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부산·경기도자비엔날레
예술감독 인터뷰

노재민·황수진·강재영 기자

Theme Feature

제16회 광주비엔날레《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

9.5~11.15 광주비엔날레전시관

제16회 광주비엔날레의 제목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아폴로의 고대 흉상」에서 가져왔다. 이처럼 단호한 명령형 앞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변화를 요구하는가이다. 호추니엔 예술감독에게 변화는 개인이 스스로를 고쳐 쓰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삶과 힘, 역사와 관계를 맺으며 이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역량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번 비엔날레에서 함께 제시하는 또 하나의 핵심어는 ‘실천(practice)’이다. 어떤 변화가 삶과 관계, 기억과 상상력을 확장하고, 어떤 변화가 몸을 규율하고 역사를 지우며 사람들을 고립시키는가. 이 질문은 작품의 내용에만 머물지 않는다. 참여자의 범위와 저자성, 광주라는 도시의 역사, 비엔날레를 만드는 노동과 제도, 큐레토리얼팀의 협업 방식까지 전시의 조건 자체로 번진다. 개막을 앞두고 호추니엔에게 변화와 실천, 그리고 한 번의 비엔날레가 남길 수 있는 것에 대해 물었다.

노재민 기자

Ho Tzu Nyen, Artist Director of the 16th Gwangjubiennale
Courtesy of Gwangju Biennale, photo by Lee il chun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는 매우 직접적인 명령문이다. 오늘날 자기계발과 신자유주의 담론에서 ‘변화’는 구조적 문제의 책임을 개인의 자기혁신으로 전가하는 언어가 되기도 한다. 이번 전시는 이 문장이 또 하나의 자기관리 명령이 아니라, 변화가 일어나는 공동의 조건과 구조에 대한 질문이 될 수 있도록 어떤 장치를 마련했는가.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는 말은 분명 직접적이고 강압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흥미롭게 보는 것은 이 문장이 동시에 완전히 열려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 문장의 힘이자 도발이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일까. 거울 속 자신에게 하는 말일까. 아니면 작품이 관객에게 건네는 말일까.

오늘날 자기계발 문화와 산업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관리, 미디어의 확산, 끊임없는 재교육과 최적화에 연결돼 있고 이제는 웰니스와 바이오해킹의 영역까지 침투했다. 우리는 이러한 자기계발 숭배를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기계발이 결코 줄 수 없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싶다. 그 배후에는 무엇이 있으며 그 이후에는 무엇이 올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이보다 더 오래되고 강력하며 기이한 전통도 있다. 서구 철학에는 삶 자체를 시험하고 훈련하고 실천하며 실험하는 대상으로 보는 계보가 있다. 누군가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의 급진적 가능성을 탐구한 사례는 에머슨과 소로, 니체에서 소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가운데 나에게 중요한 인물은 스피노자다. 그는 “당신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라고 질문을 바꾼다. 삶을 바꾼다는 것은 고립된 상태에서 자신을 고치는 일이 아니다. 하나의 삶이 다른 삶과 힘, 역사와 함께 구성될 때 무엇이 가능해지는지를 발견하는 일에 가깝다.

제임스 베닝(James Benning)의 〈스템플 패스(Stemple Pass)〉(2012)는 이 문제를 오두막이라는 형상을 통해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미국적 상상력에서 오두막은 자립, 철수, 사회로부터의 자유를 상징하지만, 작품 속 오두막에는 ‘유나바머’ 테드 카진스키가 있다. 베닝은 이를 월든 호숫가의 소로의 오두막과 병치한다. 둘 다 세계로부터의 철수지만 하나는 철학으로, 다른 하나는 누군가에게 테러로 기억된다. 철수 그 자체는 결코 순수하지 않다.

변화가 언제나 진보적이거나 해방적인 것은 아니다. 파시즘과 전쟁, 기술적 통제, 공동체의 해체 역시 변화의 형태다. 이번 전시에서 삶을 생성하는 변화와 삶을 훼손하는 변화를 구별할 기준도 제시하는가?
물론 변화가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이번 전시는 변화를 보편적인 가치로 찬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가 지닌 차이와 다양한 징후, 그 안의 모호함과 반전까지 포함해 어떻게 변화를 사유할 것인가에서 출발한다. 앞서 말한 〈스템플 패스〉만 보더라도 철수와 자립, 다르게 살아가려는 욕망은 아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전시는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누가 그것을 수행하는지, 어떤 실천을 통과하는지, 어떤 역량을 향해 가는지 묻는다. 여기서 이번 비엔날레의 두 번째 용어인 ‘실천’이 중요해진다. 어떤 변화가 삶과 관계, 지각과 기억, 집단적 역량을 확장하는가. 반대로 어떤 변화가 삶을 축소하고 몸을 규율하며 역사를 지우고 사람들을 서로 고립시키는가. 실천이라는 말을 통해 이러한 차이를 질문할 수 있다.

좋은 변화와 나쁜 변화, 좋은 실천과 나쁜 실천을 나누는 간단한 체크리스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일반적인 판단 기준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그 변화로 몸과 공동체가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치고 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가. 기억하고 행동하고 상상하며 다르게 살아갈 역량을 증가시키는가. 아니면 그것을 침묵과 소진으로 축소시키는가.

과거 작가로 광주비엔날레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당시 경험 가운데 이번에 예술감독이 되어 개선하고자 한 부분이 있었나. 특히 비엔날레 참여 작가에 대한 낮은 사례비와 경제적 불안정성, 재단의 단기계약 구조를 비판한 바 있는데, 이번에 제작비와 작가비, 계약과 노동조건에 어떤 원칙을 적용했나.
작가로 여러 차례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 구조가 얼마나 위압적일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서류 작업은 미로처럼 느껴지고 계약서 문구는 가혹하게 들릴 수 있다. 작가일 때는 “관료주의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예술감독이 되어 더 많은 설명을 듣지만 결국 다시 “관료주의”라는 말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한 번의 비엔날레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광주비엔날레는 공적 재원과 행정 구조, 오래된 제약과 정치적 영향을 받으며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손님으로 들어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조건을 이해하되 그것을 최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무언가를 망가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그 유연성을 최대로 시험하는 일이다. 이 과정은 전시팀과 함께 해야 했고 다행히 우리는 함께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올해는 보수, 계약 문구, 제작 과정 등 협업자들의 조건을 개선하려 했다. 이런 노동의 많은 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광주의 유산과 정신을 고려하면 조건 개선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단기계약은 끊임없는 단절을 만든다. 한 회차에서 배운 것이 다음 회차가 시작되기 전에 사라지고, 매번 다시 제로에서 시작할 위험이 있다. 이번에 만든 작은 돌파구들이 다음 회차에도 이어지고 현재의 팀이 남아 이미 축적된 경험 위에서 다음 비엔날레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아직 성공했다고 말하기에는 아주 멀리 있다. 그래도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는 점에는 감사한다. 내가 작가로 참여했을 때도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긴 프로젝트와 만남, 우정은 실제로 내 삶을 바꾸었다.

참여 명단에는 개별 작가만이 아니라 오월어머니집, 운림산방,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와 연결된 허백련, 심지어 제주의 화산암처럼 공동체와 역사적 계보, 교육기관과 비인간 물질도 포함된다. 이번 전시에서 ‘참여 작가’ 혹은 ‘참여자’의 범주는 어디까지 확장되는가? 그래픽 아이덴티티에는 참여자와 작품 이미지를 바탕으로 인공지능(AI)이 생성한 시도 사용된다. 그렇다면 AI 역시 또 다른 저자로 볼 수 있나.
창조성이란 이미 계속 일어나고 있는 과정이며 수많은 방식으로 표현된다. 화산암이 만들어지는 과정만 보더라도 그렇다. 마그마가 공중으로 솟구쳐 굳거나 나무를 둘러싸고, 식어가는 용암이 접히며 형성되기도 한다. 광물이 섞인 물이 흘러 들어오고 소금과 바람, 비와 시간이 내부를 파내기도 한다. 창조의 과정을 이해하는 한 방법은 우리 자신을 변화가 통과하는 통로나 매개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변화의 방향을 틀고 동시에 변화는 우리의 방향을 튼다.

그래서 운림산방이나 오월어머니집, 허백련과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제주의 화산암을 참여 작가라고 부르는 것은 도발이 아니다. 예술적 주체성이 어디에 있다고 볼 것인지 그 범위를 넓혀보자는 제안이다. 운림산방의 계보에 속한 각각의 화가는 분명 창조적인 개인이다. 동시에 그 안에는 전통과 개인성 사이의 작용,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자식, 집과 산, 먹과 종이, 기억과 반복처럼 그들을 통과하는 것들이 있다. 저자성은 어느 한 손에만 속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개별적인 손이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제주 화산암에서는 질문이 다시 달라진다. 화산은 인간이 아니지만 창조가 인간만의 특권이 아니며 시작과 끝이 분명한 하나의 사건도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게 한다. 창조는 이미 진행 중인 과정이고 우리가 보여주는 것은 그 과정의 한 단면, 하나의 절단일 뿐이다.

AI 역시 일종의 통로로 사용했다. 인간 화가도 계보가 통과하는 하나의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제작된 모든 회화의 유령이 새 캔버스에 머문다. 강이룬의 그래픽 아이덴티티에서 AI가 만든 시는 특정한 데이터셋과 매개변수 안에서 작품과 참여자의 이미지에 반응한다. 저자성은 분산돼 있지만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그래서 더 흥미로운 질문은 AI가 저자인가 아닌가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꿈꾸고 상상하고 관계 맺고 감각하며 형성하고 변형하는 데 어떤 새로운 역량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각 도시가 자신만의 비엔날레를 만든다고 말한 바 있다. 이번 비엔날레에는 광주의 특성과 역사가 어떻게 반영됐나. 5·18민주화운동뿐 아니라 허백련의 농업교육과 차 문화, 운림산방의 계보와 자연미술의 실천까지 다루는데, 이를 통해 광주의 어떤 계보를 제안하고자 하나.
5·18은 이번 비엔날레의 가장 깊은 토대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그 정신을 최대한 존중하며 돌보고 계속 자라게 하면서 다른 역사와의 연결 역시 천천히 확장하고자 한다. 왕 투오(Wang Tuo)의 〈래칫 드릴(Ratchet Drill)〉(2026)처럼 광주를 아시아 곳곳에서 아래로부터 일어난 봉기들과 나란히 바라보는 이유다.

다른 방법은 특정 사람, 그림, 방에 가까이 머무는 것이다. 오월어머니집을 통해 시도하는 것이 그렇다. 주홍과 함께 제작한 322점의 그림에는 1980년 5월의 이야기가 응축돼 있다. 그러나 5·18은 맞서 싸운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통과 부상, 트라우마와 상실을 안고 이후의 삶을 이어간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계속 살아가고, 계속 변화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그림에는 이러한 역사와 함께 가족과 꽃, 과일, 회복과 우정, 일상의 삶이 놓인다.

한편으로는 민중미술의 역사와 광주시민미술학교, 사회적 도구로서의 목판화가 있다. 목판화는 복제가 가능하고 옮길 수 있으며 공동체 안에서 유통될 수 있다. 크리스티앙 니얌페타(Christian Nyampeta)는 뉴욕에서의 워크숍과 대화, 관계의 형식을 통해 이 역사를 다시 활성화하고, 뉴욕에서 만들어진 작품을 다시 광주로 가져왔다.

다른 지층에는 허백련의 회화와 차 재배, 농업과 교육이 있다. 그의 실천은 문인문화를 회화와 시, 세련된 취향으로만 보는 대신 학교와 농사,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는 광주시민미술학교나 니얌페타의 워크숍과 연결된다. 서로 전혀 다른 교육의 형태지만 지식과 실천, 집단적 삶이 어떻게 전승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광주는 봉기의 도시인 동시에 다양한 실천의 도시다.

이번 비엔날레는 예술감독과 세 명의 큐레이터, 두 명의 어시스턴트 큐레이터가 함께 만들었다. 서로 다른 팀원들의 연구와 관점, 의견 차이는 전시 안에서 어떻게 남았나. 다른 큐레이터의 제안으로 처음의 판단이나 작가 선정이 크게 달라진 사례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차이와 함께 일하는 것이 과정의 핵심이었고 그 흔적은 전시 곳곳에 남았다고 생각한다. 흥미롭게도 작가 선정에서는 큰 의견 충돌이 거의 없었다. 비교적 제한된 수의 작가와 깊이 있게 작업하기로 처음부터 결정했기 때문인지 과정은 매우 순조롭고 종종 만장일치로 진행되었다. 명단은 빠르게 채워졌고, 누구를 넣을 것인가보다 어디까지 더 확장할 수 있을 것인가를 논의하는 일이 잦았다.

네 사람이 함께 일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이 가끔 놀랍다. 물론 어려운 순간과 판단도 있었다. 한번은 AI가 한 작품을 김밥으로 렌더링한 사건이 있었다.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동료들은납득하지 못했다. 지금 우리는 이를 ‘김밥 사건’이라고 부른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이 사건은 전시가 하나의 상상력을 모든 것에 일방적으로 덧씌우는 작업이 아니라 유머와 위험, 명료함과 기이함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것인지 서로 다른 기준을 두고 협상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되새기게 해주었다.

나는 예술감독이지만 동시에 작가다. 이 역할을 ‘작가이기도 한 큐레이터’나 ‘큐레이터인 척하는 작가’가 아니라 ‘큐레토리얼하게 작업하는 작가’의 위치에서 맡고 싶었다. 이는 내가 작품을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이 프로젝트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한계에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시험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호기심과 애정을 가지고 일한다. 그 과정에는 끊임없는 협상이 있었고, 단지 받아들이는 데서 끝내지 않고 어려움을 더 기이하거나 강한 무엇으로 성장시켜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결국 우리 각각의 저자성은 서로 녹아들었다.

가이드북은 좋은 예다. 전시를 안내하는 가이드의 목소리로 쓰인, 저자성에 대한 하나의 실험이기도 하다. 내가 작가로서 계속 전시를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큐레토리얼팀과 전시팀, 재단의 신뢰 덕분이다. 여기서 신뢰는 동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의견 차이와 불확실성이 전시의 형태 속에서 의미 있는 부분이 될 만큼 오래도록 활성 상태로 남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제임스 베닝 〈스템플 패스〉(스틸)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122분 2012
제공: 작가 및 베를린 노이게림슈나이더 갤러리

관람객 수나 언론의 비평적 평가 외에 비엔날레가 의미 있었는지를 판단할 다른 기준이 있다면 무엇인가.
비엔날레가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면 나에게 큰 의미가 있다. 한 번의 만남이, 그리고 변화한 한 사람의 삶이 어떤 차이를 만들지는 알 수 없다. 전시 제목을 가져온 릴케의「아폴로의 고대 흉상」도 그렇게 읽을 수 있다. 하나의 작품과의 만남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남에는 적어도 두 측면이 필요하다. 만남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하고 때로는 그 준비에도 실천이 필요하다. 감각과 감수성의 범위를 넓혀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도 20년에 걸쳐 세 번을 시도한 끝에야 비로소 릴케의 글 속으로 제대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번 열리고 나니 많은 것이 함께 열렸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이 답을 쓰는 데까지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릴케 역시 내 삶을 바꾼 셈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적어도 한 사람에게 그런 순간이 한번은 있기를 바란다. 너무 쉬운 목표처럼 들릴 수도 있고 거의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목표일 수도 있다. 하나의 순간, 작품, 문장, 이미지, 소리 혹은 방 하나가 전시장을 떠난 뒤에도 누군가를 따라 집까지 가는 것. ‘삶을 바꾸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비엔날레는 일시적으로 열리고 사라지지만 잔여물을 남긴다. 작가와 관객, 도시와 기관, 그 전시를 만든 사람들 안에 흔적이 남는다. 때로 그 흔적은 아주 길고 미묘한 길을 지난 뒤에야 꽃을 피운다.


2026 부산비엔날레 《불협하는 합창》

8.29~11.1 부산현대미술관, 스페이스 원지, (구)부산남고등학교

2026 부산비엔날레《불협하는 합창》은 ‘듣기’를 전시의 태도이자 집합의 실천으로 제시한다. 공동 전시감독 에블린 사이먼스와 아말 칼라프는 부산의 항구와 부두 노동, 민중가요와 레이브 문화에서 이어지는 저항과 집합의 감각을 동시대의 목소리와 연결한다. 부산현대미술관, 스페이스 원지, (구)부산남고등학교는 각각 다른 박자와 리듬을 지닌 세 개의 ‘악장 (movement)’으로 구성된다. 알고리즘이 미술을 빠르게 읽고 소비할 수 있는 이미지로 평평하게 만드는 시대, 두 감독은 소리를 몸과 시간을 엮고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힘으로 바라본다. 이번 전시는 서로 다른 목소리를 하나로 봉합하지 않은 채, 관람객에게 충분히 머물고 경청하며 다른 미래를 함께 상상하기를 제안한다.

황수진 기자

왼쪽 아말 칼라프(Amal Khalaf) 사진: Christa Holka
오른쪽 에블린 사이먼스(Evelyn Simons) 사진: Sander Houthuys

한국 독자들에게 두 분의 활동은 다소 낯설 수 있다. 지금의 큐레이팅 방식에 영향을 준 경험과 그 경험에서 얻은 원칙이 이번 부산비엔날레에서 어떤 선택으로 이어졌나?
아말 칼라프 서펜타인의 에지웨어 로드 프로젝트(Edgware Road Project)/센터 포 파서블 스터디스(Centre for Possible Studies)와 이후 장기 협업 프로젝트 ‘라디오 발라즈(Radio Ballads)’에서 16년 넘게 일한 시간을 지금도 자주 되돌아본다. 당시 돌봄 노동자와 가사 노동자,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을 대신해 어떤 해석을 내놓기보다 그들이 이미 해오던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다. 그 과정에서 경청은 큐레이팅에 앞서 필요한 준비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배웠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는 누가 이야기하고 누가 기록하는지, 또 누가 주체가 되고 누가 대상이 되는지에 관한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트린 민하가 말한 ‘대신 말하기(speaking for)’가 아닌 ‘곁에서 말하기(speaking nearby)’라는 개념은 이런 고민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되어주었다. 누군가의 경험을 대신 말하기보다 그 곁에 머무르는 태도다. 이는 큐레이터를 권위 있는 해석자가 아니라 예술가의 작업 과정 곁에 서는 사람으로 다시 생각하게 했다.

부산에서 내린 결정들도 이러한 경험에서 출발했다. 외부자로서 부산에 머문 1년 동안, 이 과정이 어떻게 서로 배우는 자리가 될 수 있을지를 계속 고민했다. 부산의 민중가요 역사를 접했을 때도 그것을 외부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는 대상으로 삼지 않으려 했다. 민중가요 저장소의 김영구와 그의 아카이브 역시 단순히 자료를 제공하는 역할이 아니라 전시의 저자로 참여한다. 김영구는 임민욱의 리서치에 함께했고, 비엔날레의 리서치 공간에 들어갈 노래와 기록 자료도 직접 선별하고 구성했다. 이러한 커미셔닝 방식은 전시 안에 개방성과 위험을 남겨두는 ‘둘라(doula)로서의 큐레이터’라는 태도와도 이어진다. 큐레이터가 모든 것을 정하고 이끄는 저자가 아니라, 프로젝트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모습을 갖춰갈 수 있도록 곁에서 그 조건을 마련하고 지켜보는 것이다.

에블린 사이먼스 벨기에의 폐쇄된 군사시설에서 열리는 전자음악 페스티벌 호르스트 아트앤뮤직(Horst Arts & Music)에서 보낸 시간은 나에게 결정적이었다. 작은 팀이 정해진 틀이 없는 환경에서 시각예술과 퍼포먼스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변동하는 조건 속에서 프로그램도 현장의 대화에 따라 변화해야 했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기관들이 밤의 문화와 클럽 문화를 끌어안으려 할 때, 고유한 힘을 비워낸 채 껍데기만 남기는 일에 가담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되었다. 언더그라운드 레이브 문화는 완전히 해독되거나 미학으로 포장해 팔 수 없기에 특유의 힘을 지닌다. 중요한 것은 이 문화를 단순히 미술관 안으로 옮기는 데 있지 않고, 실천의 서로 다른 측면을 어디에서 보여주고 어떻게 매개할지다. 부산에서도 참여작가들의 DJ, 프로듀서, 클럽 기획 활동을 인위적으로 떼어놓고 싶지 않았지만, 미술관이 그 모든 것을 담는 그릇이 되길 바란 것도 아니다. 그래서 지역 클럽 ‘아웃풋’, 커뮤니티 라디오 ‘라디오 레볼루션’, 성격이 다른 세 전시장 등 다양한 모임의 형식을 함께 고민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전시를 확장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비엔날레를 둘러싼 예술적·사회적 생태계의 여러 부분이 각자의 조건과 방식으로 존재하도록 하는 자리다.

우미 이시하라 〈Gravity and Radiance〉 HD 영상 설치 30분 2022

줄리앙 크뤼제 《2021 마르셀 뒤샹 상》 퐁피두 센터 전시 전경 2021

현장에서 새롭게 발견한 오늘의 부산은 어떤 모습이었나?
아말 칼라프 항구의 역사가 과거형의 산업유산 이야기로 읽힐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함께 조직해 온 움직임과 민중가요는 아카이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젊은 활동가와 음악가들이 계속 새롭게 써 내려가는 살아 있는 문법임을 확인했다. 노동과 저항을 기념해야 할 역사라기보다 오늘에도 유효한 실천 방식으로 보게 된 것이다. 임민욱의 작업에서 배는 영도 해안을 따라 집단행동으로 완전히 결집되지 않는 여러 장면을 지나고, 마지막에는 2011년 영도조선소에서 김진숙이 벌인 309일간의 크레인 고공농성과 연결된 녹음을 바탕으로 한 사운드트랙과 함께 레이브로 이어진다. 구호와 베이스라인 사이의 연속성은 비엔날레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이다.

에블린 사이먼스 한국에서는 저항과 반문화의 역사가 공동의 문화사에 여전히 살아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사회가 저항의 역사를 과거로 남겨두지 않고, 앞으로 이어갈 자원으로 다시 받아들이는 데에는 큰 힘이 있다. 민중가요가 지금도 계속 전해지고 새롭게 해석되며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며, 이번 비엔날레 역시 역사가 어떻게 기억되는지, 누가 그 기억을 전하는지, 그 역사가 현재에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공간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임민욱〈동해사〉(스틸) 3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D 애니메이션 9분 2024 제공: 작가

공적 언어가 알고리즘 속에서 힘을 잃어가는 상황이 기획의 출발점이었다고 들었다. 예술 현장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경향은 무엇이며, 이것이 전시 구성에 어떻게 반영됐나?
아말 칼라프 오마르 엘 아카드(Omar El Akkad)가 제국이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쓴 글처럼, 공포의 실체를 또렷이 드러내기보다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언어에 관한 이야기다. 미술계 역시 작가와 그 입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단순화하고, 짧은 벽면 텍스트로 즉시 번역하려는 ‘복잡성의 평면화’ 경향이 있다. 또 하나는 문화노동의 조건 그 자체다. 누가 보수를 받는지, 누가 후원하는지, 누구의 노동이 보이지 않는 채로 남는지의 문제다. 전시는 저항과 이견을 훌륭하게 다루면서도 제작 과정에서는 추출의 구조를 되풀이할 수 있다. 외부에서 온 큐레이터로서 이러한 구조에 연루되는 흐름을 직시하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두 경향은 작가 선정에 영향을 주었다. 관람객에게 ‘시간’을 요구하는 실천, 즉 오래 머물고 세 전시장을 오가며 다시 만날 때마다 다르게 이해되는 작업을 찾았다. 어떤 체계 안에서 이견이나 저항이 완전히 판독 가능한 것이 되었다면, 대개 그 체계는 이미 그것을 흡수하는 법을 배운 셈이기 때문이다.

에블린 사이먼스 소셜미디어가 예술을 경험하는 방식에 미치는 영향을 계속 고민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이 운영하는 플랫폼이 알고리즘으로 정보 흐름을 좌우하는 상황을 매켄지 와크는 ‘벡터리즘(vectoralism)’이라고 부른다. 온라인 세계가 우리의 언어와 소통 방식을 비워내고, 행동 데이터를 추출하며, 우리의 주의를 수익화하고 세계를 좁힐 때 예술과 문화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번 비엔날레는 쉽게 소비되는 이미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대신 함께 모이는 일, 혼종적 공동 저작, 시간 속에서 이어지며, 바라건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뉘앙스와 복잡성이 그대로 존재하도록 하고, 이해하는 데 인내와 시간이 필요한 작업을 마주할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

참여 작가군을 구성할 때 가장 중요하게 삼은 기준은 무엇이었나? 역사적 유산과 현재의 목소리는 어떤 관계를 맺나?
에블린 사이먼스 작가군은 하나의 별자리처럼 직관과 공동 리서치로 구성되었으며, 출품작의 약 70%가 커미션 작업이다. 어슐러 K. 르 귄, 랄라 루크, 드렉시아 같은 이름들은 이번 비엔날레 전반을 관통하는 지도, 악보, 음악 기보에 대한 관심과 연결된다. 대안적 세계를 상상하고 시험해 현실로 불러오는 방식들이다.

드렉시아의 초기 앨범 아트를 아부카딤 하크, 제럴드 도널드와의 협업으로 선보이고, 그 유산은 줄리앙 크뤼제, 브라힘 탈의 설치와 대화를 나눈다. 강서경의 유산 역시 이전 협업자들과 함께 비엔날레에서 선보인다. 이러한 작업과 자료는 세대 간의 대화를 만든다.

아말 칼라프 처음부터 연대기나 명성은 중요한 기준이 아니었다. 전시를 구성하면서는 하나의 실천이 다른 실천과 이어져 노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래 하나의 음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어두운 시대에 길을 찾을 여지를 만들어주는 작가들과 함께하고자 했다.

르 귄의 작업은 역사적 기준점이라기보다 오늘날 같은 질문을 던지는 작가들의 살아 있는 대화 상대로 자리한다. 그의 지도와 드로잉은 세계 만들기가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인 과정임을 보여준다. 랄라 루크의 작업 역시 그것이 응답했던 정치적 조건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완으로 남아 있다. 드렉시아가 만든 ‘중간 항로(Middle Passage)’를 바탕으로 만든 신화는 수많은 음악가와 작가, 사운드 기반 예술가들이 여전히 즉흥적으로 변주하는 하나의 악보가 된다. 마리암 카바의 말처럼 ‘희망은 훈련(hope is a discipline)’이다. 유산과 함께 작업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만드는 것이 결국 다음 세대의 것이 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구조적으로 별도의 ‘레거시 룸’을 두지 않고 아카이브와 역사적 존재들을 세 전시장 전체에 분산해 새로운 커미션 작업 바로 곁에 놓았다. 과거시제로 밀려나지 않고 같은 호흡 안에서 대화하도록 한 것이다.

아말의 ‘라디오 발라즈’에서 소리는 돌봄 종사자와 주민의 경험을 오랜 시간 함께 기록하는 방식이었고, 에블린에게 음악은 레이브와 시위 속에서 낯선 사람들을 한순간 연결하는 힘이었다. 두 분이 생각하는 소리의 성격은 어디에서 같고 어디에서 달랐나?
아말 칼라프 ‘라디오 발라즈’는 전시 이전부터 주민, 노동자 곁에서 수년간 진행한 리서치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이고 속삭이며 시적이고 외치고 노래하는, 목소리의 서로 다른 결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에블린과 내가 만나는 지점은 소리가 언어로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몸과 시간을 조직한다는 확신이다. 우리는 이를 ‘집합으로서의 소리(sound-as-assembly)’라고 생각한다. 소리는 집단성이 밀려오는 파도일 수도, 더 느리게 관계를 만드는 방식일 수도 있으며, 누가 말하고 그 목소리를 찾기까지 무엇을 감수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소리가 단순히 설명이나 보조 역할에 머문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우리에게 소리는 실제로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다.

에블린 사이먼스 콘서트나 레이브의 순간 자체는 짧게 끝날 수 있지만, 그 이전까지 이어지는 전체 과정이 존재하며 그 과정 역시 똑같이 중요하다. 그 순간 소리와 그 시공간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감싸이는 경험은 마법 같다.

세 전시 공간을 ‘악장(movement)’이라고 부른 이유는 무엇인가?
에블린 사이먼스 ‘무브먼트’, 즉 ‘악장’이라는 개념은 유동적이고 열려 있으며 계속 움직이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시간에 구획되는 ‘장’이나 ‘막’, 혹은 공간적으로 규정되는 ‘전시장’ 같은 말보다 접근 방식에 훨씬 잘 맞는다. 우리의 큐레이팅은 어떤 주장이나 선언을 내세우기보다, 서로 다른 실천과 목소리가 다성적으로 공명하도록 두는 데 가깝다. 또한 ‘무브먼트’에는 정치적 함의도 있다. 민주화운동에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주체적으로 행동할 힘이 있으며 계속 스스로 조직할 필요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아말 칼라프 ‘무브먼트’는 사회운동이자, 모였다가 흩어지고 다시 형태를 만드는 파도에 가까운 의미다. 2019년 홍콩의 ‘물이 되어라(Be Water)’ 전략에서 소리는 저항의 배경이 아니라 저항이 이동하는 흐름 그 자체였다. 관람객이 지나가면 끝나는 고정된 섹션이 아니라 모이고 흩어지는 무브먼트가 되기를 바랐다. ‘무브먼트’는 지속 시간과 템포, 리듬을 뜻하기도 한다. 각 전시장에는 저마다의 박자표가 필요했고, 관람객에게 서로 다른 질문을 던진다. 부산현대미술관은 작가의 세계에 충분히 머무르기, 스페이스 원지는 물과 몸의 관계를 감각하기, (구)부산남고등학교는 집단적 미래를 만들어가는 참여자로 자신을 상상하기를 요청한다.

2024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과 베니스비엔날레《In Minor Keys》 등 최근 국제전은 시각적 과잉에서 한발 물러나 듣기와 리듬, 경청을 전시의 중요한 태도로 제안한다. 이 흐름 속에서 부산비엔날레는 무엇이 다른가?
아말 칼라프 ‘듣기’, 혹은 청각을 우선하는 태도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압도적인 알고리즘 기반의 시각 과잉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불협하는 합창》이 다른 지점은 고요함이 관조에만 머물도록 두지 않는 데 있다. 자크 랑시에르의 ‘불화(dissensus)’ 개념처럼 무엇이 보이고 들릴 수 있도록 허용되는가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우리는 소리를 행동을 촉구하는 힘으로 다룬다. 합창은 조용하지 않으며 집단적이고 방향성을 가진다. 듀킴처럼 저항의 감각을 몸의 차원으로 옮기거나, 말이 힘을 잃을 때 호흡, 진동, 몸짓을 방법으로 삼는 작가들과 함께 듣기 자체가 행동의 한 형태임을 보여준다.

에블린 사이먼스 사람들이 경험의 기록이나 스펙터클보다 실제 경험 자체를 갈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을 들여 경험해야 하는 작업과 사운드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선정적인 방식으로 소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바이럴을 노린 대형 설치와 과장된 제스처 같은 미술의 ‘디즈니화’, 여기에 예술 생산이나 언어 속으로 스며드는 ‘AI 슬롭’까지 더해지면 미술계가 다른 곳에서 의미와 진정성을 찾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2026 경기도자비엔날레 《땅이 만든다》

9.18~11.1 이천·광주·여주 및 경기 곳곳

이대형 예술감독은 도자를 인간의 손에 의해 완성되는 수동적 재료가 아니라, 열과 중력, 수분과 압력, 화학 반응 속에서 스스로 변화하며 작가와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생각하는 동반자’로 바라본다. 개막을 앞두고 이대형을 만나《땅이 만든다》에서 다시 묻는 도자의 현재와 미래를 들었다.

강재영 기자

이번 경기도자비엔날레 감독 선임을 두고 파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본전시 《땅이 만든다》에서 도자를 중심으로 제시할 새로운 관점은 무엇인가.
사실 도자와 관련한 전시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10여 년 전 첨단 세라믹을 주제로 큰 전시를 두 차례 기획했다. 당시에도 세라믹을 도자기만으로 보지 않고 첨단 소재와 센서, 기술까지 포함하는 넓은 범위에서 접근했다. 한국도자재단에서도 그 전시를 주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디지털 환경에서는 주로 눈으로 본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냄새를 맡고, 손으로 만지고, 두드려 소리를 듣고, 무게를 느끼는 종합적인 감각이 필요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시점에 도자비엔날레 제안을 받았고, 흙이라는 재료를 떠올리게 됐다. 인간이 어릴 때 연필보다 먼저 만나는 것이 흙일 수도 있다. 모래성을 쌓고 땅에 그림을 그리고, 점토를 만지면 자신의 지문과 몸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흙에 남는다.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물과 음식을 담을 그릇을 만든 재료도 흙이었고, 지금은 우주선에도 세라믹 기술이 쓰인다. 가장 오래된 재료인 동시에 가장 먼 미래까지 닿아있는 재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흙을 생각하다가 ‘어스(Earth)’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흙이면서 땅이고, 지구이면서 대지인 단어다. 이번 비엔날레는 거기서 시작했다.

흙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주제로 돌아온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AI와 디지털 기술에 너무 깊이 들어가다 보니 나 스스로도 균형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을 계속 공부하면서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것, 인간의 감각과 생태적인 관계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흙은 과거가 아니다. 가장 오래된 물질인 흙에서 출발해서 그것을 생태와 기술, 지질학적인 시간, 문화적 다양성, 나아가 미래와 행성의 문제까지 연결할 것이다. 이번 전시는 전통과 현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이 아니다. 도자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물질적 깊이와 긴 시간성을 다시 바라보고, 그것을 오늘의 언어와 연결하는 데에 더 가깝다.

도예가들은 오래전부터 흙의 수축과 균열 성질에 주목해 불과 가마를 작업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이번 전시가 흙을 ‘능동적인 협력자’로 정의하는 관점은 기존 도예의 물질 이해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어스’라는 하나의 단어에서 이번 전시의 세 장을 생각했다. 먼저 흙을 수직선으로 생각했다. 땅속으로 내려가면 지층이 있고, 깊이에 따라 압력이 달라지고 시간이 축적된다. 흙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과 기억, 역사가 쌓여 있다. 이것이 첫 번째 장 ‘흙이 만든다’의 출발점이다.

두 번째는 수평선이다. 우리가 “어느 나라의 땅인가”, “어떤 땅인가”라고 이야기하듯 장소에 따라 토질과 기후가 달라지고, 그것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 양태와 문화도 달라진다. 그래서 ‘땅이 만든다’에서는 장소가 만들어내는 문화적 다양성을 생각했다.

세 번째는 원이다. ‘메이드 인 코리아’나 ‘메이드 인 재팬’이 아니라 ‘메이드 인 어스(Made in Earth)’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리는 국적과 종교, 피부색이 다르고 그 차이 때문에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지구 바깥에서 보면 결국 같은 행성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래서 마지막 장에서는 동심원적인포용성과 행성적인 사고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결국 이번 전시에서 ‘흙’은 작가가 일방적으로 형태를 부여하는 수동적인 재료가 아니다. 흙에 축적된 시간과 장소, 기후와 압력, 지질학적 변화까지 작품의 형성에 함께 관여하는 요소로 바라본다.

본전시의 세 개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나 프로젝트를 소개해 달라.
전시는 세 장으로 나뉘어 있지만, 작품을 세 장으로 완전히 분리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작업 안에는 수직과 수평, 원의 요소가 함께 있다. 어디에 더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 전시의 위치를 정한 것이다.

인도의 비렌더 쿠마르 야다브는 탄광에서 일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성장한 작가다. 그는 인도 미르자푸르의 벽돌 가마터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와 계절 노동자들의 삶에 주목해 왔다. 특히 매일 거친 흙과 모래, 벽돌을 다루며 지문마저 닳아 없어지는 노동자들의 손을 통해 노동의 흔적과 신체의 기억을 탐구한다.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경기 지역의 한국도예고등학교 학생들과 협업해 작품을 완성한다. 인도의 탄광 노동과 한국의 한옥 건축에 사용된 도구를 통해 서로 다른 세대와 문화, 지역과 시대를 가로지르는 노동의 흔적과 기억을 연결한다. 세노코즘은 기술을 매개로 인간과 자연이 감각적으로 만나는 방식을 탐구한다. 관람객이 식물을 만지면 접촉에 따라 소리가 반응하고, 살아 있는 나무에 귀나 몸을 대면 소리와 진동을 직접 느낄 수 있다. 센서와 음향 기술을 활용하지만, 기술 자체보다 우리가 평소 감지하지 못했던 자연의 존재를 몸으로 느끼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경험에 주목한다. 이완은 서구 박물관에 소장된 아시아 문화재의 이동과 소유 문제를 다룬다. 해외 박물관 소장 유물을 3D 스캔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번 비엔날레 참여 작가인 안성만과 협업해 이를 도자로 다시 구현한다. 이를 통해 문화유산이 원래의 장소와 맥락에서 분리되어 온 역사를 되짚고, 오늘날 어떻게 다시 바라볼 것인지 질문한다. 엘레나 후르토바는 한국전쟁과 분단의 기억이 남아 있는 DMZ 인근 세 지역에서 채집한 흙으로 작업한다. 서로 다른 장소의 흙을 압축해 거대한 덩어리로 제시하며, 땅에 축적된 역사와 기억, 장소의 흔적을 물질 자체를 통해 드러낸다. 야스민 스미스는 지질학자 클리티 그라이스 교수와 협업하며 지하 1.3km 깊이에 담긴 6600만 년 전, 인간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의 ‘딥 타임(Deep Time)’을 탐구한다. 지역의 지질과 식물에서 얻은 재료를 도자 작업으로 옮기며, 인간의 역사보다 압도적으로 긴 시간이 흙과 돌 안에 축적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경기도 도자 생산 기반 위에서 열린다. 지역 도예가의 노동과 기술, 가마와 원료, 도자산업의 현실은 전시 안에서 어떻게 다뤄지나.
이번 비엔날레는 이천 광주 여주에서 펼쳐진다. 먼저 이천의 본전시는 동시대미술에 가까운 전시로 구성하고 있다. 반면 광주는 명장과 전통 도자를 집중해서 보여주고, 여주는 생활도자와 실제 생활 속에서 사용되고 유통되는 영역을 중심으로 간다.

세 지역 전체를 하나의 개념으로 다시 묶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각 지역이 그동안 형성해 온 성격과 방향을 살리는 편이 좋다고 봤다. 처음 광주에서 명장들을 만났을 때 그분들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으나,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는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동안 비엔날레를 현대적으로 만들려고 하면 전통 도예가가 빠지고, 반대로 전통을 강조하면 동시대미술과 멀어지는 식의 구분이 있었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단순히 기술적으로 훌륭한 도자로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기술과 시간이 가진 깊이를 충분한 이야기와 맥락 안에서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젊은 세대와의 연결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미래에게》를 통해 전국의 젊은 도예가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해외 작가와 이천의 한국도예고등학교 학생들이 실제로 함께 제작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한다. 서로 다른 세대와 문화가 만나야 도자의 다음 이야기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엘레나 후르토바 〈흙의 수행–암석이 풍화할 때〉암스텔파르크와 암스테르담 그론드방크에서 채취한 토양
가변크기 2023 Zone2Source,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사진: 토마스 렌덴

‘포커스 호주’는 호주의 땅과 공동체, 이주와 문화적 기억을 서로 다른 배경의 작가들을 통해 살펴본다. 특히 ‘원주민’ 공동체의 지식과 역사를 생태적 지혜나 이국적인 이미지로 낭만화하지 않기 위해 어떤 협업과 해석의 과정을 거쳤나?
호주미술관협회 콘퍼런스에 기조연사로 참여하면서 호주의 여러 미술관 관계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가운데 하나가 원주민을 ‘퍼스트 네이션’이라고 부르는 관행이었다. 단순한 명칭의 차이가 아니라 이 땅에 먼저 있었던 사람들을 첫 번째 주체로 인정하는 태도가 언어 안에 담겨 있다고 느꼈다.

그 이후 퍼스트 네이션에 대해 공부하면서 헤르만스버그 포터스라는 아티스트 그룹을 알게 됐다. 이 공동체는 자신들의 언어를 유지하고 있고 영어는 그들에게 여러 언어 가운데 하나다. 그들이 도자 표면에 그려 넣는 것도 거창한 주제라기보다 자신들의 일상과 땅,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굉장히 강력하다.

이들을 보며 내가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기술의 우열이 아니라 작품이 자신이 살아가는 땅과 공동체의 이야기를 어떻게 품고 있는가였다. 그들의 작업이 호주의 주요 미술관 컬렉션에 들어가는 것도 결국 그러한 이야기와 역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호주관을 기획했던 나탈리 킹을 ‘포커스 호주’ 커미셔너로 초대했다. ‘포커스 컨트리’라는 형식 역시 이번에 한 번으로 끝내기보다 앞으로 이어갈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특정 국가의 작가를 단순히 몇 명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국가의 문화와 담론, 여러 기관이 비엔날레 안에서 더 깊게 관계를 맺는 구조가 될 수 있다.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관객이 도자를 어떻게 새롭게 경험하기를 바라는가?
요즘 아이들은 곤충을 무서워하고 자연도 낯설어한다. 도시에서 성장하고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자연은 점점 자신과 동떨어진 것이 되고 있다.

AI 시대에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가 공감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충분히 학습한 AI가 언젠가는 제대로 경험하지 않은 인간보다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의 공감능력을 보이는 반응을 할 수도 있다. 그런 시대가 올수록 인간은 자신의 몸을 통해 세계를 감각하는 경험을 잃지 않아야 한다.

나뭇잎도 만져보고, 나무를 끌어안아 보고, 흙을 만지면서 그 안의 개미가 움직이는 것도 봐야 한다. 햇볕과 바람을 몸으로 느끼고 자신의 몸에 무게가 있다는 것도 느껴야 한다. 지금은 그런 경험을 할 기회 자체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번 비엔날레를 보고 잠들어 있던 감각을 다시 깨우고, 흙과 땅에 조금 더 가까이 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감각이 살아나야 공감 능력도 살아나고 창의성도 생긴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AI와 디지털 기술을 다루면서 생긴 결핍이 스스로를 ‘흙’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흙과 자연에 가까워져야 한다는 것을 작가들과 이야기하면서 더 많이 느꼈다. 관객들도 이번 비엔날레에서 그런 감각을 조금이라도 회복했으면 한다.

2026년 9월호 (VOL.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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