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nus van de Velde

다중우주 속 다중적 자아,
리너스 반 데 벨데

ARTIST FOCUS

리너스 반 데 벨데 벨기에 앤트워프 거주. 회화, 설치, 조각, 영상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작업. 가상과 실제, 평행우주 안의 무한한 개연성에 대하여 끊임없는 탐구를 작품으로 표현. 벨기에 보자르(BOZAR, Brussels, 2022 ), 스위스 루체른미술관(Kunstmuseum Luzern, 2021 ), 프랑스 FRAC 페이드라루아르컬렉션(Frac des Pays de la Loire, Nantes, 2021 ), 스페인 말라가현대미술관(Centro de Arte Contemporáneo Málaga, 2020 ) 등에서 개인전 개최. 벨기에왕립미술관(Royal Museums of Fine Arts of Belgium ), 네덜란드 헤이그미술관(Kunstmuseum Den Haag ), 스페인 말라가현대미술관(CAC Málaga ) 등에 작품 소장.

© Rinus Van de Velde, Courtesy of Gallery Baton

〈라 루타 내추럴〉(스틸) 단채널 비디오, 13분 34초 edition of 3 and 2 A.P 2020~2021
© Rinus Van de Velde, Courtesy of Gallery Baton

다중우주 속
다중적 자아,
리너스 반 데 벨데

이나영 | 독립큐레이터, 미술비평가

“영혼은 비행기처럼 빨리 날 수 없다는 것을 인디언에 관해 쓴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여행할 때 영혼을 잃어버리고 영혼이 없는 채로 목적지에 도착한다. 심지어는 시베리아 열차도 영혼이 나는 것보다 빨리 간다. 나는 처음 유럽에 올 때 시베리아 기차를 타고 오면서 내 영혼을 잃어버렸다… 그 다음에 나는 몇 번 비행기를 타고 오고 가고 했는데 도무지 내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것이 여행자들은 왜 모두 영혼이 없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1

1920년경 래것(Rageot)은 쓴다 : “오늘날의 여행자들은 말한다 : 난 지구의 주민이라고. 마치 나는 아니에르 주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거기엔 여행 중이라는 걸 잊어버린 여행자가 있다.”2

인디언의 세계관을 따른다면, 누구보다 우주적이고 시대적인 여행을 즐기지만, 작업실 소파에 앉아 책과 영화, 뉴스를 보면서 상상의 여행에 머문 이상 리너스 반 데 벨데의 영혼은 손실없이 안전하게 남아 있다. 영혼이 남아있는 까닭에 반 데 벨데는 AI(인공지능 )가 온갖 영상과 이미지를 간편하게 만들어내고, 3D 프린터가 못 만들 것이 없는 시대에, 일부러 조악해 보이면서도 손맛 나는 영상, 회화, 조각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비행기와 기차, 자동차가 있어도 이동을 하느라 시간이 없고, 영혼도 그 사이에서 잃어버린 지 오래고, 그래서 작품을 만들 시간조차 없어진 이들에게 반 데 벨데가 시간과 영혼을 넣어 만든 작품들은 그 앞에서 또다시 한참의 시간을 보내게 한다. 자꾸만 시선을 끌어 요리조리 보게 되는 판자와 골판지를 이용한 조형물들이 있다. 그 조형물들이 미장센으로 나오는, 작가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써서 어색한 외형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역시 이상하게 매력적인 영상도 있다. 그리고 주식투자자부터 작가 자신까지 부지런히 신분을 바꾸는 자아가 자신에 대해 서술하는 목탄 드로잉과 미술사 속 다양한 인물이 떠오르는 오일파스텔까지, 다채로운 매체를 넘나드는 다량의 작업이 전시장에 놓였다. 조형물이나 목탄 드로잉의 규모도 실물 크기에 맞게 대체로 크다. 핸드메이드임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은 만들어내는 자, 창작하는 자인 작가가 모든 것을 ‘직접’ 만들어낸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음을 되새기게 한다. 아마 반 데 벨데는 작품에 시간을 쏟느라 물리적 여행을 할 시간이 도무지 없는 까닭에 안락의자 여행자가 되는 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오래전부터 많은 시각예술가는 이주를 통해 작품을 발전시키거나 작업할 여건을 찾아가곤 했다. 후원자를 찾아(혹은 부름을 받고 ), 스승이나 영감을 찾아, 전쟁을 피하거나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향을 떠나곤 했다. 유학이나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현대판 작가 이주의 이유가 된다. 전 세계에서 열리는 비엔날레나 아트페어의 수요를 충족시키며 작품 운송이나 설치를 위해 단기 이주, 일종의 비즈니스 트립을 떠나는 이도 많아졌다. 이 무수한 이동의 문제는 대체로 가내수공업자인 작가에게 필요한 절대 시간, 즉 스튜디오에 머물며 작품을 생산해야 하는 시간을 빼앗는다는 점에 있다. 작가가 바빠질수록 이동은 잦아지고, 작품도 더 많이 필요해지는데, 스튜디오의 직원 시스템 없이 작업하는 1인 기업 작가들은 이동과 작업의 균형을 맞추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반 데 벨데는 그런 어려움을 해결하는 답안을 제시해줬다. 바로 이동하지 않는 것. 단순히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훨씬 더 먼 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하기 위해 작가는 ‘이동’ 혹은 ‘여행’이라는 행위 자체를 삶에서 제거했다. 물리적 이동을 제거했더니 오히려 많은 시간 더 많은 상상 속 이동이 가능해졌다. 책이나 매체에서 얻는 소스들을 상상에 더해, 타임머신 없는 시간여행, 우주선 없는 우주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여행 속에서 만난 인물에 빙의해서 작업을 하거나, 상상 속 공간을 직접 만들어 작가 스스로가 현실 속에 만들어진 가상공간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여행 후기를 쓴다. 회화, 영화, 설치로 드러나는 후기는, 작가의 일상적 상상을 기록하는 새로운 방식의 브이로그인 셈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상상의 여행을 강조하는 전시제목이나 작품제목을 사용한다. 2021년 루체른미술관에서는 《집에 머무는 게 더 낫다,…(I’d Rather Stay at Home,…》, 2022년 보자르미술관에선《내적인 여행들(Inner Travels )》, 그리고 2023년 보르린덴미술관에선 《나는 안락의자 여행자(I am the armchair voyager)》라는 개인전 제목을 사용했다. 그리고 2024년 아트선재센터와 스페이스이수에서 동시에 진행한 개인전 제목은《나는 욕조에서 망고를 먹고 싶다(I want to eat Mangos in the bathtub)》이다. 프랑스 남부로 여행을 떠나던 마티스의 말을 인용한 이 문장은 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욕조에서 망고를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상상여행을 떠날 수 있는 반 데 벨데의 작업방식을 드러낸다.


1 다와다 요코 『영혼없는 작가』 을유문화사 2011 pp.26~27
2 Paul Virilio 『The Aesthetics of Disapprearance』 SEMIOTEXT
2009 p.112

〈과일가판대〉 판지, 페인트, 나무, 혼합재료 260 × 220 × 225cm 2019

〈하루의 삶〉(스틸) 단채널 비디오, 17분 3초 edition of 3 and 2 A.P 2021~2023
© Rinus Van de Velde, Courtesy of Gallery Baton

《리너스 반 데 벨데 : 나는 욕조에서 망고를 먹고 싶다》
아트선재센터 전시 전경 2024 사진 : 남서원 제공 : 아트선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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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상 속에서, 그리고 그 상상을 구현하는 스튜디오에서는 어떤 여행들이 가능했을까. 우선 신디 셔먼처럼 작가 자신이 다중적 주체로 변모하는 정체성 여행이 가능했다. 피에르 보나르나 마크 로스코, 혹은 에밀 놀데나 에드바르 뭉크가 되어 그들의 표현양식을 따라 그림을 그려보았다. 인상파 화가부터 추상 표현주의 작가까지 방대한 영역이고, 중국작가인 류샤오둥까지 등장한다. 윌리엄 크라우더라는 가상의 작가를 내세워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영상에서는 반 데 벨데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쓴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이 주인공은 평행우주, 혹은 다중우주 속의 작가 자신과 다름없다.

폴 비릴리오는 『소멸의 미학』에서 하워드 휴즈의 비행과 정주를 예로 들어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여행하는 경우 시간이 느려지고 공간이 변형된다는 상대성 이론을 말하며 해방의 광속이라 표현한다. 물체가 정지 중이면 계속 정지하고, 움직이고 있다면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관성의 순간을 동시에 말하며 나흘 만에 최고속도의 비행으로 세계일주를 마치고 이륙지점으로 돌아온 휴즈의 움직임의 욕망은 머무르는 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정주의 욕망과도 같다고 말한다. 극한의 관성은 너무 빨라 정지에 가깝고 싶은 욕망이라는 것이다. 떠나지 않고 도착해 있는 관성의 순간에 대한 사유는 결국 호텔에 칩거하는 것과 고대의 은자들이 사막으로 이동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없게 만들었다. 결국 머무는 것도 떠나는 것도 같은 여행이라는 사유를 제시하는 듯하다.

이동의 기회가 생길 적마다 호크니의 표현을 빌려 “상상의 여행(imaginary journey )”을 더 즐기고 싶다고 말하며, 가족들과 여행을 떠난 길에도, 그랜드 케니언 앞에서 차에서 내리기를 거절했다는 11살 적의 에피소드3를 말하는 반 데 벨데는 정주를 통해 극한의 관성을 실험하는지도 모른다. 작업을 관통하는 모든 이야기가 작가 자신이 움직이지 않은 채 얼마나 많이 이동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상상 속에서 작가는 둘이 될 수도 있고, 죽다 살아날 수도 있고, 하루가 무한히 반복될 수도 있다. 영화〈라 루타 내추럴〉(2020 )에서 작가는 도플갱어가 쏜 총에 죽지만, 다시 차를 타고 수중세계를 지나 내 방에 돌아가 총을 쏘는 것도 결국 작가 자신이 되는 무한 루프에 빠진다. 에셔의 무한대로의 여정처럼 작가는 상상 속에서 작품 속에서 죽다 살아나길 반복하며 물속을 활보한다. 이 기묘한 영화 속 소품이 전시장에 고스란히 놓여 있어서, 작가의 상상(영상 )과 현실을 연결하는 매개제로 기능한다. 작가의 엄청난 상상의 소산들을 따라가는 일은 그 스펙트럼이 너무나 넓고 종횡무진이라 흥미진진하다


3 Dirk Vermalen “The Cunning Little Vixen” 〈Rinus Van De
Velde : Inner Travels〉 Hannibal 2022 p.19 : 김나정, “리너스
반 데 벨데 안락의자 여행자”에서 재인용

《리너스 반 데 벨데 : 나는 욕조에서 망고를 먹고 싶다》
아트선재센터 전시 전경 2024 사진 : 남서원 제공 : 아트선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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