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하는 책 만들기
ART BOOKS
강재영 기자
OO하는 책 만들기
최근 몇 년간 한국과 해외에서 독립출판과 아트북 제작이 활기를 띠고 있다. 작가들이 자신의 시각언어를 책이나 진(잡지) 형태로 다듬어 소규모로 출판하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으며, 독립 서점과 페어를 통해 독자와 직접 소통하기도 한다. 새로운 문화적 흐름을 만들어가는 독립출판은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있다 그래서 준비했다. 해외 아트북 및 독립출판의 그 실천적 경향을 살펴볼 수 있는 진 두 종과 책 두 권을 소개한다.
장원쉬안 지음 · 임경용 옮김 · 미디어버스
344쪽 · 2023
22000원
『엑스포츠 온 페이퍼』는 타이완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장원쉬안이 동남아시아와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며 만난 30여 명의 예술가, 이론가, 역사학자, 비영리단체, 연구자, 혁명가, 교육자, 사회운동가, 독립출판사, 사립도서관 종사자 등을 인터뷰하고 그중 18건의 인터뷰를 선별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책의 서문「3개의 단어만 담고 있는 사전」에서 저자는 이 책의 세 챕터 ‘사미즈다트’, ‘선언문’, ‘아카이브’에 대해 서술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독립출판이 다른 출판과 다르게 지니고 있는 성질인 운동성과 역사성을 강조한다.
첫 번째 장의 제목인 ‘사미즈다트’는 러시아어로 자주 출판(self-publish) 을 뜻하는데, 이 장에서는 자주 출판의 의미와 실천을 소개하며, 타이완 독립운동 활동가 수벵, 페루의 독립 출판물 연구자 로마넷, 멕시코시티의 자율 도서관 아에로모토, 방콕의 예술 아카이브 리딩룸, 인도네시아의 출판 운동가 마르진 키리 등의 활동을 다룬다. 두 번째 장 ‘선언문’에서는 정치적 신념이나 지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쓰기 실천에 대해 다룬다. 이 장에서는 책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변화를 촉진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다양한 사례를 인터뷰한다. 세 번째 장 ‘아카이브’는 출판물이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탐구한다. 다양한 지역의 공동체와 협력하여 미디어와 이미지가 어떻게 정의되는지 이해하고, 지역의 공공적 관점에서 정보를 생산하는 사례들을 통해 아카이브의 역할을 조명한다.
이 책이 돋보이는 것은 단순히 출판 종사자의 인터뷰나 활동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글로벌 사우스’라는 지리적 범주가 과거 식민지 지배와 현재의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자리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인터뷰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경향이나 방향성이 아닌 중첩되고 다분화되는 행동하는 사람의 여러 목소리는 우리 독립출판과 시각예술장의 모습을 반추하게 한다.
버나드 셀라, 레오 핀다이센, 아그네스 블라하 지음 · 김재경, 노다예 옮김 · 엔커
510쪽 · 2021
28000원
『NO-ISBN : 독립출판에 대하여』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독립출판 아트북을 소개하고 전시하는 예술공간 살롱 퓌르 쿤스트부흐를 운영하는 예술가 버나드 셀라,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미디어 이론 강사로 재직 중인 레오 핀다이센, 미술사와 문화 과학을 연구하는 아그네스 블라하 등 세 사람이 저자로 나서, 국제표준거래시스템(ISBN )에 등록되지 않은 예술로서 독립 출판물에 대해 다루는 책이다.
비선형적인 책의 구성은 독립출판이 지닌 형식적 특질을 떠오르게 만든다. 1쪽부터 74쪽까지는 ISBN에 속하지 않는 출판물 정보를 빼곡히 나열했다. 이어 서유럽의 독립출판계를 이모저모로 살펴볼 수 있는 인터뷰, 아티클, 연표, 여러 아트북 도판 등등 다양한 형식과 방대한 자료들로 제시된다. 다루는 영역도 다양하다. ISBN의 기원이나 인쇄술의 역사와 함께 보는 독립출판의 역사 등 과거 독립출판의 형식과 경향을 살필 수도 있고, 예술과 독립출판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생성되는 감각적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들도 담고 있다. 도래한 디지털 시대에 ‘촉감’과 물성을 감각하게 하는 독립출판의 풍경과 함께 종이 없이 출판하는, 포스트 디지털 출판을 다룬 글도 읽어볼 수 있다. 정치적 행동의 동반자로서의 독립출판물 제작 경향이나, 이를 유통하는 매개로서 아트북 페어나 새로운 형식의 유통 소비를 꿈꾸는 예술가 이야기도 있다. 독립출판을 기록하고 수집하는 방식으로서 대안적 아카이브인 ‘아나카이브’를 제안하기도 한다.
이렇듯 이 책은 독립출판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풍부한 자료와 다양한 이들의 시각을 병치하여 탐구하도록 한다. 이뿐만 아니라 예술과 독립출판의 공존에서 일어나는 여러 종류의 작용/반작용을 세세하게 다루고 있어서 시각예술로서 독립출판에 관심이 있는 이에게, 마치 색인 없는 사전 같은 훌륭한 참고문헌이다.
모리츠 그륀케 지음 · 김수진 옮김 · 더북소사이어티, 오프투얼론
12쪽 · 2024
5000원
『아트북 페스티벌의 미래 – 이전에는 페어로 알려진』은 12쪽으로 구성된 진 형태의 출판물로, 베를린에서 활동하며 지난 10여 년 동안 아트북페어 현장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온 모리츠 그륀케(Moritz Grünke)의 동명의 글을 담고 있다. 저자는 베를린에서 15년여간 ‘글로리아 글리처(Gloria Glitzer)’라는 출판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여러 페어, 페스티벌에 참여하거나 관련 프로그램을 기획해왔으며 베를린의 대표적인 아트북 페어인 ‘미스 리드(Miss Read)’ 조직위에 7년 동안 참여해왔다. 저자는 아트북 페어가 지난 수년 동안 출판인들이 책을 홍보하고 동료를 만날 기회로, 뉴욕, 런던, 파리, 도쿄 등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 글로벌 사우스 지역의 거점 도시에서도 확장되고 있다고 밝히면서도, 현시점에서 아트북 페어가 지닌 구조적 문제점과 한계 등을 논한다.
그륀케는 현재 아트북 페어가 이상적인 책 공간보다는 상업적인 열망과 여행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소수의 참여자를 위한 행사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페어(fair)’가 상업적 의미를 품은 단어이기에, 상업적 모델 대신 좀 더 공동체적인 이벤트이자 교류를 위한 플랫폼으로써 ‘페스티벌’이란 말을 사용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구조를 고민하자고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페어 참여자는 높은 여행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팔릴 만한 책’을 만드는 데 집중하지만, 이는 아트북 페어의 개별적 특성을 희석시키고 획일화, 보편화되는 경향을 초래한다. 이러한 보편성은 주로 판매를 겨냥한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저자는 페어 기간 참여자들이 테이블 앞에만 머물지 말고 동료와 대화하며 주제를 나누기를 권한다. 아트북 페스티벌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주제들이 논의될 수 있는 공론장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함께하고, 배려하고, 나누고, 서로를 지지해 주는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으로서 페스티벌 이어야만 페어에서 사라져 가는 새로운 시각을 지닌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그의 글은 시장이 아닌 축제로서의 아트북 행사를 다시금 그리게 한다.
마크 피셔 지음 · 김재경, 노다예 옮김 · 엔커
8쪽 · 2022
4000원
『지속가능한 독립출판 모델을 향해』는 마크 피셔(Marc Fischer)의 강연문을 담은 진이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4월 2일 열린 프린티드 매터(Printed Matter)의 온라인 대담 프로그램에서 마크 피셔를 비롯한 참여 패널들은 정부나 제도의 지원 없이도 자신만의 작업을 지속할 방법을 논의했다.
마크 피셔는 시카고에 기반을 둔 아티스트이자 출판인으로, 2007년 공공이 수집하지 않는, 주로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산물을 수집하고 지식과 아이디어를 전시, 강의, 출판 활동을 통해 공유하는 단체인 ‘퍼블릭 컬렉터스(Public Collectors)’를 설립했다. 그룹 ‘템퍼러리 서비스’의 일원이자, 출판사 ‘하프 레터 프레스’의 공동설립자로 다수의 출판물을 제작해왔다.
피셔의 강연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전시 예산에 초대장 인쇄 항목을 포함시켜라. 전체 예산을 써서 무언가를 인쇄하라. 나누어 주고도 남아서 팔 수 있을 만큼 인쇄물을 충분히 제작하라. 종이 낱장, 책자, 신문, 포스터, 책 또는 그 사이에 있는 어떤 형태든 다 가능하다.” 값싼 중고 인쇄장비와 질 좋고 저렴한 종이를 구하고, ‘무료 인쇄는 좋은 인쇄’라며 인쇄를 마음껏 할 수 있는 회사에서 눈치껏 출력하라는 피셔의 조언 혹은 외침은 ‘출판’이라고 하는 행위가 갖는 책임과 무게가 느껴질 때쯤 꺼내보고 싶을 정도로 간결하면서도 강하다.
언더그라운드 독립출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지 않으면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이 강연문은 단순히 출판물의 제작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지원금 경쟁’을 피하라는 그의 말에서 이러한 출판물을 함께 제작하고 소비하는 동료를 생각하는 공동체 의식이 지속가능한 출판의 필요충분조건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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