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굴곡을 안고 다시 태어난 전시 공간》

SPECIAL FEATURE

노재민 기자

헤레디움

《안젤름 키퍼: 가을 Herbst》 전시 전경 2023
아래 나선형 계단을 품은 공간

제공: 헤레디움

1922년 일제강점기, 신흥도시 대전의 발전과 더불어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이 건립됐다. 건물은 1945년 광복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본인 소유의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미군정 산하 신한공사에서 관리하다, 1949년 미군정의 철수와 함께 신한공사가 해체되고 대전체신국으로 사용됐다. 6·25전쟁 이후에도 대전전신전화국으로 기능하다가 1984년 민간에 매각되면서 철강회사와 건축자재판매장으로 쓰였다. 2001년 등록문화재 제도가 시행되면서 2004년 9월 국가등록문화재 제98호로 등록됐다. 황인규 CNCITY에너지 회장이 건물을 매입한 이후 문화재로서 보존 및 관리와 문화시설로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논의하게 됐고, 이상희 목원대 산학협력단 교수의 총괄 자문을 거쳐서 동양척식회사 대전지점의 아카이빙, 보존 및 활용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사업을 추진했다.

이상희 교수는 “문화재가 갖는 역사성 외에도 건축적 가치에 대한 보존 요소(건립 당시의 기술력이나 재료, 장식적인 디테일 등)를 최대한 보존하고자 했으며, 추정에 의한 복원은 지양했다”고 전했다. 건립 당시 건축 재료로 유행했던 타일을 사용했으며, 옛 서울역사나 일본 도쿄역사와 동일한 타일을 사용했다. 최대한 원형 타일을 유지하기 위해 파손 정도가 크지 않으면 되도록 현 상태를 유지했다. 2층의 목재 창호는 내부 공간이 사무실로 전용되면서 설치했던 석고보드 칸막이 안에 보존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보수 과정에서 칸막이 벽체 철거 시 확인되어 보존 처리했다. 이 교수는 “같은 시기에 건축된 동양척식회사 지점과 금융시설 특징을 고려했을 때 내부계단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나, 앞서 건물 사용자에 의해 철거된 상태”였다며, “추정에 의해 계단을 재현하기보다는 내부 오브제로 인식될 수 있도록 디자인적인 요소를 반영해 나선형 계단을 설치했다”고 덧붙였다.

근현대문화유산의 보존 개념은 단순히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형태와 기능을 동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활용을 권고하고 있다. 문화재 활용을 논할 때 대부분 문화시설로 전용을 고민하지만 예산이나 관리 인력의 전문성, 콘텐츠 활용에 한계를 지니고 있다. 공공시설로 관리돼 왔기에 예산이 부족한 상태에서 보수적인 시각으로 리노베이션한 다른 사례와는 달리, 헤레디움은 민간의 예산과 전문가의 연구로 근대건축물 개보수 활용의 참고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미 재건한 근대건축물도 다시 리노베이션을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된 바 있다.

현재 헤레디움은 안젤름 키퍼의 개인전 《Herbst 가을》을 진행 중이다. 함선재 관장은 헤레디움이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공간을 복원함으로써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고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문화예술공간으로 거듭나길 희망”한다며, “키퍼의 철학이 헤레디움과 잘 어우러진다 생각하여 첫 현대미술전으로 안젤름 키퍼의 작품을 소개하게 됐다”고 밝혔다.

당시 충남도청 본관 건물과 함께 일제강점기 대전의 대표적인 신식 건물로 손꼽힌다. 사진은 1922년 모습
가운데 신한공사 해산 이후에는 대전체신청으로 사용되었다. 체신은 ‘우체’와 ‘전신’의 합성어로, 우편사업과 전기통신사업을 아울러 지칭한다. 이후 대전체신청은 6·25전쟁의 발발로 출범 8개월 만에 폐지되었으며, 대신 그 업무가 부산체신청사로 옮긴 서울체신청으로 이관되면서 통합되었다. 사진은 1949년 모습
아래 민간에 매도되어 상업시설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 지점 건물은 각 상업시설의 편의에 따라 개조 및 변형됐다. 1층 내부에 2층이 설치되고, 전면의 출입구가 철거되는 등 건물의 상당 부분이 원형을 잃어갔다. 그럼에도 2004년 9월 근대건축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98호로 등록됐다. 사진은 1984년 모습

제공: 헤레디움

문화역서울 284

1층의 3등대합실 복원 전
아래 1층 3등대합실 복원 후
제공: 문화역서울284

지금의 문화역서울284는 1900년에 경인선 남대문역(정거장)으로 지어졌다. 1922년 기존 정거장 자리에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에서 역사 신축공사를 시작해 1925년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준공했다. 쓰카모토 야스시가 설계한 새 역사는 경성역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그 후 1947년 서울역으로 역명이 변경됐으며, 1981년 서울역사를 사적 제284호로 지정, 2004년 KTX 고속철도 개통 및 구 서울역사 폐쇄의 과정을 거쳤다. 2007년 8월 철도청이 공사로 전환되면서 국유문화재(사적 제284호) 소유권을 이전하고 같은 해 8월 30일 문화재청에서 문화체육관광부에 관리를 위임했다.

2008년 구 서울역사 리노베이션 건축설계경기에 ‘삼우설계+아틀리에17+ 금성건축’안이 당선되어 ‘원형복원과 문화공간화사업’이 실시되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2년 동안 경성역 원형복원 공사가 진행됐다. 경성역 건립 당시의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100년 전 역사 내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2011년 복합문화공간인 문화역서울284로 개관했다.

안창모 경기대 대학원 건축설계학과 교수에 따르면, 처음 복원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개조하여 세계적인 명소가 된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과 같은 공간을 만들자”는 의견이 미술계를 중심으로 대세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 교수는 “파리의 도시 구조에서 오래전에 기능을 상실한 폐역이었던 오르세역과는 달리, 오늘날까지 서울의 중앙역으로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역을 미술관으로 만든다는 것은 역사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었기에 “(구)서울역사는 문화역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과정에서도 언제든지 기차역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중앙홀을 비워 건축 자체를 경험케 하면서, 문화역 내부를 인위적으로 나눠 별도의 전시공간을 두지 않는 계획”이 채택됐다고 밝혔다.

공사 이후 2011년부터 지금까지 문화역서울284를 위탁받아 운영하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은 “원형 복원을 절대적인 원칙으로 하는 근대 이전의 목조 건축과 달리, 지난 세월의 우리 삶을 담을 뿐 아니라 오늘 이후의 삶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함을 원칙으로 두고 복원과 문화공간화 수리 사업이 진행되었다”고 전했다. 이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활용을 통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구현하는 근대건축 문화재라는 점을 감안하여 원형 복원 수준에 따라 복원등급을 상, 중, 하로 구분하였으며, 각 등급에 맞는 복원계획과 활용방안에 따라 수리공사를 진행했다”고도 덧붙였다. 복원등급의 원칙에 변경이 필요할 경우 자문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복원 공사 내용을 결정하고 있다.

노재민 기자

1 붉은 벽돌, 화강암 바닥, 인조석을 붙인 벽, 박달나무 바닥 등으로 이루어진 유럽식의 외관을 지녔다
2 기자가 문화역서울284의 운영상 애로사항을 문의하자, “문화재 건물이다 보니 보수, 복구 시에도 문화재청 문화재 심의위원회의 승인을 거쳐 진행되기
때문에 기간이 많이 소요되는 점”을 꼽았다

문화역서울284 외경 제공: 문화역서울284

SeMA 벙커

SeMA 벙커 역사갤러리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2005년 서울시가 여의도에 버스환승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현지 조사 중 지하비밀벙커를 발견했다. 국토교통부나 수도방위사령부 어느 곳에서도 이 벙커와 관련된 기록을 찾지 못했다. 다만 벙커의 위치가 여의도광장에서 열리던 국군의 날 행사 때 사열대 바로 아래라는 점, 1977년 이후 항공사진에서 벙커의 출입구가 확인된다는 점을 근거로 박정희 정부 시절 만들어진 방공호로 추정되고 있다.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단상이 그대로 지하로 가라앉도록 설계된 것이라는 추측이다. 발견 당시 경호원 대기실(180평·약 595m2)과 VIP실(20평·약 66m2)로 구성돼 있었으며, 지하 벙커의 내부 벽은 전부 콘크리트로 감싸져 있었다.

2006년 화장실, 매점, 휴게실 등 시민 편의시설로 바꿔 개방하는 계획을 수립했으나 철회됐다.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하고, 2015년 발견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여 시민에 공개하는 계획 수립에 따라 2017년까지 서울시 도시기반시설본부에서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했다. 주안점은 1.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2. 배수시설을 위한 공간벽 개념으로 벽체 시공을 하며, 3. 강제 배수시설을 설치하여 배수의 원활성을 돕는 방향으로 설정했다. 2016~2017년 서울시 안전총괄과와 도시기반시설본부의 주관 아래 리노베이션 공사를 마치고 2017년 10월 19일 서울시립미술관이 운영하는 SeMA 벙커로 개관하게 된다.

SeMA 벙커 전시실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과거 VIP실이었던 공간은 역사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다. 역사 갤러리는 SeMA 벙커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재해석하는 공간으로, 벙커의 역사를 떠올리거나 되짚어볼 수 있도록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는 한편, 벙커에서 이뤄지는 기획전 및 SeMA 벙커 아카이브 프로젝트 등을 선보이는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발견 당시 흑백 점박이 무늬 소파 여덟 개는 물에 잠겨 천이 삭았기에 그 틀만 유지하고 비슷한 무늬의 천으로 대체했으며, 화장실 변기와 바닥 타일은 그대로 두었다. 과거 경호원 대기실이었던 곳은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벽면은 하얗게 칠을 했지만, 타일 형태의 바닥은 그대로 두고 낮은 층고를 보완하기 위해 천장은 노출 형태로 마감했다. 전시 공간 확보를 위한 내벽을 덧대고 엘리베이터 및 항온항습 시설과 소방·냉난방시설 및 환기시설을 갖췄다. 인근 IFC몰 앞 보도에 출입구를 추가하고 보행 약자를 위한 승강기도 설치해 접근성을 높였다. 개관 당시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는데, “벙커의 터프함은 감춰지고 하얗고 얌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기대했던 벙커 공간이 가진 역사성이 가려진 것 같아 다소 아쉽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고, “전시장으로 바꾸지 말고 경호원 대기실이었던 공간의 성격 그대로를 보존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견해를 밝히는 사람도 있었다.

서울시립미술관 측은 “장르에 구분을 두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장소 특정적인 성격을 살려 미디어 기반의 전시를 주로 개최”해왔다며, “이 공간의 특징은 대안성에 있다”고 밝혔다. 그에 따라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예술형식을 벙커와 결합시키고 있다고도 했다. 이를테면 신진 작가 및 기획자들의 예술활동을 장려하는 ‘서울시립미술관 신진미술인 지원 프로그램’의 선정 전시 및 다양한 장르의 융합을 시도한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경우, 2016년 제9회에서 벙커라는 장소에 특화한 신작을 선보였고, 2023년 제12회에서는 서울의 여러 지하 장소를 주목, 벙커를 전시 장소로 활용하였다. 올해 있을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사전프로그램으로 비엔날레의 정체성, 지역 미술사와의 연결성, 미디어아트 연구에 관한 스크리닝을 계획하고 있으며, 벙커를 전시 장소로 사용할 것을 검토 중이다.

노재민 기자

1 서울시는 방치된 지하 공간을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여의도 지하 비밀벙커, 경희궁 방공호, 신설동 유령역 등 3개 공간을 2017년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문화비축기지

석유비축기지 폐쇄 후 주차장으로 사용되었던 문화비축기지 제공: 문화비축기지

마포석유비축기지에서 도심 속 생태 문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문화비축기지 외경 제공: 문화비축기지

석유를 100%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는 1973년 1차 석유파동 때 원유 공급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마포석유비축기지는 에너지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1976~1978년에 건설한 유류 저장시설이었다. 아파트 5층 높이인 5개의 유류저장탱크에는 당시 서울 시민이 한 달간 사용할 수 있는 분량의 석유를 보관했다. ‘G–1’이라 불렸던 이 1급 보안 시설은 건설 당시부터 일반인의 접근을 차단했었다. 2002 한일월드컵 개최를 위해 서울월드컵경기장을 건설하며, 인근 500m 이내에 위치한 석유비축기지가 위험시설로 분류되었다. 이에 탱크에 저장된 석유를 이전 수송하고 2000년 12월, 시설 폐쇄를 결정했다. 이후 10년 이상 방치되어 버스 주차장으로 사용되다가 2013년 도시재생사업 대상지로 선정되면서 서울시는 석유비축기지 활용 시민아이디어 공모전을 열었다. 시민 다수 의견에 따라 복합문화공간으로의 변경을 확정하고, 2014년 국제 현상 설계 공모 당선작 ‘땅으로부터 읽어 낸 시간’을 바탕으로 공간 조성에 돌입했다.

2015년 12월부터 2017년 8월까지 공사를 시행했다. 시작은 흙을 파내 땅속에 묻힌 탱크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건축 작업보다는 잠들어 있는 산업화 시기의 유물 발굴에 가까웠다. 대부분의 탱크가 암반 위에 있어 공사가 어려웠고, 더구나 설계 원칙은 발굴한 탱크를 최대한 보존하는 것이었다. 기존 건축물을 부수지 않고 재생‧재활용하는 작업은 더 섬세함이 요구돼 까다로웠고, 작업하던 시공사가 여럿 중도 포기를 선언했다. 그럼에도 공간을 설계한 허서구 건축가는 “원형을 존중해 최소한의 건축적 개입을 통해 공간의 용도를 바꾸고 공간의 잠재력이 드러나게 하는 데 주안”을 뒀다. 2017년 9월 1일 마침내 마포석유비축기지’가 ‘문화비축기지’가 되어 개원했다.

총 6개의 탱크가 있다. T1 파빌리온은 탱크를 해체하고 벽과 지붕을 유리로 만들어 탱크의 원형을 복원한 공간이다. 현재 전시, 공연, 워크숍 등을 진행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T2 공연장은 기존의 탱크를 모두 제거한 다음 외형을 새로 구축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열어 둔 공간. 상부는 야외무대, 하부는 공연장으로 조성되었다. T3 탱크원형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한 공간이다. 가파른 계단, 유량을 재던 계측기를 온전히 남겨 2020년 9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내부 출입이 제한되어 외부 관람만 가능하다. T4 복합문화공간은 탱크의 내부를 그대로 살린 공간이다. 공간의 울림과 어둠을 활용해서 공연, 전시, 체험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T5 이야기관은 1층의 영상미디어관과 2층의 전시관으로 구성된다. 1층에선 미디어 전시를 개최하고, 2층에서는 기획전시 및 문화비축기지의 아카이브 자료를 선보이고 있다. T6 커뮤니티센터는 T1과 T2를 해체할 때 나온 철판을 활용해서 2017년 새롭게 건축했다. T1의 철판은 내장재로, T2의 철판은 외관 재료로 쓰였다. 원형회의실, 창의랩, 강의실, 카페테리아 등 커뮤니티 활동을 위한 공간들로 이뤄져 있다. 1층은 카페, 2층은 옥상마루, 도서휴게공간인 에코라운지가 있다. T0 문화마당은 문화비축기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광장으로, 큰 규모의 축제, 시장, 문화행사가 펼쳐진다.

문화비축기지는 서울시가 폐산업 시설을 부수고 재개발하는 대신 생태공원과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활용한 도시 재생 사례이자 도시 재생에 시민이 참여한 국내 첫 사례지만, 위치나 교통 면에서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이 지적되어왔다. 이에 서울시는 기지 내 야외 공간인 문화마당을 활용해 여가 및 문화시설을 늘리고 접근성을 높일 계획이다.

노재민 기자

T1 파빌리온에서 열린 전시 《전기수: 시끄러운 조각》의 전경 2023 사진: 노재민

《오픈미디어아트페스티벌 2021-디지털아우라》(2021)의 일환으로 T4에서 진행된 윤제호의 작업. T4는 공간의 울림과 어둠을 활용하여 다양한 연출이 가능한 공간이다
사진: 박홍순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1971년도 공간사옥의 외관. 폭이 좁은 창이 돋보인다 제공: 김수근문화재단

구관 지하 1층 홀1 사진: 박홍순

구 공간사옥(현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은 한국의 현대건축에서 대표성을 띠는 교과서 같은 건물이다. 공간사옥을 설계한 김수근은 김중업과 함께 한국 건축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 대한민국 1세대 건축가다. 그는 1960년대부터 국가 사업을 도맡았다. 1970년대 초는 오일쇼크로 인해 건축 경기가 위축되었던 시기로, 당시 김수근은 기념비적인 건물 설계가 주를 이룬 자신의 1960년대 건축에 회의를 느끼면서 공간의 탐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1972년, 은행에 진 빚으로 경매에 넘어간 자신의 집터에 건축설계 사무소(공간 사옥)를 지었다.

공간사옥은 자신이 차린 건축사무소인 공간종합건축사무소 사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기에(다시 말해 클라이언트가 자신이었기에), 본인이 지향하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표출할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기에 이상적인 설계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고민 끝에 김수근은 인근 한옥들과의 조화를 위해 기왓장 느낌의 검은색 전돌을 주재료로 삼고 자연과의 상생을 고려해서 담쟁이덩굴을 심어 외벽을 장식했다. 내부는 대지의 경사를 살려 반 층씩 오르내리는 스킵 플로어(Skip Floor) 구조를 적용했고, 문 대신 계단으로 공간과 공간 사이를 연결해서 계단을 중심으로 공간을 구획했다. 이러한 공간은 한옥의 열린구조처럼 서로 막힘없이 연결되고 가변적이다. 이뿐 아니라 김수근의 건축적 이상인 ‘궁극 공간(Ultimate Space)’1이 반영되어 휴먼 스케일을 기준으로 공간이 좁고 천장이 낮게 설계되었다.

공간사옥은 1972년 준공된 구관과 1977년 증축된 신관으로 구성된다. 김수근이 1972년에 구관을 완공한 다음, 공간건축사사무소의 규모가 점차 커지고 직원이 늘면서 김수근의 제자이자 공간의 2대 소장이었던 장세양이 건물을 증축했다. 1977년 사옥이 증축되면서 공간사옥 소극장(공간사랑)2이 오픈했고 공간화랑이 확장됐다. 구 공간사옥은 건축사무소라는 목적 외에도 소극장, 갤러리, 모임장소 등으로 활용됐을 뿐만 아니라 한국 최초의 종합예술지 『공간』을 창간하고 발행한 장소다. 장세양은 신사옥이 비원(창덕궁 후원)에서 바라보는 스승 김수근의 건물을 가릴 수 없다는 이유로 외관을 통유리로 계획하고 공간 철학은 그대로 구현하되, 두 건축을 연결하는 브리지를 형성했다.

1 김수근에게 ‘궁극 공간’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쳐 간 가장 편안한 ‘모태 공간’, 즉 ‘자궁 공간’이었다. 따라서 어머니의 자궁처럼 ‘사람을 감싸 안는 건축’을 추구했다
2 전위극, 무용, 연희 등 각종 문화 활동의 장소로 개방하였다. 언제나 열려있는 사랑방이었으며 1970~80년대 가장 실험적인 공연 예술가들이 거쳐 간 역사적인 장소이다. 김덕수의 사물놀이와 공옥진의 병신춤이 탄생한 장소이기도 하다

2012년 공간종합건축사무소는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하고 2013년 부도처리되었다. 공간사옥이 언론을 통해 부동산 매물로 나온 시기는 2013년 가을. 등록문화재는 완공된 후 50년이 지난 후에야 심사가 가능하므로 1970년대 지어진 공간사옥은 당시 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문화재법 34조에 의거, 건설・제작・형성된 후 50년 이상이 지나지 아니한 것이라도 긴급한 보호 조치가 필요한 경우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할 수 있다. 김수근문화재단은 빠르게 공간사옥을 등록문화재3로 지정해달라고 신청해 등재시켰고, 이 소식은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허물 수 없는 건축은 부동산 가치가 현저히 떨어지기에 당시에 여러 사람이 공간사옥에 관심을 갖고 있었음에도 경매에서 유찰되었다. 이 소식을 기사로 접한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이 2013년 11월 공간사옥을 150억 원에 구매했다.

공간사옥은 9개월의 리노베이션 과정을 거쳐 2014년 9월 1일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로 개관했다. 아라리오뮤지엄에서 내세운 리노베이션의 기조는 ‘원형의 훼손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찢어진 벽지까지 그대로 놔뒀으나, 공간의 용도가 미술관으로 바뀌면서 운영상 필요한 보강 작업을 했다. 이를테면 레일과 조명을 설치하고, 안전을 위해 계단에 없던 난간을 제작했으며, 전시마다 유동적으로 몇몇 입구와 출구를 제한하고 있다. 기존에 사용하던 화장실이나 싱크대 위, 창고 등은 소장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구 공간사랑은 기획전이 열리는 언더그라운드 인 스페이스로 변모했다.

구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소장품 전시의 경우 주요 작품들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몇몇 작품을 교체하고 있다. 건물의 천고가 낮고, 형태와 크기가 제각각인 공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항온항습이 어려워 작품 선택에 제한이 많다. 건물의 입구, 통로, 창문4이 좁아 대형작품을 전시할 경우 창문을 뜯어서 입고해야 하는데, 나무로 되어 있는 창틀을 훼손할 염려가 있어 가능한 한 대형 작품으로의 교체를 최소화하고, 크기가 작은 작품 위주로 소장품이 교체되고 있다. 송예진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부디렉터는 “전시 공간을 의도하고 만든 건물이 아니다 보니 이런저런 애로 사항이 발생하지만 공간이 주는 힘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2019년 아라리오뮤지엄은 문화재청에 누수로 인한 외벽 보수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진행 절차에 대해 문의했다. 이에 문화재청은 종로구청과 연계하여 2020년 조사팀을 파견하여 누수 발생 장소와 원인 조사에 들어갔다. 이어서 2021년 누수 보수 공사를 위한 설계 예산 신청, 2023년 조경, 건축, 한옥 등 각 분야 전문가의 자문 회의를 통한 누수 공사 범위와 방식 설계 및 공사비를 산정하고, 예산을 확정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종로구청에서는 2024년 약 6개월에 걸쳐 ‘서울 구 공간사옥 누수 보수공사’를 진행할 예정이며, 현재 시공사 선정 절차를 밟고 있다. 공사 일정은 시공사 선정 후에 확정된다.

이번 누수 보수 공사에서 균열이 생긴 외벽 벽돌들은 전문가들의 검증을 받아 원형과 가장 흡사한 새 벽돌로 교체된다. ‘서울 구 공간사옥 누수 보수공사’와 연계해서 4월 말에 소장품 전시 《테세우스의 배(The Ship of Theseus)》(가칭)가 열린다. ‘보존’에 초점을 맞추어 문화유산 보존의 의미와 목적, 당위성 등을 다양한 관점에서 검토할 계획이다.

노재민 기자

3 등록문화재로 등재되면 건물의 외관은 변형할 수 없으며, 내부 공사만 진행할 수 있다
4 폭이 4~5cm 정도에 해당하는 창문도 있다

1971년도 공간사옥의 모습. 신관 지상 3층에 위치한 공간으로, 설계실로 사용됐었다 제공: 김수근문화재단

구 공간화랑이었던 공간. 《꿈이여 환상이여 도전이여》 전시 전경 2023 제공: 아라리오뮤지엄
아래 구 공간사랑이었던 공간. 이 공간에서 기획전이 열린다
사진: 박홍순

보안여관&오초량

왼쪽 건물이 보안1942, 오른쪽 건물이 구 보안여관이다
아래 구 보안여관의 벽지는 남아있는 곳이 없고 벽은 군데군데 뜯긴 상태 그대로다
제공: 보안1942(통의동보안여관)

보안여관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공간을 만들려고 공사를 시작할 무렵, 최성우 대표는 천장에서 ‘소화17년(1942)’이라는 상량문 기록을 발견하고 공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새 건물 설계를 하는 시기에 비가 와서 누수되는 부분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보안여관이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목조 건물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공사계획을 수정해서 보안여관의 원래 모습을 가능한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해체작업을 시작했다. 원형을 해치지 않기 위해 화장실, 정수기, 냉난방시설을 비롯한 편의시설을 일절 설치하지 않았다. 일본과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기법이 섞인 그 시대의 특징적인 구조물들은 지금도 내외부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일본식 천장 ‘덴조’를 철거한 뒤 나온 낡은 서까래와 어지럽게 얽히고설킨 전선들, 녹이 슨 옛날식 화장실 타일, 낮은 천장과 좁은 복도, 신문지로 바른 벽에 남아 있는 못 자국 등. 건물은 벽 사이로 군데군데 골조를 드러내고 있다.

2017년 구 보안여관 옆에 신축건물 보안1942가 문을 열었다. 보안1942는 민현식 건축가가 설계를 맡았다. 전시장, 카페, 책방, 전시장, 게스트하우스까지 모두 갖춘 공간으로, 공사 중 땅을 파자마자 조선시대 집터 4필지가 나와 문화재 조사를 했다. 발굴된 집터들은 유리 바닥을 통해 그대로 볼 수 있게 했다. 그는 구 보안여관에 의도적으로 손을 대지 않는 대신, 보안1942는 끊임없이 가꾼다. 두 건물은 2층에서 브리지로 연결돼,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갈 수 있다.

최 대표는 보안여관을 찾는 작가들이 화이트 월인 신관에 비해 구관을 부담스러워한다고 밝혔다. 구관은 공간이 방으로 나뉘어 있는 탓에 면적에 비해 전시 가용 면적은 굉장히 넓은 공간인 것이다. 결국 같은 방 크기의 네모난 공간에 비해 전시 면적이 거의 7~8배 넓다. 그뿐인가 8월에는 비가 새고 12월, 1월, 2월에는 난방이 안 되는 탓에 워낙 추워서 1년 중 4개월가량 전시를 운영하지 않는다.

그는 내부적인 고민을 밝혔다. “이제 개관한 지 17년이 되었어요. 장소 특정적이라는 것도 17년의 세월이 지나면 프레임이 되잖아요. 보안여관이 만들어진 2007년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비영리 전시공간인 문화예술공간이 많지 않았고, 그게 필요했어요. 만약 지금 저한테 세 필지가 주어진다면 이렇게 짓지 않았을 거예요.” 이어서 공간을 바꿀 때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건물을 짓기는 했지만 한 번 재생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건물은 살아있는 유기체잖아요. 저는 보안여관을 식물에 비유해요. 스스로 못 걸어 다니니까 동물은 아니고요. 여기에 딱 붙어 있는 생태계인데 그 생태계가 계속 자라야 하는 거죠.” 그는 새로운 고민을 시작할 때라며 외부에 아직 공개하지 않은 프로젝트를 설명했다.

“보안여관에 지하가 있어요. 원래는 지하 통로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트스페이스 1, 아트스페이스 2, 아트스페이스 3 세 공간을 한 동선으로 연결하려고 했어요. 예산과 일정 때문에 못 했지만요. 운영적인 측면에서도 전시의 효율성이 높아질 거예요. 물론 세 공간이 따로따로 전시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무조건 같은 시기에 하잖아요. 지금은 공간의 흐름이 끊어져요. 물론 끊어지는 것도 전시의 시노그라피상 강약 중강약이 될 수는 있지만 공간이 단절돼요. 그런 면에서 세 공간을 같이 연결해서 하나의 신을 만들고 싶은 거죠.”

모토는 모든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 대표는 일부러 처음부터 간판을 만들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제는 다들 눈치채서 많이 작동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간판이 없잖아요. 옛날에는 유모차도 밀고 들어오고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잡고 들어오고, 장 보고 들어오는 사람이 너무 많았거든요.” 현대 미술 공간들이 패배감을 준다고 느낀 적이 더러 있던 탓에 그런 광경을 보면 기분이 너무 좋았다고 술회했다. 그에 반해 당시 작가들은 “전시인 줄 모르고 마구 들어오는 것이 불편하다”며, 아트스페이스 간판을 달아달라고 항의했다는 후문이다.

최 대표는 지난 17년간 문화예술공간을 운영하면서 약 55만 명의 관람객이 왔고 트래픽(정보 교류)은 많이 일어난 반면, 막상 보안여관에서 원하는 핵심 가치와의 접점은 낮은 수준으로 일어났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보안 손님’ 제도다. 누가 이 공간을 활용하고 왔다 갔는지 좀 더 가까이 만나고 싶은 마음에 다수의 불특정인이 언제나 들어오는 공간에서 핵심 가치에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는 확률을 높인 것이다.

블루 플래닛 – 바다》 전시 전경 2022 사진: 유용진 제공: 보안1942(통의동보안여관)

오초량

2023년 최성우 대표는 오초량을 개관했다. 오초량은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49호인 부산 초량동 소재의 목조가옥을 리노베이션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예약제다. 하루에 두 타임만 개관하고 한 타임에 12명씩만 받는 폐쇄적인 공간이다. 입장하면 바구니 안에 차와 다식을 주고 있다. 입장료는 2만7000원. 보안여관과는 달리 예약하는 과정이 선행되기에 감상이나 관람에 뜻이 없는 불특정 다수를 어느 정도 걸러내는 효과가 있다.

숙박업소였던 보안여관과는 달리, 오초량은 개인이 살던 집이었다. 여관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인 반면, 집은 거주자와 안면을 트지 않은 사람이 입장하기는 힘들다. 이러한 특성을 살려 초대받은(혹은 예약을 완료한) 사람만 오초량에 갈 수 있도록 구상되었다.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는 콘셉트로 우리가초대받아서 어떤 집에 가면 책도 보고 그 사람의 컬렉션도 보고 그 사람이 내주는 차도 마시는 것에서 착안했다. 최 대표는 그 공간의 특성 혹은 원래의 콘텐츠를 가져왔다고 밝혔다. 보안여관의 역사적 맥락을 전략적으로 잘 활용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콘텐츠와 태도라고 강조하며. 역사의 흔적을 박제하는 것에만 기준을 두는 행위는 경계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보안여관의 개관전에서 작가 인터뷰가 잘리고 과거의 역사만 부각되어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공간의 기존 맥락보다는 지금 리노베이션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콘텐츠와 그 공간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노재민 기자

위,아래 개관전 《오! 분더카머》 전시 전경 2023
제공: 오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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