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숙 Youngsook Park
사진으로 말하는 자, 박영숙
-경계를 가로지른-
김최은영 미학, 인천아트쇼 예술감독
Artist

©박영숙 에스테이트 제공:유족 및 아라리오갤러리
1941년 충남 천안 출생(2025년 작고). 1963년 숙명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86년 동 산업대학원 사진디자인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2년 ‘숙미회(淑美會)’를 창립하면서 활동을 시작했으며, 1975년 유엔 제정 ‘세계여성의 해’ 기념전 참여를 계기로 한국 페미니즘 사진의 선구적 기틀을 마련했다. 여성주의 동인 ‘또 하나의 문화’와 잡지 『이프(if)』 발행 등 여성문화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1999년부터 ‘미친년 프로젝트’ 연작을 통해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과 여성의 주체성을 집요하게 탐구했다. 한국여성사진가협회 창립(1998)과 트렁크갤러리(2006~2019) 운영을 통해 사진계의 물적 토대를 구축 했으며, 제32회 이중섭미술상(2021)을 수상했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2026, 2020), 아라리오뮤지엄 제주(2022), 한미사진미술관(2017),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2016), 고은사진미술관(2009), 성곡미술관(2005)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국립현대미술관(2024), 도쿄 A.R.T. 갤러리(2004), 광주비엔날레(2002) 등 국내외 주요 기획전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리움미술관, 한미사진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박영숙(朴英淑). 그 이름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야 한다. 수식어를 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작업이 제기한 질문 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친년’과 ‘마녀’—언어의 바깥에 방치된 존재들. 선택적 주의로 포착된 36인의 실존적 초상. 꽃의 등가화(等價化)를 해체하는 연출 사진. 이것들은 박영숙이 렌즈를 통해 무엇을 문제 삼았으며 무엇을 발명해 냈는지를 가리키는 단서가 아니다. 그 자체가 질문이다.
사진의 역사 안에서 박영숙의 위치는 단순하지 않다. 1960년대 여성이 모델로만 존재하던 시절에 카메라를 들었고, 다큐멘터리 중심주의가 지배하던 사진계에서 연출 사진을 선택했으며, 페미니즘이 낯설고 위험하게 여겨지던 시대에 여성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 모든 선택은 제도와 언어와 시각의 관습에 대한 집요한 저항이었다. 이 글은 그 저항이 각각의 작품 안에서 어떤 형식으로 발현되었는가를 읽는다.

왼쪽〈장면 43〉 젤라틴 실버 프린트 40.6×50.8cm 1967 ©박영숙 에스테이트 제공: 유족 및 아라리오갤러리
오른쪽 ‘36인의 포트레이트’ 중 〈김금지, 연극배우〉 31×45cm 1981 뮤지엄한미 소장 제공: 뮤지엄한미
응시의 전환: 1960~1970년대 흑백 사진
기록이기만 했을까. 박영숙의 초기 흑백 사진들을 보면 그렇게 단순히 말하기 어렵다. 화장기 없는 얼굴, 거리를 당당히 걷는 모습,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여성들. 당시 사진 속 여성들은 정숙한 아내이거나 인자한 어머니였다. 거리의 풍경 중 하나였고, 응시의 대상이었다. 박영숙의 사진 속 여성들은 배경이 아니라 중심이었다.
이미 그때, 여성을 응시의 대상이 아닌 응시의 주체로 세우려는 시선이 흘렀다. 그것은 촬영 방향의 문제이기 이전에 태도의 문제였다. 같은 피사체를 앞에 두고도 누가 찍느냐에 따라 사진은 전혀 다른 언어가 된다. 박영숙은 이 언어의 차이를 처음부터 몸으로 알고 있었다.
이 흑백 사진들은 선구적이었지만 온전히 읽히지 못했다. 사진은 찍히는 순간이 아니라 읽히는 순간에 완성된다— 박영숙의 초기작은 그 명제를 뒤늦게 증명하고 있다.

〈자궁의 노래_이제 크신 어머니 자고 깨니〉(스틸)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7분 30초 1994/2026
©박영숙 에스테이트 제공: 유족 및 아라리오갤러리
36_포트레이트와 관계항의 미학
포트레이트라는 작업은 사진가에게 독특한 긴장을 안긴다. 기록을 담보로 뷰파인더를 통해 타자의 얼굴을 담아내는 일은, 찍는 자의 시선과 찍히는 자의 존재 사이의 권력 역학을 피해갈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박영숙은 이 긴장을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한가운데에 자신을 세우고, 거기서 전혀 다른 방식의 초상을 발명했다.
1979년부터 시작해 1981년 공간사랑 갤러리에서 발표한 연작 ‘36인의 포트레이트’. 박영숙은 교수, 소설가, 화가, 연극 배우 등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40대 여성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들은 가장 자신다운 공간에 서서 정면으로 카메라를 응시한다. 누군가의 아내나 딸이 아닌 전문가로서의 자기 자신. 사진 속 얼굴에는 설명이 필요 없는 정체성이 있다. 이 작업에서 박영숙이 발명한 것은 인물과 공간을 분리 하지 않는 방법론이었다. 그는 이것을 관계항으로 읽었다. 박영숙은 그 사람들은 거기에 가지 않으면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하며, 그들이 서 있는 그곳에서 그들의 진짜 삶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공간은 배경이 아니다. 인물의 정체성이 실현되는 장소이며 그 실존과 분리될 수 없는 조건이다. 공간과 직업과 인물은 낱개의 개별체가 아닌 유기적 본체자(本體者)로 새로운 관계항을 성립시킨다.
빈 객석 앞에 선 인물, 타들어가는 담배를 든 손, 테이블 위의 팔꿈치와 빈 잔 하나. 이 작은 단서들을 통해 관람자는 관객이 된다. 롤랑 바르트가 사진을 이해하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연극을 통해서라고 말한 것은 사진이 시간성과 서사를 품는 방식에 대한 통찰이었다. 기록과 재현의 범주를 넘어, 실존으로부터 찾아낸 픽션의 합리적 창조. 한 컷이 서사를 품는다.

위〈미친년들 #1〉 C-프린트 150×120cm 1999
아래〈미친년들 #7〉 C-프린트 150×120cm 1999
오른쪽〈꽃이 그녀를 흔들다 #1〉 C-프린트 120×120cm 2005
©박영숙 에스테이트 제공: 유족 및 아라리오갤러리
〈자화상〉과 〈자궁의 노래〉: 몸을 돌려받는 일
1986년 숙명여대 산업대학원 졸업 이후 ‘또 하나의 문화(또문)’ 에 합류하면서 박영숙의 작업은 방향을 틀어 결정적인 전환을 맞는다. 1988년 《우리 봇물을 트자》 전시가 그 본격적 투신의 계기였다. 그 전환은 곧장 신체로 향했다. 몸은 오랫동안 타자의 언어로 규정되어 왔다. 에로티시즘의 도구이거나 어머니의 상징. 소유의 대상이거나 재현의 대상. 박영숙의 질문은 하나다. 그 몸은 누구의 것인가.
1995년 〈자화상〉에서 박영숙은 유방암으로 한쪽을 잘라낸 가슴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신화화된 여성의 몸을 있는 그대로 노출함으로써 바라봄의 방식 자체를 바꾼 것. 훼손된 몸이 아니라 살아낸 몸. 시선의 대상이 아닌 존재의 증거. 윤석남이 나무 조각과 전구로 그 옆에 불을 밝힌 것은 연대로서의 예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두 작가가 공유한 것은 협업이 아니었다. 여성의 몸을 돌려받는 일이었다.
1994년 〈자궁의 노래〉. 윤석남, 여성 목사 김영, 가수 한영애와 함께한 이 작업은 1988년 《우리 봇물을 트자》에서 시작된 연대가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보여준다. 권위적인 언어가 아닌 보편적이고 평등한 언어로 여성의 몸과 운동성을 담아내려 했다. 오랫동안 막혀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힘, 그 봇물의 지속이 이후 그의 작업 전체를 이루었다. 이 시기 작업들에서 박영숙은 페미니즘의 언어를 단독으로 발화하지 않았다. 언제나 함께, 여러 목소리로 말했다. 결과보다 과정, 개체보다 관계. 그 공동성 자체가 이미 작품의 일부였다.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 #1〉C-프린트 120×120cm 2002
‘미친년 프로젝트’: 언어를 뒤집는 일
1999년 박영숙은 ‘미친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공식적 출발점은 같은 해 열린 전시 《팥쥐들의 행진》이었다. 콩쥐 거부, 팥쥐 선택. 착하지 않고 자유롭고 주체적인 존재. 일하고 창작하는 여성들이 신화 뒤집기에 참여한 그 선언 속에 ‘미친년’이라는 언어를 선택할 개연성이 이미 잠복해 있었다.
착한 여자아이 콤플렉스(good girl complex)에 갇혀 자기 내면의 욕망을 들어주지 못하는 구조가 여자를 미치게 만든다. 어떤 이들은 ‘미친년’을 아름다울 미(美), 친할 친(親), 연꽃 연(蓮)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박영숙은 거부했다. 그 날것의 언어 자체가 페미니즘의 핵심을 찌르는 도박적 선택 이었기 때문이다. 멸시의 언어를 가져와 의미를 전도시키는 것.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존재를 주체로 다시 정의하는 것. ‘미친년’은 그 수행의 이름이었다.
연출 사진을 선택한 것은 미학적 판단 이전에 윤리적 결단이었다. 의왕 정신병원에서 다큐멘터리 제안을 받았을 때 그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내가 작업하겠다고 쟤들의 인권을 마음대로 대상화시켜? 그건 나 용서 못해.”2 ‘입김’ 멤버들이 협업자로 나섰다. “자아를 갖추지 못한 여성들을 너희들이 대신해 아파야 된다. 너희들이 미쳐야 된다.”3 시댁에 아기를 빼앗긴 뒤 베개를 끌어안는 여자, 치약 두 개를 쥐고 칫솔질하는 여자—정신병원에서 목격한 장면들이 협업자들의 몸을 통해 재현되었다. 모델들은 피사체가 아니라 작품의 공동 저자였다. 다큐 사진은 개인의 불행에 집중하게 만든다. 연출 사진을 택한 더 깊은 이유는 사연이 아니라 여성을 그렇게 만든 보이지 않는 사회 구조를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장면 속 모든 요소에 의미와 의도를 심을 수 있는 연출—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억압을 보이는 형식으로 전환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꽃이 그녀를 흔들다’ 연작이 그 방법론을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푸른 나뭇가지로 뒤덮인 방 한가운데 흰옷의 여성이 꽃향기를 맡고 있다. 창문은 닫혀 있고 방문도 없다. 숨이 막혀도 나갈 수 없는 구조. 압도적인 꽃은 가정에 대한 환상인 동시에 여성을 짓누르는 가정의 무게다. ‘꽃은 여성이다’라는 동서양 보편의 등가화—박영숙이 하고자 한 것은 그 전복이 아니라 해체였다. 꽃이 으스러지는 데까지. 통념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의 자리까지. 꽃은 수동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감정을 건드리는 능동적 존재다.
2001년 광주시립미술관 《오월 정신전》에서 ‘행방불명’을 주제로 박영숙의 작업을 초청했다. ‘미친년 프로젝트’에서 행방불명된 것은 무엇인가. 여성의 성(性)이었다. 남성 중심의 성적 관습 속에서 여성의 성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닌 채 대상화되어 왔다. 역사적 행방불명과 여성의 행방불명이 같은 자리에서 만났다. 연작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2002)은 이 연장선에 있다. 부엌, 침실, 화장실, 베란다. 고등어를 손질하다 넋을 놓는 여성, 화초에 물을 주다 말고 먼 곳을 응시하는 여성. 그 시선의 ‘정처 없음’은 심리적 방황이 아니다. 자신에게 할당된 공간과 역할의 경계 너머를 욕망하는 존재의 몸짓이다. 억압의 구조는 일상의 찰나 속에 새겨져 있다.
‘미친년 프로젝트’는 또 하나의 전선을 열었다. 화폐 속 인물들에 여성이 단 한 명도 없다는 발견이 ‘화폐 개혁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미친년이 진보다.”4 그 진보의 화폐 단위는 ‘샘(泉)’으로 정해졌다. 물의 운동성, 여성성, 그 발원지로서의 샘. 박영숙은 화폐의 형식으로 균열을 냈다. 법정 통화를 대체하는 상상이 아니라, 통화의 언어 안에 새겨진 권력의 계보를 가시화하는 것.

〈마녀〉젤라틴 실버 프린트 26.5×217.2cm 1988
©박영숙 에스테이트 제공: 유족 및 아라리오갤러리
〈마녀의 귀환_그림자의 눈물〉: 역사를 소환하는 상상력
마녀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억압의 피해자였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했고 독립적이었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했다. 박영숙은 1988년 《우리 봇물을 트자》에 〈마녀〉(1988) 를 출품하며 처음 이 영혼들을 불러냈고, 이후 작업에서도 마녀는 반복적으로 소환되었다. 중세 가톨릭 신부들이 기준에서 이탈한 여성에게 마녀 프레임을 씌워 화형시켰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박영숙은 그 영혼이라도 불러서 위로해주고 안아주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 충동이 마침내 버려진 땅 곶자왈에서 완성의 장소를 찾았다.
2017년부터 매달 보름씩 제주 곶자왈을 드나들며 완성한 사진 연작 ‘그림자의 눈물’(2019). 돌과 자갈, 수풀이 뒤엉켜 농사도 지을 수 없고 가축도 기를 수 없는 땅. 위험하고 쓸모 없다 여겨져 오랫동안 버려진 곶자왈. 그 버려진 공간이야말로 박영숙이 찾던 장소였다. 남성 중심의 사회가 만든 프레임에 희생당한 여성들의 혼이 배를 타고 표류하다 이 버려진 숲에 정착한다는 상상—그 상상이 사진이 되었다. 쓸모없다 여겨진 땅과 쓸모없다 여겨진 여성. 등가가 아니라 동일한 폭력의 소산이다.
‘미친년’이 현재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에 포박된 여성의 이야기였다면, ‘마녀’는 그 폭력의 역사적 뿌리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이었다. 현재에서 과거로, 개인에서 역사로. 박영숙의 사진 속 곶자왈은 그 혼들이 마침내 쉬는 공간이자 귀환의 장소로 재의미화된다. ‘미친년’에서 시작해 ‘마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여정—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의 계보를 사진으로 쓰는 일이었다. 낙인의 언어에서 화형의 역사로. 그 폭력은 단절된 적이 없다.
신났었어: 끝나지 않는 말
2025년 박영숙은 향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페미니즘 사진의 대모’라는 타이틀이 다시 소환되었다. 그러나 그 타이틀이 그를 박물관의 유물로 만드는 방식으로 소비되어서는 안 된다. 사진은 여전히 누가 찍고 누가 찍히는가의 문제를 안고 있다. 박영숙이 렌즈를 통해 싸웠던 그 시선은 형태를 바꿔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아카이브로만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조어(造語)되지 못한 것들, 분류의 경계 너머에 있는 존재들에 주목하는 일. 박영숙은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일을 했다. 한 방향으로 성실하게 가다 보면 무슨 일이든 극복된다—그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페미니스트로 사는 일이 외롭지 않고 신났다고 그는 말했다. 그 말이 그의 작업과 겹친다. 깊은 것이 밝게 빛날 수 있다. 그가 제기한 질문이 계속되는 한, 박영숙은 끝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