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작가로 전략가로서 이우환
류병학 미술비평
한 작가를 규정하는 작업은 그의 일생 전반과 주변 환경과 주고받은 영향 등 이른바 맥락을 살피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우환이라는 한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에 앞서 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고, 자신을 둘러싼 외부와 어떻게 대화하고 부대꼈는지 점검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그가 어떻게 동시대미술의 중심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는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역사가 깊고 위대한 명소인 베르사유궁 정원에서 전시회를 하게 돼 기쁘고 흥분됩니다. 이 완벽미를 지닌 인공정원 속에서 완벽을 넘어선 우주와 자연의 무한성을 드러내 보이려는 게 제 작업의 의도였습니다.” 지난 6월 12일 베르사유궁에서 열린 <이우환 베르사유(Lee Ufan Versailles)전> 기자회견에서 이우환은 벅찬 감회에 젖어 이렇게 인사말을 했다. 일명 ‘베르사유 현대미술전’은 절대왕정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물인 베르사유궁을 현재진행형의 공간으로 되살리는 야심 찬 프로젝트로 2008년 제프 쿤스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제적인 스타 작가들을 차례로 초대해왔다. 이우환은 아시아 작가로는 일본의 무라카미 다카시(2010년)에 이어 두 번째다. 전시를 기획한 알프레드 파크망(전 퐁피두센터 관장)은 “파리 주드폼(1997~98),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2011)에서의 회고전 이후 열리는 이번 베르사유 전시는 이우환 예술세계에 또 하나의 전기를 이룰 것이며, 그는 동시대미술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어떻게 이우환은 동시대미술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까? 《월간미술》은 필자에게 ‘작가로 전략가로서 이우환’을 주제로 원고를 청탁했다.
미술비평가로서의 이우환
이우환(1936년생)은 1956년 서울대 미대를 중퇴하고 일본에 밀항한다. 그는 1961년 니혼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나 고민 끝에 철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일본화 학원을 다니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1960년대 중반 《매일신문》의 <현대일본미술전>과 쉘 주최 <현대일본미술전>에 몇 차례로 응모하지만 낙선한다. 당시 그는 일본미술계에서 제대로 평가받으려면 ‘작품’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 같다. 1968년 이우환은 곽인식의 추천으로 한일 문화교류 일환으로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에 참여한다. 1969년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였던 김세중은 곽인식과 함께 이우환을 선정한다.
1969년은 이우환에게 뜻 깊은 해이다. 그는 <오브제에서 사물로>를 미술출판사 미술평론 현상공모에 응모하여 비평상을 받고, 국제청년미술전에 응모하여 수상한다. 그는 당시 일본 미술계에 ‘핫’한 모노하(物派)에 비평(<존재와 무를 넘어서-세키네 노부오론> <다카마쓰 지로-표현작업으로부터 만남의 세계로>)으로 개입하여 일본미술계에서 입지를 굳힌다. 이를테면 이우환은 급진적인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미술계에서 작품보다는 평론으로 주목받았다는 말이다. 1971년 이우환은 평론집 <만남을 찾아서>를 출판한다. 당시 이우환의 평론은 철학과 출신답게 하이데거와 메를로 퐁티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의 이론을 미술에 접목한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하이데거의 예술개념과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신체)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의 장소성 개념을 ‘모노하’에 접목했다. 이우환의 미술평론은 1960년대 말부터 한국미술계에 ‘이론공부 열풍’을 일으킨다. 이우환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 중반까지 40여 편이 넘는 글을 발표했지만, 1960년 초 철학도의 길을 포기했듯이 이후 미술비평가가 아닌 작가의 길을 걷는다.
아티스트로서의 이우환
하지만 이우환의 아티스트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1970년 구겐하임미술관 사건과 1971년 파리비엔날레 사건이 그 단적인 사례이다. 구겐하임미술관은 <재팬, 아트, 페스티벌>에 이우환을 선발했지만, 일본 측은 이우환의 국적이 한국이라는 이유를 들어 전시 초대를 보이콧한다. 그리고 《르몽드》를 위시해 적잖은 파리 언론매체에서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한 이우환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결국 그는 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 그는 일본작가 신분으로 출품할 수 없겠냐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아티스트로서 이우환의 행보를 알려면 그의 전시 경력을 살펴보면 된다. 이우환은 1973년부터 2008년까지 당시 일본 메이저 갤러리 중의 하나인 도쿄화랑에서 개인전을 꾸준히 개최한다. 1973년 그는 다마미술대학 교수로 임명되는데, 그가 일본미술계에 자리매김했음을 반증한다. 따라서 1970년 구겐하임미술관의 ‘일본현대미술전’에 출품하지 못했던 이우환은 1974년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열린 <일본현대미술전>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이우환은 도쿄화랑의 파워를 깨달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뒤셀도르프미술관 그룹전을 계기로 사방팔방으로 독일 메이저 갤러리들을 물색한다. 그는 1976년부터 2006년까지 독일 보쿰 갤러리m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당시 리처드 세라 등 국제적인 미니멀아티스트들이 소속돼 있던 갤러리m은 유럽 메이저 갤러리 중의 하나이다. 당시 갤러리m의 딜러인 알렉산더는 유럽미술계의 파워맨이었다. 1976년 갤러리m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이우환은 그다음해인 1977년 ‘카셀도쿠멘타’에 초대된다. 갤러리m의 딜러 알렉산더의 파워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1974년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그룹전(일본현대미술전)에 참여했던 그는 1978년 당당하게 개인전을 개최한다. 같은 해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유명 미술관인 스테델(STADEL)에서 개최한 조각전(Z. B. Sculpture)에 초대된다.
이우환은 또 한국의 메이저 갤러리인 갤러리 현대에서 1978년부터 2003년까지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는 프랑스의 메이저 갤러리 중 하나인 갤러리 드 파리(Galerie de Paris)에서 1984년부터 1995년까지 개인전을 연다. 1986년에는 퐁피두미술관에서 개최한 <일본의 아방가르드(Le Japon des Avant-Gardes)전> 에 초대된다. 1994년 그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무디마미술관(Fondazione Mudima)에서 개인전을 연 데 이어 구겐하임 소호미술관에서 열린 그룹전 <Scream against the sky>에 초대되고, 국립현대미술관과 갤러리 현대 그리고 인공갤러리에서 동시에 개인전을 개최한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도록은 갤러리 현대가 금전적 지원을 편집디자인은 인공갤러리가 맡았다.
이우환은 영국의 메이저 갤러리인 리슨갤러리에서 1996년과 2004년 그리고 2008년 개인전을 개최한다. 1997년에 서두에서 알프레드 파크망이 언급했던 파리 주드폼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퐁피두에서 기획한 그룹전 <Made in France>에 초대된다. 1978년 프랑크푸르트의 스테델에서 그룹전에 초대된 이우환은 1998년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어서 1999년에는 독일의 저명한 른 루드빅미술관에서 기획한 그룹전 <Kunstwelten im Dialog>에 초대된다. 2001년에는 영국 런던의 저명한 테이트모던에서 기획한 그룹전<Century City>에 초대된다.
2003년 이우환은 삼성미술관(호암갤러리, 로댕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같은 해 그는 일본의 모리미술관에서 기획한 그룹전(Happiness)에 초대되고, 2004년 도쿄국립미술관의 그룹전 <Ecole de Limpa>에 초대된다. 2006년엔 ‘광주비엔날레’ 그리고 2007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에 초대된다. 2008년 그는 <이우환 베르사유>를 후원하는 갤러리 중 하나인 뉴욕의 메이저 갤러리 페이스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2011년에는 서두에서 알프레드 파크망이 언급했던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리고 2014년 베르사유궁에서 이우환 개인전이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단편적인 이우환의 전시경력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전자는 이우환이 국제적인 작가로 성장하기까지 메이저 갤러리의 역할이다. 물론 유럽 유명 미술관에서 개최된 이우환의 개인전들 중에는 이우환 개인의 노력으로 성사된 것이 적잖다. 필자는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이우환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는데, 당시 50대 말이었던 이우환은 자신의 도록들을 직접 들고 미술관 관계자를 찾아다녔다. 한마디로 이우환에게 매니저가 없었던 것이다. 와이? 왜 이우환은 매니저도 없이 혼자 고군분투한 것일까? 이우환 왈, “쓸만한 사람이 없어서…” 문득 “내 인생을 통해 80%는 인재를 모으고 기르며 교육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는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말이 떠오른다. 후자는 세계미술계의 권력으로 부상한 미국에서의 전시경력이다. 이우환은 유럽에서 활발한 전시활동을 한 반면, 미국에서는 2008년 페이스갤러리의 개인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시경력이 전무한 상태였다. 와이? 왜 이우환은 미국에서 통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우환 왈, “미국미술계가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작품을 좋아하기 때문에…” 필자는 <쓰리스타와 이우환>(2003)에서 이우환이 미국미술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작품의 외향이 아니라 이우환의 상업적 시스템 결여에 있다고 보았다. 그 대안으로 필자는 쓰리스타에게 그동안 구축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십분 활용하여 이번(2003년 삼성미술관) 이우환 회고전을 미국의 유명 미술관에 순회할 수 있게끔 공격적인 마케팅을 추진할 것을 요청했다. 2011년 삼성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그는 서두에서 알프레드 파크망이 언급했던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삼성과 이우환
국내 모 일간지는 이우환이 삼성가(家)와 친분이 깊다고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1960년대부터 이병철 선대 회장과 최순우 선생 등 고미술 전문가들 사이에 심부름을 자주 하면서 인연을 쌓게 됐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과도 그 시절부터 즐겨 어울리며 답사를 다닐 만큼 절친했고, 지금도 종종 만나 대화를 나누는 사이다.” 아티스트는 개인이다. 따라서 아티스트는 어느 갤러리에 소속될 것인지를 고민한다. 하지만 국제미술계에서 주목받기 위해서는 메이저 갤러리의 서포트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 대기업의 후원 없이 국제미술계의 스타가 되기는 쉽지 않다.
이우환은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했다. 따라서 그는 이건희 회장의 고등학교 선배다. 그리고 그는 (서울대 미대를 중퇴했지만) 홍라희 삼성미술관장의 대학 선배이기도 하다. 물론 홍 관장은 서울대 응미과를 졸업했고, 이우환은 동양화과를 다녔다. 1984년 《중앙일보》 창간 20주년을 맞이하여 건축된 《중앙일보》 신사옥에 중앙갤러리가 개관했다. 당시 신사옥에 공공작품을 설치할 때 이우환이 자문역할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우환은 그 이후에도 삼성미술관의 자문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단편적인 사례로 미루어 삼성은 이우환에게 후원자가 돼줬으며 이우환은 삼성에 자문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삼성과 마찬가지로 삼성미술관과 이우환은 일류를 지향한다.
2001년 이우환은 호암상을 수상하고, 2003년 호암갤러리와 로댕갤러리에서 대대적인 개인전을 개최한다. 지난 2011년 2월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 현직에 복귀한 후 2012년 VIP 달력 작가로 이우환을 선택한다. 그리고 서두에서 인용했던 알프레드 파크망이 주목했던 두 개의 이우환 회고전(파리 주드폼과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미술관)은 삼성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파리 주드폼은 1990년 중반부터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삼성의 후원을 받아 1997년 주드폼에서 이우환의 개인전을 기획한다. 삼성은 2010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 ‘삼성아시아미술큐레이터’를 설립한다. 첫 큐레이터인 알렉산드라 먼로는 미주 삼성의 후원을 받아 2011년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이우환의 개인전을 기획한다.
야심 찬 프로젝트인 일명 <베르사유 현대미술전>은 세계미술계의 절대권력을 꿈꾼다. 이를테면 <베르사유 현대미술전>은 동시대미술의 대표 주자가 되는 ‘티켓’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세계미술계의 절대권력을 향한 꿈을 이루는 데 재정적 문제라는 현실을 비켜갈 수는 없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에 의하면 재정위기로 정부 지원이 줄어든 파리의 박물관은 후원금 유치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에 아해(세모그룹 유병언 전 회장)는 2012년 루브르 박물관에 110만 유로(약 15억3000만 원), 베르사유 궁전에 140만유로(약 19억4600만 원)를 후원금으로 기부하고, 그 대가로 루브르 박물관과 베르사유궁 미술관에서 아해의 사진전이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혹자는 “프랑스 문화예술의 자존심이 자본의 논리에 영락없이 팔려나가고 있다”고 비난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자본을 위해 프랑스 문화예술로 장사를 하고 있다.
베르사유궁에서 열린 <이우환 베르사유전> 개막 기자회견에서 카트린 페가르 베르사유 박물관장은 “이우환의 작품은 우리를 조용하고 매혹적인 그의 시 속으로 이끈다”고 평한다. 하지만 현지 언론 기자들은 이우환 옆에 앉은 카트린 관장에게 베르사유궁에서 개최된 <아해 사진전>에 대해 질문했다. 카트린 왈, “‘아해 전시’는 돈 받고 대관해주는 공간 ‘오랑주리’에서 열린 이벤트였을 뿐이다. 이우환 전시는 베르사유궁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매우 권위 있는 전시”라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아해 사진에 관한 카트린 관장의 인터뷰는 그와 전혀 다르다. “그(아해)의 작품은 웅장하면서도 겸손하다. 한 사람이 세상, 자연, 생명을 시적으로 바라보는 점이 이례적이다”라고 평했다.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이우환의 벅찬 감회가 길지 못했을 것 같아 아쉽다. ●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팔라조 팔룸보 포사티에 설치된 <Resonance>
위 이미지. 2008년 9월 10일부터 10월 25일까지 뉴욕 페이스갤러리에서 열린 이우환 개인전 전시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