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egue Yang: Leap Year
양혜규: 일상의 연금술이라는 이름으로
World Report | London

〈솔 르윗 동차動車 – 입방체 하나 빠진 입방체 위에 6 단위 입방체〉(사진 가운데) 2018
〈이모저모 토템〉(사진 배경) 2013《양혜규: 윤년》헤이워드 갤러리 전시 전경 2024
양혜규: 일상의 연금술이라는 이름으로
전민지 미술사, 미술비평
런던을 수놓은 한국 여성작가들의 전시로 유럽 미술계가 떠들썩하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과 영향력, 전시 방식에 대해 여러 의견이 갈리는 가운데,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린 양혜규 전시를 살펴봤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줄곧 머무르지 않고 확장하고 있는 그의 작품을 전시를 통해 확인해 보자. 전시는 1월 5일까지.
지난 10월부터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개최 중인 양혜규의 대규모 개인전 《양혜규: 윤년》은 광활한 미궁과도 같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20여 년간 탐구한 작업세계를 총망라한다는 점에서 시간의 미로이며, 수많은 주제어를 중심으로 전시 공간의 내부를 구조화한다는 점에서 공간의 미로다. 초기 대표작 〈창고 피스〉(2004), 인천에서 연 국내 첫 개인전 《사동 30번지》(2006)부터 〈Windy Terrace Beyond Reach〉(2024) 등 커미션 신작까지 작가의 예술관을 드넓게 아우르는 120여 점의 전시 작품은 물질과 인식의 경계를 유영하는 캐러밴처럼 다가온다. 이는 양혜규가 ‘유목하는 예술가’로서 2000년대 초부터 만들어낸 움직임의 흔적을 담아낸다. 당시 정체성을 고민하며 이방인이 되기를 자처했던, 동시에 거부했던 작가는 이제 ‘이동하는 존재’를 창조 및 재구성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각기 다른 문화권으로부터 차용된 유목적 요소들은 전시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복잡다단하게 얽히며 경계 너머를 조망한다. 결국 미술관은 단순히 과거의 성과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양혜규의 작업이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장으로서 기능한다. 이로써 전시 《양혜규: 윤년》은 양혜규의 또 다른 도약(leap) 지점이 된다.
딸깍거리는, 딸랑거리는
갤러리에 도착한 관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신작 〈농담濃淡진 소리 나는 물방울 – 수성 장막〉(2024)이다. 동아시아 전통 목조건축을 연상시키는 구조물 아래, 푸른색과 은색의 금속 종들이 기다란 커튼처럼 드리워져 감각적 관문 역할을 한다. 작품을 직접 통과하고 그 과정에서 예측할 수 없는 종소리를 지나쳐야만 전시장에 당도할 수 있는 셈이다. 입장과 동시에, 슬라이드 프로젝션 〈그 밖에서〉(2006)로부터 들려오는 딸깍대는 소리는 이미지가 교체되는 속도보다도 빠르게 대중을 현혹했던 부동산 광고의 이면을 드러낸다. 20세기 중후반 한국의 소위 ‘현대 건축’이 “미의 차원에서는 역사에 졌고, 숭고의 차원에서는 건설에 졌다”1는 점을 보여주는 듯한 이 작업은 도시 개발과 현대성, 나아가 허구와 이상에 관한 작가의 초기 관심사를 여실히 녹여낸다. 이처럼 초반 작업과 약 20년이 지난 뒤 탄생한 신작이 같은 장소에 놓일 때, 각 작품에서 들려오는 서로 다른 청각적 자극은 이번 전시의 다층성을 상징적으로 시사한다.
생동하는 몸짓과 물질
1층 전시장에서는 〈솔 르윗 동차動車 – 입방체 하나 빠진 입방체 위에 6단위 입방체〉(2018), 〈소리 나는 의상 동차動車 – 우람 머리통〉(2018) 등이 디지털 컬러 프린트 작업 〈이모저모 토템〉(2013)을 배경 삼아 중앙부를 차지한다. 한편, 공간을 에워싼 벽은 군청색 페인트로 채워져 있는데, 여기에도 〈Quasi-Yves Klein Blue〉(2024)라는 제목이 더해졌다.2 이로써 양혜규는 솔 르윗(Sol LeWitt), 이브 클라인(Yves Klein) 등 서구 미술계의 소위 ‘롤모델’을 기리면서도 그들의 정당성과 권위를 교묘하게 흔든다. 예를 들어 구조물의 반복적이고도 기계적인 배열은 미니멀리즘에 대한 경의를 표하지만, 기하학적 질서를 타파하여 움직임을 부여하고자 한 작가의 시도는 미술사 내에 기입된 고정관념을 전복한다. 각 작업은 정해진 날짜에 전문적으로 훈련된 퍼실리테이터에 의해 작동되는데, 이를 통해 오브제들은 퍼포먼스와 조각의 구획을 넘나들며 역동성을 획득한다.
다음 공간에서 연이어 등장하는 〈중간 유형〉(2015~) 시리즈는 마치 인간-조각으로 구성된 일종의 부족처럼 보인다. 한국 전통 공예와 현대적 재료를 결합해 창조한 이 연작은 전 세계 곳곳의 민속 설화로부터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인조 밀짚, 조개껍데기, 야자수, 뜨개실 등을 활용한 수작업의 결과물이다. 연달아 전시된 한지 콜라주 연작 〈황홀망〉(2021~)의 경우, 동아시아의 종이와 문양으로써 무속적 정신성을 담아낸다. 각양각색의 물리적 신체를 얻은 이 존재들은 애니미즘, 더 나아가 철학자 제인 베넷(Jane Bennett)의 ‘생동하는 물질(Vibrant Matter)’ 개념을 구현하는 듯하다.3 그저 무기력한 형태가 아니라,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 도전하는 에너지를 지닌 능동적인 주체로 맥동하는 것이다. 이들이 공간의 심장부에 위치함과 더불어, 관객은 무생물의 생명력을 재고하며 그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존재의 목소리를 인지하게 된다.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2024 《양혜규: 윤년》 헤이워드 갤러리 전시 전경 2024
사진: Mark Blower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Hayward Gallery 제공: 국제갤러리
속삭이는 기억과 투쟁의 장
양혜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정치적 언어로 ‘딴죽걸기’를 실천해 왔다. 이브 클라인 블루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눈에 잘 띄지 않는 〈회전하는 노트〉(2013)가 그 대표적 사례다. 벽에 부착된 금속 보드 위에 자석으로 고정된 메모들은 작가, 역사가, 교수 등 정치적 갈등을 직접 겪은 인물의 생애를 추리 소설의 단서처럼 빼곡하게 기록한 것이다. 이 작업은 역사적 격동을 지나온 개인의 성장과 정체성을 속삭이듯 탐구한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생존자, 재일교포, 팔레스타인의 아이들 등 일견 무관해 보이는 주제가 나란히 놓임으로써, 상이한 경험에서 공유하는 보편성이 현실 사회의 복잡한 역학과 그 관계성을 강력하게 증명해 낸다.
이와 유사하게, 헤이워드 갤러리의 2010년 기획전 《The New Décor》에서도 전시된 바 있는 〈생 브누아가 5번지〉(2008)는 정치적 투쟁과 생존을 위한 장소로서의 ‘사적 공간’을 다룬다. 이 작품의 제목은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의 파리 주소에서 따온 것이다. 뒤라스의 아파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들이 모이던 장소였다. 작가는 이를 보일러, 냉장고, 세탁기와 같이 지극히 평범한 가전제품으로 시각화하여 일상적 사물과 공간이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집단적 저항과 기억의 무대로 기능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그와 더불어, 전형적인 사적 영역이 공적 저항의 장소로 전환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은유한다.
전시의 대미를 장식하는 2024년 신작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는 작곡가 윤이상의 〈이중 협주곡〉(1977)을 모티브로 삼은 대형 설치 작품이다. 분단된 한국의 혼란 속에서 독일로 망명을 떠난 윤이상은 동서양의 전통을 잇는 음악을 창작한 인물로, 작가의 오랜 탐구 대상 중 하나다. 그의 작품은 양혜규의 세계관과 마찬가지로, 지리적 및 정치적 경계를 초월하는 예술적 방법론과 이산의 경험을 담고 있다. 시의적절하게도 양혜규의 전시가 시작된 2024년 10월, ‘동백림 사건’에 대한 재심이 시작되었다. 윤이상이 독일 체류 중 북한 인사들과 교류했다는 이유로 간첩 혐의를 받아 1967년 유죄 판결 및 투옥된 사건이 57년 만에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층층이 나뉜 다리 모양의 블라인드 사이로 빛과 그림자가 투사될 때, 35분의 음악 루프 뒤에 이어지는 70분의 의도된 침묵은 짧은 재회의 기쁨과 지난한 이별의 고통을 대비시키는 서사를 구축한다.
《양혜규: 윤년》 헤이워드 갤러리 전시 전경 2024
사진: Mark Blower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Hayward Gallery 제공: 국제갤러리
〈소리 나는 의상 동차動車 – 우람 머리통〉
이탈리아 트리엔날레 디 밀라노 전시 전경 2018
사진: Masiar Pasquali 제공: 풀라 재단, 트리엔날레 디 밀라노
불가해한 것의 연금술
이번 전시는 시작과 동시에 영국 내에서도 평이 극명하게 엇갈리며 회자되었다.4 일례로, 가디언지의 미술 담당 기자 조너선 존스(Jonathan Jones)는 전시 오픈 직후 별점 1점과 함께 냉소적 혹평을 남겼다. 그러나 일주일 뒤, 미술사학자 줄리언 스탈라브라스(Julian Stallabrass)는 이에 반박하는 글로써 양혜규의 독창성과 심오함에 찬사를 보냈다. 이처럼 극명한 관객 반응의 스펙트럼은 양혜규 작업의 태생적 특성, 즉 ‘불가해성’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매혹과 수수께끼라는 두 축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작가의 접근 방식을 방증한다. 이곳에서 해석과 관점은 무한히 분화한다.
그로 인해 이번 전시는 전통적인 의미의 연금술과 닮아있다. 무가치한 오브제로 여겨지던 블라인드나 빨래 건조대, 목욕탕 의자를 두고 작가는 일찍이 새로운 층위로의 전환을 실험했다. 본래의 용도에서 탈주해 기존 기능을 초월한 오브제들은 양혜규의 언어로 재조합되어 시적 속성을 무대 위에 올렸다. 이때 이들은 예술 작품으로 ‘격상’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작가의 작업세계에서 가장 자주 호출되는 블라인드는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선으로 남되, 빛과 소리, 공기, 향기가 스며드는 틈을 반투명하게 내재화한다. 이는 결국 구분과 연결, 차단과 개방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공존하게 만드는 요소이자 매개체가 된다. 본질을 꿰뚫는 연금술사-작가는 사물을 변형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내면에 잠재된 가능성을 발굴해 활성화하는 역할을 해낸다. 그런 의미에서 《양혜규: 윤년》은 끝없이 펼쳐진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하나의 별자리를 그려낸 일시적 이정표다. 다만 이는 과거의 궤적을 정리한 것이라기보다는 가까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지도로서 작동한다. 행간을 읽으려는 시도는 가능할지언정, 완결된 서사와 여정이란 없다. 적어도 양혜규의 세계에서는 그러하다.
《양혜규: 윤년》 헤이워드 갤러리 전시 전경 2024
〈솔 르윗 동차動車 – 입방체 하나 빠진 입방체 위에 6 단위 입방체〉
2018 《양혜규: 윤년》 헤이워드 갤러리 전시 전경 2024
사진: Mark Blower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Hayward Gallery 제공: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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