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21세기의 지정학적 노마드 이우환

김미경 한국문화예술연구소(KARI) 소장, 강남대 교수

이우환은 스스로를 노마드(nomad) 혹은 중간자로 정의하는 것 같다.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그가 우리 미술과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을까? 또한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지배했던 일본이라는 유무형의 환경은 이우환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세계의 시각은? 이러한 많은 질문은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 필자의 글을 통해 이우환과 우리, 그리고 일본,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의 물꼬를 트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지금 우리는 세계적인 거장이자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예술가 이우환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큰 예술로 배태되어 미학적 토론의 대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토양은 근본적으로 일본과 유럽의 문화였다. 그렇다면 과연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 노마드(nomad)면서 중간자(中間者)로서의 이우환에게 한국은 어떤 곳인가? 다시 말해서 한국 문화예술은 이우환의 사상 및 예술과 정작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국의 예술가들과 이우환의 실체적인 관계는 어떠한가? 아울러 이우환을 바라보는 일본 내부의 비평적 시각과 일본이 세계에 선보이는 이우환은 상당한 간극이 있는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서구에 거의 알려져 있지도 않고, 일본이나 한국의 많은 사람에게도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 그 대화를 위해서는 먼저 일본과 한국의 현대미술계에서 이우환을 동시에 살펴 볼 수 있어야 한다. 세계적인 거장의 사소한 주변 이야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못했던 그 대목은 먼저 한국에서 논의되어 세계가 인식하도록 해야 하며, 그것은 세계적인 한국인 예술가에 대해 자부하기 전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1956년 여름, 서울대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갓 입학한 이우환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머니가 손에 들려준 약을 갖고 작은아버지의 병문안을 위해 감행했던 대학 1년생의 일본 밀항은 60여 년 전의 은밀한 사건이었고, 현재의 이우환을 당시에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작은아버지의 권유로 일본에 눌러앉기로 결심한 그는 도쿄의 다쿠쇼쿠(拓殖) 대학에서 일본어를 배운 뒤 니혼(日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일본에서 문학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끝없이 글을 쓰던 그가 자신의 열린 사상으로 젊은 일본 작가와 처음 교감했던 글은 1969년 6월 《산사이(三彩)》에 실린    <존재와 무를 넘어서-세키네 노부오론(存在と無を越えて-關根伸夫論)>이었다. 무명의 작가이자 비평가가 떠오르는 신예 작가에 대해 쓴 글은 성공적이었고, 그는 세키네와 주변의 작가들에게 사상적 키워드를 제공하며 1971년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한 <관계항>으로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훗날 국민미술 ‘모노하’(ものほ)로 불리게 된 일본의 중요한 예술 흐름에서 재일 한국인 이우환은 사실상 결정적인 존재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 2005년 일본 《비주츠테초(美術手帖)》의 ‘일본근현대미술사 100년’ 특집에서 일본 대표 미술가로 선정된 일,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과 2010년 일본 나오시마의 이우환미술관 건립, 그리고 2011년 구겐하임미술관 개인전과 2014년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전시를 관통하는 이력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우환의 사상과 예술의 특성이지만 일본의 국력과 다각도의 모노하 담론도 만만치 않은 뒷받침이다.

‘근대초극’ 논의의 중요성과 일본에서의 이우환

한국 문화예술계에서는 서구 근대나 컨템퍼러리 개념이 혼용되고 있을뿐더러 그것들을 우리에게 대입하는 이상으로 ‘근대초극(近代超克, The modern)’ 논의가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필자가 《모노하의 길에서 만난 이우환》(2006)에서 상세히 다루었듯이 일본 지성계에서 ‘근대초극’ 논의는 매우 심도있게 전개되었으며 이우환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서구 근대문명과 모더니즘의 역사를 비판하며 뛰어넘자는 일본의 근대초극은 이우환의 글 <세계와 구조-대상의 와해>(1969.6)나 <컨셉션과 대상의 은폐> (1969.8), <데카르트와 서양의 숙명>(1969.9)에서도 잘 피력되어 있다. 그러나 이우환의 근대초극 관점의 보다 큰 강점은 단순히 서양을 이기는 동양 찬미가 아닌 ‘중간자’로서 서양과 동양의 경계도,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적 경계도 없는 통섭적 입장으로 열려있는 태도이다. 그것은 모노하 작가들을 그의 주변으로 모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 다마(多摩) 미술대학의 비쿄토(美共鬪)가 이우환을 맹공격한 이래 그 공격의 주동이었던 히코사카 나오요시(彦坂尚嘉)는 물론 미네무라 도시아키(峯村敏明)나 지바 시게오 (千葉成夫)로 이어지는 일본의 비평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우환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신비주의적 자연주의 파시스트’(히코사카)나 ‘창조를 부정하는 자’(지바), ‘붓을 빼앗기고 추방된 자들이 세운 왕국 모노하의 이우환’(미네무라) 같은 일본의 비평적 관점은 이우환 예술의 성격을 상당히 오해하거나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노하가 일본의 국민미술로 추앙받기 위해서는 이우환이 껄끄러운 ‘타자’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세계적인 모노하를 말하기 위해 이우환이 일본의 전면에 내세워지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의 그의 말은 그 점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한국에서 커서 일본에서 서려고 하니 일본 쪽은 나더러 한국적이라며 침입자 취급을 하려들고 시간이 흐르니 한국에서는 일본 바람을 탄 도망자로 몰려는 느낌도 있었다. 그래서 더 멀리 설 곳을 찾아 유럽 각지를 삼십여 년 헤맸더니 그쪽에서는 또 동양적이니 이방인이니 하며 칭찬으로 점잖게 제외시키려 들지 않는가. 하지만 그래도 낯선 곳을 쫓아다녀야 하고 생소한 작가와 만나고 함께 전람회를 거듭하는 가운데 열린 자기를 기르는 수 밖에 따로 살 곳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우환 《여백의 예술》(2002)에서

한국의 실험미술과 이우환의 실체적 관계

이우환은 평면회화나 입체설치에서 모두 자신의 미학을 관통시킨다. 1960년대 초엽에 이미 시도된 점과 선의 회화들은 1970년대에 특유의 조형과 미학으로 진화되었고,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입체설치는 모노하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애초에 이우환의 회화는 모노하라는 이름 아래에서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 모노하는 평면회화의 문제가 아닌 시공간의 물질 문제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1969년 7월 《공간》을 통해 ‘일본현대미술의 동향’을 처음 국내에 소개한 이우환의 글에는 ‘모노하’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다카마쓰 지로(高松次朗)의 광목 천과 세키네 노부오나 나리타 가즈히코    (成田克彦), 요시다 가쓰로(吉田克郞)의 돌로 눌러 놓은 종이 외에 이다 쇼지(飯田昭二)의 반으로 자른 통나무, 아오야마 고유(靑山光佑)의 인간형체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 이후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과 1972년 이우환의 명동화랑 전시, 그리고 이우환이 커미셔너였던 1973년 파리비엔날레 무렵까지 일본 모노하를 둘러싼 새로운 설치 형태의 조형은 한국의 젊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모노하’를 특정 카테고리화하지 않던 이우환이 그 용어를 한국에서 사용하지 않았고, 이우환 하면 ‘모노하’를 떠올렸던 국내 비평가들에게 이우환의 회화와 입체는 모두 ‘모노하’라는 이름으로 묶어졌다. 게다가 엉뚱하게도 ‘모노하’는 ‘모노크롬’과 혼동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모노하’는 결코 회화적 개념이 아니며 ‘모노크롬(Monochrome)’과는 더더욱 상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학이 아닌 우정 관계 :이우환의 회화와 한국의 모노톤* 예술

이우환과 몇몇 한국의 실험미술 작가는 시공간에서 물체들이 발휘하는 물질성의 놀라운 생생함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예술의 태도를 공유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이우환과 한국의 모노톤 예술을 주도한 작가들 간에 맺어진 관계는 사실상 미학으로 연결된 것이 아닌, 서로의 필요에 의한 인간적인 우정 관계였다.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이우환의 회화와 한국 작가들의 관계는 1968년에 시작되었다. 1968년 7월 한국내 반일감정을 다소 극복하면서 본격적인 한일교류전으로 <한국현대회화전>이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렸을 때, 이우환이 재일 작가로서 출품한 <퐁경Ⅱ>가 박서보에게 ‘그리지 않은 그림’으로 깊은 인상을 준 사실은 1984년 가을         《화랑》에 실린 박서보의 <이우환과의 만남 68년 이후를 회상한다>에 기록되어 있다.
“…이우환과의 첫 만남은 1968년 8월… 그는 한국현대회화전에 300호가 넘는 대작 3점을 출품했는데 분무기로 전 화면에 형광도료를 뿜어 놓은 소위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그런 작품이었다… 그것이 성공적이건 아니건 간에 추상표현주의의 강렬한 열기에 심신이 만신창이로 화상을 입고 있던 서울화단의 시각과는 전혀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음을 곧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우환은 한국의 모노톤 예술가들과 같이 전시를 하며 어울려 다녔으면서도 자신의 회화의 미학적 입장을 그들과 관련시켜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그의 회화는 한국의 ‘모노톤 예술’과 거의 상관이 없는 예술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유의 출발 지점부터 전혀 다르다.
그런데 왜 최근의 국내외 전시에서까지 ‘단색화’라는 이름으로 모노톤 예술가들과 이우환이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한국의 모노톤 예술가들 그리고 몇몇 전시 기획자와 국내의 몇몇 비평가가 미학이 아닌 우정관계에서 비롯된 이우환의 태도를 이우환의 미학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영향이 미술계에 미치는 파장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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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모노톤 예술Monotone Art’
이라 부르게 된 미술 경향은 그것이 ‘단일한 색’을 의미하는 모노크롬Monochrome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며, 역시 ‘단일한 색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의미하는 ‘단색화Dansaekhwa’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1999년 박사논문 이후 ‘단색조 회화Monotone Painting라 부르기도 했지만, 하종현이나 최병소, 김장섭 등 중요 작가들의 작업이 단순히 회화의 문제가 아닌 시공간의 물질 문제로 이미 확장되어 있다는 점을 중시하게 되었다.

유목민 중간자 이우환

이우환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이라는 삼각형 속에서 그 어떤 꼭지점도 자신의 철저한 본거지가 되지 않는 일종의 유목민(nomad)이다. 그래서 어디서도 ‘타인(他人)’의 처지를 면치 못하는 이방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관계’ 속에서 이동하는 운동성을 갖고 있다. 2013년 파리의 카멜 므누(Kammel Mennour)에서 열린 전시에서 이우환은 자신의 회화와 입체설치를 놀랍게 조우시키는 ‘만남’의 관계를 또 한번 새롭게 시도했고 2014년 베르사유전시에서 서구 전통과 아시아의 미학을 조우시켰다.
필자는 올해 4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한국 현대미술 다시 읽기(Re-reading Korean Contemporary Art)’란 제목으로 한 영어 발제에서 한국의 실험미술과 모노톤 예술의 용어 문제 및 한국 현대미술에서의 두 가지 정치 사회학적 매핑을 피력했고, 대단히 진지한 반응과 공감을 나누었다. 앞으로 한국의 미술계에서도 이우환과 그의 예술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토론의 장에서 연구자들의 만남이 더욱 활성화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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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 므누에서 열린 이우환 개인전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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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풍경 Ⅱ> 1968, <한국현대회화전>, 도쿄국립근대미술관 (2003년 이우환이 처음으로 필자에게 공개한 컬러 슬라이드)

위 이미지. 이우환 <관계항> 180×230×50cm 1969, 파리 비엔날레(1971) 출품작

사진 : 한국문화예술연구소(KARI) 아카이브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