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YOUNG JIN

홀로 남은 남자

ARTIST REVIEW

〈2022-12〉 LED설치 가변크기 2022 《출구가 어디예요?》 대구미술관 전시 전경 2023 사진: 박홍순

김영진은 국내 1세대 전위작가로, ‘설치 미술’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시절부터 ‘설치 미술’의 지평을 넓히며 “관념과 통념에 익숙해진 회화를 낯설고 생경한 것으로 해체”시켰다. 그는 대구와 경주를 거점으로 오브제, 비디오 영상, 사진, 석고, 종이, 플라스틱, 나무, 흙 등 다양한 매체를 경유하여 공간의 관계를 실험하고, 사진, 불상 오브제, LED 빛 등을 소재로 대칭과 중력을 탐구한다. 대구미술관 2023 다티스트 작가로 선정되어 열린 《출구가 어디예요?》에서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출구에 관한 실험을 확장한 김영진은 세계와 자신의 신체 행위가 만나는 시공간의 흔적을 선보인다.

홀로 남은 남자

윤규홍 | 예술사회학, 오픈스페이스 배 아트디렉터

〈2022-4〉 폴리에스테르 400×900×50cm 2022 대구미술관 전시 전경 2023

가까운 미래에 2023년 미술계가 어떻게 기록될지 예측해보면, 1960~70년대 한국 실험미술의 재조명이 중요한 항목으로 들어갈 것 같다. 최근 여러 전시 기획에서 실험미술가들의 대표작과 신작을 연달아 공개하고 있어서다. 그 가운데 한 명이 김영진이다. 때마침 대구미술관에서 그의 주요 작품을 전시하는 개인전 《출구가 어디예요?》가 시작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김영진은 대구를 거점으로 전위미술을 시도해 온 미술가다.

현대미술사는 그를 1974년 《앙데팡당》전을 시작으로, 같은 해 《제1회 대구현대미술제》 부터 그 행사에 줄곧 참여한 주요 구성원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구현대미술제가 일으킨 요동이 다른 지역의 동시대미술제로 확산되었고, 거기에 김영진을 부르는 일은 잦았다. 중요한 사건 하나가 또 있다. 1975년 대구에서 처음 개최된 《35/128》전은 그 지역 출신 작가들의 운동에 가까웠다. 전국의 전위미술가가 대구를 찾았다가 돌아갔다. 그들은 가는 길에 대구 작가들을 데리고 갔다. 김영진은 여러 지역을 다녔지만, 이후 활동 거점은 대구였다. 좀 더 정확하게는 대구현대미술제를 추억하는 여러 이벤트, 그리고 신라갤러리다.

그의 작업은 실험미술이라고 부르는 영역에서 탐색한 모든 시도에 손댔다. ‘손을 댔다’ 말고 ‘손을 대어보다’라고 보조동사를 붙이는 편이 맞다. 이런 섭렵 과정은 다른 작가들이라고 사정이 다르진 않았다. 별 정보 없이 김영진의 작품을 본다면 다른 작가의 것과 혼동하더라도 관람자 탓은 아니다. 대구미술관 전시보다 먼저 시작되었던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실험미술 1960-1970년대》(2023)에서 김영진의 작품은 S.T그룹의 주제 섹션으로 나누어졌다. 여기서 그는 한국 비디오아트 개척기 작가군(群)으로 묶였다. 김영진은 S.T의 주류가 아니었으며, 영상작업만이 대표작이라고 부르기에도 무리가 있다.

그가 남긴 숱한 작품은 작업연도에 따라 매겨진 숫자 제목을 달고 있다. 이건 시간에 대한 작가의 강박을 드러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의 작품 구성에 곧잘 등장하는 깨진 불상과 사람 뼈는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덧없음을 이야기한다. 작가가 세계를 초월자적 시선으로 전망하기 위해서 먼저 필요했던 게 현시점이라는 기준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미술계가 그를 바라보고 평가한 태도는 좀 성의 없었다. 미술사는 상위 체계인 역사학 일반의 주류 방법론인 실증주의를 따르는 처지-이 또한 엉성한 문헌 조사가 횡행하는데-에서 여러 맹점을 만들었다. 동시대 미술사의 과업이 작품보다 사건 중심으로 기록지를 살필 수밖에 없었던 점도 그중 하나다. 김영진은 실험미술이 벌인 갖가지 이벤트에 이름을 올렸다. 그때 동참했던 미술가들이 한국 화단을 이끄는 인물들로 올라섰다. 미술계가 실험미술에 접근하는 방법이 ‘지금 흥한 누군가가 과거에 어떤 활동을 벌였으니 그때 일은 대단했던 것’이란 논리에서 출발하는데 이건 순리에 맞지 않는다. 김영진은 누구와 전시를 치렀고, 그들 후일담이 어떻게 전해졌는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실험적 삶을 살고 있다. 지금까지 쟁쟁한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 작가를 설명해 왔다면, 이제는 다른 이름들을 빼고 오로지 김영진 본인을 통해서 바라볼 때다.

왼쪽 대구미술관 전시 전경 2023
오른쪽 〈2016-9〉 폴리에스테르, 형광 분말, 푸른 빛 200×120×270cm 2016 대구미술관 전시 전경 2023

이제 초로의 연배를 넘어선 작가가 오랜만에 풀어놓은 작품 보따리는 양으로 따질 때 적지 않다. 커다란 전시가 벌어지는 지금이 김영진이라는 작가를 입체적으로 살피기 좋은 때다. 그런데도 누가 선뜻 나서지 않는다. 그동안 그의 작업을 드문드문 봐 온 사람들 가운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있다. 그때는 설명이 쉬워 보였는데, 부분을 모은 전체 앞에서는 오히려 혼란스럽다. 왜 그럴까? 쉬운 설명과 어려운 설명을 나누어 본다. 어려운 것부터 먼저 정리하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낡음과 새로움의 합일이다.

김영진의 실험미술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온 모든 작품이 일시적으로 터져 나온 파편과도 같다. 다시 말해 근래 완성한 작품은 1970년대 분위기를 품고 있고, 거꾸로 초기작들은 현재 동시대미술의 방향을 고스란히 예지하고 있다. 사람 몸은 하나인데다, 작품에 투여되는 자원이 늘 풍족할 수 없기 때문에 한 방에 터트릴 예술을 50년 동안 잘게 썰어낸 셈이다. 각 시기마다 부는 미술사조의 바람에 작업이 기웃댈 법도 했는데, 그는 한결같았다. 이런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태워 넣은 연료는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하나는 작가가 받았을 심적 억압이다. 또 하나는 그런 억압을 토대로 그가 깨우친 세상의 원리다. 비범함과 꺾이지 않는 창작 태도는 작가에 관한 멋진 수식어다. 그러나 실상을 파고 들어가면 그를 둘러싼 의미 있는 타인들(significant others), 즉 가족과 같은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와 선후배 작가들의 게젤샤프트(Gesellschaft)로부터 비롯된 인간관계 상흔이 있다. 이 말은 이 텍스트가 취재가 아니라 작가론인 이상, 나는 그 내용을 캐거나 덮는 일을 가려서 해야겠다는 뜻이다.

〈2015-3〉 폴리에스테르, 브론즈, 열 210×210×350cm 120×55×40cm(×21) 2015 대구미술관 전시 전경 2023

왼쪽 〈1984-2〉 비디오 설치, TV 모니터 가변설치 가변크기 1984
가운데 〈1978-10-3〉 사진, 회반죽 150×60×250cm 1978
오른쪽 〈1974-2-1〉(사진 앞) 오브제, 스프링, 대저울 20×20×150cm 1974
대구미술관 전시 전경 2023

그의 미술에 일관성을 부여한 두 번째 요소는 스스로 세운 작업 개념이다. 이건 작가가 자연과학으로부터 끌어들인 원리다. 뭔가 하면 대칭과 중력과 진화다. 그가 세계 안에서 관찰한 원리가 작품을 결정하는 격식으로 구체화된 식이다. 이런 형식 실현은 그에게 예술가가 마땅히 가지는 에토스로 내재화되었다. 그 태도는 작가가 남긴 말과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칭 원리의 구체화는 데칼코마니 식으로 좌우상하로 맞선 영상과 사진 작업에 잘 나타나는데, 꼭 그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중력의 원리는 여러 작품에서 흘러내리거나 매달린 상황으로 재현된다. 그 가운데에서도 1974년에 완성한 저울과 죽은 고양이(〈1974-2-1〉)와 밧줄의 조합은 우연히 취한 재료로써 필연적 원리를 끌어내려는 예술 행위를 잘 보여준다.

작가의 예술 의지는 다른 각도에서 조금 열기를 식혀 바라볼 필요도 있다. 그렇게 한다면, 논리는 작가 당사자뿐 아니라 당시 실험미술의 캠프에 묵었던 여러 작가에게 시비를 거는 식으로 비칠 수도 있다. 실험미술의 명분은 예술과 과학의 탐구자 태도보다 대중의 스노비즘과 친밀했다.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이 택한 이론보다, 그것이 소통하는 장에서 퍼져 나온 언술이 실험미술로 흘러갔다. ‘실험’은 과학 제도에서 연구 가설을 증명하는 절차인데,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이 된 모순을 품은 격이었다. 그래도 이 말이 통한다면, 모든 미술 중에 실험이 아닌 것도 없다는 논리가 선다.

〈1980-1988〉 회반죽, 돌 15×23×6cm(×1170) 1980~1988 대구미술관 전시 전경 2023

작가가 언급한 대칭 또한, 생물학에서 비롯된 형태학(morphology)을 파고들수록 예외적인 경우가 더 많음을 발견하게 된다. 중력의 절대적 원칙이 당연하다면 물리계를 지배하는 나머지 힘, 즉 자기력과 장력과 상호작용력도 생각했어야 했다. 진화의 원칙은 헤겔의 역사 진보 개념 이후 항상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받아왔다. 정치의 진화 방향이 언제나 민주주의가 아니라 엉뚱한 쪽으로 샐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물론 실험미술은 반세기 전의 독재 상황에서 과도한 간섭을 피하기 위해 난해함을 갖고 온 진화적 선택압이다. 정치적 진보와 예술적 진보가 항상 같이 갈 이유는 처음부터 없었다.

좀 야박하게 따졌지만, 김영진의 작업은 한 비범한 사람이 벌인 궁여지책이다. 작품 항목 중에는 손발을 수갑과 사슬로 채운 것이 유독 많다. 〈1992-1〉에서 작가는 작은 인물상을 굴비 엮듯 매달았다. 앞서 말한 내용을 다시 슬쩍 흘린다면, 그를 평생 억압하고 소외시킨 건 정치적 검열이 아니라 종교와 부권(父權)의 중첩이었다. 또 하나 더 있다면 파리비엔날레로 대표되던 당시 한국 현대미술의 학맥이었다. 이런 처지에서 작가가 피안의 세계를 전망하도록 이끈 건 본인의 몸이었다. 신체를 드러내는 영상작업은 행위예술과 이어졌으며, 1970년대 대구현대미술제가 그의 과거를 회고하는 대목으로 자리 잡은 이유다.

상황을 비약해서 말하자면, 실험미술의 태동기로부터 대구현대미술제 시기를 함께 보냈던 전위미술가들의 현주소는 그때와 다르다. 어쩌면 김영진은 다른 이들이 빠져나간 그곳에 머물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이는 현실 파악이라는 철이 안 들었거나, 반대로 너무 일찍 철들어 세속을 벗어난 듯 보이는 것 둘 중 한 가지다. 지금 벌이고 있는 개인전 제목에서 따오자면, 작가 김영진은 출구지향형 인간이다. 이런 말이 존재한다면, 입구지향형 인간이라는 반대말도 따라온다. 입구지향형은 학교, 직위, 기회, 인맥 이라는 관문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유형이다. 그게 부질없다고 보는 출구지향형은 저항하거나 도피하는 유형으로 비친다. 작가가 “출구는 어디?”냐고 묻는데, 누군가가 출구를 가리키더라도 그가 그리 갈까? 잘 모르겠다. 설령 갔더라도 출구지향형 존재는 그곳에서 또 다른 출구를 찾을 게 분명하다.

위 〈2021-11〉(사진 왼쪽) 폴리에스테르, 빛 80×60×100cm 2021
아래 왼쪽 〈1989〉(사진 오른쪽) 사진, 회반죽 50×150×100cm 1989
오른쪽 〈1992-1〉(사진 왼쪽) 회반죽, 빨대 10×20×60cm 1992
대구미술관 전시 전경 2023

김영진은 1946년 태어났다. 계명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대구와 경주를 기반으로 작업 활동을 지속해왔다. 대구미술관, 갤러리신라, 제3미술관, 시공갤러리, 스페이스129 등에서 약 12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대구현대미술제, 앙데팡당전, 서울현대미술제, 에꼴드서울전 등 1970년대 한국미술의 주요한 기획전을 비롯해서 2016년 부산비엔날레, 《한국 비디오아트 7090:시간 이미지 정치》(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9), 《한국실험미술 1960-70년대》(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3) 등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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