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길을 잃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안진국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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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활용기-작가편
우리의 욕망을 미리 예측하고 최적화하는 디지털 환경은 이미 인간의 지각과 판단, 심지어 예술을 경험하는 방식까지 재조직하고 있다. 우리가 원하기도 전에 최적의 선택지를 제시하는 이 시스템은 삶의 우연과 더듬거림, 낯선 것을 향한 설렘을 지워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야 할 것이다. 이번 장에서는 인공지능이 장악한 ‘예술의 환경’을 비판적으로 해부한다.
일러스트 ©May Kang
갑자기 스마트폰에서 ‘핑’ 알림음이 울린다. 치킨 할인 쿠폰이다. 배고픔을 느끼던 찰나에 평소 좋아하던 치킨 가게의 할인 쿠폰이 도착했다. 마치 지금 치킨을 사 먹으라는 것처럼. 기막힌 우연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주머니 속에 있던 기계가 내가 배고플 시간을 알고, 먹고 싶어 할 음식을 알려준 것이다. 이 기계는 나의 미래를 가로채 눈앞에 가져왔다.
이제 AI가 우리를 대신해 세계를 해석한다. 이 기계는 인간의 감각과 판단, 나아가 예술을 경험하고 생산하는 방식 자체와 연결되어 있다. 지금 AI는 우리의 삶을, 그리고 예술을 어떻게 재편하고 있을까? 지금의 디지털 구조가 인간의 감각, 시간, 분류, 판단, 주체성을 어떻게 재조직하는가?
의미를 모르는 기계
AI는 1948년 이후 전개된 사이버네틱스의 계보 위에서, 데이터 피드백 루프를 통해 스스로 학습하고 적응하며 유기체처럼 진화했다. 이 기계는 데이터를 먹고 소화하며 스스로 변형되는 체계가 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디지털 구조는 단순한 도구의 집합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고 감각하며 판단하는 조건 자체가 되어 버렸다.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는 글로벌 자본주의, 빅데이터, 자동화 알고리즘이 얽혀 있는 이 거대한 디지털 구조가 인간의 새로운 ‘환경(milieu)’2이 되었다고 말한다.3 우리는 디지털 장치와 플랫폼, 인터페이스, 추천 시스템, 데이터 흐름이 짜놓은 환경 안에서 지각하고 반응하며 욕망한다. 인간은 이제 도구를 손에 쥔 자율적 주체라기보다, 거대한 디지털 생태계라는 어항 속을 헤엄치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예술의 존재 조건에도 영향을 미쳤다. AI 예술을 보라. 데이터 세트, 인터페이스, 프롬프트, 서버 연산, 메타데이터, 추천 로직과 같은 다층적 관계망 속에서 생성된다. 디지털 구조 내부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AI 예술은 인간의 시간과 주의력, 감정과 기대, 기억과 선택을 조직하는 디지털 ‘환경’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AI 예술을 보면서 “사람보다 잘 그린다”거나 “결과물이 정교하다” 정도의 감탄 수준에서 멈춰선 안 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인간과 AI의 관계를 그저 대체의 논리로만 이해한다. 자본주의는 기능적으로 동등하면 호환 가능하다고 믿는다. 나사를 조이는 노동자를 로봇 팔로 대체하는 것처럼, 세잔이나 고흐의 화풍을 학습해 그리는 AI가 인간 예술가를 대체할 수 있다고 본다. 이렇다면 예술이 데이터라는 재료를 넣으면 결과물이 나오는 자판기와 뭐가 다르겠는가. 여기서는 창작의 이면에 있는 인간의 고통, 시대적 맥락, 심리적 상호작용 등 과정의 시간은 제거된다. 이러한 대체의 논리는 예술 창작을 기능적 결과물을 경쟁적으로 양산하는 과정으로 축소한다.
디지털 구조는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과 관련 있다. 디지털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컴퓨터와 알고리즘은 세계를 잘게 쪼개고, 이름을 붙여 분류하고, 범주화한다. 세계-내-존재인 인간도 디지털 환경에서는 들뢰즈가 말한 ‘가분체(dividuals)’로 전락한다. 정치적 성향 15%, 소비 욕구 30%, 심야의 우울감 10%와 같은 식의 데이터 포인트로 무참히 분절되어 네트워크 곳곳에 분산된다. 이러한 데이터들은 ‘데이터에 관한 데이터’, 즉 메타데이터와 결합하고 스키마(schema)4를 통해 기능적 맥락을 갖게 된다. (이러한 구조를 컴퓨터 세계에서는 ‘온톨로지(ontology)5’라고 부른다.) AI에게 세계의 ‘이해’는 중요하지 않다. 주어진 규칙에 따라 세계를 분절하고 정렬하는 게 중요하다. AI가 예술적 결과물을 생성할 때도 이 작동 방식은 그대로 적용된다. 결국 AI 예술은 인간이 사전에 구성해 놓은 분류 체계와 의미의 목록을 기술적으로 재조합한 것에 가깝다. 존 설(John Searle)의 ‘중국어 방’ 사고 실험6에서 중국어를 모르면서 중국어를 하는 사람처럼, AI는 그 의미를 모르면서 규칙에 맞춰 결과물을 생성한다. 마치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의 감동적인 대사에 눈물 흘리지만, 정작 배우는 자신의 대사가 왜 슬픈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7
장미가 피고 있다
전통적인 논리학에서는 주어와 술어 형식을 취한다. “사과는 빨갛다”와 같은 명제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형식은 어떤 사물이 그 자체로 고유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전통적 실체 개념이 근본적으로 흔들렸다. 입자는 더 이상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측에 따라 달라지는 확률적 상태, 혹은 관계적 존재로 파악되기 시작했다.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으로의 이행’을 ‘인과법칙에서 확률법칙으로 이행’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8 러셀(Bertrand Russell)은 이러한 전통적인 논리학 방식을 비판하며, 관계형 수학 모델을 제안했다. “사과는 빨갛다”와 같은 속성 명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x는 y보다 크다” 혹은 “a는 b를 알고 있다”와 같은 관계 명제를 중요하게 봤다. 대상과 대상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러셀의 관계 논리학은 이후 관계형 데이터베이스(RDB)로 확장되면서 디지털 구조 환경이 되었다.9
그렇다면 관계형 모델은 문제가 없는 걸까? 관계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분류와 범주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분류 체계라는 게 사실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10라는 글에서, 가상의 중국 백과사전(『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제국』)을 제시함으로써 분류 체계 자체가 얼마나 자의적인지 풍자했다. 이 사전에서는 ‘동물’을 “황제에게 속한 것”, “미친 듯이 나부대는 것”, “방금 항아리를 깨뜨린 것”, “멀리 파리처럼 보이는 것” 등으로 분류한다.11 이 분류가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한 것은 분명하다. 어떤 분류도 객관적 진리를 반영할 수 없으며, 특정한 문화와 권력, 역사성에 따라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 분류란 언제나 어떤 관점이 세계를 조직한 결과다. AI 예술은 어떠한가. AI가 학습한 이미지들을 ‘풍경’, ‘인물’, ‘동양화풍’, ‘추상’, ‘아름다움’, ‘예술성’ 등의 범주로 나눴다면, 그 범주들 역시 특정 시대의 미학적 규범과 데이터 수집 방식, 산업적 목적이 응축된 산물일 뿐이다. 이는 AI 예술이 이미 구성된 그 시대의 자의적 미학 분류 질서를 자동으로 되풀이한 결과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파편화와 분류, 그리고 관계성이 시간적 경험을 소거한다는 점이다. “장미가 피고 있다”를 보자. 하이데거는 이 문장을 예로 들어, 형식 논리학에서 진술—기호적 표기로 “x:P(x)”. x는 장미이고 P는 피고 있다는 술어이다—이 일상 언어의 표현과 무엇이 다른지를 보여줬다.12 우리가 “장미가 피고 있다”라고 할 때(일상 언어의 표현), 거기에는 단순히 꽃잎이 열린다는 물리적 사실만 담겨 있는 게 아니다. 꽃봉오리가 맺히기를 기다렸던 시간, 향기가 퍼질 것이라는 기대,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생생한 감각이 담겨 있다. 살아 있는 시간의 흐름 전체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규정적 판단으로 들어가는 순간, 장미라는 그 사물이 ‘피고 있음’이라는 속성을 가진다는 뜻으로만 해석된다. 즉 이 문장을 기계로 처리하기 위해 수학적 형식 논리의 기호로 환원하면(“x:P(x)”가 되면), 장미에서 피어나는 낭만적이고 생생한 경험은 사라지고 정보만이 껍데기처럼 남게 된다. 그렇다면 AI 예술은 어떻겠는가? 생생한 경험의 시간성이 소거된, 단순히 정지된 규정적 판단만을 드러내는 이 예술은 뭔가 결여하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AI 예술이 얄팍하게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는 AI가 인간을 압도하는 결과물을 생성하는 속도와 정교함에 감탄한다. 하지만 이 기계는 다룰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수학적 의미의 ‘계산 불가능성(incomputable)’과 애초에 계산의 영역 바깥에 있는 ‘연산 불가능성(incalculable)’. 전자는 재귀적으로 가산할 수 없는 특성, 즉 알고리즘의 유한한 단계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처럼 논리학 내부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후자는 사랑, 우정, 욕망, 행복처럼 전혀 계산할 수 없음을 말한다. 정신적, 실존적, 종교적 차원까지 포함하여 계산 가능성 자체를 초과하는 것들은 애초에 수학 방정식이나 알고리즘으로 해결할 수 없다.13 특히 우리는 후자를 주목해야 한다. AI의 강력함은 세계를 계산 모델로 환원하는 데 있기에 ‘장미가 피고 있는’ 것에서 느낀 감정과 시간성을 전달할 수 없다. 어찌 보면 연산 불가능한 영역이야말로 지능의 진정한 대상이며, 예술적 사유가 발생하는 조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AI는 ‘연산 불가능한 세계’를 우리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트린다. 수치화될 수 없는 미지의 것을 탐구하는 행위가 예술이라고 볼 때, 예술은 AI의 계산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AI는 이미 알려진 사실을 정교하게 계산할 뿐이다.
미래를 훔치는 기계
AI의 정교한 결과가 가능한 것은 재귀성(recursivity)을 통해 그 자체를 끝없이 갱신하기 때문이다. 재귀성은 반복(looping)과 다르다.14 하나의 이미지를 복사기에 넣고 똑같이 이미지 수백 장을 찍어내는 작업이 반복이라면, 재귀성은 두 개의 거울을 서로 마주 보게 세워두는 것에 가깝다. 거울 속의 거울, 다시 그 거울 속의 거울. 두 거울이 끝없이 서로를 반사하면서 깊은 심연으로 이끄는 것처럼, 재귀 함수는 특정한 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자기 자신을 거듭 호출한다. 그러면서 데이터의 가장 깊은 층위, 수많은 갈래길의 끝까지 파고든다. 재귀성은 인간의 행동 패턴 속에 존재하는 무한한 분기점들을 거울처럼 끝없이 탐색해 들어간다. 이러한 재귀성이 만든 구조는 개인을 끊임없이 수정되는, 연산할 수 있는 패턴의 다발로 취급한다. 여기서 개인은 더 이상 “이런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특정 시간대에, 특정 감정 상태에서, 특정 이미지를 보고, 특정 광고 앞에서 머뭇거릴 확률의 집합체일 뿐이다. 인간을 더 정밀하게 쪼개고 조합 가능한 패턴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내가 치킨을 좋아한다”라는 정보 하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비 오는 날 치킨을 먹었고, 그때 유튜브에서 한강 변 영상을 보았으며, 내 친구 또한 그날 치킨 가게를 검색했다는 식으로, 패턴들을 확인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그 패턴들을 다시 호출한다. 이때 과거의 흔적은 다음 계산의 입력값으로 되돌아가면서 미래를 예측하는 연산의 재료가 된다.
재귀적 연산 구조는 이러한 재귀성을 통해 우리가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에 개입한다. 우리의 미래를 훔치는 것이다. 후설(Edmund Husserl)은 인간의 시간 의식이 ‘파지(把持)’, ‘원인상(原印象)’, ‘예지(豫持)’의 삼중 구조로 이루어진다고 봤다.15 음악을 들을 때 들은 음을 기억하고(파지) 다음 음을 예상하기(예지) 때문에 비로소 음악을 하나의 흐름으로 경험하는 것(원인상)이다.16 그런데 오늘날 디지털 환경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AI에 외주화한다. 이것이 바로 육후이(Yuk Hui)가 말한 ‘제3차 예지’다. 재귀적 연산 구조는 어젯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무엇에 ‘좋아요’나 하트를 눌렀는지, 어떤 광고 영상 앞에서 1.5초 정도 머물렀는지, 어떤 뉴스 기사를 넘겼는지 하는 흔적들을 모두 기록하고, 제3차 파지로 축적하고, 이것들을 재귀적으로 계산하면서 다음 할 행동의 확률을 추론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내가 아직 원한다고 느끼기도 전에 무엇을 원할지를 먼저 제시한다. 나의 미래를 훔치는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AI가 내 마음을 먼저 읽어 귀찮은 선택의 과정을 없애주면 편리하니 좋은 게 아닌가? 아주 유능하고 손이 빠른 비서 한 명을 둔 것과 같은데 이게 문제인가? 이런 편리함이 중요한 것을 빼앗아 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친구와 상의하고,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풍겨오는 냄새에 이끌려 낯선 식당에 들어가는 걸 상상해 보라. 그 더듬거림과 망설임, 우연한 발견과 기대감. 이것들이 삶의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AI는 이러한 인간 본연의 시간을 0.1초 만에 최적화된 결괏값으로 덮어버린다. 삶의 다음 순간을 향해 스스로 방향을 잡아가며 나아가는 기쁨, 우연히 뜻밖의 것을 마주치는 놀라움과 설렘 속에서 선택을 구성해 가는 시간 자체를 빼앗아 버린다. 남는 것은 오직 결과뿐이다.
예술에서도 중요한 것은 결과물만이 아니다. 예술은 미지와 만나는 사건이며, 낯선 것을 감당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실패하면서, 감각을 조정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예술은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런데 제3차 예지가 지배하는 AI 환경에서는 예술조차 취향의 자동화로 변질될 수 있다. 이미지, 음악, 영상, 전시 추천 등은 우리를 미지의 탐험자로 만들기보다는, 과거의 취향을 반사하는 거울 앞에 붙잡아 세운다. 이 때문에 우연한 충돌과 지연, 오해와 재해석의 시간을 상실하고, 취향의 자동 재생 목록 안에서 순환하는 소비형 예술로 전락한다. AI 예술은 생산의 속도뿐 아니라 유통과 감상까지 결괏값을 최적화하고자 하므로 이 과정을 가속할 위험을 지니고 있다.
미래를 선점하는 이러한 구조는 결국 인간의 주체성을 잠식한다. 인간은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지고, 불확실성 속에서 자신의 삶을 기획하며,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간다. 이러한 실존적 행위를 하이데거는 ‘마음씀(Sorge)’이라고 했다.17 그런데 이 행위를 AI가 외부에서 대신 수행해 줌으로써, 인간이 점점 자기 삶의 다음 순간을 스스로 구성하지 못하게 된다. 기계적인 예지가 ‘마음씀’을 대체해 버린 것이다. AI 예술도 마찬가지다. 지금과 같은 구조라면 형식을 벗어난 창의적인 어떤 것이 생성되길 기대하기는 힘들다. 거울방의 얄팍한 거울 면으로만 빨려 들어갈 뿐이다. 제3차 예지가 지배하는 환경에서 예술은 최적화된 취향의 소비로 환원될 가능성이 높다. 예술이 더 이상 나를 흔들고 낯설게 만드는 사건이 아니라, 내가 이미 좋아할 것이라고 계산된 콘텐츠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AI 예술에서 매끈한 결과물을 얻는 데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AI의 작동 방식을 수면으로 끌어올려 드러내야 한다. 최근의 주목되는 AI 예술 작품은 편향성, 데이터의 한계, 환각, 글리치, 오류까지도 예술적 재료로 받아들인다. 이는 통제할 수 없는 기계의 불확실성을 예술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이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길을 헤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술적 사유와 기술적 사유가 결합하며, 새로운 감수성이 창출된다. 예술은 단순히 기술을 빌려 화려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나의 미래를 선점하는 AI가 장악한 시대에 예술은 기술을 대하는 인식론 자체를 뒤집는 역할을 해야 한다.
100퍼센트 예측 가능한 미래에서 길을 잃기
만약 AI의 알고리즘이 점점 더 완벽해져서 인간의 욕망과 미래를 거의 100퍼센트에 가깝게 예측한다면? 삶 속의 모든 우연과 비효율을 진공청소기처럼 흡수해버린다면? 그때 도래할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그 세계에서 예술은 무엇으로 남을까? 어쩌면 이런 미래에는 인간이 저지르는 어리석은 실수, 알고리즘의 완벽한 추천을 무시하고 충동적으로 내리는 비합리적인 선택, 낯선 곳에서 내비게이션을 끄고 완전히 길을 잃어버리는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경험이야말로, 인간이 시스템에 통제되는 데이터 조각이 아니라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저항이자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최고의 사치품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예측 가능성과 최적화의 질서 속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예측 불가능한 우연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 기꺼이 길을 잃을 것인가? 진정한 AI 예술은 이 길 잃음의 가능성을 작품 속에서, 기술 속에서, 우리 자신의 감각 속에서 끝까지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
지금 당신은 길을 잃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1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길 잃기 안내서』 반비 2018 p.31
2 ‘milieu’는 어떤 개별적 동일이나 인간 또는 집단을 ‘둘러싸고’ 경계를 이루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야곱 폰 웩스쿨(Jakob von Uexküll)이 말한 ‘움벨트(Umwelt, 주관적 환경)’와 같다. 박쥐는 초음파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진드기는 포유류의 체온과 냄새를 통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이러한 자기만의 세계를 독일어 ‘Umwelt’라고 했다. 생명체는 보편적으로 동일한 세계를 사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감각적 표지들과 의미망으로 조직된 환경 세계를 살아간다는 의미다
3 베르나르 스티글러 「서문」 허욱『디지털적 대상의 존재에 대하여』새물결 2021 pp.36~37 편집자주) 육후이(Yuk Hui)의 한자음 ‘허욱’의 이름으로 한국어 단행본이 출판되었다
4 ‘스키마(schema)’란 데이터베이스나 인지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보와 경험을 구조화하고 조직화하는 틀 또는 도식을 뜻한다
5 원래 대문자로 시작하는 ‘온톨로지(Ontology)’, 즉 존재론은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이 존재란 무엇인가를 탐구해 온 가장 근본적인 철학의 분야였다. 그런데 컴퓨터 공학자들은 데이터를 분류하고 스키마를 설계하는 시스템에 똑같이 소문자로 시작하는 ‘온톨로지(ontology)’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컴퓨터 과학에서의 온톨로지는 혼돈 상태의 데이터에 카테고리를 부여하고, 그것을 디지털 객체의 형태로 구성하며, 데이터를 구조화한다. 더 나아가 세상의 개념과 관계를 기계가 읽을 수 있도록 새롭게 규정하고 질서를 부여한다. 이 작업은 단순한 기술적 정리가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일종의 존재론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6 이 사고실험에서 어떤 사람은 중국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지만, 주어진 규칙표에 따라 중국어 기호들을 적절히 배열하여 외부의 질문에 마치 완벽하게 대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밖에서 보면 그는 중국어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의미도 이해하지 못한 채 기호 조작만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컴퓨터 역시 이와 유사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의미를 이해하고 응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직 형식적 규칙에 따라 기호를 처리할 뿐이다
7 바로 이 점에서 이 체계에서 사용하는 ‘시맨틱 웹(semantic web)’, 즉 ‘의미론적 웹’은 그 용어 자체부터 대단히 모순적이다. IT 업계 뉴스나 애플, 구글 같은 기업의 발표를 보면 언제나 시맨틱 웹이라는 표현이 자랑스럽게 등장하거나, 컴퓨터가 데이터를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맞춤형 결과를 제공한다는 식의 설명이 흔하지만, 기계는 본래 의미를 이해하는 존재가 아니다. (허욱 앞의 책 p.168)
8 문종만 『테크놀로지: 고대에서 현대까지 철학적 답변의 역사』 마농지 2023 p.520
9 관계형 데이터베이스(RDB, Relational Database)는 IBM의 연구원이었던 에드거 F. 코드(Edgar F. Codd)가 1970년에 제안한 것으로, 데이터를 테이블(table)의 형식으로 조직함으로써, 각각의 데이터가 고정된 물리적 위치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이터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유연하게 연결될 수 있게 되어 있다
10 17세기 영국의 철학자이자 체스터의 주교인 존 윌킨스는『참된 문자』에서 존재를 아홉 가지 범주와 마흔 가지 장르로 분류하는 존재론적 체계를 제안했다. 그의 분류법은 가능한 모든 개념을 체계적 구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상적 언어의 기초로 설계되었다. 보르헤스는 존 윌킨스의 분류법 또한 이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이 글을 작성했다.데이터가 고정된 물리적 위치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이터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유연하게 연결될 수 있게 되어 있다
11 허욱 앞의 책 pp.171~172
12 Heidegger Logik. Die Fragenach der Wahheit Frankfurt am Main Klostermann 1976 GA 21 p.157
13 허욱 지음 조형준 감수 『예술과 코스모테크닉스』 새물결 2024 p.317
14 허욱 『디지털적 대상의 존재에 대하여』 p.431. 이 책의 번역자는 ‘looping’을 원어 발음 그대로 ‘루핑’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쉬운 이해를 위해 ‘반복’으로 번역했다
15 ‘파지(Retention)’는 방금 지나간 대상의 국면을 의식 속에 붙잡고 있는 과거지향적 지향성이다. ‘원인상(Urimpression)’은 지금 바로 발생하고 있는 현재의 순간이다. ‘예지(Protention)’는 곧 일어나려고 하는 대상의 국면을 미리 내다보는 미래지향적 지향성이다
16 ‘제1차 파지’는 ‘방금 지나간 순간’에 대한 의식으로, 이것과 현재를 기반으로 바로 다음에 올 순간을 예상한다. 이것이 ‘제1차 예지’다. ‘제2차 파지’는 제1차 파지가 사라진 후 기억으로 남은 것으로, 이것을 토대로 장기적인 미래를 예상하는 것이 ‘제2차 예지’다. 쉽게 말해서 방금 들은 선율의 기억은 제1차 파지, 과거 연주회에 대한 기억이 제2차 파지이다. 스티글러는 외부 기술(기록 매체)에 의한 기억의 보관을 ‘제3차 파지’라고 말한다. 사진, LP, CD, 영상, 인터넷 등 외부적 기억 장치를 의미한다. (베르나르 스티글러 『자동화 사회 1: 알고리즘 인문학과 노동의 미래』 새물결 2019 pp. 142~143) 육후이는 이것을발전시켜 기술 환경이 제공하는 데이터나 알고리즘을 통해 미래를 예상하는 것을 ‘제3차 예지’라고 했다. (허욱 『디지털적 대상의 존재에 대하여』 pp.404~405)
17 하이데거 지음 소광희 옮김『존재와 시간』 경문사 1995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