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iness is not always fun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불안할지라도
World Report | Berlin

리크리트 티라바니자〈무제(데모 스테이션 8번)〉설치 전경 2024
《행복은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다》 그로피우스 바우 2024
사진: 구안난 리 © 그로피우스 바우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불안할지라도
박은지 독립큐레이터
‘관계의 미학’의 대표적인 작가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의 전시가 독일 베를린 그로피우스 바우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난 가을 리움미술관의 2024 아트스펙트럼 《드림 스크린》을 기획해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 그는 작가이자 큐레이터로서 관객의 자유로운 참여를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히도록 유도한다. 전시는 1월 12일까지.
짭조름하고 비릿한 피시 소스와 코코넛 밀크의 달콤한 향, 코끝을 맴도는 고소한 기름 냄새. 지난 9월, 그로피우스 바우(Gropius Bau)에서 열린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 전시 개막식은 몇개월이 지난 지금도 태국 음식 특유의 향과 맛, 함께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드는 왁자지껄한 소리로 기억된다. 그로피우스 바우는 베를린의 대표적인 현대 미술관으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고전적인 화려함과 웅장한 건축물을 자랑한다. 특히 미술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중앙 아트리움은 층고가 매우 높고 넓게 트인 공간으로, 이곳을 거쳐간 작가 대부분은 스펙터클한 설치와 대규모의 퍼포먼스를 선보여 왔다. 그러나 티라바니자는 이 곳에 압도적인 크기의 작품을 설치하는 대신 탁구대 8대와 목재로 만든 나선형 무대, 그리고 전시장 한 쪽에 팟타이를 요리하기 위한 작은 조리대를 마련했다. 곳곳에서 음식을 나눠 먹고, 탁구를 치며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독일 현대사의 굴곡을 몸소 겪은 미술관이 베를린의 여느 공원과 다름없어 보였다.
먹고 마시는 근원적인 향유에서 경험하는 타자성
전시 타이틀인 《행복은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다(DAS GLÜCK IST NICHT IMMER LUSTIG)》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Rainer Werner Fassbinder)의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li: Fear Eats the Soul)〉(1974 )의 오프닝 시퀀스를 인용한 것이다. 노년의 독일인 여성과 모로코에서 이주한 젊은 노동자의 사랑과 사회적 편견, 인종차별을 다룬 영화처럼, 이번 티라바니자의 전시 또한 독일의 사회정치적인 맥락과 이주민의 문화적 정체성을 심도있게 다룬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전시 개막식에서 관람객에게 팟타이를 제공했던 〈타이 파크(Thai Park)〉(2024 )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타이 파크는 베를린 빌머스도르프 지역에 위치한 프로이센 공원의 또 다른 이름으로, 1990년대 베를린으로 이주한 태국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주말마다 공원에서 태국 음식을 팔면서부터 사람들이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베를린 시민과 관광객에게 레스토랑이 아닌 공원에서, 독일식으로 변형되지 않은 본래의 레시피로 조리된 태국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장소로 입소문이 나면서 베를린의 명소가 되었다. 초기에는 불법 노점으로 단속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2022년 베를린 시의회가 이 곳을 공식적으로 허가한 이후 태국 뿐 아니라 필리핀,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의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자리잡았다. 불법 노점에서 ‘타이 파크’로 인정 받기까지의 여정은 아시아 이주민이 독일 문화에 일방적으로 동화되지 않고,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가는 과정과도 같다. 이러한 의미에서 〈타이 파크〉는 태국 출신 작가의 정체성 표현을 넘어선다. 타이 파크에서 실제 요리하는 분들을 초청해 제공한 팟타이는 다양한 삶의 층위와 문화정치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매개체였다.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무제 1993(카페 독일)〉 설치 전경 1993
《행복은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다》 그로피우스 바우 2024
사진: 구안난 리 © 그로피우스 바우
티라바니자와 독일의 인연은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가는 쾰른에 있던 막스 헤츨러 갤러리(Galerie Max Hetzler)의 그룹전에 초대되었지만, 실제로 전시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 당시 그는 비자 문제로 독일로 출국했다간 다시 미국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팩스로 갤러리에 매뉴얼을 보내 작업을 준비해야 했다. 당시 전시기획자인 팀 노이거(Tim Neuger)는 티라바니자의 요청에 따라 L자 모양으로 책을 쌓아 올리고, 꽃병을 올려둔 테이블과 의자, 간단히 커피를 끓일 수 있는 조리대를 마련해 〈무제 1993 (카페 독일)〉(1993)을 완성했다. 갤러리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평소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듯 이 곳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읽고, 사적인 대화를 나누며 원하는 만큼 ‘카페 독일’에 머물렀다. 이 때 노이거가 만들어 낸 커피는 태국 문화와 전혀 관련이 없는 터키식 커피. 전시가 있기 몇 주 전, 티라바니자는 독일 묄른에서 터키 이주민을 대상으로 한 방화 사건을 다룬 기사를 접했다. 미국 사회의 한 구성원이자 이주민으로서 거주와 이동이라는 기본적인 자유가 제한되었던 그이기에 독일내 인종차별 사건을 다룬 기사를 흘려 읽을 수 없었다.
같은 해, 작가는 함부르크 예술가협회의 전시에서 〈무제 1993(프래들 수프)〉를 선보였다. 프래들 수프(Flädlesuppe)는 독일 남부지방과 오스트리아, 독일어권 스위스에서 즐겨 먹는 전통 요리로, 1987년 독일 영화 〈용의 사료(Drachenfutter)〉(1987)에서 ‘진정한’ 독일인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파키스탄 출신 셰자드의 이야기를 통해 독일 내 이주 노동자가 겪는 인종차별과 노동착취를 그린다. 주인공은 독일 함부르크로 망명해 밤에는 술 집을 전전하며 장미를 팔고, 낮에는 중국 식당에서 일하며 오로지 이 도시에서 자신만의 레스토랑을 열겠다는 꿈으로 온갖 고난을 견뎌낸다. 그가 일하던 중국 식당에는 다양한 국적의 이주 노동자들이 주방에서 보조로 일을 하곤 했는데, 이중 아프리카 출신 동료는 프래들 수프를 만들줄 알아야 ‘진짜’ 독일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셰자드는 프래들 수프 본연의 맛을 내기위해 여러번 시도하지만 끝내는 ‘진짜’ 독일인이 되지 못한 채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2층 전시장에 마련된 〈무제 1993(프래들 수프)〉(1993)에는 〈타이 파크〉와 같이 작은 조리대와 테이블, 의자가 놓여 있었다. 프래들 수프를 먹으며 〈용의 사료〉를 볼 수 있도록 식기 찬장에는 모니터가 설치되었고, 피부색의 차이가 흐릿해진 작은 흑백화면 속에서 셰자드는 낯선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소고기 육수에 팬케이크 돌돌말아 얇게 썰어 넣은 프래들 수프는 언뜻 칼국수와 비슷해 보였지만, 한국의 국물요리에서는 나지 않을 파슬리 향이 강하게 풍겼다.
리크리트 티라바니자〈무제(플래들 수프)〉(부분) 1993
《행복은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다》 그로피우스 바우 2024
사진: 구안난 리 © 그로피우스 바우
“나의 작업은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
음식과 정체성의 문제는 사회문화적, 경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주제다.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는 ‘한 사회의 요리는 그 사회의 구조를 나타내는 말’이자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라고 강조한 바 있다. 티라바니자는 1961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에티오피아와 말레이시아, 태국, 캐나다 등 여러 나라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이후 토론토의 온타리오 미술대학을 시작으로 밴프 센터 미술학교와 시카고 예술원 학교, 뉴욕의 휘트니 독립 연구 프로그램을 통해 미술교육을 받았다. 이후 1989년 뉴욕의 스콧 핸슨 갤러리에서 처음으로 음식을 매개로 한 작업을 선보인다.
“제 작품이 뉴욕에서 처음 전시될 것이라는 생각에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긴장을 풀기로 결심했고, 제 일상 경험의 일부인 친숙한 것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요리 작품을 만들었을 때, 그것은 사실 요리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일종의 박물관학적 비판이었고, 이는 문화적 유물을 원래의 맥락에서 다른 맥락으로, 즉 제 관점에서는 동양에서 서양으로 옮기는 문화적 단편화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습니다.”1
티라바니자는 부처상이나 도자기, 식기 등 비서구권에서 옮겨온 유물이 서구 박물관에서 특정 문화적 가치로 분류되거나 사용가치를 상실한 채 전시되는 현상에 주목했다. 당시 전시 작품이었던〈무제〉(1989)는 주 1회 태국 커리를 요리하고, 완성된 커리와 직접 사용했던 조리도구를 좌대 위에 올려둠으로써 사물의 일상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었다. 동시에 1990년대 초 미국 사회내 다문화주의와 이민문제가 부각되는 상황을 여러차례 목격한 그가 자신의 타자로서의 정체성을 태국의 식문화와 결합한 것이기도 하다. 이듬해 작가는 〈무제 1990(팟타이)〉(1990)를 통해 전시장에서 직접 팟타이를 요리해관람객에 게 무료로 제공했으며, 〈무제(무료)〉(1992)에서 태국식 그린 커리를 매일 요리해 대접했는데, 당시 일부 관람객들은 그를 케이터링 담당자로 오해하기도 했다.
이후 1990년대 제작된 일련의 작업은 다양한 요리와 일상적 공간을 활용하여 관람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티라바니자는 태국 음식뿐 아니라 차, 수프, 디저트 등 전시 맥락에 맞는 음식을 선보였고, 텐트와 아파트, 슈퍼마켓 등 일상에서 익숙한 공간들을 전시장에 재현했다. 이번 전시의 〈무제(치유)〉(1992)는 주황색 대형 텐트 안에서 관람객이 직접 중국차를 우려 마실 수 있도록, 찻잎과 다기, 테이블, 의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전시장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작은 원형 테이블에 서로 가까이 앉아 차를 함께 마시는 상황에 어색해했지만, 점차 짧은 대화를 나누며 일상에서 벗어난 경험을 즐기는 듯 했다. 〈무제 1997(소시지로서의 파우스트와 감자로서의 프란츠 비베르코프의 시연)〉(1997)은 관람객이 공연에 직접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독일의 문화적, 사회적 맥락을 탐구하도록 설계되었다. 공연 참여자들은 독일 문학의 상징적인 인물인 ‘파우스트’와 ‘프란츠 비베르코프’를 각각 감자와 소시지로 형상화한 탈을 쓰고, 독일 국기를 연상시키는 무대 위에 선다. 이 작품은 ‘시연(demonstration)’이라는 단어의 이중적인 의미를 활용해, 관람객이 ‘시연’을 통해 작품의 의미를 완성하는 동시에 독일 통일 이후의 사회적, 문화적 변화와 계급 갈등에 대한 ‘시위’의 역할도 수행하게 한다.
리크리트 티라바니자〈무제(팟타이)〉 1990~2004
《아무것도 없음》 치앙마이 대학교 미술관 2004
제공: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아카이브 ©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불확실한 미래에 던지는 작은 공
이처럼 티라바니자의 작품은 전시장을 일상적인 활동의 장으로 변모시키며, 관람객들 사이의 친밀하고 즐거운 소규모 관계를 형성한다. 여기서 관람객은 작품의 필수 불가결한 존재이자 스스로 그 의미를 창출하는 적극적인 참여자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 출신의 전시기획자이자 미술 비평가인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는 티라바니자를 ‘관계 미술’의 대가로 자주 언급했다. 부리요는 1996년 프랑스 보르도 현대미술관(CAPA)에서의 전시 《트래픽》과 1998년 출간한 『관계의 미학』을 통해 1990년대 이후의 예술적 경향을 이론화했다. 그는 현대미술이 ‘인간의 관계 전체와 사회적 맥락을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출발점으로 삼는 예술적 실천’에 가깝다고 분석하면서, ‘사회적 틈’으로 기능하는 예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축소된 관계적 공간’을 전시라는 제한된 시공간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회복시킬 수 있다고 봤다. 나아가 티라바니자를 포함 리암 길릭과 곤잘레스 토레스 등 ‘관계의 미학’을 실천하는 작가들이 완성된 오브제보다 작품을 통해 관람객 간 만남과 소통을 중시한다고 분석했다. 훗날 티라바니자는 자신의 작업이 부리오의 ‘관계의 미학’ 개념 안에서 자주 논의되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서구적 개념인 미학에서 논의되는 것은 여전히 불편하다”고 밝혔다.2 실제로 전시장에서 둘러본 지난 30년에 걸친 그의 작품들은 설치와 영상, 출판물, 텍스트 기반의 회화,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며 과거의 이론적 틀에 갇혀 있기보다 현재 진행 중인 사회적인 논쟁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유머러스하게 접근 가능한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무제(데모 스테이션 8번)〉 2024
《행복은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다》 그로피우스 바우 전시 전경 2024
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위해 이례적으로 미술관 중앙 아트리움 공간을 전시 기간 내내 무료로 개방했다. 전시장 중앙에 위치한 〈무제 2024(데모 스테이션 8번)〉(2024)은 프리드리히 키슬러(Friedrich Kiesler)의 〈공간무대〉(1924)를 재구성한 개방형 무대로, 전시 기간 중 매일 공연을 하거나 아이들을 위한 만들기 워크숍, 과학 세미나, 퍼포먼스 등 다양한 이벤트가 기획되었다. 무대 주변에 설치된 〈무제 2024 ( 내일이 문제다)〉(2024)에서는 탁구공을 주고받느라 분주한 사람들이 눈길을 끌었다. 탁구대에는 ‘TOMORROW IS THE QUESTION’이라는 문구가 8개국 언어로 적혀 있었고, 그 위를 넘나들던 탁구공은 탁구대에 잘 안착하기도, 때로는 빗겨 나가 바닥을 구르기도 했다. 게임 결과에 따라 환호와 탄식이 오가는 것도 잠시, 이내 빠르게 다음 게임으로 이어졌다.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함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때로는 즐겁기도 하고 때로는 두렵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소통하고 공감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의 삶처럼 말이다.
리크리트 티라바니자〈무제(기회는 결코 폐지되지 않을 것이다)〉 설치 전경 2022
《행복은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다》 그로피우스 바우 전시 전경 2024
사진: 구안난 리 © 그로피우스 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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