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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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 Jaih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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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당시 심사위원단은 그를 “관찰자의 그림이 아닌, 삶과 일치하는 예술작업을 견지해온 흔치 않은 인물”로 설명했다. 바로 광부화가 황재형의 얘기이다. 광부로서의 삶을 자처하며 1982년 강원도 태백 탄광촌으로 들어가 그 곳의 풍광을 밀도 있게 표현해온 그가 최근 가나아트센터에서 진행된 개인전 〈십만 개의 머리카락〉(2017.12.14~1.28)에서는 붓과 물감대신 ‘머리카락’을 재료로 선택하여 우리네 삶을 진실한 태도로 접근하는 그만의 진중함이 더 심오해진 양상으로 드러냈다. “나의 그림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익명의 개인에게 보내는 뜨거운 연서입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순박한 웃음 속에 녹아 있는 열정 어린 고백을 들여다보자. 박수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작가전〉은 4월 15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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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이긴다 : 약속을 지킨 화가 황재형

2011년 명동 신세계백화점 6층 옥상 정원에 제프 쿤스의 ‘보라색 사탕’ 봉지 조각 〈Sacred Heart〉가 설치되었다. 보라색에 금빛 리본을 묶은 형상의 ‘작품(?)’의 높이는 3.7m, 무게 1.7t, 고광택 크롬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진 것이다. 2011년 현재 쿤스의 ‘작품(?)’은 국내에 총 3점이 설치되었는데, 삼성미술관 리움과 CJ 등 모두 형제기업이다. 그도 그럴 것이 〈Sacred Heart〉의 다른 에디션 하나가 2007년 소더비 경매에서 2360만 달러(한화 약 250여억 원)에 경매된 바 있다. 재벌가의 심미적 안목이

탁월해서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2016년 1월, 필자의 저서 《아트버블, 거품이 꺼진 현대미술의 민낯》(2016 리슨투더시티) 출판과 관련해 쿤스의 작품 도판 한 점을 사용하기를 원했지만, 도판 사용은 비용 지불과 무관하게 불허되었다. 리움과 나인브릿지골프장, 하이트진로에 소장되어 있는 그것의 용도가 무엇인지를 새삼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런 ‘대단한 체계’를 대변하는 쿤스가 “아트(art)란 세속적인 것을 초월해 인류의 문명과 공동체의 계몽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소리를 들을 때, 뭔가 소중한 것을 도둑질당하면서도,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도록 길든 상황이 역하게 다가왔다. 그가 휘트니미술관 회고전을 거쳐 퐁피두센터를 찍고,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을 경유하는 전례 없는 순회전 일정을 소화하고 있을지라도, ‘진실’을 다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이 진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황재형 같은 작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환기되고 촉구되는, 그러한 진실이다.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십만 개의 머리카락〉에 출품된 〈새벽에 홀로 깨어Ⅱ(세월호 어머니)〉(2017)에 작가는 에밀 졸라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으면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진실은 스스로를 가누기에도 너무 힘들어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아마도 우리는 거의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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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자리〉(사진 왼쪽) 캔버스에 유채 162.1×227.3cm 2011.11~2013.4 박수근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작가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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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부터 예술은 본격적으로 명품소비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는 이른바 VIP 마케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대박 아이템으로 오롯이 정착했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새로운 역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현대미술은, 적어도 그것의 구매를 위해 300억원 정도는 지불할 여력을 지닌 소수의 그늘 밑으로 기어들어가 재롱을 부리는 것이 되었다. 쿤스의 〈Sacred Heart〉가 설치되던 날, ‘쿤스’의 이름과 하트가 새겨진 기프트 카드와 가방, 티셔츠, 목걸이, 머그잔을 받기 위해 줄을 선 백화점의 소비자들은 부지불식간에 그 초고가의 것들의 민주적 가치를 부풀리는 데 동원되었다. 민주제도가 발달할수록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고, 예술은 그 격차를 활용하는 투전판이 된다. 애꿎은 대중은 이미 팝아트 때부터 그것도 무료로 동원되었지만. 첨단화된 주주자본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곤 했던 최소한의 동정심조차 거두어들이도록 했다. 예술은 레이건주의에 동조했다가 이젠 트럼프주의를 앞질러나간다. ‘아메리칸 퍼스트’가 그렇듯, 자신이 더 ‘많이 가진 자’가 되는 것 외에 어떤 것도 중요하거나 의미 있지 않다는, ‘머니 퍼스트’의 예술에서 더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세계는 뭔가 심각한 오류로 인해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까?) 그 안의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는 대륙과 대양의 오염 못지않은 것이 정신 차원의 오염이다. 현대미술의 식구들이 유난히 이 사실에 무감각한 것 같다. 아니면 애써 외면하는 것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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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땅을 딛고서〉 나무에 철망과 아크릴릭 69.2×105.5cm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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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상황은 그 사실을 더욱 극적으로 증언한다. 예술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끔찍한 시대를 대변하기 시작했다. 작가들에게서도 징후가 목격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언제부턴가 진실을 위해 울지 않는다. 눈물은 약자의 상징이고, 경쟁에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기꺼이 사회의 1% 최상위 계층, 재력과 교양을 겸비한 유력한 사람들 편으로 분류되고 싶어 했다. 조금씩, 때론 현저하게 그들의 사유와 인식은 쿤스처럼 독일제 세단 광고에 호출되는 것에 대한 열망으로 변성되어 갔다. 상황론으로만 뭉뚱그리기엔 너무나 뼈아픈 시간이 흘렀다. 아마도 저스틴 폭스가 자신의 《죽은 경제학자들의 만찬(The Myth of the Rational Market)》에서 설파했던 시대가 도래하고 만 것이리라. “세상을 지배하는 사상은 경제이론과 정치이론뿐이다.” 현재의 글로벌 현대미술은 돈과 권력의 뒤꽁무니를 따라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다. 어느 때부턴지 더는 오르지 않는다. 우리 미술이 예외일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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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 목판화 26×18cm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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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행군하도록” 돕는 의식이 곧 작가 의식

폭력은 이미 1980년대에 충분히 예고되었고, 황재형은 그것을 간파했다. 그리고 ‘5·18 광주민중항쟁’과 ‘서울의 봄’을 뒤로한 채, 1982년 27세의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과 함께 태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광부가 되었고, 광부로 살았고, 광부의 삶을 그리는 ‘약자’를 자처했다. 그저 이 땅의 약자들 곁을 떠날 수 없어서였다. 그는 중앙미술대전에서의 입선을 기반삼아, 잔뜩 근력을 키운 다음 강자들의 경쟁에 뛰어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타인의 고통에 일찍 눈떴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그것이야말로 정신적 유아기를 벗어난 진정한 성인에게서 나타나는 특성이다.

물론 태백 이후로도 다음과 같은 상황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진실은 어떤 임계점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지속적으로 무기력해 보인다. 신세계 백화점의 옥상과 나인브릿지골프장에서 고광도 크롬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것들이 거만하게 햇빛을 반사해내고 있을 무렵, 황재형은, 그가 떠나온 서울에선 이미 퇴행으로 간주되곤 하는 유화기법으로 〈아버지의 자리〉를 그리고 있었다. 그림의 면면을 보자.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 깊이 팬 주름, 듬성듬성한 새치, 수염, 잔뜩 눈물이 고인 눈, 무기력한 시선, 이 세상의 경계로 내몰린 탄광촌 아버지의 초상이다. 1981년 광산매몰사고로 사망한 어느 광부의 작업복을 그린 〈황지 330〉에서 달라진 것이라곤 없다. 〈황지 330〉을 그린 1981년 때처럼, 1996년에도 누구도 그에서 사망한 광부의 아내들 가운데 한 명인 〈선탄부 권씨〉(1996)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의 자리〉를 그리던 2013년도 다르지 않았다. 황재형은 그렇게 해야 할 ‘이성적 이유’가 없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아픔들로 인해 자책하고 또 자책해 왔다. “진정으로 느꼈으면 됐지,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 무슨 명예를 얻으려고 하는지…” 이것이 아직은 증명되고 있는 ‘작가의식’이다. 마스크를 하고 머리에는 수건을 두른 채 거의 눈만 드러낸 얼굴을 한 〈선탄부 권씨〉,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버지의 자리〉는 이런 의식에서 가능했다. 이 의식은 자신의 창작을 합리적 인건비로 환산 가능한 임노동으로 스스로 규정하고, 양보할 수 없는 청구권의 일환으로 환원시키는 의식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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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바라기〉 캔버스에 머리카락 130.3×162.2cm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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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떠날 때의 약속을 적어도 지금껏 지켜왔다. 누구도 그에게 떠남의 삶을 지속할 것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 그렇게 해왔다. “먼저, 그리고 본능적으로 떠나는 사람만이 다른 이들을 떠나게 할 수 있다.” 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말이다.

이 지면을 쿤스의 300억 짜리 〈Sacred Heart〉로 시작한 이유가 짐작되는가? 그것은 힘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져야 했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위대함, 탁월성, 유명세, 고가(高價)로 포장되고, 갑부 컬렉터, 상류 취향, 첨단, 길게 늘어선 관객, 입장 행렬로 장식된다. 하지만, ‘힘의 예술’에 대한 데이비드 A. 시멘스의 통찰이 참으로 옳다. 그는 말한다. “힘의 예술은 당대가 힘으로 정의하는 외부적 요인들을 통해 인간의 타락한 정신과 노예적 도덕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믿는 예술이다. 그리고 그렇게 믿음으로써, 내부에 그럴 수 있는 힘이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예술이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것을 다시 읽어야 한다. 강한 것은 때로는 오랜 시간 약한 것처럼 보이는 ‘진실’이다. 어느 순간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진실이 승리하기 마련이다. 시간은 진실의 편에 서는 예술의 손을 들어주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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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재 형

1952년 출생했다. 1981년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1984년 아카데미화랑과 제3미술관에서 첫 개인전 〈쥘 흙과 뉠 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1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제3회 민족미술상〉(1993) 〈제7회 민족미술상〉(2013) 〈제1회 박수근미술상〉(2016) 수상 경력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주요 미술관 다수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현재 강원도 태백에서 작업하고 있다.

글:심상용 | 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 교수 / 사진:박홍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