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Curators Voice & Critique 

《시대정신》
《나는 웃으며 잠에서 깼다》
《소닉 크로노시스》
《무기세》
《모나 하툼》

권준호·김민경·윤태균·이나연·이진실

《시대정신》
리얼레이션 스페이스 2.28~3.16
권준호 디자이너

《시대정신》 리얼레이션 스페이스 전시 전경 2025 제공: 일상의실천

시대의 정신, 연대와 발언

무엇을 말할 것인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후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여의도광장으로 들어서며 수많은 인파와 몸을 부대끼면서, 그들과 내가 같은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정신을 동시대적인 방식으로 전달하고 공유할 수 있을까. 표현의 방식에 메시지의 내용이 가려지지는 않을까. 그러나 응원봉을 들고 모인 사람들의 구호, 음악, 메시지의 전달 방식은 시대를 아우르는 표현으로 진화한 것처럼 보였다. 광장에 나온 사람들은 온전히 그곳에서 공유되는 시대의 정신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디자이너는 주로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인식되지만, 그보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나는 수차례의 시행착오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예쁘게 포장된 선동은 설득으로 나아갈 수 없고, 표현에 가려진 내용은 결국 종착점까지 다다르지 못한다. 디자이너는 때로 메시지의 생산자가 될 수 있지만, 주로 생산된 메시지를 알아보고, 선택하며, 무형의 언어를 구체적 사물로 구현하고, 의미에 형태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수없이 생산된 메시지들 중 무엇을 선택할지를 가르는 기준은, 그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이다. 1980년 공권력에 무참히 쓰러져 간 시민들의 죽음을 목도한 사람들이 공유했던 시대의 정신은 아마도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 1987년 광장으로 뛰쳐나온 시민들의 시대정신은 무고한 희생을 멈추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살아온 시대의 정신은 ‘시국 선언문’이라는 텍스트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민주화 이전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거나, 그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고, 그들의 결심은 그 텍스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오직 오늘 보람 있는 삶과 내일 부끄럽지 않은 과거’1를 위해, ‘어떠한 탄압 속에서도 계속될 인간 본연의 진실한 외침’2을 선언했던 그들의 목소리는 시대를 관통하여 지금 여기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2024년 오늘, 시각언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디자이너의 책임과 역할은 무엇인가. 시대의 정신은 어떤 모습으로 구체적 물성을 지닌 발언으로서 표현되어야 하는가.

《시대정신》 리얼레이션 스페이스 전시 전경 2025 제공: 일상의실천

시대의 정신, 연대와 발언
텍스트를 이해하고, 자신의 해석을 가미해 그것이 지닌 사회적 맥락을 시각화하는 디자이너는, 다른 감각으로 텍스트를 분석하는 ‘최초의 비평가’3일지 모른다. 비평이 단지 객관적 사실을 나열해 예술의 소비를 촉진하는 매개 역할이 아닌, ‘작품이 잉태하고 있는 것을 끌어내면서 전달하는 행위’이며 ‘잠재적 유에서 현실적 유를, 감각적 유에서 윤리적 유를 창조’4하는 행위라고 할 때, 디자이너의 작업은 비로소 창조된다. 현재를 살아가는 디자이너가 40여 년 전 발표된 시국 선언문의 맥락을 인식하며 자신만의 언어로 텍스트를 시각화할 때, 그 텍스트는 과거에 박제된 기록이 아닌 현재의 정신을 담아낸 살아 숨쉬는 언어가 된다.

디자이너에게 ‘연대’란 낯선 행위다. 디자이너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다른 작업자와 차별화되는 각자의 개성을 갖추는 것은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다. 이것은 비단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며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개인이 직면하는 생존 방식일 것이고, 그것은 SNS를 포함한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된다. 남과 조금이라도 더 다른 삶의 단면으로 어떤 방식이든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을 우리는 ‘인플루언서’라고 지칭하고, 그들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집단의 공통된 목소리보다 독립된 개개인의 영향력이 더 큰 요즈음,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말하는 것은 다소 시대착오적인 행위로 보일지도 모른다. ‘일상의실천’ 역시 디자인 스튜디오이자, 소규모 공동체로서 독립된 목소리를 내왔다. 우리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의 방식으로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 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개인의 발언이 적층되고 그 목소리의 방향이 한곳을 향할 때 비로소 시대의 정신은 구체적 형태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

시대정신 프로젝트를 위해 작업자 63명이 모였다.5 그들은 각자가 지닌 목소리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자신만의 관점을 담은 문장을 포스터라는 물성으로 치환해 냈다. 실천이란 개인적인 결심을 전제하지만, 무엇인가를 감내하며 밀고 나가는 행위라는 점에서, 그 행위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사회적이기도 하다. 개별적인 발언은 연대를 통해 사회적인 실천으로 거듭난다. ‘시대의 정신’이 ‘연대와 발언’ 없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다.

* 본고는 전시와 함께 동명의 이름으로 출간된 『시대정신』 에서 전시기획자이자 주최자의 글 일부이다

《나는 웃으며 잠에서 깼다》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3.8~4.19
김민경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큐레이터

《나는 웃으며 잠에서 깼다》 왼쪽에서부터 손민석, 허찬미의 작품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4층 전시 전경 2025

생생하고도 어렴풋한 환영의 세계

《나는 웃으며 잠에서 깼다》는 1990년대에 출생한 회화작가 6인의 그룹전이다. 이번 전시를 이루고 있는 주요한 요소는 ‘1990년대 출생자’와 ‘회화를 주요 매체로 다루는 작가’이다. 전시를 기획하면서 첫 번째 목표는 동시대 생동하는 예술을 선보이자는 것이었고, 기대효과로 실존하는 개인과 시대의 면면을 살펴보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랐다. 이러한 기획의 근거에는 ‘작품과 작가 또한 시대와 사회의 일부로 존재하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이든 시대가 미치는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라는 명제가 깔려 있었다.

1990년대 출생자를 참여작가의 조건 중 하나로 설정한 이유에는 이들이 현재 격동하는 시기를 살아가는 청년기 사람들이라는 점이 가장 컸다. 2025년 현재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 연령대에 걸쳐 분포하고 있을 이들은 생애주기에서 청년기에 해당하는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청년 시기에는 환경의 변화를 비롯해서 심리적인 면에서도 불안정함이라는 요소가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작업을 하는 예술가에게도 별다를 것 없이 적용되고 있다. 청년 작가들은 소재나 주제에서 여러 시도를 하기 때문에 화풍이 일정하지 않을 수 있어, 확신을 가지고 이들을 소개하기에는 위험 요소 또한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와 정비례하여 자신과 주변을 가장 많이 살피는 때이자, 방향성을 고심하며 새로운 표현의 방법론을 시도하는 도전의식이 넘쳐나는 시기라는 점은 그 발현되는 생동성에 있어서 이들을 참여작가 조건으로 삼기에 충분한 계기로 작용했다.

평면 위에 안료를 올린다는 개념의 회화는 근원적 차원에서 동굴벽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번 전시의 매체로 회화를 설정하게 되면서, 가장 오래되고 순수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시각예술 장르인 회화에 쌓여온 서사와 시각적 방법론이 현시대 젊은 작가들에게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는 작가들의 작품에서 특정 시대의 물질과 정신이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에 관한 흥미로운 지점을 연결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는 회화를 구상, 추상, 개념, 사회미술 등의 사조나 흐름으로 구분하기보다는, 동시대 청년의 시각에서 이들이 바라보고 느끼고 있는 시대와 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과 공동체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반추해볼 수 있는 작품들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명 “나는 웃으며 잠에서 깼다”는 실제 경험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떠들썩한 자신의 웃음소리에 깨어난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다. 웃으며 잠에서 깼던 순간은 악몽에서 깨어난 이후 다가왔던 안도나 해방감과는 달리, 갑자기 혼자가 된 허무한 기분과 함께, 무엇이 그리 즐거웠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꿈을 그리워하며, 꽤나 울적한 감정이 동반되는 경험이었다. 지배적인 하나의 감정이 아닌, 상이하고 복합적인 감정이 충돌하는 마음을 되새겼을 때, 불확실한 현실에 놓인 청년의 시절이 겹쳐졌다. 이렇듯 이번 전시의 주제어인 ‘꿈’은 청년, 그리고 회화의 속성을 아우르며 전시를 묶어내고 있다. 현실을 기반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뒤엉켜 드러나는 진실, 허구, 욕망, 이상은 꿈의 화면과 회화의 세계 모두에서 드러나고 있다.

《나는 웃으며 잠에서 깼다》 왼쪽에서부터 강철규, 윤미류의 작품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2층 전시 전경 2025

 《나는 웃으며 잠에서 깼다》 왼쪽에서부터 양하, 김민조의 작품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2층 전시 전경

작가 6인이 그려내는 환영의 세계들은 유사한 키워드를 공유하며 연결되어 있다. 전시의 시작에 등장하는 양하와 김민조의 작품은 세계 속 실존하는 개인의 상태를 보여준다. 양하는 현재 거주하고 있는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작가가 지속하고 있는 부드러운 폭발 이미지를 그려낸다. 작가의 시각적 아이러니는 세계의 모순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현대의 시선을 닮았다. 김민조는 일상의 반경에서 마주했던 대상에 자신을 투영해 몽환적 화면을 구성하는데, 언뜻 자유로워 보이는 작가의 대상은 이들을 억압하는 장애적 요소와 함께 하며, 개인의 존재 상태를 생각하게 한다.

이어지는 강철규의 작품은 특유의 감각적 인상으로 내면세계를 비춘 듯한 화면을 제시한다. 삶을 직면하며 그려낸 그의 작업은 불안, 도피, 투지, 염원 등이 혼재된 마음의 상태를 독창적인 조형물이나 알레고리의 상징적 도상으로 지시하며 공감대의 형성이나 유대감의 소통을 시도한다. 2층 전시실 끝에서 만나볼 수 있는 윤미류의 작품은 유사한 이야기의 세계인 듯하지만, 사적인 개인을 지워내고 관람자마다의 독립적 서사의 생성을 제안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진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개인의 내면을 위로하거나, 사회 커뮤니티의 담론을 이야기할 계기를 마련하며 존재한다.

손민석과 허찬미의 공간은 4층 전시실에 마련되었다. 손민석은 일상에서 관찰하고 경험한 대상을 소재로 작업 중인데, 대상의 존재 형식을 탐구하며, 존재 간의 관계성이 작가의 의식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허찬미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는 도시 풍경, 그리고 쉽게 지나치거나 무관심의 대상을 작업으로 끌어온다. 작가의 강렬한 파편적 터치는 대상의 존재 형식과 감각을 다시금 깨워낸다. 이들이 바라본 세계, 대상의 이면은 오랜 시간 예술가에게 요구되어온 시선의 방법론을 떠올리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들은 현대 물질문명을 활용하고, 익숙한 환경과 문화적 소재를 내세우며 시대에 발맞춰 걷는 듯 보이면서도, 시대의 지향점을 부정하거나, 실존하는 개인을 마주하게 하는 상징의 세계를 설정하며, 오늘날을 반추하게 하는 시선을 끌어낸다. 전시 《나는 웃으며 잠에서 깼다》는 저마다의 ‘환영의 세계’가 어떤 맥락으로 확장되고 유효할 수 있을지를 모색하며, 불안정한 격동의 시기를 살아가는 이들의 회화에서 가장 생동하는 현재의 예술을 만나게 되길 기대한다.

《소닉 크로노시스》
아트스페이스3 2.27~3.11
윤태균 독립큐레이터

 《소닉 크로노시스》 스페이스3 전시전경 2025 제공: 윤태균

소닉 크로노시스

소닉(sonic)은 사운드(sound)의 물리적 속성을 일컫는다. 음파의 속도, 음파의 세기, 음파의 진동수(frequency)와 같이, 소닉은 방향과 힘을 가진 운동이다. 전시 《소닉 크로노시스(Sonic Chronosis)》가 사운드라는 익숙한 용어 대신 소닉을 제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오늘날 미술 전시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사운드라는 미디엄(medium)의 재료적, 질료적 성격을 재고하기 위함이다. 또한 전시의 제목에서 소닉이 수식하는 크로노시스(Chronosis)라는 용어는 레자 네가레스나티(Reza Negarestani)와 키스 틸포드(Keith Tilford)가 공저한 그래픽 노블 이론서『크로노시스(Chronosis)』(2021)에서 빌렸다.1 이 책은 코스믹 호러라는 장르를 이용하여 시간에 관한 사변적이고 급진적인 사유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시간은 선형적 흐름이 아닌 복잡한 물질적·수학적 구조이다. 다양한 벡터, 즉 다양한 방향과 구조를 가진다는 것이다.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면, 사고와 존재 방식도 새롭게 재구성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시간적 매체로 이해하는 사운드에 관해 다시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시 《소닉 크로노시스》는 바로 이와 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시간이 선형적이지 않은 구조를 잠재한다면, 시간적 미디엄으로서 사운드 또한 다른 구조의 시간으로 안착할 수 있지 않을까?

사운드가 현대미술에서 다루어진 지는 이미 오래다. 초기에 사운드는 미술사의 전통과 매체를 교란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20세기 초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의 소음 생성 기계인 ‘인토나루모리’(Intonarumori)는 당시 산업화된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소리 중 기계가 내는 소음인 테크노포니(technophony)를 예술의 맥락에 삽입함으로써 사운드에 가속적인 정치성을 부여했다. 또한 1960년대에 플럭서스(Fluxus)의 퍼포먼스는 사물의 구체적인 사운드(concrete sound)를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재료로 사용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미술의 포스트모던적 열병은 사운드를 견고한 미술관과 공인된 제도로 편입해왔다. 그러나 나는 사운드가 미술의 맥락에서 다루어지는 모든 사건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겠다. 문제는 사운드 아트가 물리적 의미의 ‘미술관’에 배치된다는 사실 자체이다. 수 세기를 거치며 완전한 시각중심적 공간이 된 미술관은 사운드의 물리적 속성, 즉 소닉의 운동을 미리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통제는 엄격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지기보다는 서툴고 혼란스럽게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사운드가 미술관에 배치될 때에, 청취 환경인 어쿠스틱(acoustic)은 전시의 시각적 공간 디자인에 비해 덜 중요하게 이해된다. 사운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작가 혹은 학예사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시 기획에서 청취 환경의 조성은 부차적 고려 사항이었다. 시각이 전시의 기획 의도와 벽에 의해 통제 가능한 감각이었다면, 청각적 경험은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럽고 우연적인 환경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접근은 다소 순진하고 시각중심적이지만 역설적으로 사운드의 특징적 속성을 고려한 접근이기도 한다.

《소닉 크로노시스》 스페이스3 전시전경 2025 제공: 윤태균

청각은 시각만큼 쉽게 통제될 수 없다. 파동은 귓바퀴만을 통하기보다는 발끝부터 정수리까지의 온몸을 통해 고막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울림은 벽과 천장을 타고 음원 너머의 공간까지 쉽게 전달된다. 또한 회절(diffraction) 현상으로 인해 음원 공간에 조그마한 틈이라도 있다면 바깥으로 넓게 퍼져 나간다. 완벽하게 청취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면 사운드를 위해 복잡하고 위험한 공학적 설계와 비싼 시공비를 투자할 미술관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운드의 이러한 특성에 비추어 보아, 사운드가 미술사에 등장하기 시작했던 때 소음의 정치성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운드의 물질적 속성이 그러하다면, 왜 그 속성을 통제해야 하는가? 매체특정성은 말해져야 하는 것이지, 감춰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관점에서 《소닉 크로노시스》는 사운드의 매체특정성을 다루는 전시이다. 이 전시에서 사운드의 침투하는, 회절하는, 진동하는 특성은 통제되지 않고 해방된다. 각 작가의 사운드는 공간의 벽과 바닥, 천장에서 서로 교차하고, 겹치고, 얽히며 관객의 몸까지 도달한다. 《소닉 크로노시스》의 공간은 분할되어 개별 작가에게 할당되지 않고, 모든 참여 작가의 작업이 한꺼번에 진동하는 공유지이다.

당연히 전시에서 큐레이터의 역할에 대한 재고가 요청된다. 이 지점에서 내가 전자음악가로서, 사운드 엔지니어로서 가진 지식은 새로운 시도를 가능케 한다. 전시를 준비했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참여 작가는 큐레이터에게 두 개의 사운드 작업 파일을 보낸다. 큐레이터는 총 6개, 6채널의 스피커를 전시장에 배치하고 각 작가의 사운드가 송출되는 공간과 시간을 결정한다. 개별 작업이 가지는 구체적인 내용과 맥락은 의도적으로 생략되었다. 사운드만이 전시되는 《소닉 크로노시스》의 공유지에서 개별 작업은 각자 따로 청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구체적인’ 김유수의 시가 낭송되는 순간은 언어와 발화가 그 맥락을 내려놓고 사운드로의 인상으로 회귀하는 때이며, 동시에 관객이 언제,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알 수 있는 지표가 된다. 단일한 선형적 시간성은 각 작가 사운드가 가지는 복합적 시간성이 이리저리 얽히며 복잡한 다중-시간 구조로 뒤틀린다. 당연히 전시의 시작과 끝은 없고, 오직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이 전시는 온전히 사운드를 다루는 큐레토리얼 실천 방식을 개발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시각적 완성도와 전시의 서사적 내용은 언젠가 찾아올 미래로 유예되었다. 전시에 방문한 몇 작가들이 내게 건넨 공통된 평을 기억한다. ‘전시를 어떻게 감상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전시에 사용 설명서(user manual)가 필요하다는 감상이었다. 다음 인용은 그러한 의견에 대한 답이자 《소닉 크로노시스》 큐레토리얼 노트의 마무리이다. “우리의 정신이 더 활짝 열릴 때, 그 정신은 낡아빠진 목적론 대신에 오직 침묵만이 배반하지 않는 진리를 구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2

《무기세》
서울대학교미술관 2.6~5.4
이나연 독립큐레이터

 노영훈 〈미키〉 (사진 가운데) FRP, 스테인리스 스틸, 카페인트 160×120×170cm 2019
《무기세》서울대학교미술관 전시전경 2025

무기, 통제의 도구에서 사유의 대상으로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는 현대 기술이 군사적 목적과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순수전쟁(pure war)” 개념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전쟁과 평화의 경계가 사라졌다고 보았다. 즉, 평화 시기조차 다음 전쟁을 준비하는 상태로 기능하며, 전쟁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비릴리오는 기술 발전이 곧 군비(軍備) 경쟁과 맞닿아 있으며, 기술 그 자체가 인간을 상대로 수행되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자 무기라고 분석했다. 교통수단, 통신, 영상 기술 등은 모두 군사적 목적에서 발전했으며, 이는 결국 사회의 구조와 질서를 군사 논리에 의해 재편하는 결과를 낳는다. 비릴리오는 이러한 기술-군사 복합체가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이는 정치나 윤리보다 우선한다고 비판했다. 현대 기술은 더 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정치적·경제적 구조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무기적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무기세(武器世)》는 비릴리오의 이러한 통찰을 예술의 언어로 적합하게 풀어낸 듯하다. ‘무기세’는 인류세(Anthropocene)나 자본세(Capitalocene)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기(Weapon)가 지배하는 시대를 의미한다. 기획자인 심상용은 무기가 현대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예술로 드러내면서 폭력의 질서에 균열을 내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 전시는 무기가 전쟁터의 총과 칼에서 벗어나 기업의 경쟁 논리, 미디어 소비 방식, 기술 발전의 흐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작품으로 보여준다.

전시는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섹션 ‘무기화된 일상’은 무기가 일상의 질서 속에 스며든 방식을 탐구한다. 허보리의 설치 작품은 넥타이와 정장 옷감으로 만든 탱크와 총을 통해 자본주의와 군사 질서의 결합을 상징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경제적 경쟁 구조가 군사적 질서와 다르지 않음을 드러낸다. 실제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가는 것과, 정장을 입고 일터로 나가는 것에 별 차이가 없는지도 모른다. 강홍구의 사진은 평범한 도시 풍경 속에 숨어 있는 군사적 흔적을 포착한다. 전투기가 하늘을 가로지르거나 바다에 군함이 정박해 있는 모습은 군사적 힘이 일상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안성석의 사운드 설치 작업은 군대의 기상 알람 소리를 반복적으로 들려준다. 사진병으로서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한 경험을 바탕으로, 알람 소리를 통해 무고하게 희생된 군인을 기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두 번째 섹션 ‘스펙터클로서의 무기’는 무기가 미디어와 예술에서 어떻게 시각적으로 소비되는지를 탐구한다. 최재훈의 퍼포먼스 결과물은 반사되는 스테인리스 스틸 판에 총을 쏘아 실탄의 흔적을 남기는 장면을 통해 폭력의 자기파괴적 속성을 형상화한다. 관객은 자신의 얼굴이 실탄의 흔적 위에 겹쳐지는 모습을 보며 폭력이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역설을 경험한다. 온통 하얀 노영훈의 작품은 디즈니 캐릭터 형태의 방독면이나 풍선처럼 보이는 지뢰 등을 통해 폭력의 이미지가 오락으로 소비되는 현실을 풍자한다. 실제 2차대전 때 어린이용 방독면을 재현한 것인데, 전쟁의 공포가 영화, 게임, 뉴스에서 흥미로운 콘텐츠로 변질되며 폭력의 본질이 왜곡되는 현상을 다룬다. 이용백의 사진 작품은 평화로운 꽃밭에서 위장복을 입은 군인을 찍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조차 군사적 질서에 의해 은밀히 통제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현대 사회에서 폭력이 일상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음을 시각화한다.

오제성 〈조각에 대한 기억〉 (사진 가운데) 스테인리스 스틸, 철, 알루미늄, 발포우레탄폼,
스트로폼, 
탄성방수제, 모델링페이스트, 실리콘, 우레탄클리어, 축광안료 80×354 ×300cm 2024
《무기세》
서울대학교미술관 전시전경 2025

방정아 〈핵좀비들 속에서 살아남기〉(사진 오른쪽) 천에 아크릴
700×1200cm 2022 《무기세》 서울대학교미술관 전시전경 2025
제공: 서울대학교미술관

세 번째 섹션 ‘무기, 낯익은 미래’는 무기의 영향력이 환경과 기술의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만들어질 미래를 경고한다. 하태범의 시리아 내전 현장의 처참함을 흰색 모형으로 재현한 사진에는 핏빛도 울부짖음도 없고 그저 적막한 폐허만이 보인다. 전쟁 현장을 시적인 풍경처럼 보이게 하여 전쟁 이미지가 미디어에서 어떻게 미화되고 소비되는지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실제 전쟁 사진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신, 한 단계 거른 형태로 재현함으로써 이미지 자체에 대한 메타적 성찰을 이끌어낸다. 오제성의 조각 작품은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의 아버지로 연결되는 기억을 표현하는데, 이 군상의 줄서기는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이 일렬종대를 이룬 것 같아 흥미롭다. 방정아의 회화는 핵발전소와 좀비의 이미지를 결합해 기술과 폭력이 결합된 새로운 통제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실제 군사기밀 공간으로 지도에 없는 핵발전소와 좀비를 드러내고 있다.

《무기세》는 무기가 현대 사회에서 단순히 군사적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 질서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무기는 전장의 총과 칼에 국한되지 않고 자본주의적 경쟁, 기술 발전, 미디어 소비 방식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허보리의 탱크는 군사 질서와 경제 질서가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고, 노영훈의 방독면은 폭력의 이미지가 문화 상품으로 소비되는 방식을 드러낸다. 오제성의 폐허는 무기가 남긴 환경적 파괴의 실체를 가시화한다. 무기의 논리는 현대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경쟁, 기술 발전, 권력 질서와 결합하며 결국 일상 속에 폭력적 질서를 내면화하게 만든다.

그러나 전시는 무기의 논리를 전복할 수 있는 예술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허보리의 탱크가 옷감으로 만들어졌듯이, 폭력의 도구는 상징의 차원에서 해체될 수 있다. 최재훈의 거울 퍼포먼스에서 폭력의 순환 구조가 드러나듯이, 예술은 폭력의 구조를 가시화하고 전복하는 힘을 가진다. 기획자 심상용은 무기 생산과 수출에 앞장서는 강대국이 현대미술 담론을 주도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예술이 단순히 무기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기적 사고방식에 균열을 낼 수 있음을 강조한다. 결국 전시는 무기적 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예술의 힘을 제안한다. 관객은 이를 통해 인간성과 평화를 다시 상상하고 모색할 수 있는 계기를 얻는다.

《모나 하툼》
화이트 큐브 서울 3.6~4.12
이진실 미술비평

 〈미스바〉 황동 랜턴, 금속 체인, 전구, 회전 전동 모터 랜턴:
58×32×28.5cm 2006~2007 © 모나 하툼

모나 하툼, 이토록 친밀한 폭력

베이루트 출신 작가 모나 하툼(Mona Hatoum)의 국내 첫 개인전이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1980년대 모나 하툼은 사회적 조건으로서 여성의 신체성을 보여주는 강렬한 퍼포먼스와 비디오 작업으로 주목받았으며, 1990년대 이후로는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감정을 촉발하는 설치미술 및 조각으로 작업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시적 조형 언어를 구사한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나에게 모나 하툼이라는 이름은 〈거리 측정〉(1988)이라는 강렬한 비디오 작업으로 각인되어 있다. 목욕하는 어머니의 사진과 보이스오버로 구성된 영상은 무척 강렬하면서도 여러 레이어가 중첩된 모호한 인상을 남겼다. 알아들을 수 없는 작가와 어머니의 대화, 그 위로 겹쳐지는 내레이션, 그리고 역광으로 윤곽만 간신히 드러나는 어머니의 몸과 그림자, 그리드와 아랍어 글자가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여러 겹의 거리감을 만들어냈다. 특히 그리드 위에 철조망처럼 드리워진 아랍어 글자들은 아득한 대화 소리와 함께 한편으로는 사적인 내밀함을, 다른 한편으로는 망명, 실향, 전쟁으로 인한 상실과 고통과 같은 정치적 주제를 강력하게 드러냈다.

물론 이번 화이트 큐브 서울 개인전에서 이러한 초기의 강렬한 서사성과 정동은 기대하기 어렵다. 1990년대 이래로 하툼은 다매체 설치 및 조각으로 작업 방식을 전격 옮겼으며, 이주민 가족 출신 여성으로서 겪는 트라우마, 신체성에 관한 발언은 일상적이면서도 언캐니한 사물성과 공간성의 체험으로 전이되었다. 이러한 전이로 인해 초기 퍼포먼스와 비디오 영상이 발산하던 미세하면서도 강렬한 전율은 다소 세련되고 역설적인 미감으로 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하툼은 한 인터뷰에서 ‘레바논 출생, 팔레스타인 난민 출신 여성 작가’라는 그녀의 정체성을 통해 사람들이 보고 듣기를 원하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배반하고자 한다고 표명한 바 있다.1 이제 일상적이면서도 환상적으로 보이는 하툼의 조각 및 설치 작업들이 말 그대로 ‘화이트 큐브’에 자리한다. 외양적으로는 미니멀리즘 조각처럼 보이는 단순함과 반복, 집안의 기물들이 주는 일상성의 감각은 이제 관객 스스로가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는 저마다의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이를 통해 하툼의 초기 작업들이 담고 있던 메시지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 누구의 생애에서도 비슷하게 작동하는 일종의 제도적 폭력, 구분 짓기, 공간적 단절에 대한 질문의 지평으로 변환된다.

무거운 위트, 현실적인 언캐니
휠체어, 가림막, 의약품 캐비닛, 전등과 같은 하툼의 조각과 설치는 ‘홈바운드’의 성격을 지녔지만 결코 안락하지 않다. 이 조각들은 언제나 의외의 물성, 형태로 역설적인 의미의 층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개 형태에서 기대되는 특질과 쓸모를 배신할 뿐 아니라, 위협적이고 기괴한 물건으로 변한다. 가령, 〈무제(휠체어 II)〉(1999)는 신체를 지탱하고 보조하는 휠체어의 모양이지만 똑바로 앉을 수 없게 앞으로 기울어져 있고, 차가운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은 보조기기라기보다 말끔히 소독된 병원 카트나 해부대를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톱날 모양의 휠체어 손잡이는 치명적인데(다른 연작, 〈무제(휠체어)〉의 손잡이는 식칼 모양이다), 이는 돌보는 이 또는 간호하는 이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는 것 같다. 돌봄의 대상도 주체도 부재하는 가운데, 위트라고 부르기에 섬뜩한 사물적 왜곡은 언캐니한 환영 속에 신체를 둘러싼 사회적 구조와 모순이라는 모종의 현실성을 불러온다.

이처럼 언캐니한 상상력의 외양을 띠고 은밀히 드러나는 현실성, 즉 장애, 돌봄과 관련한 신체적 곤경, 의존적 관계, 제도적 격리라는 문제의식은 신작 〈분리〉(2025)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이칸막이는 시각적으로 전혀 가려지지 않는 철조망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철조망은 그녀의 초기작 〈거리 측정〉에서 그리드에 걸쳐진 아랍어 문자를 환기시키는 한편, 시각적 분리가 금지와 위협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불러들인다. 이번에 전시된 〈분리〉는 약 20년 전부터 그녀가 선보인 〈강판 분리〉(2002)의 변형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주방에서 쓰는 강판의 날이 3단 가림막으로 변신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베이고 갈리는 신체적 고통을 상상케 만드는 동시에, 시각적 ‘보호’라는 기능을 완전히 배신하고 보는 이를 격리, 감금의 공포로 빠뜨린다.

〈정물(의약품 캐비닛) VI〉 블로운 유리, 강철, 유리 캐비닛 73.5×61×34.5cm 2025
© 모나 하툼, 화이트 큐브

《모나 하툼》 화이트 큐브 서울 전시 전경 2025 사진: 전병철 제공: 화이트 큐브

공간, 사물, 신체의 인사이드 아웃
하툼의 작업에서 그리드와 펜스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모티프로서 다양한 시각적 은유와 병치를 통해 역설적인 의미망을 만들어내곤 한다. 특히, 가림막, 새장, 창살과 같은 분리의 프레임은 (초기 비디오 작업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친밀감과 거리감의 역설을 자아낸다. 철조망으로 된 〈분리〉나 콘크리트 타설용 강철바로 제작된 〈거울〉(2025)은 사적인 친밀함에 기반하는 보호, 애정(자기애를 포함해), 연약함이라는 관념을 의심케 하고 그 관계성을 다시 측정하게 만든다. 그것은 격리가 아닌가? 그것은 학대가 아닌가? 나는 저 창살 안에 갇힌 자인가, 아니면 바깥에서 갇힌 자를 들여다보는(혹은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자인가. 이처럼 하툼의 ‘초현실적’인 조각들은 위트와 언캐니를 오가며 친밀함과 사적인 것을 제도적 폭력과 비상사태로서의 현실로 뒤집어놓는다.

무엇보다 이러한 위트와 역설의 핵심에는 신체의 형상이 놓여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몸을 지탱해 주는 지팡이(〈무제(지팡이)〉(2011))가 물렁한 고무로 제작되어 벽에 기대있는가 하면, 몸을 장식하는 목걸이는 작가의 흰 머리카락으로 빚어졌고(〈헤어 네크리스〉(2025)), 거의 완벽한 구(求球)를 이루는 콘크리트 조각은 뇌처럼, 아니 내장처럼 보인다(〈인사이드 아웃〉(2019)). 신체의 일부는 보석이 되고, 그 연약함은 사물들의 ‘살’로, ‘골수’로 변형된다. 반대로 사물들의 견고함이 우리 자신의 심리적인 강박과 사로잡힘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정물(의약품 캐비넷)〉 VI 작업은 약 캐비닛 안에 찬란한 빛깔을 발하는 작은 유리 조각품들을 진열한 작업이다. 그러나 ‘정물’로 명명된 이 작은 유리 조각들은 실상 수제 수류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아름다운 소유물과 폭탄 사이의 거리는 얼마만큼일까. 하툼의 작업에서 폭탄은 단순히 분쟁 지역의 참상을 환기시키는 사물이 아니라, 종파적 분쟁과 전쟁의 폭력을 야기하는 문젯거리로서 (여성) 신체라는 함축을 지녀왔다. 갤러리 입구에 걸린 오래된 작업 〈나의 죽은 몸 위에〉(1988~2002)라는 포토몽타주처럼 전쟁의 폭력과 공포는 보호의 담론을 미끼로 여성의 신체 위에서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아랍어로 ‘불을 밝히는 등’을 의미하는 〈미스바〉(2006~2007)는 황동으로 된 등이 회전하는 작품이다. 별빛처럼 빛나는 불빛 사이로 무기를 든 남자들의 형상이 보는 이를 에워싸며 공포의 감각을 주입한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집안, 그리고 폭탄이 투하되는 공포의 장소 사이의 거리는 빛과 그림자처럼 붙어있다. 이처럼 하툼의 가구, 조명이 안겨주는 역설은 우리가 사물과 맺는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신체적, 심리적 폭력과 공포의 구조를 환기시킨다.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