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ORS VOICE & CRITIQUE
안민혜 | 독립큐레이터
추성아 | 리움미술관 큐레이터
노재민 | 기자
정소영 | 기자
《오직 밤뿐인》
에이라운지 2.14~29
안민혜 독립큐레이터
마주치는 어긋남
손현선은 지도(아마도, 인지 cognition )를 잃어버렸다며 자신의 감각에 의존해 대상을 마주하겠다고 말한다. 오종은 늘 떠돌아야 하는 불안한 삶 안에서 길을 잃지 않고 상황과 타자를 받아들이며 균형을 잡아 항해하는 법을 찾는다. 두 작가가 작업을 다루는 방식은 매우 다르지만, 앞에 놓은 타자를 길을 찾기 위한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두 사람이 유사한 태도를 갖고 있음을 가늠하게 한다. 이렇게 타자의 반사를 통해 길을 찾는 두 사람의 협업은 물러남의 지속, 반사의 연속일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이 두 사람 사이에 선다. 첫날에는 손현선이, 다음 날에는 오종이 전시장을 찾아와 숨을 뱉어 낸다. 나는 그 숨을 받아 마시고, 그들의 제스처를 받아 적는다. 그리고 서로에게 전달한다. 이 관계는 6일간 지속된다. 전시가 관객에게 열릴 때, 세 사람을 오가며 범벅이 된 말들이 그 누구의 말도 아닌 채로 전시장 입구에 놓인다.
나는 두 사람과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다. 나의 말, 나의 생각, 나의 행동은 온전한 나의 것이 아니며, 우리 중 어떤 한 사람의 것도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이에 뱉어진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바라보는 시선이 누구의 시선인지, 움직이는 손이 누구의 것인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흐릿하다. 그저 우리가 여러 경험을 공유하며 그 안에서 습득한것과는 달랐다. 처음부터 온전한 하나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두 사람의 물러남이 결코 둘을 마주칠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계속해서 길을 잃는 이유, 혼자서는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는 이유, 타자에게 의지하고 나서야 겨우 방향을 잡게 되는 이유는, 중심이 비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우리의 협업은 무엇을 주장하거나 누군가를 이끌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주장할 수 없으며 내세울 수 없고 의견을 모아 합의할 수 없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첫날과 마지막 날이 있지만 누구도 시작하거나 끝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은 ‘사랑’이라 불렀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가 단호하고 유일한 ‘나’를 대신하여 답 없는 ‘누구’라는 열린 공간이 들어 오는 것을 ‘우정’이라 불렀듯이, 물러남으로 비워진 공간에 그다음 사람을 초대하는 것, 그리고 그의 시간과 제스처, 목소리를 내내 상상하고 생각해야만 하는 상황, 이것이 들이닥치는 것은 아마도 사랑이다.
《오직 밤뿐인》 에이라운지 전시 전경 2024 제공 :안민혜
《오직 밤뿐인》은 형식 자체가 내용인 전시다. 보이는 그대로, 작가들과 내가 오가며 머무른 시간과 공간, 서로 논의하지 않고 하루씩 번갈아 가며 공간에 나와 작품을 설치하는 행위 자체, ‘아니지 않다’라고 대답하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공간을 점유하며, 점유한 것 —시선, 또는 뱉어진 말 —이 누구의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수동적 협업의 상태를 구축하는 것이 전시의 주제다. 그 안에서 나는 기획자이기보다 번역가의 역할을 수행한다. 설치가 이루어지는 6일간 두 작가가 번갈아 작업하는 모습을 개입 없이 지켜보고 기록하여 서로에게 전달하기. 나는 그저 그들의 제스처를 받아 적었을 뿐이었으나, 적힌 내용에 대해 작가들에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다. 서로를 받아 적고, 누가 내뱉은 것인지 모를 말을 공간에 떠돌게 하며, 그것이 스스로 다음 말을 찾아내도록 두어, 어떤 것도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는 상태에 머무르고자 했다. 어쩌면 그 누구의 전시도 아닌 전시를 보고 싶었던 욕구가 전시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이름이 있고, 작품이 있으나 그것의 조합이 어떤 의미도 이루지 못하는 것, 누구의 소유, 무엇으로의 분류도 되지 못하는 것, 그것이 가능할 것인지 묻고 싶었다.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 전시가 우리에게 여전히 ‘전시’로 남을 것인지도 지켜보고 싶었다.
그렇게 뒤범벅된 기록의 글 외에 다른 글은 덧붙이지 않았다. 어쩌면 덧붙일 수 없었다 해야 할 것이다. 10여 년간 전시를 만들면서 전시를 설명하는 나의 글들이 어김없이 전시를 비껴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운명 같은 것일까? 언제나 이미 지나갔거나 아직 오지 않은 상태로, 전시와 글은 어긋나버린다. 그러니 전시에 대해 ‘이렇다’라고 말하는 것은 소용도, 의미도 없어 보였다. 게다가 언젠가부터 나는 모든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고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뱉은 말들, 만들어진 전시들, 확신했던 믿음들, 지나간 시간과 경험이 나를 채우고 있다고 생각했던 오해들 … 나는 확실한 말들을 피해 주변을 빙빙 돌며 머뭇거린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증명해 내기 위한 전시 대신에 그저 상태를 드러내는 것, 나 역시도 그 안에서 상태로 머무르는 쪽으로 다가간다. 기획자가 무엇인지, 전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떻게 하면 기획자와 작품, 작가, 그리고 공간의 관계를 우리가 만드는 전시와 동떨어지지 않게, 우리의 삶과 동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그 과정의 상태로.
《오직 밤뿐인》에서 우리는 그저 그렇게 머무르며, 타자의 말을 반복하고 따라 하면서 전시장을 오갔다. 그러는 동안 어쩌면 뭉근하게 두어 번 마주치고 헤어졌을 것이다. 그 시간은 지나갔지만 나에겐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직 흐릿하게 남아있다. 다시 나를 머뭇거리게 하는 목소리…
손현선〈조각컵〉패널에 흑연 27.3 × 22cm 2024 제공 : 에이라운지
손현선 〈투명_몸〉(사진 가운데 )
투명 필름 위에 젤 미디엄 가변 크기
2023 《오직 밤뿐인》 에이라운지 전시 전경 2024
《Time Lapse : 어느 시간에 탑승하시겠습니까?》
페이스갤러리 2.15~3.13
추성아 리움미술관 큐레이터
회화적 시차 적응
다시 만들어진 회화적 재현의 세계는 우리가 처한 크고 작은 삶에서 개인으로부터 출발했으나, 다수의 공감을 끌어내는 미시사 중심으로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소위 인물과 풍경을 내포하고 있는 재현의 세계가 고정된 장면과 틀을 담고 있을지언정, 대상을 회화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의 힘은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을 투영하고 각자의 발화된 말들로 확장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각각의 고유한 시간 위에 점철된 작품세계와 마주했을 때, 동시대에 경험한 시대적 정서가 반드시 같은 방식으로 감각되거나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았던 태도가 마냥 낯설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전시 《Time Lapse : 어느 시간에 탑승하시겠습니까?》의 회화 작가 여덟 명은 같은 시간의 축을 공유했던 이들과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작가까지 미묘하게 교차한 시간 위에 놓여 압축된 세대의 폭을 대변한다.
여덟 명의 작가가 재현하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는 각자가 위치한 자리에서 사유할 수 있는 방식에서부터 출발하여 각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다시, 자신을 향한다. 이들이 캔버스 위에 직조한 회화적 재현 방식은 리얼리즘을 표방하면서, 동시에 매우 낭만적이고도 냉소적이며 초현실적이다. 긴 시간 각자의 언어로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여덟 명의 다채로운 시간과 감각을 동시에 소개하는 이 전시는 ‘타임랩스’라는 제목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한다. 전시는 시간의 흐름을 내포하는 전시명을 통해 회화에서 작동하는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인 형식에 주목하고, 여러 층위의 세대를 상대적 감각의 연속체로 바라봄으로써 길게 펼쳐 놓은 시간을 압축적으로 스토리텔링 한다. 이렇듯, 전시는 여덟 명이 상호작용하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시간의 감각에 기대어 회화적 방법론과 태도로 서로가 끌어낼 수 있는 명목과 생각의 형식, 그리고 일상에서의 몰입을 공유한다.
타임랩스의 핵심인 상대적 시간은 일정한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고, 시간을 압축하며, 제어하기 위한 기록의 촬영술이기도 하다. 전시는 ‘어느 시간에 탑승하겠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우리에게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 주인이 되라고 제안한다. 이 제안은 전시 공간의 각 층을 세대, 회화적 방법론, 서사적 특징, 상징과 재연 등 주체와 대상, 주제, 그리고 형식으로 구분하여 동시대 회화의 가능성을 압축된 시간 위에서 감지하도록 한다.
서용선 〈숙대입구역 07:00~09:00〉 아크릴릭, 캔버스에 비닐 테크닉 180 × 230cm 1991
제공 : 작가, 페이스갤러리
예컨대, 서로 다른 시간의 축 위에 서울을 기록하는 이우성과 서용선의 작품으로 시작되는 전시는 한 개인이자 모두를 상정한 사회적 합의에서 느낄 수 있는 불안과 희망을 전달한다. 이와 같은 몸짓은 우리가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회화적 재현 방식을 제안하고, 세대를 막론하고 인간이 품고 있는 본질적인 감각과 태도의 보편적 감각으로 이끌도록 한다. 이어서 우리가 탑승하게 될 또 다른 시간은 대상의 내면을 통과하는 각자의 표현 방법이 매개된 서로 다른 회화적 방법론을 구사하는 박광수, 이재헌, 류노아의 실존적 자아를 통제하는 영역으로 존재한다. 그리기 방식에 초점을 두어 화면과 대상을 지탱하는 형식이 곧 회화의 지지체가 되는 이 포털은 시간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매개체에 주목한다. 이후에 펼쳐질 세계는 마치 타임랩스가 무한 반복되는 시간의 루프에 갇힌 블랙홀과 같다. 정속도로 존재하지 않는 타임랩스의 감각처럼 보통의 시선으로는 감지하기 어려운 초월한 시간에 주목한 김정욱, 김진희, 정수정의 상호작용은 신화적 상상과 현실에서의 기억, 그리고 가상의 우주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회화의 집합체와 같다. 각각의 공간에 이들을 묶어 놓은 듯하지만, 두 개의 공간에는 몇몇의 작가들이 사실상 함께 뒤섞여 있다. 이렇듯, 이들의 내면을 향한, 삶과 죽음에 대한 탐구는 여러 참조점을 중심으로 고유한 세계관 안에서 세대를 뛰어넘는 공통된 질문과 사유로 발화된다.
그 어떤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은 이 시간의 흐름은 프레임의 속도 위에 파편화되어 무한한 별처럼 각자의 시간 속에서 반짝인다. 압축된 시간이 주는 비현실감은 기억과 시간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여러 세대를 아우른 자신과 당신,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서사를 대변하여 어떤 시간의 좌표를 잠시 정지시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세 개의 포털을 통과한 이들에게 다시 질문한다. 당신은 어느 시간에 탑승하시겠습니까?
《Time Lapse : 어느 시간에 탑승하시겠습니까?》 페이스갤러리 전시 전경 2024
사진 : 김상태 제공 : 페이스갤러리
《박관택: Back and Forth》
씨알콜렉티브 2.22~3.30
노재민 기자
사이를 가로질러 본질을 찾아 나서는 여정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언뜻 회화로 보이는 작품들이 벽에 붙어있다. 액자 처리가 되어 있지는 않아 걸려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부리고, 홈을 내거나 접는 등의 변주를 자세히 살피려고 가까이 다가가면 지지체는 캔버스가 아니라 다른 물성을 지닌 물질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게 된다. 두께가 조금 있어 어떠한 판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조각 작업 같기도 하다. 캔버스가 아닌 것을 확인하고 나서, 지지체의 정체가 뭔지 알고 싶어 전시장 구석으로 가서 캡션을 살펴본다. 그 정체는 MDF 패널이었음을 알아차린다.
다시, 개별 작품에 다가섰다가 뒤로 물러서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MDF 패널의 앞면에 투명하게 드러나는 드로잉 못지않게 뒷면의 조형을 확인하고 싶어져서인데, 한 눈에 잘 보이지는 않아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본다. 무엇보다 작품이 붙어있는 벽면에 색이 살짝 비치는데, 어떠한 원리인지 고민하며 괜히 조명의 위치를 한번 살펴본다. 뒷면의 형광 안료가 그 원리를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서문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이렇듯 관람의 종료는 자꾸 지연되고, 전시장에 입장한 관람객이 몸을 움직이면서 궤적을 만들어 가는 일이 불가피해 보인다.
회화와 조각을 엄격하게 분리하던 모더니즘으로부터 이탈한 것이 미니멀리즘 아니던가. 회화와 조각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Back and Forth》의 출품작은 그러한 점에서 미니멀리즘 사조를 생각나게 한다. 한편, 미니멀리즘 미술가들이 작품을 직접 제작하지 않고 제련소에 재료를 맡기고 타인에게 제작을 분담시키는 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미니멀리즘과 강하게 부딪친다. “내구성이 더 좋은 알루미늄을 사용하지 그랬냐”는 피드백에 박관택은 “작업의 공정을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는 방식을 피하고 싶었다”고 밝힌다.
〈Untitled 06〉MDF 패널에 아크릴릭 146 × 224cm 2024
그 이유에 대한 답으로 “창작자와 관람자가 구분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달리 말해 작업을 할 때 제1 관람자는 작가 자신이 될 수밖에 없는데, 작업의 프로세스를 외주로 맡겨버리면 “제1 관람자로서의 경험을 놓치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작가는 본인이 제일 먼저 작업을 경험하며 관객이 경험하는 것을 예측해보려고도 한다. 이번 전시가 관람객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관람객이 하나의 큰 변수로 작용했던 미니멀리즘을 연상하게 하는데, 마찬가지로 미끄러지는 부분도 같이 작동한다. 미니멀리즘이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며 작품의 의미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주체로 관람객을 등장시킨다면, 박관택은 저자와 관람객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더 깊은 이해를 위해 그의 이전 전시를 되짚어 보자. 박관택은 관람객이 흰 벽에 UV 라이트 손전등을 직접 비춰야만 작가의 행적을 관람할 수 있는 전시 《여백》(인사미술공간, 2019 )을 구성하기도 했고, 《페어링》(인천아트플랫폼, 2021 )에서 드로잉과 스피커를 결합하기도 했다. 여러 매체를 경유하던 작가가 가장 ‘본질적인 방식’의 실험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포스트미니멀리즘의 실험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지각 경험이 오히려 유효하다는 생각에 AI가 예측할 수 없는 물리적인 영역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고 밝힌다. 그래서인지 회화의 느낌을 내기 위해 작업을 바닥에 설치하거나 위에 매다는 등의 설치 방법을 일부러 배제했다.
이렇듯 이번 전시는 미술사의 사조로 따지자면 미니멀리즘에서 포스트미니멀리즘까지 경유하지만, 계속해서 어긋나는 지점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박관택이 당시의 사조로 회귀해서 딱 들어맞는 작업을 한다기보다는 그 속성들이 자연스럽게 체화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회화와 조각 사이, 작가와 관람자 사이를 가로지르는 박관택에게 미니멀리즘과 포스트미니멀리즘의 특성이 무시간성을 띠며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짐작건대 본질로 추정된다. AI가 등장하고 전시장에서 유사 자연을 영상으로 관람하는 시대에 관람객이 전시장에 직접 방문해서 몸을 움직이며 전시를 관람하게 하는 것.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할 방법을 고심하며 관람의 종료를 지연시킬 장치들을 마련하는 것.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관람객이 전시장에 더 오래 머무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혹은 예술이 담론을 잔뜩 휘두른 작금의 상황에서 다른 담론을 걷어차 버리고 예술 그 자체만으로 존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작업이 무언가에 대한 답을 내리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프롬프터로서의 역할을 이행하는 것이다.
지지체로 MDF 패널을 사용했고, 뒷면의 형광 안료가 벽에 색을 반사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보자. 지지체의 물성은 어떠하고 뒷면의 색이 벽에 반사되는 원리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정답을 구하는 행위 혹은 작품이 결국 회화인지 조각인지 답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기보다는 그것에 관해 논의가 생성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Untitled 13〉(사진 가운데 ) MDF 패널에 아크릴릭 146 × 112cm 2024 《박관택 : Back and Forth》
쪽〈Untitled 03〉MDF 패널에 아크릴릭 40 × 30cm 2024
사진 제공 : 작가
《무솔리니 팟캐스트》
아마도예술공간 3.6~4.5
정소영 기자
과거가 될 현실을 통해 미래를 바라보는 법
사회, 경제, 예술 할 것 없이 분야마다 인공지능에 관한 관심이 뜨겁다. 유럽연합(EU)은 무분별한 인공지능 사용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세계 최초로 인공지능 규제법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우려와 격려가 뒤섞인 기술로 인한 지금의 변화는 카메라와 인터넷 발명 이후 최대의 변화가 아닐까 싶을 만큼 격렬하다. 제11회 아마도전시기획상에 뽑힌 《무솔리니 팟캐스트》는 인공지능의 무분별한 수용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창시자로 불리는 ‘무솔리니가 지금의 인공지능 시대를 만났다면’이라는 가설로 시작되는 전시 기획은 오펜하이머와 노벨의 발명이 낳은 인류의 변증법적 역사를 근거로 인공지능의 발전 이면의 탐색을 독려한다.
기술발전에 대한 경계와 융합 사이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동시대인들은 기술 발전에 따른 부작용을 염려하고 경계하는 반응과, 융합과 활용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반응을 동시에 보이며 논쟁을 벌였다. 김정인은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독창적 창작 방식을 작업으로 표현한다. 작가의 다중적 경험을 통한 기억 혼합으로 이뤄진 작품은 저마다의 조각이 모여 하나의 상을 이룬다. 깨진 거울 조각 같은 이미지의 결합은 기억 속 현실의 반영이자 깨진 현실의 저항이다. 사진 기록으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현실과 가상 그 중간에 놓인 인간의 기억은 지금의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데이터의 이미지와 흡사하다. 작가의 근작에 가까울수록 점점 더 확장되는 결합된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서 프랙탈(fractal )의 흔적은 인간의 창작영역에 대한 균열의 표현임과 동시에 아직은 기술이 미치지 못하는 변수로서의 인간의 창작영역을 대변한다.
안준은 기술의 융합과 활용을 통한 생성형 인공지능에 의한 이미지를 작업에 활용한다. 태초에 신이 언어로 인류를 탄생시킨 것에서 착안해 자아, 가족, 사랑, 행복과 같이 문화와 개인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이 함의된 추상명사를 프롬프트를 통해 대화가 가능한 인공지능의 의인화된 이미지를 유도한다. 규정에서 벗어나는 답을 얻어내는 이런 프롬프트 해킹 과정에서 출력된 이미지 중 하나인 〈Good Morning, John〉 시리즈와〈A Room for you and God〉 시리즈는 인류를 만들어낸 신과 1965년 최초로 인공지능을 언급한 존 매카시의 이름을 따서 붙인 제목에서 읽히듯 신과 인공지능의 만남을 이미지를 통해 현실화시켰다. 인공지능 활용을 통해 도출해낸 가상의 이미지는 현실과 가상 그 중간의 세계를 몽환적으로 표현한다.
정나영 〈기억의 동굴〉 점토, 언더글레이즈, 유약, 데칼, 금박, 나무 가변 크기 2022
현실과 가상 그 사이의 공간에 대해
SNS를 통해 나의 일상과 생각을 타인과 공유하고, 메신저 상태 메시지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시대에 가상과 현실은 어떻게 구분돼야 할까. 정아사란은 비물질의 데이터를 감각화하면서 물질의 변화와 경도의 차이를 함께 시각화한다. 이는 “실재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물음에 대한 작가의 답이자 1과 0으로 압축되는 가상에 대한 현실에서의 작가적 표현이다. 정나영은 현실 속 자연의 근원 중 하나인 흙을 재료로 하는 도예와 자연 소재를 주로 사용하는 작업을 통해 물성에 포함되는 지역적 특성과 자신의 경험을 설치와 퍼포먼스로 표현한다. 작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장소를 출력된 사진으로 소환해 다시금 도자에 캐스팅한 〈Memories Within Caves〉는 작가의 실제적 기억이자 데이터의 소환으로 이뤄진 사진과 실제 공간에 존재했던 흙의 물성과 지역적 특징을 혼합한 작업이다.
예술을 통한 현재의 기록
인류 과학의 비극은 기술 발전 그 자체가 아닌, 헤겔의 변증법에서 이야기하는 새로운 창조의 시작 이면에 파멸과 죽음의 결과를 초래한 사실을 망각하면서 이어졌다. 지금의 인공지능 역시 기술 발전 그 자체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로봇이 인류를 대체할 것이라는 1차원적 박탈감이 아닌, 그동안의 역사가 증명한 기술 발전 과정에서부터 결과의 이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경고다. 이번 전시는 인간 고유의 창작 방식의 독창성과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생, 가상과 현실 그 중간의 접점을 그리면서도 자연 그대로의 물성을 기억하려는 작가들의 태도와 작품을 통해 과거가 될 현재에 미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함께 고민하게 한다.
김정인 〈풍경에 스며드는 별 2〉(사진 오른쪽 ) 캔버스에 유채 130.3 × 162.2cm 2023
정아사란 〈Light Structure〉
스티로폼, 유리, 레진, 더블 채널 비디오, 사운드, 비디오 설치 가변 크기 4분38초 2023
사진 : 박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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