다. 길이 17m의 〈부석사 설화 – 새로운 신화창조〉(2017)는 연필을 주 매체로 하여 수많은 검은 곡선을 통해 작가가 추구하는 내러티브를 역동적으로 만든다.

이 작업은 원래 베이징 금일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을 위해 49일간 현장에서 제작한 것으로 지금도 그 과정을 유튜브 영상을 통해 볼 수 있다. 영상 속에서 작가는 원하는 이미지가 나올 때까지 계속 연필을 깎고 그리기를 반복한다. 화면의 상하좌우에 다다르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오가며 손을 움직인다. 연필심이 다하면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깎고 다시 연필로 종이 위에 무수한 곡선을 그리며 선 위에 또 다른 선을 쌓아 면을 만들어낸다. 완성된 작업에는 거대한 용의 몸을 암시하는 검은 덩어리들과 역동적인 선들이 펼쳐져 있어서 어디까지가 선이고 면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그런 혼돈을 헤집고 화면 가운데로 가면 배를 탄 사람들이 보이고 왼쪽 끝에는 현대도시 베이징이 보인다. 부석사 설화에 나오는 의상과 선묘의 이야기를 작가의 시선으로 해석한 것이다.

신라시대 의상대사는 화엄학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잠시 머문 신도의 집에서 딸 선묘의 구애를 받는다. 의상의 사랑을 얻기 위해 평생 불법을 따르겠다는 선묘를 뿌리치고 중국 장안에서 10년 동안 수학한 의상은 귀국길에 다시 선묘의 집에 들르게 된다. 선묘는 그사이 약속대로 불법을 따르며 의상을 위해 가사와 장삼을 짓고 있었고 마침 의상이 도착했을 때는 불단 앞에서 염불에 전념한 채였다. 그런 선묘를 보고 의상은 마음을 흩트리지 않기 위해 배를 타고 신라로 떠난다. 이를 알게 된 선묘는 의상이 탄 배를 향해 그동안 지은 옷을 바다 위로 던지며 배에 도달하기를 기도했고 몸을 바다로 던지며 용이 되어 의상을 보호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소원대로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이 탄 배를 지켜냈으며 후에 의상이 부석사를 설립할 때 장애물이 나타나자 그를 수호하는가 하면 죽은 후에 부석사 법당 아래에 묻혀 사랑의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부석사 설화 – 새로운 신화창조〉에 나오는 배는 바로 의상이 탄 배이고 그 배를 에워싸고 용틀임하는 용은 바다에 빠진 선묘이자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여성의 상징이다. 그 용은 베이징에서 활동하는 박소빈의 자아가 투영된 존재이기도 하다. 의상과 선묘의 이야기가 한국과 중국을 이었듯이 박소빈은 용에서 찾은 정체성을 들고 용의 상서로움을  숭배하는 베이징에서 활동하며 상상과 현실을 넘나들고 있다.

〈부석사설화 – 새로운 신화창조〉 종이 위에 연필, 동가루 145×1700cm 2017 제공: 광주시립미술관

작가는 대학 시절 불교미술을 공부하다 화엄사 대웅전에서 본 용의 형상에 매료된 이후 용과 사랑을 나누는 꿈을 꿀 정도로 집착했다 석사 논문을 위해 용의 상징을 연구하면서 부석사 설화를 알게 됐고 용이 되어 사랑을 지킨 선묘에 눈이 갔다. 1990년대 광주에서 민중미술 작가들과 활동할 때 ‘왜 그런 그림을 그리나?’라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유럽의 표현주의와 상징주의 미술 언어를 통해 벌거벗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박소빈은 용이 된 선묘를 통해 자신이 그동안 찾던 여성의 힘과 사랑 그리고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를 찾았다. 육지와 바다를 넘고, 인간과 신비로운 동물의 경계를 넘었으며 결국 사랑의 힘으로 죽음을 넘은 선묘의 이야기는 작가의 무의식을 파고들었다. 지난 20여 년간 작업한 결과물이 이번 회고전에서 선보인 일련의 회화 작업이다.

박소빈의 다른 회화에는 관능적인 여성과 용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요동친다. 위의 배경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누드의 여성 신체가 내뿜는 섹슈얼리티 때문에 용과 여성의 격렬한 사랑처럼 보이기도 한다. 수직의 연필로 그린 긴 용의 이미지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시각에서 남근의 표상이며 그 상징을 품은 여성은 남근숭배의 순간에 빠진 듯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묘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여성이 정신과 신체를 다한 사랑의 힘으로 용틀임을 하며 성적 에너지를 용으로 승화시키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신화와 종교 그리고 왕권 시대의 상징인 용을 통해 자신의 여성성과 섹슈얼리티를 드러내고 사랑의 힘으로 우주를 포용하려는 박소빈은 여신 이미지를 통해 여성성의 극대화를 추구했던 서양의 페미니즘 작가를 연상시킨다. 남성 작가의 그늘에서 예술가의 꿈을 펴기 어려웠던 시절 여성 작가의 창의성이 가부장제의 억압하에 짓눌려왔다고 외치며 의식과 무의식에 깃든 남근숭배 콤플렉스를 여신의 힘을 빌려 극복하고자 했다. 대지의 여신과 신화 속의 여성을 끌어와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답고 힘이 넘치는 존재와 작가 자신을 동일시하며 여성 작가로서의 창의성을 구현하고자 했던 태도는 본질주의 페미니즘이라 불리며 한때를 풍미했고 지금도 생태주의 페미니즘과 결합되어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호출하기도 한다.

우리의 무의식은 언어로 구축되어 있다. 혼돈의 무의식이라 할지라도 용의 꿈은 ‘용’이라는 언어가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창작 의지가 불타는 박소빈의 무의식도 사실 ‘용’을 안 다음에 용의 상징에 기대게 되었을 것이다. 박소빈의 의식과 무의식을 차지한 용은 여성 작가로 성장한 1990년대 광주와 10여 년 전 정착한 도시로 작가의 예술적 의지를 지켜주는 베이징의 문화적 환경 속에서 그 의미를 배가했을 것이다. 역사와 개인을 넘어 생명의 본능인 리비도(libido)와 성적 쾌락의 충동인 에로스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중국의 천자를 수호하는 용의 권위를 선묘의 사랑 이야기로 중화시키고 무수한 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예찬하고 있는 것이다.

양은희 | 미술사

〈부석사 설화〉(사진 왼쪽) 연필 드로잉, 실크 판화에 채색 175×485cm 2022 《박소빈: 용의 신화, 무한한 사랑》
광주시립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제공: 광주시립미술관

논알고리즘 챌린지
세화미술관 1.30~4.28

세화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논알고리즘 챌린지’는 3부작 전시로 작년 10월, 1부 《귀맞춤》이 열렸고 현재 2부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 3부 《4도씨》가 진행 중이다. 각 전시는 ‘감각’, ‘신체’, ‘기억’을 열쇳말로 “고도화된 인공지능과 공존하는 시대에 인공지능과 차별화된 ‘인간다움’에 대해 탐색”하고자 기획되었다. 세 전시를 관통하는 문장(홈페이지 발췌)은 인간은 ‘공존’해야 하고 ‘차별화’돼야 한다고 말한다. 누구와? 그러나 상대편인 ‘인공지능’은 나를 여기에 두고 멀리 떠나갔다.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작은 점이 되어 간 상대를 보며 비로소 나는 깨닫는다. 세계를 송두리째 바꿀 기술이 구체적으로 가시화된 지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나는 그 중심에선 밀려났고 온전히 정보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도 버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HMD를 쓰고 질주하는 VR 게임처럼 나의 변변찮은 몸과 사고 능력은 여기에 있는데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다움이라는 이상향은 멀어져 갈 때, 존재론적 위상의 어긋남이 만들어내는 멀미가 발생한다.

이 글은 ‘논알고리즘 챌린지’의 2부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에 집중했다. 2부는 피부를 통해 느낀 신체적 경험, 그 경험을 통한 지각, 그 지각 안에서 발생하는 자아감에서 인간다움을 발견하고자 기획되었다. 전시 서문은 “인간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이 아닌 관객 개개인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 초점을 두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멀미의 감각이다. 민찬욱, 박관우, 정찬민의 작업에서 디지털 휴먼, 안드로이드, 데이터는 인간의 반대편에 서 있는 비인간의 대표로 설정되지만, 그것이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적나라한 인간 본연이다. 아래와 위, 안과 밖의 뒤바뀜, 내가 아니라고 믿었던 존재에서 자신을 보는 메스꺼운 경험만이 전시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다움을 공허한 외침이 되지 않도록 한다.

민찬욱의 〈디지털 휴먼은 무엇인가〉 (2022)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화면과 작가의 형상을 복제한 디지털 휴먼이 등장하는 화면 두 개로 이루어져 있다. 인물은 질문을 던지고 무대에서 사라지지만 디지털 휴먼은 대답하고 나면 그 쓸모를 다 했다는 듯 쓰러지고 한 자리에 더미로 쌓인다. 이 작품에서 쓰러진 디지털 휴먼은 연작 〈죽은 자의 대화〉(2024)에 다시 등장해 작가의 의도로 만들어진 자신의 쓸모와 죽음에 대해 독백한다. 민찬욱은 디지털 휴먼과 대조를 통해 새로운 종의 탄생을 상상하는 듯하지만, 관객이 깨닫는 건 대화의 폐쇄성이다. 거울 속 자기 자신을 남이라고 설정한 이 대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디지털 휴먼의 죽음은 전기와 데이터를 자원 삼아 영생할 가상의 존재가 아니라 사체의 분해 혹은 시체 더미를 떠올리게 하며 유기물의 죽음을 부각한다.

정찬민은 물리적인 이동에 초점을 둔 4개의 작업을 선보였다. 전시의 긴 복도를 채운〈이동부피〉(2024)는 작가의 이동 시간을 공기 조형물로 시각화한 것이고 〈현상된 움직임 2024 버전〉(2024)은 광역버스에 탑승하여 이동한 몸의 움직임을 3D 형태로 제작한 것이다. 두 작업은 물리적인 경험, 즉 몸의 이동을 가시화하고 고정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몸의 ‘있음/없음’의 구분 자체가 아니라 ‘몸 없는 너’가 ‘몸 있는 나’를 물리적인 몸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누락하는 이동은 어떻게 비물질적인 데이터가 되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는 듯, 영상 〈멀미로운 감각〉(2024)은 경험을 끊임없이 기록하고 미묘한 감각으로 치환하려는 정찬민의 시도가 데이터로 완벽하게 전환되지 못하고 몸의 잔여물로 남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민찬욱 〈죽은자의 대화〉 비디오 설치 22분 가변 설치 2024

정찬민 〈이동 부피〉 팬모터, PVC, 철제 조형물, 모터 제어 장치 90×200cm×5
세화미술관 제작 지원 제공: 세화미술관

반면 박관우는 인간을 대체재로 활용하는 길을 택했다. 〈인간의 대화1〉(2017), 〈인간의 대화〉(2024)는 인공지능 챗봇의 스크립트를 배우가 연기하며 대화하는 영상이다. 배우의 미세한 표정 변화, 목소리의 높낮이, 눈꺼풀의 떨림 같은 신체 변화는 이들이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챗봇의 존재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뒤로 감춰진다. 〈달콤한 꿈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2022)는 ‘2052년의 이주사건’이라는 가상의 시놉시스로 진행한 5주의 집단 심리극을 기반으로 하는데, 화면 속 두 사람은 심리극의 실제 참여자로 20분이 넘는 영상은 어떠한 대본 없이 즉흥적으로 발화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헛소리로 일축될 수 있는 이들의 대화는 아무 질문에나 그럴싸한 말을 만들어 대답하던 GPT-3의 답변을 떠올리게 한다. 박관우는 가짜 정보를 제공해 관객으로 하여금 진실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유도하는 것을 넘어, 애초에 그런 구분 따위는 없었다고 뻔뻔스럽게 밀어붙인다.

“그 시대는 인간의 정신에서 자기가 추구했던 것을 발견한다.” 플라톤은 희랍도시 국가의 계급에서 정신을 찾았고, 기계론자는 톱니바퀴, 프로그래머는 뉴런과 시냅스, 신경망에서 정신을 발견했다. 인공지능 시대가 아닌, 다른 어떤 시대가 잘 떠오르지 않지만, 매체 철학자 제이 데이비드 볼터(Jay David Bolter)는 “컴퓨터가 최종 해답이 아니며, 컴퓨터는 지금은 상상하지 못할 기술에서 유래된 은유로 대체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다움이 견딜 수 없게 멀미가 난다면, 창문을 열고 더 멀리 보면 된다. ‘논알고리즘 챌린지’의 3부 《4도씨》에 그다음이 있을 수도 있다. 마지막 전시는 인간의 기억과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에 대한 전시이기 때문이다.

최선주 | 코리아나미술관 *c-lab 큐레이터

박관우 〈인간의 대화5〉(사진 오른쪽) 2가지 종류의 2채널 영상, 인간 인터프리터와 인공지능 챗봇을 통해 구성된 대화 25분 가변 설치 2024 세화미술관 제작지원 제공: 세화미술관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그리고 우리*는
합정지구 2023.12.29~1.31

영화 〈아가씨〉가 개봉한 이후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는 대사는 하나의 대명사가 되었다. 개인의 주관적 해석이 개입할 여지가 다분한 이 대사는 “망치러 온 것이 곧 구원인가?”에 이어 망쳐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궁금증으로 향한다. 그러면서 인생사에 양립 불가능한 가치라 여겨지는 ‘망침’과 ‘구원’을 동시에 몰고 온 한 사람(者)과 나, 우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제공한다. 이 대사를 입은 전시는 콤마(,)를 달고, 관계를 내포하는 ‘우리’에 별(*)을 추가한 뒤,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의 여지를 내포했다.

“새훈이 주도적으로 작성했지만, 나머지가 지적하고 서로 참견하며 쓰인 뒤범벅의 글”이라고 명시된 전시 서문을 통해 엿볼 수 있듯, 전시 역시 각 작품의 뒤엉킴과 상호 침투로 말미암아 재구축될, 잡히지 않고 부재하는 어떤 혼종적 이미지를 향한 장이다. 이는 어울림을 고민하는 과정이며 꽉 차 있지만 군 군데 벌어진 틈새로 무언가가 새어 나오고 있는 무대이다.

문을 열고 좁은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다른 공간 혹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여지가 군데군데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후천적 청각장애와 뇌 손상 경험을 가진 할아버지가 버려진 시계를 제멋대로 고쳐준 경험과 썩은 매실청 선물을 받고 난 뒤 동요한 여진의 마음. 주인의 곁을 지키고 있는 혹은 지킨 개들이
인간과의 관계에 천착한 시점으로 시야를 옮기게 된 권동현×권세정의 시간들. 미디어가 비춘 수많은 인물의 (신체) 이미지들과 거울, 행거에 걸린 옷들을 통해 과잉과 부재 혹은 신체의 해체와 재배치의 과정을 은유하는 한솔. 망설이고 뱉어내고 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목소리를 담은 영상을 통해 퀴어에 대한 지배적 재현이 퀴어를 납작하게 만들어 ‘퀴어-되기’가 멈춰지지는 않을지 경계하는 새훈의 시선. 이들의 개별적인 사유와 목소리는 ‘타자와 묶이는 것’에 대한 공통분모로 존재할 수도 있지만, 묶음을 통해 말할 수 없는 너른 지대가 존재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의 제목으로 엮였을 때, 양립할 수 없거나 심지어 적대적일지라도 함께 고민하고 관계 맺는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 보이며, 위험을 감수한다.

뜯어진 가벽 능선에 배치한 여진의 할아버지 종웅이 준 시계들은 시선을 어지럽히긴 했지만 나름의 정돈된 형태로 배치되어 있어 공간을 혼돈으로 몰아넣지는 않았고, 흘러가는 시간이 존재하는 영상 한 편과 약 6개의 정지된 권동현×권세정의 이미지들은 그사이에 놓인 하얀 틈새로 인해 이미지에 삽입된 개와 개의 흔적 그리고 살짝 보이는 여자의 무수한 시간을 유추하기에 충분했다. 중앙에 배치된 출판물과 대형 거울의 뒷면에 부착된 무수히 많은 신체 이미지, 행거에 걸린 넥타이들과 (누구의 옷인지  알 길이 없지만) 걸려 있는 옷을 제시하는 한솔의 설치 작업은 사각형 공간의 꼭짓점을 사이에 두고 있어 눈에 잘 띄지는 않았지만, 장치들을 각각의 면에 쏙 들어가게 배치해 되레 시선의 오가기를 유도했다.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과 영상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트램펄린이라는 장치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소통에 대한 새훈의 고민은 비록 어둠 속(어두운 공간 속)에 있었지만, 그랬기에 유기적 연결이 아닌 해체와 단절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너머의 것에 대해 성찰하도록 유도했다.

이들의 하모니는 끊임없이 생성될 ‘우리’라는 공동체를 은유하는 듯 보인다. 이는 동일함과 전체성이라는 종합적인 말로 수렴되지 않으면서도 연결돼 있다는 감각을 상기시키는 ‘혼종’이라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의 서문이 다다랐던 문장으로 이 글을 닫고자 한다. 그리고 생성될 공동체가 하나의 언어와 문장으로 통합되지 않을 나날을 위해 생성뿐일 공동체 ‘우리*’의 미래를 상상해 본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말하기를 멈추지 않되, 우리의 차별과 억압만이 특별하다고 중요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소수자들과 함께, 정상성과 보편을 의심하고 싸우는 이들과 함께 의존과 연대의 의미를 다시 쓰는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1


1 장애여성공감’ 20주년 선언문, 2018

하도경 | 기자

여진 〈그가 멍든 시간을 마주하는 법〉(사진 앞 가운데) 시계, 책상 가변 크기 2023,
권동현×권세정 〈러브 데스 도그 & 에필로그〉(사진 뒤 가운데) 단채널비디오, 컬러, 흑백, 스테레오사운드 24분 10초 가변 크기 2023

새훈 〈귀귀퀴퀴+-×÷〉(사진 뒤) 다채널비디오, 컬러, 스테레오사운드, 트램펄린, 실, 종이 30분 가변 크기 2023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그리고 우리*는》 합정지구 전시 전경 2024 사진: 이창민 제공: 합정지구

김보민 그림자의 강
김희수아트센터 2023.12.18~2.17

서울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서울은 우리 조상들이 입신양명의 꿈을 안고 과거를 보러 고향에서부터 한 달 이상 걸어오던 목적지였다. 그런가 하면 서양에 문호를 개방했던 시기에는 신문물이 쏟아지고 신여성들의 눈을 사로잡는 화신백화점이나 미쓰코시 백화점이 세워졌던 곳이며, 김현옥 시장 부임 이후 산업화가 대대적으로 이뤄진 곳이기도 하다. 군부정권 시절에는 매일같이 크고 작은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던 도시이자 현재도 각종 시위가 발생하는 장소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도시에는 집단 경험과 기억이 쌓이는데, 작은 면적에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고 일상이 켜켜이 쌓이는지 생각해보면 새삼 놀랍다.

김보민은 제국주의, 근대화, 산업화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만들어진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고 탐구한다. 그는 도시를 걸으며 과거의 잔상과 잠재된 것,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을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러면서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치며 우리가 만든 시대의 풍경에 관해 이야기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곳의 어제를 알아가고 한 장소의 다른 시간대를 오가면서 이 땅의 새로운 의미와 가능성을 고민한다.

현재도 매일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거기에서 이야기가 생기는데, 그중 어떤 것은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는다. 이를테면 한강변을 거닐며 금덩이를 주운 형제가 금을 향한 욕심으로 우애가 깨질 수 있다면서 금을 강에 던져버렸다는 ‘투금탄 설화’를 떠올릴 수 있다. 김보민은 설화가 되어 다음의 세대에게 전해지는 얘기를 듣거나 발견하면 그것을 소재로 빌려와서 “본인을 숙주로 삼아 누군가에게 전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까지 고백했다.

그는 본인과 연이 닿은 장소를 위주로 그곳의 역사를 추적한다. 인천아트플랫폼에 입주해있는 동안은 인천 개항장의 거리를 탐구했고, 이번 전시에서는 근대화를 둘러싼 사건 및 역사가 응축돼 있는 한강과 그 주변을 작업의 소재로 삼았다. 강변 근처의 상징적 빌딩이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63빌딩이 눈에 띈다. 이제는 63빌딩보다 높은 빌딩이 18채나 있지만, 한동안 한국의 최고층 빌딩으로 자리매김했던 건물은 이번 전시에서 산업화를 떠올리게 하는 마천루로 등장한다.

작가는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스(Elias Burton Holmes)가 1900년대 초 조선을 방문해서 촬영하고 기록한 영상을 참고한다. 그리고 연구를 통해 수집한 이전의 보도 사진과 직접 본 도시 풍경을 교차시킨다. 사라진 시공간을 상상하며 도시를 걸으면서, 거기에 묻혀 있는 이야기를 파낸 다음, 이를 상상적으로 연결해서 화면을 구성한다. 즉, 상상을 통해 재구성하고 다시 그린 도시 풍경을 펼쳐낸다. 따라서 실제의 모습을 곱씹어본다면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외국인이 바다라고 오해할 만큼 실제로는 넓은 한강인데, 마치 냇가처럼 사람들이 강변에 가까이 몰려있어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장소로 묘사되고 있다. 다양한 사람을 삽입해서 도시가 변화하는 방법을 살피고 풍경의 역사성을 추적하면서 양산된 그림은 시대적이고 개인적인 기억을 불러내서 개인의 삶이 어떻게 역사가 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노재민 | 기자

〈탑〉 비단에 먹과 색 각
26.2×19.5cm 2023
〈탑〉의 뒷모습이다

〈측항〉 비단에 먹과 색
56.4×56.4cm 2023
제공: 수림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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