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에서 기억으로:

건물과 전시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관한 소고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SPECIAL FEATURE

최근 10년간 서울시 건축허가 건수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건물의 신축은 6,000건에서 3,000건으로 절반 가까이 줄고, 증·개축처럼 기존 건물에 건축 행위를 더하려는 신청허가는 2,000건 정도로 꾸준히 유지돼왔다. 신축은 줄어들고 상대적으로 리노베이션 비중이 늘어난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새 건물을 지을 땅이 없고, 원자재 가격과 시공자 임금이 상승했으며, 무엇보다 도시에 건물 자체가 포화 상태다. 이미 우리나라보다 먼저 도시화가 된 다른 국가들에선 기존 건물을 활용해 새로운 용도를 부여하는 일이 전혀 새롭지 않다. 한국도 앞으로 리노베이션이 대세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흐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관공서의 후적지(後適地)나 공장, 창고와 같은 산업 유산이 미술관이나 전시 장소로 바뀌는 경우다. 최근 구 충남도청사 자리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대전관 건립 준비를 하고 있고, 구 경북도청 자리에도 국립현대미술관 대구관 건립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다. 벌써 개관한 지 5년이 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도 담배 공장을 개조한 곳이다. 서울관 또한 완벽한 신축이라기보다 국군기무사령부 건물을 존치한 채 공간을 확장한 증·개축 프로젝트다. 그러고 보면 국립현대미술관 분관과 최근 논의되고 있는 지방 분관 중 온전하게 새로 지어진 곳은 과천관뿐이다.

2010년대 후반 이후 건축계에서는 도시재생 이슈와 함께 리노베이션 전시 공간들이 유수의 건축상을 휩쓸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부천아트벙커B39는 2018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대상을, 문화비축기지는 2018 공공건축상 최우수상을, 코스모40은 2019 인천시 건축상을, 윤동주기념관은 2021 한국건축가협회 작품상을 수상했다. 이런 공식적인 질적 평가 외에도, 양적인 측면에서 ‘전시’는 과거의 장소를 지금 시점으로 소환하는 마법처럼 사용된다. 서울의 대표적인 경공업 중심지였던 성수동 일대는 현재 전시가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지역 전체가 일시적인 전시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수동 일대 문화행사 소식을 알려주는 SNS채널에 의하면, 2023년 11월 한 주에 열린 팝업 전시만 50여 개였다. 실제로는 그 2배라는 것이 공공연한 의견이다.

일상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른바 ‘인증샷’의 시대에 ’전시하기/보기’는 가장 보편적인 문화 행위다. 여러 리노베이션 문화시설 중에서 전시 공간의 비중이 우세한 까닭도 이러한 가시성의 효과에 기대기 때문이다. 더불어 공연장이나 체육시설보다 기술적으로 설계비나 공사비가 저렴하고, 운영이 용이하다.

이렇게 옛 건물을 전시 공간으로 바꾸는 일이 오래 지속되고 있는 지금, 역사적인 공간을 전시장으로 만들었다는 현상 안에는 새로움보다 익숙함과 피로감이 담겨있다. 오히려 어떤 건물을 도서관이나 체육관처럼 다른 문화시설로 바꾸는 것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제대로 된 학예 조직 없이 그냥 공간만 생산해내는 것도 문제다. 그렇다면 이렇게 범람하는 전시 공간을 단순히 ‘과거와 현재의 새로운 만남’과 같은 상투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을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이러한 공간을 비평적으로 보기 위해 건물과 전시 사이에서 작동하는 다양한 힘의 의미들을 발굴하는 게 유의미할 것이다.

건물과 전시 사이 설치 형식들
할 포스터는 『컴플렉스』에서 건축(건물)과 미술(전시)이 서로에 기대는 현상 혹은 동력을 ‘컴플렉스’라고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수많은 대형 미술관들이 디아 비컨처럼 개조한 공장으로, 테이트 모던처럼 발전소를 변형한 형태로 존재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이처럼 설치 형식이 오늘날 미술관에서 여전히 만연하기 때문이다. 애초에는 낡은 스튜디오나 살롱, 화이트 큐브라는 예술적 생산과 전시의 표본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에서 산업 공간으로 눈을 돌렸지만, 지금은 쿤스트할레나 미술관으로 새롭게 정비된 산업 공간으로 깔끔하게 되돌아오면서 또 하나의 순환고리가 만들어진다.”1

그의 말대로 깔끔하게 정비된 과거의 공간은 화이트 큐브를 비롯한 기존 미술 제도 공간과 순환한다. 그가 설치 형식에 주목한 것처럼 옛 건물이 가진 이질적인 건축적 배경이 전시 자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사이에는 디스플레이 방식, 전시 디자인과 같은 전시 생산의 기술적인 차원들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체계를 살펴보지 않고 곧바로 공간의 물리적인 흔적과 전시의 상관관계를 답하긴 쉽지 않다. 다만 과거의 물리적 흔적들은 공간 브랜딩과 직결된 건물의 내외부를 관통하는 분위기를 결정한다. 겉으로는 기존 용도가 폐기된 오래된 건물이지만 내부가 일반적인 신축 미술관과 크게 다르지 않을 때, 건물 외관과 내부 공간은 단절된다. 그런 어긋남이 촉발하는 아이러니가 미술관에 특별함을 가져온다. 구 대법원 건물의 입면만 살리고 나머지를 새로 지은 서울시립미술관이나,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외관을 보존하고 내부를 흰색 벽으로 정돈한 헤레디움 같은 곳을 들 수 있다. 반대로 문화비축기지, 부천아트벙커B39, 보안여관처럼 옛 건물의 물성이 내부까지 투명하게 이어진 곳들이 있다. 이 경우 과거의 물리적 흔적이 구성하는 분위기가 종종 작품을 압도할 때가 있다. 전시가 그러한 힘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선 정교한 장치가 필요하지만 대체로 중립적인 상태로 두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문화역서울284처럼 문화재(구 서울역사 사적 284호)로 등록된 공간 안에서 이루어진 전시들은 건물과 즉각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같은 역사적인 건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등록문화재냐 아니면 문화역서울284처럼 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느냐와 같은 제도적 상황이 차이를 만든다. 문화역서울284는 벽에 못 하나 제대로 박을 수 없는 엄격한 통제 조건들이 있다. 오히려 이런 한계가 기획자나 전시 디자이너로 하여금 끊임없이 공간의 현 상태를 점검하고 실험하게끔 만든다. 그래서 문화역서울284에서 이루어지는 전시들은 대체로 전시 내용보다 전시 설치나 디자인과 같은 형식적 요소들이 더 주목받는다. 문화역서울284가 과거 공간의 흔적들과 대항하는 긴장된 전시 형식을 창안한다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은 그와 반대다. 이곳은 덕수궁 안에 있지만 지정문화재 건물은 아니기에 전시장 안에서의 여러 연출이 자유롭다. 그럼에도 공간과 전시가 단순히 중립적인 상태가 아니라 긴밀히 연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곳이 근대 건축물이라는 미술관의 건축 형식과 근대미술을 다루는 전시의 내용이 명확하게 부합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많은 리노베이션 공간들이 근현대미술을 포함한 다양한 주제들을 복합적으로 소화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예외적인 사례다.

흔적에서 기억으로
흥미로운 것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미술관 자체가 역사적인 장소이자 오래된 건물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건축물의 수명은 30년이 분기점이다. 30년 이후는 철거 혹은 리노베이션과 같은 재생의 기로에 선다. 신축으로 완공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최초 화이트 큐브인 과천관이 2년 후면 지어진 지 40년이 된다. 부산시립미술관은 이미 올해 리모델링에 착수했으며, 서울시립미술관 본관도 증·개축을 준비하고 있다. 과천관도 10년 전부터 재활성화를 위한 물리적 변형의 다양한 방식들을 연구하고 있다. 용도가 폐기된 관공서나 산업 유산만이 과거의 역사적인 건물이 아니라, 이제 미술관 자체가 자기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를 갱신해야 하는 시점이 온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전시는 사라지지만, 그것의 물리적 흔적은 어떤 식으로든 건물에 남게 된다. 실제 가벽을 친 곳, 레이블을 붙인 자리, 작품을 옮긴 궤적 등은 온전하게 지워지지 않는다. 독일 쾰른에 있는 콜룸바미술관은 이런 과거 전시의 흔적들을 애써 지우지 않고 드러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글의 출발이 된 이번 호 특집 담당 노재민 기자가 내게 던진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본다. “과거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있는 공간에서 작품을 마주할 때 전시의 맥락은 사그라들까 혹은 시너지를 발휘할까?” 이때 과거의 흔적은 원 건물의 물리적 흔적만을 일컫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에 자기 서사의 흔적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면, 전시 공간에서 이루어진 설치의 역사까지 이야기를 이어가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시가 만들어지고 철거되는 순환의 과정이 자연스레 흔적이 되고, 기관이 축적한 기억이 된다.

미술사학자 매리 앤 스타니제프스키는 『파워 오브 디스플레이』에서 MoMA(뉴욕 현대미술관)의 전시 설치 역사를 들여다보며 1990년대 이후부터 어느덧 디스플레이의 힘을 잊어버린 MoMA에 각성을 촉구한다. “정작 MoMA는 건망증이 만연한 기관이다. 그리고 이 책은 기억력을 소생시켜보려는 시도다”라고 집필 의도를 밝힌 그는 MoMA의 기관 아카이브를 통해 개관 시점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지난 전시의 흔적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1930년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MoMA의 전시 설치 실험기를 주목하며, “전시 디자인을 미학적인 요건뿐 아니라 이념적으로나 역사적, 경제적, 정치적인 요건에 의해 형성된 재현으로 다루는 것”2의 가치를 분석한다. 매리 앤 스타니제프스키 교수가 강조한 디스플레이의 힘은 지금 한국 미술계에서도 망각하고 있는 영역 중 하나다.

할 포스터가 『콤플렉스』에서 말한 “미술과 건축 간의 긴장된 상호주의”는 그저 건물 안에 작품을 두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전시의 맥락을 생성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건물과 전시가 마치 별개의 것인 양 제각기 작동하거나, 건물이 전시를 압도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를 리노베이션을 마친 전시 공간에서 종종 본다. 미술관이 다시 미술관으로 재생될 도래하는 신(新)리노베이션의 시대에는 건물과 전시 사이 새로운 유형의 상호주의를 실험해 봐야 하지 않을까. 다가오는 시간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 현재 만연한 전시 공간들을 전시 형식의 관점에서 탐색하는 일들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1 할 포스터 김정혜 옮김 『콤플렉스』 현실문화 2014 p.188
2 메리 앤 스타니제프스키 김상규 옮김 『파워 오브 디스플레이』디자인로커스 2007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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