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ORS VOICE & CRITIQUE
최희승 | 빌리타운 게스트 큐레이터
김윤익 | 413BETA 디렉터, 아트플랫폼 PACK 대표
콘노 유키 | 미술비평
백지홍 | 광주신세계갤러리 큐레이터
김아영 | 대림미술관 큐레이터
《물보라를 일으켜》
KF갤러리 6.20~8.17
최희승 빌리타운 게스트 큐레이터
카테리나 하일 〈거의〉(사진 가운데)
3D 비디오 애니메이션, HDMI 스크린, 헤드폰 5분 7초 2019
《물보라를 일으켜》 KF갤러리 전시 전경 2024 제공 : KF갤러리
또 물보라를 일으켜!
“희승, 우리 몬드리안 펀드에 선정되었어! 4명 모두 서울에 가게 될 거야!!” 문자를 받고 눈을 크게 떴을 때 시곗바늘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전시 개막을 2주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 대부분을 작가 없이 설치해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불을 끄고 누워 KF갤러리 공간을 머릿속에 띄워놓고 조각의 설치 순서와 특수한 못과 망치, 접착제들, 천장의 디스코 볼 모터까지 짚어가던 중에 지원금 선정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아마도 개막까지의 여정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면 이때가 아닐까. 처음 들었던 생각은 방금까지 떠올리던 설치에 대해 조금은 안심하게 된 것도 아니었고, 자비로 비행기 표를 구매했던 지아지아 치와 샘 해쉬바흐에 대한 미안함이 덜어진 것도 아니었다. 머나먼 거리를 날아온 작품들이 좀 더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겠구나 싶은 안도감이 가장 먼저 들었다. 작품이 온전히 전시장에 도착했다가 있던 곳으로 잘 돌아가는 일. 이번 전시는 가장 기본적인 전시의 일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듭 되새기게 했다.
작년 9월의 어느 날 당시 런던에서 지내던 중, 지인으로부터 빌리타운이라는 네덜란드의 미술 기관에서 한국과의 교류전을 기획하고 있고 실현할 수 있는 큐레이터를 찾는다는 이메일을 받게 되었다. 빌리타운은 2003년 설립된 헤이그의 비영리 기관으로 1층에는 전시 공간과 서점이 있고, 2층에는 작가 스튜디오와 레지던시, 아카이브 라이브러리를 두고 운영하는 곳이라는 소개와 함께 몇 가지 정보를 전달받을 수 있었다. 그중 눈길을 끌었던 점은 20명이 넘는 다국적, 다양한 나이의 작가들이 공동 운영진으로서 각자 역할을 수행하고 의사결정을 하며 꾸려가는 방식, 즉 협동조합을 연상케 하는 빌리타운의 운영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 단체에서 한국 미술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도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실제로 빌리타운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중정 구조의 2층 중앙홀에 작가들이 모여 앉아 PT나 워크숍을 하거나, 서로 경험한 비엔날레나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이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참여를 결정한 뒤부터 전시의 구조를 빠르게 잡아나갔다. 현재 빌리타운의 멤버이자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였던 지아지아 치가 이번 프로젝트의 공동 큐레이터로 함께했다. 빌리타운에서의 전시와 한국에서의 전시, 서로 다른 두 전시의 골자가 교류의 성격을 지녔기에 서울과 헤이그의 공통적인 이슈를 찾아내는 것에서부터 기획은 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두 도시를 가로지르는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작년 여름 서울에서의 장마와 홍수에 대한 뉴스를 접하며 기후 변화를 투명하게 반영하는 물과 그 속도에 대응하지 못하는 사회 구조, 건축물, 매일의 삶에 대해 털어놓았었다. 여기에 대해 지아지아 치는 해안 도시인 헤이그를 위협하는 가파른 해수면 상승에 대해 말해주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헤이그 전체를 비롯하여 내가 사는 지역이 언제 침수로 사라지게 될지 예측해 주는 앱이 인기라고 했다. 전시로 말할 수 있는 메시지의 강도와 방향은 서로 달랐지만, 물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 우리는 동의했다.
주제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며 네덜란드 작가와 한국의 작가 리스트를 만들어 서로 공유하고 리뷰했다. 작가는 언제나 전시를 만들어 나가는 근간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 (파트의) 작가’라는 말을 사용하는 횟수와 비례하여 묘한 책임감이 추가로 뒤따랐다. 참여 작가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적’인, ‘한국적’인 작업에 대한 질문과 자문이 오가기도 하였다. 빌리타운 일부의 의견이지만, 한국 작가들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은 작품의 높은 완성도와 화려한 색감, 동시대 미술의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하는 점, 개인의 뛰어난 기량 등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런 지역적 경계보다도 그것을 침투할 수 있는 작가 개인의 주제와 표현, 태도에 대한 관심이 결정적인 우선순위가 되었다. 다수의 회의와 작가별로 출품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쳐 한국 전시에는 샘 해쉬바흐, 아프라 에이시마, 지아지아 치, 카테리나 하일이 참여하고, 빌리타운에서의 전시에 노혜리, 윤지영, 이은새가 참여하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비행금지 구역 때문에 늘어난 비행거리와 코로나 기간 동안 변화된 규제들의 불안정함 속에서 열네 시간을 오가는 작가와 작품을 보며 전시는 많은 사람과 마음을 모아 함께 벌이는 일이라는 되새김도 있었다. 지난 6월 20일 KF갤러리에서 개막한 《물보라를 일으켜》 파트1 전시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의 공동 주최,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과 몬드리안 펀드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파트2는 예술경영지원센터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의 후원이 결정되었다. 빌리타운에서 보내온 한국에 대한 순수한 관심과 요청에 대해 흘려듣지 않고 귀 기울여준 사람들 덕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에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는 네덜란드 작가들의 열망도 긴 프로젝트를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화려한 색채를 지닌 아프라 에이시마의 대형 텍스타일과 신작 태피스트리를 비롯하여 KF갤러리를 그린 샘 해쉬바흐의 회화 2점을 포함한 룸 포트레이 시리즈를 전시 중이다. 공간과 빛, 환경에 대한 경험을 만드는 지아지아 치의 설치 신작은 이탈리아에서 레지던시를 마친 작가와 함께 도착했다. 카트리나 하일이 이번 전시에 맞춰 새로 그린 대형 드로잉과 라이프 캐스팅한 조각까지 총 16점의 작품이 KF갤러리에 모이게 되었다. 전시장에서 물과 관련된 익숙함, 두려움, 경외, 아름다움, 신화 등 다양한 작품 속 모티브와 함께 네덜란드 작가들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의 국문 제목인 ‘물보라를 일으켜’와 동일한 후렴구를 지닌 아이돌 가수 ‘오마이걸’의 노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노래의 반복적인 리듬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어 흥미로운 일이다. 노래와는 무관하지만 유동적인 움직임으로 중력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파도와 매번 다른 형태를 지니며 일어나는 ‘물보라’의 개방적인 상태를 말하고 싶었다. 전시를 통해 강조하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오늘의 물에 대한 인식의 시작점이 되기를 바랐다. 한편 거대한 배의 이미지나 물방울, 파도, 제방 등 물에 대한 직접적인 이미지를 따라갈 수 있도록 구성한 이번 전시와 이어질 빌리타운에서의 전시는 방향을 달리할 계획이다. 11월 개막을 준비하고 있는 파트2의 경우 지리적 경계를 이동하는 개인과 신체, 인간에게 가장 익숙하고 가까운 몸속의 물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다음 전시는 빌리타운에서의 첫 한국 작가 그룹전인 것은 물론이고, 아시아 여성 작가로 구성된 그룹전이 처음 열리는 것이라고 한다. 물리적인 거리와 낯선 환경, 예측할 수 없는 제약들 속에서 어떤 과정을 기꺼이 마주하고 어떤 의미의 파장들이 전시를 통해 일어나게 될까. 헤이그의 비어있던 전시장 이곳저곳을 기억하고 떠올리며 작품이 자리하게 될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
《URGENCY: Daddy’s Dinner》
413BETA 6.21~7.7
김윤익 413BETA 디렉터, 아트플랫폼 PACK 대표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 방식의 네트워크는 어떻게 가능할까?
네트워크 더 오븐(Network THE OVEN)1은 2023년 6월 노르웨이 모스의 옐로이섬에서 개최된 비엔날레《Momentum 12 : together as to gather》에서 시작되었다. 옐로이섬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풍경을 잊을 수 없는데, 오래된 숲과 드넓은 초원, 능선 너머로 길게 뻗어있는 흙길, 그 뒤로 멀리 검푸른 노르웨이 바다가 조용히 넘실대는 모습은 마치 중세 시대에 시간이 멈춘 듯한 생경한 풍경이었다. 팬데믹 직후라서 그런지, 서울의 빌딩 숲과의 대비가 더 크게 다가왔다. 한국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던 나에게 이러한 자연의 아름다움은 큰 위안이 되었고, 섬의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속도감을 찾으며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비엔날레 현장에서의 경험 또한 매우 생경했다. 나는 자문 역할로 초대받았지만, 당시의 감독인 텐트하우스(Tenthaus)는 구체적인 역할을 전달하지 않았다. 그들은 비엔날레의 부제 ‘together as to gether’의 의미를 조직 방식에도 적용한다고 설명할 뿐이었다. 참여자들이 비엔날레의 주최 측과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역할과 결과물을 규정할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처음에는 준비가 부족하거나 비엔날레가 너무 느슨하게 운영되는 것이 아닌지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비엔날레의 디자인을 맡은 태국 – 방콕의 스튜디오 150과의 대화가 생각난다. 비엔날레에서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점차 자신이 무엇을 하면 좋을지 생각하며 만들고 싶은 것을 제안해 나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네가 하고 싶은 걸 생각해 봐, 그리고 그걸 말하면 돼”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너무도 어색하다고 느꼈다. 한국에서는 역할이 분명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프로젝트의 범위는 예산과 일정에 의해 가시화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의 반쯤은 내려놓은 상태로 일단 비엔날레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지켜보기로 했다.
정말 텐트하우스는 나에게 어떤 업무도 할당하지 않았다. 되레 내가 할 일을 이야기하자며 미팅을 요청할 뿐이었다. 몇 번의 미팅을 통해 그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텐트하우스는 이번 비엔날레를 하나의 종결된 프로젝트로 생각하지 않고, 비엔날레의 조직 방식이 실험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비엔날레 이후 모인 구성원들의 만남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길 바랐고,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있게 다루려 했다. 팬데믹을 거치며 나에게도 새로운 방향성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피어났고, 그들의 의도가 크게 와 닿았다. 결국 나는 비엔날레 기간 특별한 역할 없이 시간을 보냈고, 전시 설치 주변을 맴돌며 사담을 나누고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이야기하면서 비엔날레를 구석구석 관찰하며 깊은 관계를 맺어 나갔다.
비엔날레는 느슨한 분위기와 형태로 오픈했다. 인도네시아 – 자카르타의 ‘구드스쿨(Gudskul)’은 밤이면 작은 광장에서 저녁 식사를 만들고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 그들이 찾은 역할이었다. “렛츠 두잉 가라오케”라고 말하며 노래를 권하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Momentum 12의 실험적인 비엔날레 조직 방법을 경험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도 일이 되는구나.
《URGENCY : Daddy’s Dinner》 413BETA 전시 전경 2024
제공 : 413BETA 사진 : 이 생
한국에서의 경쟁적이고 과열된 예술 장의 분위기를 떠올려본다. 급속히 발전하는 기술과 자본화는 예술 생태계를 양극화시켰고, 예술가에게 복잡한 제약이 되었다. 2010년대 중반쯤, 아티스트 런 독립 공간들이 나타났고, 내가 운영하는 413BETA(구 공간사일삼)도 그중 하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러한 흐름이 우리를 둘러싼 제약을 가시화하는 사건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신생 공간도 그렇고 2015년의 《굿-즈》도 그러하다. ‘함께 한다’라는 측면에서 Momentum 12와도 비슷하지만, 조직하고 운영하는 방식은 달랐다. 이 다른 부분이 공간들이 문을 닫고, 《굿-즈》와 이후 생겨난 대안적 아트페어, 플랫폼들이 사라지는 원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창작자 커뮤니티의 발현이 너무나도 목표 지향적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은 거다. 나는 이러한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근본적인 모순과 한계를 상기한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 우리를 위치시키는 그것 말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네트워크 더 오븐을 결성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Momentum 12에 모인 사람들과 나눈 수많은 이야기는 각자가 직면한 커뮤니티의 위기에 대한 토로였고, 함께 고민을 풀어나갈 방법을 찾자는 취지였다. 텐트하우스의 비엔날레 방식 ‘Together as to gather’는 우리 모두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다. 목표를 설정하지 말고, 함께 하는 것이 어떤 움직임을 만들지 기대하는 마음.
이후 네트워크 더 오븐의 첫 프로젝트인 ‘URGENCY’의 총괄기획을 맡게 되었다. 비엔날레에서 찾지 못한 나의 역할을 비엔날레 이후에 찾은 것일 수도 있겠다. 각자의 커뮤니티의 ‘URGENCY’에 대한 접근을 요청했고, 서로 다른 지역과 환경에서 우리가 함께한 옐로이섬의 자연과 그 안의 모든 물질 위에서 서로를 신뢰할 수 있었듯이, 이러한 물질들의 관계 속에서 전시 주제를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URGENCY’ 프로젝트는 내가 운영하는 서울의 413BETA에서 세 번의 전시를 연다. 태국 – 방콕에서 방콕 아트북 페어를 개최하는 ‘스튜디오 150’, 노르웨이 – 오슬로에서 전시 공간 ‘Tenthaus’를 운영하며 탈중심적인 협력 모델을 실험하는 ‘텐트하우스’, 인도네시아 – 자카르타에서 비학문적 교육과 예술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구드스쿨’의 전시가 순차적으로 열린다. 이후 한국에서 세 차례 세미나를 개최하고, 9월에는 싱가포르 아트 뮤지엄(SAM)에서 이 모든 과정을 소개하는 전시를, 11월에는 이 모든 시간을 담은 아카이브 북 『URGENCY』를 출간하며 일단락된다.
‘URGENCY’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재미있었던 것은 이 모든 계획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덧붙여 가며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서로가 할 수 있는 만큼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면서 새로운 기회가 만들어지고, 그때마다 아이디어를 모으면서 장기적인 프로젝트로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상호 간의 연결이 만들어내는 흐름을 매우 흥미롭게 생각한다. 앞으로 네트워크 더 오븐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공유한 지금의 ‘URGENCY’에서 싹트는 새로운 협력적인 관계들을 더 많은 커뮤니티와 연결해 나가길 기대해 본다.
1 도시 간 연결을 통해 독립예술 생태계를 활성화하고자 하는 국제적인 네트워크다. 방콕의 Studio 150, 오슬로의 Tenthaus, 자카르타의 Gudskul, 서울의 PACK & 413BETA가 함께 결성했으며, 노르웨이 Moss에서 열린 비엔날레 《Momentum12》를 계기로 시작됐다. ‘URGENCY’ 프로젝트는 네트워크 더 오븐의 첫 번째 프로젝트로, 서울의 413BETA에서 3회의 기획전과 싱가포르 아트 뮤지엄(SAM )에서의 아카이브 전시로 구성된다. 프로젝트는 각 커뮤니티가 당면한 시급한 문제를 탐구하며, 지역과 문화 간의 차이를 물질성을 중심으로 드러내고 연결할 가능성을 모색한다
《Open Corridor》
인터럼 6.14~30
콘노 유키 미술비평
《Open Corridor》인터럼 전시 전경 2024 제공 : 인터럼
길쭉한 회화가 설 때 세워지는 것
1. 회화 : 넘어(,)섬의 공간
회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그것은 환영이 아니라 지지체가 아닐까. 말 그대로, 환영은 지지체인 캔버스에 붙어 있거나 안착되고,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상, 픽션, 허구, 환영으로 간주되는 이미지는 지지체를 통해서 성립(成立 )된다 — 즉 일으켜 세워진다. 그렇다면, 일으켜 세워지기 이전에 이미지는 누워 있었을까? 누워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잠을 자고 있었다. 이미지는 지지체(支持體)의 지지(支持)를 받아, 신체(身體)를 부여받고 일어서게 된다. 그리하여 가상의 장면, 가상의 공간을 제 눈앞에 구현하고 작품으로서 출현한다. 하지만 보고 있는 우리의 신체와 달리, 회화는 부유한다 — 입체 작업이나 설치 작업과 달리 바닥에서 떠 있다. 회화가 창문으로 비유되는 이유가 있다면, 창문이 바닥에서 떠 있기 때문이다. 창문은 문처럼 사람의 신체적 드나듦을 허용하지 않는다. 도둑은 풍경에 침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신체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인지해서 창문을 깨부순다. 오히려 창문 너머 보이는 것들이 도둑과도 같다. 바닥에서 떠 있는 상태로 풍경은 내가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 침투해 온다. 회화 역시 마찬가지다. 바닥에서 떠 있는 회화가 내게로 침투한다. 도둑보다 더 적절한 비유를 들자면, 회화는 유령과 같다. 유령은 물리적 제약을 (그야말로) ‘넘어(,)선다’. 유령의 서 있는 신체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바닥에서 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는 거기에 서 있지만,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채 여기에 와 있다.
창문과 유령의 공통점처럼 이것/이곳이 아닌 저것/저곳이 온 곳, 즉 ‘그것/그곳’으로서 회화가 있다. 창문인 동시에 유령인 회화는 《Open Corridor》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을까? 캔버스를 짜는 일을 하는 손주영이 2017년부터 시작한 ‘OC(Objectified Canvas) 프로젝트’가 전시 형태로 인터럼에서 열렸다. 이 프로젝트에서 손주영은 남은 자투리 천으로 캔버스를 짜고 작가에게 작업을 제안하는데, 이는 작가가 발주해 원하는=구상하는 사이즈를 짜는 일반적 순서를 역행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회화들은 생김새가 세로로 길쭉하여 전시 제목에 들어간 ‘복도(corridor)’를 형태적으로 연상시킨다. 전시된 작품의 시각장은 슬릿(slit)처럼 세로와 가로 길이가 대비를 이루는데, 창문으로 비유되는 일반적인 화면보다 부족한 면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면의 형태보다는 유령에 비유된 부유하고 서 있는 회화의 성격이다. 기획자 손주영이 《Open Corridor》를 설명하며 영화〈여고괴담〉에 등장하는 복도 장면의 ‘씬’을 이야기할 때1, 앞서 설명한 회화의 유령적 성격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복도 끝에서 이쪽을 향해 이미지가 서게 된 것이 회화이다. 캔버스는 작품이 실제로 걸려 있는 전시장과 달리 깊이감이 없는 평면이다. 하지만 작가가 각각 화면을 구상하여 작업할 때, 물리적 제약을 ‘넘어(,)선’ 이미지는 지지체의 지지를 받고 여기에 있다=존재한다. 그것/그곳이 바로 회화이다.
2. 유령이 된 캔버스=지지체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은 제공될 캔버스 크기뿐만 아니라 작업의 방향성도 제안을 받았다. 기획자와 화가가 어떤 작업이길 바라며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 ‘지지’체는 어떤 의미에서 ‘지시’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시— 곧 명령이 아닌 — 를 받고 작가가 작업한 회화는, 그간 해 온 표현 방식이나 지시(제시)된 내용을 활용해서 작품으로 잘 풀이된다. 이는 전시장에 비치된 리플릿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으며, 작가에게 제안한 내용과 작업으로 반영한 회답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 봤을 때, 지지체 이야기보다 협업의 관점에서 이번 전시를 분석하는 게 더 적절해 보일지도 모른다. 캔버스가 되지 못(할 뻔)한 천으로 짠 작품, 명령과 다른 제안을 작가들이 받아들이고 풀이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 길쭉한 물성의 한계를 가진 캔버스는 협업의 관점 (혹은 소유에 집중한 나머지, 캔버스-컬렉터의 소유 형태가 규정되어 버린 판매 기획2)에서 보는 시각 또한 필요하다. (내부의) 구조적 문제를 형태에/에서 읽어내는 시도도 유익하지만, 이 글에서는 넘어(,)선 회화의 창문과 유령적 성격을 끄집어내고자 한다. 슬릿의 화면은 형태적 유사성뿐만 아니라 복도에서의 시각장 형성 방식을 내포한다. 복도는 막다른 길이 아니다. (건물) 내부에서 흐름을 만드는 이 통로는 멀리서 오는 대상을 만나기도 할 뿐만 아니라, 그 대상을 피해서 문을 열어 가까운 방에 숨을 수도 있다. 제안을 받았을 때, 작가들에게 화면상의 선택지는 (그야말로) 여러모로 열려 있다 — 하지만 여러 면은 통로처럼 닫힌 곳에서 선택된다.
이번 전시에서 바닥에서 떠 있는, 그러면서도 서 있는 회화는 입체와 다르다. 길쭉한 회화가 아닌 길쭉한 입체는, 특정 대상을 지시할 수 있다. 바닥에 닿아 있을 때, 입체는 이제는/아직은 없는 특정 대상을 지시할 수 있다. 묘비처럼 고인의 부재를 가리키기도 하고, 피뢰침처럼 도래할 것을 미리 받아들이고 가리키기도 한다—이런 의미에서 입체(立體)는 스스로 입지(立地)를 가질 수 있다. 꽂혀 있는 막대는 지상과의 연결을, 이제는/아직은 없는 대상과의 관계가 든든하다. 이는 입체의 전통적인 지지체인 좌대가 이동 속에 입지를 갖는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와 달리, 회화는 이미지가 지지를 받으면서도 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최근에 많은 작가가 신경을 쓰면서 설치를 진행할 때, 회화 작업은 오히려 모니터와 같은 디스플레이처럼 다루어진다.3 캔버스와 철제 파이프가 결합되거나 후자가 전자를 받쳐 줄 때, 회화의 유령적 성격은 이미지와 지지체=캔버스의 기본적 관계에서 회화 이미지와 설치 = 디스플레이의 관계로 미끄러지면서 지지체의 외적 조건만 주목을 받는다. 회화 작업 자체의 물성을 극복하는 듯이 공간적으로 전개되는 설치 작업에서, 캔버스만큼 유령이 된 것도 없다. 《Open Corridor》에는 캔버스만큼 유령인 것이 ‘있다’. 구조물을 통한 설치적 연출과 이미지 분석 사이에서 캔버스는 정작 주목되기 힘든 국면을 맞이하였다. 길쭉한 회화는 망령처럼 나타나, 그 사이에 슬릿처럼 들어간다 = 슬릿을 낸다.
3. 회화( – )작업 혹은 이미지라는 덩어리에 슬릿 넣기=개입하기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복도를 지나갈 때, 조우의 공간을 정면(의 대상)이나 좌우(에 있는 방, 공간)로 만드는 것은 사실 벽이다. ‘대상화된 캔버스(Objectified Canvas)’가 ‘열린 복도(Open Corridor)’가 될 때, 길쭉한 회화는 트인 곳에 놓이는 것이 아니다. 뒤집어 말해, 길쭉한 회화는 지시와 작업 사이의 선택뿐만 아니라 공간적 분수령이 되어, 오늘날의 회화( – )작업을, 그 안에 사실상 내포된 규정의 문제를 분석한다. 자투리 천은 남거나 더 많은 여분으로 가려진 — 그러나 사실상 거기에 있는 이미지와 지지체의 관계 맺음, 더 나아가 회화와 설치 구조의 관계 맺음을 표시한다. 서 있지만 바닥에서 붕 떠 있는 회화는 평면이라기에는 모자라지만, 그렇다고 입체나 설치 구조라기에도 모자란다. 이미지와 지지체(캔버스)가 만나면서 회화가/회화로서 서게 될 때, 길쭉한 회화는 회화 작업 — 은 물론, 입체와 설치까지 — 의 성립 요건 또한 세워놓는다. 그것은 ‘이미지’라는 한 단어로 묶여 설명되는 상황에 (슬릿을 넣어) ‘개입’하는 태도이다. 이 복도는 마치 병원의 수술실로 연결된 것과도 같다. ‘이미지’라는 한 덩어리에 메스를 넣을 때, 회화는 비로소 몸을 갖게 된다. 길쭉한 회화는 물리적 넘어(, )섬과 부유하는 상태에 평면과 입체, 설치적 구조를 심문하여 제자리에 다시 서도록 해 준다.
1 전시 리플릿 참고
2 이는 비단 아트 페어뿐만 아니라 《굿-즈》 이후 2010년대 후반에 등장한 대안적 판매 플랫폼에도 해당된다. 여기서 작품은 젊은 작가들을 둘러싼 최소한의 형태로 유통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인스타그램과 아트 페어에서 거래되는, 더 커지지 않고 부담 없이 소유할 수 있는 형태로 미끄러졌다고 할 수 있다
3 예컨대, 이번 전시에도 참여한 정주원과 진예리의 2인전《피노키오의 코끝》(Hall1, 2024)의 구조물을 떠올려 보라
《김우진 : 도시동심》
IBK 아트스테이션 6.24~8.1
백지홍 광주신세계갤러리 큐레이터
《김우진 : 도시동심》 IBK 기업은행 전경
2024 사진 : 박홍순
스테인리스 사슴, 빌딩 숲을 변모시키다.
을지로 기업은행 본점 로비, 다소 예상치 못했던 공간에 다채로운 색상의 입체 작품들이 펼쳐진다. 전시된 작품은 12점. 그리 많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방문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높이 5m의 대형 에어 벌룬 〈Dog〉로 시작해 2m를 훌쩍 넘기는 크기의 〈Deer〉 등의 작품은 높은 층고의 열린 공간을 채우기에 충분해 보인다. 한편에서 상영되는 작가 인터뷰 영상에서 작게 흘러나오는 소리 외에는 적막한 공간이건만 동물들의 울음소리와 몸짓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는 ‘IBK 아트 스테이션 2024’의 첫 번째 전시로 개최된 김우진의 개인전 《도시동심》이 가져온 변화다.
IBK 아트 스테이션 프로젝트와 김우진은 제법 어울리는 조합이다. 미술관이나 갤러리는 물론이고, 화이트큐브형 전시 공간과 거리가 먼 공간에 자리하고, 자신을 둘러싼 풍경을 변화시키는 것은 2013년, 작가를 대표하는 사슴 작업이 시작된 이래 그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미술관과 갤러리의 적막을 넘어 백화점과 쇼핑센터의 활기 속으로 다가가기도 했으며, 빌딩 앞, 공원, 강변, 숲속 등 야외 공간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굳건히 서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했다.
공간을 가리지 않는 것을 넘어, 작품이 전시된 공간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작가의 작업이 독립된 작품으로서 완결성 있는 조형미를 추구하여 놓인 공간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기 때문이다. 동시에, 비교적 명확하게 인식되는 동물의 시선과 동세는 함께 전시된 작품이나 전시 공간은 물론이고 관람객과 상호작용하며 일종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도시동심》에서처럼 등신대 혹은 그 이상의 크기로 제작된 사슴이 실내에 등장했을 때, 관람객은 마치 자연 속에 있어야 할 실제 동물을 본 것처럼 약간의 놀라움을 즐거움과 함께 느끼곤 한다. 반대로 자연 속에 자리 잡을 때는 강렬한 색상과 매끈하게 다듬어진 직선 혹은 곡선과 같은 인위적 요소가 강조되며 자연스럽지 않은 동물 형상이라는 반대되는 느낌을 전한다.
동물의 형상만큼이나 김우진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선명한 색채의 ‘조각’들이다. 알록달록한 조각들을 이어 붙여 형상을 만드는 작업 방식은 동물의 모습을 입체화하는 수많은 작가 사이에서 김우진의 작업을 한눈에 알아보게 만든다. 작품의 기본 단위가 되는 조각들은 편의점 등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플라스틱 의자의 다리 부분을 잘라서 재료로 사용하던 초기 작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의자의 다양한 사출색과 동일한 형태의 플라스틱 조각, 그리고 재료의 가벼운 느낌을 줄이기 위해 조각의 끝부분에 가미한 검은 터치는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며 오늘날까지 김우진의 작업을 대표하는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의자를 재료로 사용한다는 발상은 첫선을 보인 이래 많은 이의 관심을 받으며 다양한 전시에 초대되었다.
2017년, 스테인리스 스틸로 주재료를 바꾸었을 때도 스테인리스 스틸을 잘라 플라스틱 의자 조각과 유사한 형태로 조각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이어 붙여 동물의 형상을 만드는 방식을 고수했다. 그 결과 제작된 작품들은 기존 작업의 연장에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보다 선명해진 색상과 직선이 강조되어 정제된 실루엣의 변화는 재료에 따른 작풍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을 만큼 분명했다. 플라스틱 의자라는 제약이 사라지자, 동물들의 서식지는 급격히 확대되었고, 작가의 활동 영역이 커지는 만큼 작품들의 변주는 지속되었다.
〈Bull〉(2023 ), 〈Deer〉, 〈Dog〉, 〈Utopia Horse〉(2024) 등 《도시동심》에서 선보이는 작업은 플라스틱 시기(2013~2017)와 스테인리스 초기(2017~2022 )를 지나 2022년부터 새롭게 발표하고 있는 ‘스테인리스 2기(2022~)’에 해당하는 작업들이다. 초기 스테인리스 작업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직선 조각을 구부려 동세를 강조하고, 기존 작품에 있던 뼈대를 없애고 외부 유닛들이 형태를 지지하도록 했다. 구부러진 스테인리스 유닛은 자연스럽게 두께에 차이가 생겨 마치 힘을 응축하고 있는 근육과 유사한 형상을 만들었고, 기존 작품에서는 플라스틱 또는 스테인리스 조각들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어 무게감이 느껴졌던 내부를 비워 보다 경쾌한 느낌을 더했다. 스테인리스 초기 작업을 바탕으로 만든 에어 벌룬 〈Dog〉(2023)만이 가득 채워 올린 기존 작업 스타일을 보여준다.
“과거 우리는 모두 아이들이었다.” 《도시동심》을 대표하는 이 문장은 전시의 지향점을 명확히 말한다. 어린 시절 동물사육사의 꿈을 작품 활동을 통해 풀어내는 김우진의 동물 작품은 그의 동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을 통해 꿈이 이뤄진 공간, 그래서 그의 작품은 자주 ‘유토피아’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이야기되고, 전시되었다. 《도시동심》 역시 김우진의 유토피아의 연장선 위에 있다. 플라스틱 의자에서 시작된 알록달록한 색상은 어느새 크레파스의 색감에 비유되며 동물이라는 익숙한 형상에 친근함을 더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사자, 상어 등 다소 위협적인 이미지를 가진 동물을 제외하고 사슴과 강아지 등 부드러운 동물들을 전시함으로써 은행 로비를 찾은 이들이 일상의 긴장에서 벗어나 작품을 만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의 심리적 장벽을 낮추고 편안하게 다가가고자 하는 작가의 작업 방향과도 맞닿는다.
2024년 여름 서울, 김우진은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본래 7월 19일 전시 종료 예정이었다가 8월 1일까지 전시가 연장된 《김우진 : 도시동심》은 물론이고, 《CONNECT\PALACE》(서울역, 7.1~9.30 ), 《WONDER LAND》(신세계백화점 강남, 7.2~9.29 ), 《록과樂》(피플 더 테라스, 5.29~7.31 )에서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들 세 전시는 야외 공간으로 전시 영역을 확대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역시, 김우진의 사슴은 공간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자리한 공간을 변화시킨다. 실내 전시도 이어졌다. 스트리트 아트 페스티벌 《어반 브레이크》(코엑스, 7.11~14)에서 김우진의 작업은 그래피티와 강렬한 음악이 공존하는 전시장 내에서 자신의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나가는 길에 다채로운 색상의 유닛으로 만들어진 동물을 접하게 된다면,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보자. 지난 10여 년간 감상자들의 동심을 일깨우고 유토피아를 넓혀온 작품의 매력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작가의 작업을 만난다면 당신도 멀리에서부터 김우진이라는 세 글자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제 ‘재료의 물성’, ‘다채로운 색채’, ‘동물의 형상’이라는 세 핵심 요소가 앞으로의 작업에서는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지를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지난 10년이 그러했듯이, 앞으로의 10년도 흥미롭게 관찰할 변화와 창조가 계속될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밤 끝으로의 여행》
뮤지엄한미 5.22~8.25
김아영 대림미술관 큐레이터
앤설 애덤스 〈뉴멕시코 헤르난데스의 월출〉(사진 가운데 )
젤라틴 실버 프린트 98.5 × 142cm 1941
닫히지 않는, 밤 끝으로의 여행
《밤 끝으로의 여행》은 뮤지엄한미의 주요 소장품을 중심으로 1900년대부터 동시대 현대사진에 이르는 폭넓은 시기의 작품 100여 점을 ‘밤’이라는 주제 아래 펼쳐 놓았다. 연대기적 나열에서 벗어나 비선형의 시간 아래 재구성된 작품들은 서로 얽히고 충돌하며 낮을 좇는 과정에서 유실된 밤과 어둠의 의미를 밝힌다. 전시는 해가 지고 다시 밝아지기 전까지의 물리적 시간을 넘어, 욕망, 본능, 꿈, 죽음 등의 주제를 포괄하는 무의식의 세계로 밤의 의미를 확장했다. 이로써 인화지의 표면 아래 침잠해 있던 수많은 표상이 떠오르고, 어둠을 장막 삼아 모습을 감추고 있던 은밀하고도 불편한 주제가 표면화된다. ‘녹투라마’, ‘무의식의 세부’, ‘꿈-작업 : 압축과 전위’, ‘어둠을 삼킨 밤’의 네 개의 소주제로 구분되는 전시 구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둠이 지배하는 밤의 시간에 발을 들여 온몸의 세밀한 감각을 깨우고, 은밀하고도 섹슈얼한 욕망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한다. 더 나아가 현실과 허구의 혼선이 만들어낸 꿈의 시공간을 거쳐 죽음을 향한 열린 결말에 도달하게 한다.
‘녹투라마’는 야행성 동물을 위한 도심의 동물원을 가리킨다. 어두운 진입로에 숨죽인 채 들어서면 나방을 비롯한 곤충을 포함해 도시와 야산을 배회하는 들개와 여우 무리가 녹투라마로의 입성을 반긴다. 곤충의 날갯짓과 풀벌레 소리,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청각적 상상력마저 자극하는 광활한 어둠의 풍경 안에서 관객은 그간 의식하지 못한 비인간 존재를 마주하게 된다. 앤설 애덤스의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사진에서도, 이갑철의 텅 빈 도시 사진에서도 인간 존재는 수십 개의 십자가와 가로등 불빛의 궤적을 통해 그저 존재를 추측할 수 있을 뿐 어디에서도 가시화되지 않는다. 이처럼 밤은 권도연의 작업이 설명하듯 “눈앞에 없는 것들의 존재”1를 증명하는 시간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존재와 곧 일어날 가까운 미래의 사건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다. 앞선 작업들이 사진 속 비인간 존재, 텅 빈 도시의 장면을 통해 밤의 징후적 풍경을 드러낸다면, 만 레이의 레이요그래프를 포함해 개방 수장고에 전시되는 현일영, 야로슬라프 뢰들러, 김재수의 포토그램은 그 자체로 빛에 의한 자국이라는 점에서 ‘징후적 낙인’이다. 암실에서 카메라 없이 감광지와 광원 사이에 놓인 물체에 노광을 주어 이미지를 만드는 포토그램은 간결한 선과 면을 통해 대상의 즉물성을 깨워내는 가장 직관적인 기법으로, 빛, 그에 대비되는 그림자를 재료 삼아 사진 매체의 본질을 탐구한다.
칠흑 같은 어둠에 눈이 적응할 때쯤 짙고 깊은 무의식에 자리한 성적 욕망과 환상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시각예술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신체, 특히 여성의 신체는 미적 탐구의 대상이자 욕망의 표현으로 다뤄져 왔다. 여성 누드의 곡선과 형태는 조형적 표현을 극대화하기 위한 일종의 사물이자 정물로서 사진에 등장하는가 하면, 남성 성기의 노출은 권력과 젠더 폭력, 차별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반영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신체 이미지는 제리 N. 율스만의 사진에서처럼 해체되고 재구성되며 초현실적 내러티브 아래 숨겨진 의미를 상상하게 하고, 브라사이의 사진처럼 누드 위로 원시성과 원초성, 즉흥성을 뜻하는 그래피티가 더해져 또 다른 이미지로 변모한다. 이처럼 무의식의 본능과 성적 욕망의 표출은 단지 누드를 다룬다거나 섹슈얼리티를 드러낸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신체의 부분을 클로즈업하거나 해체, 재조합, 표현을 더하는 과정에서 언어화되지 못한 즉흥적, 우연적 상징이 생산되고, 그 상징의 조합을 활용해 이미지 저변에 사유를 조직하는 사진가의 창작 과정을 통해서도 발현됨을 확인할 수 있다.
김인숙〈토요일 밤〉(사진 오른쪽) C-프린트 286.1 × 436cm 2007
《밤 끝으로의 여행》 뮤지엄한미 전시 전경 2024
제공 : 뮤지엄한미
본능과 욕망의 발현은 현실 너머 꿈의 세계에도 가닿는데, 꿈에서의 욕망은 현실과 허구의 시공간을 넘나든다는 점에서 더 원초적이고 예측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꿈-작업 : 압축과 전위’라는 소제목과 그 내용은 무의식의 욕구가 꿈의 형식을 통해 정제, 변형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작업이라는 수용할 수 있는 결과로 재탄생한다는 의미로 읽히는데, 이 같은 꿈-작업의 과정은 특정 작업에 국한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예술 작품의 창작 전반에 적용될 수 있을 만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전시는 어둠과 함께 솟아오르는 “은밀한 욕망의 분출구”2로서 꿈을 지칭하며, 이를 시각화하는 작품 중 하나로 김인숙의 대형 작업 〈토요일 밤〉을 제시한다. 독일 뒤셀도르프의 한 호텔을 찍은 이 작품은 66개의 방에서 연출된 장면들을 한 장의 사진으로 통합한 것이다. 사진 속 장면들은 식사와 같은 일상적 장면을 포함해 살인, 자살, 가학적 성적 행위, 범죄 현장 등을 포함한다. 사진에 등장하는 호텔이라는 장소는 도시의 일부를 구성하는 익숙한 건물이지만, 결코 일상적이지는 않으며 때때로 도피와 탈출, 환기의 장소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현실과 꿈의 경계에 놓인다. 그 안에서 발견되는 고독한 인간 군상의 모습과 그들의 은밀한 욕망, 성적 충동, 문제적 현장 위로 그것을 관음하는 관객의 시선이 더해지면서, 사진은 현실의 기억과 경험, 상상, 무의식의 욕구가 서로 엉겨 붙고 뒤섞인 한 장의 왜곡된 환영의 덩어리로 재탄생한다. 벽에 걸린 환영의 덩어리들이 내뿜는 기이한 분위기는 윌리엄 클라인의 영상 속 음악, 그리고 권아람의 조각난 스크린이 만들어내는 불규칙적인 섬광과 신호가 겹쳐지며 극대화된다.
비로소 관객은 죽음을 향한 터널에 다다른다. 전시의 종결부에 해당하는 마지막 파트는 이전의 전시 공간에 비해 다소 좁고 긴 복도에 연출된다. 이는 사진이 말하려는 주제가 다른 이탈의 경로가 주어지지 않는 불가항력의 것이며, 일방향의 복도를 통과해 결국 하나의 결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긴 여정임을 은유한다. 사진 이미지의 탄생과 본질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듯, 불안하고 위태로운 초상이 나열되는 공간을 지나며 관객은 필연적으로 낯선 타인과 독대하게 된다. 그들 표정에 잠재된 두려움을 마주하며 말 또는 도움의 손길을 건네야 할지를 망설이다가, 초상 속 인물의 얼굴이 나와 닮았음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전시의 마지막이 단지 죽음의 불가항력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을 말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막 속 생명력을 포착한 송영숙의 작품이 시각화하듯, 어쨌든 낮과 밤은 되풀이되고, 밤의 정적은 무의식의 기저에 깔린 삶과 죽음에 대한 불안, 감추고 싶은 날것의 감정을 마주할 기회를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단지 어둠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전시가 주목하는 무의식과 내면의 불완전함을 포용하는 ‘밤’, 그리고 그 밤과 관련된 주제들은 공통적으로 밤의 ‘끝’이 어떤 종결이나 닫힌 결말을 향하고 있지 않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밤을 향한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여행의 끝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다만 또 다른 밤일 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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