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o Sehgal》
리움미술관 3.3~6.28
사라지는 작품, 지워지는 이름,
선명하게 남는 작가의 역설
진휘연 한예종 교수
Exhibition
기록의 공유로서 사진과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에 리움미술관의《티노 세갈》은 사람을 통해 반복·재현되는 구조로 전시를 기록한다. 월간미술은 사라지지 않을 전시의 기록으로서 전시 리뷰와 그의 독특한 제작 방식과 감상 구조,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예술적 문제의식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작가와의 인터뷰 내용을 함께 담았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음으로써 예술의 조건을 되묻는 티노 세갈의 전시를 만나보자.

티노 세갈의 ‘구성된 상황’이 펼쳐지는 전시장 입구 사진: 김상태 제공: 리움미술관
작품에 대한 정보를 오직 목소리로만 전달하는 작가가 있다. 작품을 판매하면서도 문서를 비롯한 어떤 공인된 형태의 자료를 거부한다. 자신의 작업을 담은 사진과 영상이 온라인에 떠돌면 그 흔적을 찾아 지운다. 복제와 유통이 예술의 기본 조건이 된 시대에 티노 세갈은 오히려 그 보편적 소통 방식을 거슬러 관람객을 전시장으로 불러낸다. 그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경험이고, 대상이 아니라 상황이며, 소유가 아니라 만남이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반전이 생긴다. 흔적을 지우려 할수록 오히려 작가의 이름은 더 강한 아우라를 띠고 돌아오기 때문이다.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첫 한국 개인전은 작품에 대한 여러 신화 같은 이야기를 경험하게 하며 작가의 존재를 또렷이 각인시킨다.
세갈은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했지만, 그 이전부터 제롬 벨, 자비에르 르 루아 등 농-당스(non-danse) 계열의 안무가들과 작업하며 예술 감각을 다져왔다. 이들은 숙련된 테크닉, 연극적 수행, 아름다운 움직임이라는 무용의 오랜 관습을 비껴가며 개념적 안무의 지평을 열었다. 세갈의 첫 단독작 〈20세기를 위한 20분〉(2000)에서 그는 지난 세기의 주요 무용들을 자신의 몸으로 다시 춤추었다. 훗날 그가 이 작업에 대해 “내 몸이 곧 박물관이 되었다”고 말했듯, 그것은 춤의 역사를 저장하고 호출하는 살아있는 아카이브였다. 이후 그는 곧바로 위임된 퍼포먼스로 이동한다. 자신이 직접 무대에 서는 대신, 타인의 몸을 통해 작품이 작동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세갈은 자신의 작업을 퍼포먼스라 부르지 않는다. 대신 ‘구성된 상황(constructed situation)’이라 하고, 퍼포머는 ‘해석자(interpreter)’라 부른다. 이 용어는 그의 예술관을 정확히 드러낸다. 그에게 작품은 특정한 동작의 재현이 아니라 한 공간 안에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발생하는 관계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은 3차원 조형물이 아니라 시간의 축이 더해진 4차원의 구성이다. 중요한 것은 눈앞에 보이는 몸 그 자체라기보다 그 몸들이 어떤 상황을 만들고, 그 안에서 관람객과 어떤 합일을 형성하는가이다. 해석자라는 명명 또한 의미심장하다. 세갈의 작품에서 위임된 수행자들은 단순한 실행자가 아니라, 일정한 규칙 안에서 자기 기억과 감각, 재량을 개입시키는 존재들이다. 세갈이 자신의 작업을 알고리즘이나 게임에 비유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큰 규칙은 정해져 있지만, 플레이는 매번 달라지고 그들에게는 자유가 주어진다.
다만 그의 주장처럼 관람객이 작품을 통해서 매번 다른 경험을 얻게 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환경과 해석자에 따라 변수는 생기지만, 관람객의 체감이 매번 확실하게 구분되는지는 모호하다. 세갈이 말하는 ‘특별한 경험’은 종종 작품의 구조 안에 약속되어 있다기보다 우연과 장소성, 해석자의 밀도와 역량, 관람객의 위치와 심리상태가 교차하는 순간에 발생한다. 그 가능성은 흥미롭지만 언제나 자동으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성된 상황은 퍼포먼스의 맥락에 속하기보다는, 비물질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였던 개념미술의 후손이자 관람객의 경험과 상호성을 중시하는 관계미학적 실천에 더 가깝다. 세갈이 사진과 영상, 문서의 생산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떤 매체도 그 상황 전체를 온전히 옮길 수 없고, 기록되는 순간 작품은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또 다른 비판이 발생한다. 복제를 거부한다고 해서 권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미지와 정보의 희소성은 작가의 이름과 작품의 권위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세갈의 작업이 고가에 거래된다는 사실은 이 역설을 잘 보여준다. 물질을 넘어서려는 전략이 아이러니하게도 저자성과 상징 자본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티노 세갈의〈This is So Contemporary〉(2004)가 관람객을 맞이하는 리움미술관 입구
제공: 리움미술관
세갈을 세계적인 작가로 각인시킨 〈키스〉(2002)는 이번 리움 전시에서도 여전히 인상적이다. 두 명의 해석자는 미술관 안에서 서로를 천천히 애무하며, 거의 끊어지지 않는 곡선처럼 포옹과 입맞춤을 이어간다. 바닥에 눕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지만 둘 사이는 멀어지지 않는다. 관람객이 이 침묵의 장면을 지켜보다 보면 아주 가끔 “티노 세갈, 키스, 2002”라는 속삭임이 들린다. 제목이자 캡션이자 저자명이 단 한 문장으로 수행되는 순간이다.
이 작업은 살아있는 조각(living sculpture)이나 타블로 비방 (tableau vivant)의 전통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계보와도 미묘하게 어긋난다. 〈키스〉는 정지된 포즈를 제시하는 대신, 조각적 순간을 연속적 움직임으로 번역한다. 또한 사적인 애정 행위를 미술관이라는 공적 공간으로 옮겨오면서, 그것을 감정의 서사라기보다 안무이자 예술 형식으로 보이게 만든다. 키스는 로댕을 비롯해 인체를 다뤄온 예술가의 오랜 모티프로, 세갈은 그것을 가장 시적이고도 제도적인 장면으로 다시 구성한다. 그래서 미술의 오래된 관음증이 되살아나다가도 다시 미끄러진다. 눈앞의 장면은 친밀하지만 사적이지 않고, 에로틱하지만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다. 리움미술관이 이 작업을 로댕의 조각들과 함께 배치한 것은 탁월한 발상이다. 해부학적 정확성보다 순간의 균형과 운동감을 감각적으로 밀어붙인 로댕의 신체는 세갈의 살아있는 몸들과 묘한 연결을 이루며, 조각과 수행 사이에 숨어 있던 긴 연속선을 드러낸다.
〈This is So Contemporary〉(2004)는 세갈의 미학을 가장 노골적으로, 또 유쾌하게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에서 이 작품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많은 수의 해석자들이 관람객을 향해 춤추듯 몰려와 노래한다. “오, 정말 현대적이야, 현대적!” 개념처럼 변한 컨템포러리란 단어와 미술의 관계를 풍자하는 이 작품은 춤과 음악의 즉각적인 전염성을 통해 미술관을 순식간에 에너지의 장으로 바꿔놓는다. 이번 전시에서 이를 입구의 긴 통로에 설치한 결정은 매우 적절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미술관은 더 이상 정적인 수장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몸과 목소리가 점화되는 공간이 된다. 다만 이번에는 해석자의 숫자가 적어 작업 특유의 밀도와 압도감이 충분히 살아나지 못했다. 공간적 제약 때문이겠지만 군집이 주는 진동은 약했고, 작품은 관람객과의 관계 형성에 미치기 전에 멈추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티노 세갈이 큐레이팅한 리움미술관 소장품
사진: 김상태 제공: 리움미술관
이번 전시의 신작 〈무제〉(2026)는 미술관 로비에서 진행된다. 해석자들은 관람객들 사이에 섞여 있다가 천천히 다가와 손끝을 터치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거나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움직임은 조심스럽고, 특히 손을 주로 사용하는 동작들은 친밀하면서도 과하지 않다. 작가는 로비라는 장소의 성격에 맞게 두드러진 제스처를 자제하고, 해석자와 관람객이 거의 구분되지 않음으로써 특별한 상황을 만들고자 했다. 무엇보다 관람객이 로비에서 세상의 속도, 복잡한 환경으로부터 잠시 격리되기를 원했다. 해석자의 느린 터치는 관람객을 피안으로 데려가 줄 수 있을 듯 보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세갈 작업의 난점도 드러낸다. 나는 그들이 말을 걸어오기를 한참 기다렸지만, 끝내 아무도 내게 오지 않았다. 세갈이 말하는 특별한 경험은 작품의 구조만으로 자동 보장되지 않으며, 현장의 동선, 사람의 분포, 그리고 운에 의존함을 다시 한번 알려주었다.
전시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한 〈This Entry〉(2003) 역시 양가성을 보여준다. 공을 다루는 달인, 무용수, 바이올린 연주자, 사이클 묘기 선수가 각자의 도구를 마치 자기 몸의 연장처럼 다루며 관람객들 사이를 오간다. 이름을 묻고, 소리를 내고, 노래하고, 연주하고, 묘기를 선보이는 이들의 존재는 분명 시각적 쾌감을 준다. 살아있는 몸이 미술품의 스펙터클을 대신하는 순간도 있다. 개별 행위는 선명하지만 그들이 하나의 상황으로 응축되는 밀도는 조금 약하고, 상호성도 단순한 단계에 머물렀다. 세갈이 주장하는 관계의 정치학이 6주 간격으로 교체되어 전시될 〈This Joy〉(2020), 〈This Youiiyou〉(2023)에선 어떻게 달라질지 기대해 본다.
2층의 〈무언가 당신 코앞에 나타나게 놔두는 대신 춤추는 브루스와 댄 그리고 다른 것들〉(2000, 이하 〈Instead〉)은 세갈의 첫 위임된 퍼포먼스로 제목부터 세갈의 초기 문제의식을 응축한다. 한 명의 해석자가 바닥에 누운 채 아주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이 작업은, 브루스 나우만과 댄 그레이엄이 개척한 보디아트의 계보를 조용히 호출한다. 해석자는 기본적인 포지션을 반복하는데, 몸은 단순히 표현의 매체라기보다 개념을 실험하는 도구이며 가장 원초적인 미술의 조건으로 제시된다. 그 방을 채운, 조각가들의 인체를 다룬 입체 작품들 사이에서 이 느린 몸은 마치 미술사의 문장 사이로 삽입된 살아있는 각주처럼 보였다.
정원의 〈This You〉(2006)는 아름다웠다.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를 연상시키는 복고풍 차림의 해석자가 한국 유행가를 부른다. 그 순간 떠오른 감정을 목소리로 건네는 일종의 노래하는 인사에 가까웠다. 관람객들은 익숙한 음악에 친밀함을 느끼고 그의 다음 노래를 기대하게 된다. 이 장면을 위해 호암미술관에서 매화, 대나무 등을 옮겨 심은 리움미술관의 세심한 준비는, 해석자를 마치 한 폭의 회화 속에서 미세하게 움직이는 영상처럼 보이게 했을 뿐 아니라 관람객의 예술적인 경험을 끌어와 작업을 풍성하게 만드는 과정을 가시화한다.
세갈의 첫 한국 개인전에 맞춰 리움미술관은 전시 공간 자체를 하나의 정교한 조건으로 조직했다. 소장품의 위치를 조정하고 정원의 풍경까지 손본 이번 전시에서, 특히 〈This Entry〉와 〈키스〉가 놓인 공간은 인상적이었다. 중앙 홀과 채플을 연상시키는 작은 방들 사이에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의 구슬발(〈무제〉)이 가로질러 설치되었는데, 이는 아티스트 재단과의 판권 협의를 거쳐 한국에서 새로 제작된 것이다. 이 구슬발은 전시장에 매혹적인 감각을 부여하는 동시에 작품들 사이의 물리적·시각적 간섭을 절제하며, 세갈의 작업을 위한 밀도 높은 필드를 형성했다. 특히 안쪽을 완전히 가리지 않은 채 반쯤 열어두는 이 경계는 관람객을 은밀한 장면의 목격자로 위치시키며, 〈키스〉의 관음증적 긴장을 증폭시켰다. 동시에 지나치게 비어 보일 수 있는 공간의 규모를 조율함으로써 퍼포먼스의 집중도 역시 높였다. 이번 전시의 중요한 성취 중 하나였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세갈의 작업을 설명하는 부속물이 아니라, 그의 의도가 성립하고 확장되기 위한 적극적인 조건이자 작업을 미술사적이고 감각적인 층위로 확장시키는 공명판이 되었다.
세갈의 비물질적 작업이 ‘기록을 허용하지 않는 특이한 이벤트’에 머물지 않고 풍성하고도 이야기가 있는 경험이 되도록 작가와 미술관은 조각과 신체, 관계와 움직임의 역사 속에 그의 작업을 단단히 위치시켰다. 로댕의 조각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키스〉나 모더니스트들의 조각 주변에서 펼쳐지는 느린 수행 〈Instead〉, 그리고 매화와 대나무 곁에서 노래하는 〈This You〉는 세갈 작품을 하나의 맥락 속에서 다시 보게 한다. 그는 미술관을 유기체처럼 구성된 공연장으로 바꾸었고, 몸의 다양한 위상을 미술사의 층위 속에서 다시 작동시킨다.
21세기의 출발과 함께 세갈이 시도한 구성된 상황은 퍼포먼스에 종속되지 않는 움직임, 연극적이지만 관람객에게 질문하는 상호성의담보, 그리고 춤과 음악, 이야기를 교차한 흥미롭고 신선한 충격의 산물이었다. 그런 작품들을 다시 전시의 형태로 모으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다. 특히 이미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아는 관람객들에게, 기억에 각인된 경험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미술관과 작가는 큐레이팅의 묘미를 살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여러 요소들 간에 시너지를 내고 해석을 풍성하게 만드는 전략을 썼다. 세갈의 작품이 역사화되는 갈림길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형식의 제시라는 측면에서 리움미술관 전시는 충분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과 대화하는 해석자들, 춤과 노래와 율동으로 미술관을 진동시키는 몸들은 세갈을 처음 접하는 관람객들에게는 분명 매우 신선하게 다가갈 것이다. 한때 미술의 제도와 재현의 관습을 비껴가며 등장했던 그의 작업은 이제 오히려 미술사의 문맥 안으로 편입되면서 어느새 전통 미술의 한 장면처럼 읽히기 시작했다. 그는 작가의 이름을 지우는 대신 작품과 그것이 만들어 낸 상황만이 남기를 원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 상황 속에서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하게 된다. 바로 그 모순이 티노 세갈 작업의 힘이자 한계이다. 그리고 그 균열 속에서 관람객은 이미지로는 대체할 수 없는 감각의 잔여, 사진으로는 남지 않지만 몸에 오래 머무는 기억, 복합적인 모양새의 그것을 가져가게 될 것이다.
인터뷰
티노세갈

티노 세갈
제공: 리움미술관
인터뷰 진휘연
통역 박재용
진행 정소영
티노 세갈은 물질적 결과물 없이 인간의 행위와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구성된 상황’을 통해 예술을 실현한다. 그는 대화, 움직임, 참여를 매개로 관람객을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이며 전시를 경험적 사건으로 전환시킨다. 사진이나 영상 기록, 서면 계약을 거부하는 원칙을 통해예술의 비물질성과 일회성을 강조하고,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유의 논리에서 벗어난 예술의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그의 작업은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공간을 재구성하며 인간 관계와 현존의 순간을 예술의 핵심으로 부각시킨다. 그는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대표 작가로 국제적 주목을 받았으며,201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의 《This Progress》, 2012년 런던 테이트 모던 터바인홀 프로젝트 ‘These Associations’ 등을 통해 작업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후 파리 팔레 드 도쿄, 바젤 바이엘러재단 등 주요 기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동시대 미술의 핵심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작업의 출발점에 대해 말해 달라. 직접 수행에서 위임된 퍼포먼스로 옮겨간 이유는 무엇인가?
〈20 minutes for the 20th Century〉(이하 〈20 minutes〉)와 〈Instead〉는 2000년에 만든 작업인데, 전자는 무대를 위한 마지막 작품이고, 후자는 전시를 위한 첫 작품이다. 〈20 minutes〉에서 나는 20세기의 위대한 안무가들의 춤을 추며 그들을 기념했다. 이후 나는 작업이 극장 안의 일회적 이벤트에 머물지 않고 미술관의 개관 시간과 공간 규칙 안에서 지속적으로 작동하길 바랐다. 그래야 미술의 역사 안에 더 분명히 기입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작품을 수행하는 방식 역시 내게는 급진적인 변화가 아니었다. 나는 무용에서 출발했고, 안무가가 구조를 만들면 무용수가 그것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나는 퍼포먼스 아트의 계보보다 무용, 마이클 애셔, 다니엘 뷔랑, 미니멀 아트 같은 시각예술의 문제의식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내 작업의 핵심은 ‘작가가 직접 몸을 내놓는가’가 아니라, ‘어떤 구조와 상황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이다.
당신 작품은 ‘구성된 상황,’ ‘비물질적 존재성,’ ‘육체의 현전,’ ‘관계 형성’ 등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관람객들도 자신의 경험을 타자와 소통하길 원하는데, 왜 촬영과 이미지 공유에 반대하나?
나는 공식 사진을 만들지 않고, 미술관에도 찍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다. 그렇다고 관람객을 단속하거나 제지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작품이 어느새 ‘통제’ 자체를 다루는 작업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대신 사람들은 글쓰기를 통해 경험을 나눌 수 있다. 나는 단지 사진이 내 작업을 대표하는 방식을 원하지 않는다. 내가 만드는 것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구성된 상황’이다. 그것은 공간에 시간이 더해진 4차원의 작업이다. 회화가 2차원, 조각이 3차원이라면, 내 작업은 시간 속에서 전개되고 변주된다. 이를 사진이나 영상 이미지로 환원하는 순간 작품의 제안은 크게 달라진다. 나는 2차원 이미지를 구성하는 작가가 아니라, 상호작용 가능한 삶의 상황 안에서 작동하는 예술을 제안하고 싶다.
당신은 예술이 ‘세속 사회에서 차단된 영적인 피난처’이며, 자신만의 ‘불투명성’과 ‘모호성’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작품이 관람객과 직접 소통할 것을 요구하는 순간, 이 모호성이 관람객의 즉각적인 해석이나 오독에 의해 지나치게 투명해지거나 일상적인 대화로 환원될 위험이 있다. 당신이 말하는 상호작용과 관객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상호작용은 ‘전부 또는 전무’가 아니라 ‘농도’의 문제다. 〈This Progress〉처럼 전적으로 대화와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작품도 있고, 훨씬 더 ‘보는 것’에 가까운 것도 있다. 나는 관람객이 반드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다는 것, 응시하고 머무르는 것 자체도 하나의 활동이다. 때로는 상호작용이 50분 작업 안에서 1분 정도만 짧게 들어오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상호작용의 양이 아니라, 그것이 구조 안에서 어떻게 배치되느냐이다.
내 작업이 전통적인 관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관람객이 바라보는 대상이 다시 관람객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조각이나 비디오는 관람객을 보지 못하지만, 해석자들은 살아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관람객을 본다. 이 되돌아오는 시선이 중요하다.
즉각적인 해석이나 오독에 의해 지나치게 투명해지거나 일상적인 대화로 환원될 위험이 있다. 당신이 말하는 상호작용과 관객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상호작용은 ‘전부 또는 전무’가 아니라 ‘농도’의 문제다. 〈This Progress〉처럼 전적으로 대화와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작품도 있고, 훨씬 더 ‘보는 것’에 가까운 것도 있다. 나는 관람객이 반드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다는 것, 응시하고 머무르는 것 자체도 하나의 활동이다. 때로는 상호작용이 50분 작업 안에서 1분 정도만 짧게 들어오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상호작용의 양이 아니라, 그것이 구조 안에서 어떻게 배치되느냐이다. 내 작업이 전통적인 관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관람객이 바라보는 대상이 다시 관람객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조각이나 비디오는 관람객을 보지 못하지만, 해석자들은 살아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관람객을 본다. 이 되돌아오는 시선이 중요하다.
당신은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의 ‘역동적 안정화’ 개념을 인용하며 근대사회의 끊임없는 성장과 가속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에 반해 당신은 ‘현전’과 ‘감속’을 요구하지만, 관람객이 미술관 방문에서 창출된 몇 분간의 교감으로 동시대의 흐름을 끊어낼 수 있을까? 당신의 작업에서 만들고자 하는 시간은 무엇이며 대안으로서 성공하고 있나?
미술관은 ‘강’이고, 내 작업은 ‘호수’다. 하르트무트 로자가 말하듯 근대사회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성장해야만 안정될 수 있는 구조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끝없이 움직이기만 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도착(arrival)’의 감각이 필요하다. 토니 베넷의 말처럼 미술관은 대체로 강과 같다. 한 방에 들어서면 다음 방이 보이고, 그다음 방이 또 보인다. 늘 다음이 있기에 완전히 도착하기 어렵다. 나는 그 안에서 작은 호수 같은 순간을 만들고 싶다. 관람객이 잠시 머무르며 더 이상 다음으로 밀려가지 않고, 하나의 장면 속에 도착할 수 있는 순간 말이다. 내 작업이 성공한다면 관람객은 미세하게 달라지는 움직임과 소리, 반복과 차이의 구조에 붙잡히고, 그 안에 머무르게 된다. 나는 예술이 세속적인 형식이면서도 동시에 어떤 영적인 차원을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은 종교처럼 노골적인 방식이 아니라 예술 안에 숨겨진 형태로 존재한다.
매체는 일시적이고 기록이 부재한 당신의 작품을 역사적으로 보존하고 전승할 방안은 무엇인가? 인간의 경험, 기억은 유한하거나 왜곡되기에 미래 세대에 전달할 때 변화가 수반된다고 보는데, 어떤가?
보존은 기억보다 ‘관심’과 ‘전승’의 문제다. 내 작업은 이미 여러 미술관 컬렉션에 들어가 있고, 발란신 트러스트나 윌리엄 포사이드의 전승 체계와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작품을 소장한 기관은 권리를 갖고, 전시를 원할 때는 그 작업을 아는 사람들이 가서 설치와 리허설을 진행한다. 이런 체화된 형식은 결국 사람을 통해 전승되어야 한다. 비디오 하나를 보내준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나는 지금도 오프닝 직전까지 수행자의 동작을 수정한다. 그런 점에서 보존은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관심, 재정의 문제다. 누군가 계속 이 작업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지속될 수 있다.
사람들은 내 작업이 기억을 핵심으로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기억에 집착하지 않는다. 내 작업은 단지 다른 물질성을 가진 것뿐이다. 그것은 4개월, 4년, 40년도 반복될 수 있다.
팬데믹 과정 이후 작업에 변화가 있었나?
의식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늘 미술사 속의 트로프(trope)를 가져와 내 방식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Kiss〉도 그렇고, 브루스 나우만의 비디오가 속한 계보도 그렇다. 최근에는 ‘성탄 장면’ 같은 전통적 도상도 내 방식으로 작업했다. 내 관심은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형식들을 다른 구조와 시간 속에서 다시 작동시키는 데 있다.
당신이 주장하는 지속가능성은 무엇인가?
아주 단순하다. 산업사회는 자연자원을 꺼내 변환하고, 그 과정에서 탄소를 배출하며 제품을 만든다. 시각예술도 물질 변환의 논리 위에 존재해 왔다. 반면 내 작업은 움직임과 소리, 말과 관계를 만든다. 그것 역시 생산이지만, 자원을 캐내고 가공하는 방식과는 다른 모델이다. 나는 이를 ‘행위의 변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내 작업은 서비스 경제와 닮아 있다. 서비스 경제가 물질이 아니라 행위와 지식, 관계의 변환을 통해 가치를 만든다면, 내 작업도 그러한 동시대의 생산 구조를 반영한다. 시각예술이 물질을 변환해 왔다면, 나는 비물질적 행동 변환을 한다. 그것이 미래를 위한 더 지속가능한 형식이라고 본다.
경제학을 전공한 당신은 비물질적 작품과 예술 상품화의 관계를 어떻게 보나? 당신은 초기 작업에서 오브제 생산을 거부하며 이를 ‘증명의 극장(theater of proof)’이자 예술의 역사적 게임에서의 전략적 이동으로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관심 경제’와 ‘서비스 경제’는 비물질적인 경험 자체를 가장 강력한 상품으로 소비한다. 당신의 비물질적 작업이 동시대 자본주의의 정점과 완벽하게 조응하게 된 지금, ‘오브제 없음’이 지니는 초기의 정치적 저항성은 어떻게 변화했나?
내게 중요한 질문은 ‘상품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떻게 상품이 되는가’이다. 내 작품이 현재 서비스 상품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개념미술과 퍼포먼스가 상품을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 시장 안으로 들어간 역사는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나는 ‘상품에서 벗어나겠다’는 순진한 환상보다는, 어떤 생산 방식과 가치 구조를 제안하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 무엇이든 합의가 이루어지면 상품이 될 수 있다. 심지어 컵을 움직이는 행위조차 누군가가 가치를 부여하고 비용을 지불하면 상품이 된다. 중요한 것은 존재론이 아니라 방식이다. 그래서 내게 유의미한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그것은 흥미로운 상품인가?”
환경문제를 포함하여 지금 가장 비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비판보다는 긍정적인 기여를 만들고 싶다. 예전에 〈This is Critique〉이라는 작업을 했는데, 비판 모드의 약점에 관한 것을 다루었다. 비판은 늘 자신이 비판하는 대상과 관계를 맺은 채 남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비판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거나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더 흥미롭다.
당신의 작품들을 모은 이번 전시는 아브라모비치의 2010년 MoMA 전시처럼 퍼포먼스의 재연이자 라이브 아카이브를 떠올리게 된다. 차이는 무엇인가? 또 로비를 신작의 무대로 선택한 이유를 알려달라.
마리나는 그녀가 직접 수행한 상징적인 원본이 있고, 그것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란 질문이 생긴다. 하지만 내 작업은 애초부터 다른 사람들이 수행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은 ‘재연’이라기보다, 규칙 구조를 가진 살아 있는 작업을 다시 제시하는 일에 가깝다. 알고리즘은 과거 어느 시점에 구상되었지만, 그것은 매번 다른 사람과 다른 공간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 모든 순간은 반복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현재다.
리움미술관의 로비는 도착의 장소이자 다른 작품과의 다공성을 가진 공간으로,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로비는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잠시 머물고 서두르지 않으며, 도착하는 느낌의 공간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 분위기를 더 강화하고 싶었다. 또 나는 다른 작품들과의 ‘다공성(porosity)’에도 관심이 많다. 로비의 작업은 옆에 있는 영상 작업과도 작은 순간들을 통해 연결된다. 나는 작품을 고립된 자율적 단위로 보기보다,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보려 한다. 〈This Entry〉에 등장하는 공, 자전거, 바이올린 같은 오브제들 역시 조각의 역사 안에서 중요한 시각적, 조형적 계보를 가진 오브제들이다.
인공지능의 확산이 당신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리라 보는가?
인공지능 시대의 변화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여전히 인간이 가장 복잡한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을 매체로 작업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가장 복잡한 매체와 함께 일하고 있는 셈이다. 사회가 어떻게 바뀌든, 그 복잡성은 여전히 인간 안에 있다.
관람객들이 당신의 이름과 작품 중 무엇을 더 오래 기억하기를 바라나?
내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