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Curator’s Voice & Critique
《엘 아나추이: LuwVor》
《남다현: 초특가展》
《강나영: 드림하우스》
《송영숙: Meditation on the Road 길 위에서》
《75년 동안의 해와 별》/《최선: 한 날》
김소정·노재민·콘노 유키·김정은·강재영
Curator’s Voice & Critique
《엘 아나추이: LuwVor》
화이트 큐브 서울 3.18~4.18
김소정 기자

엘 아나추이〈LuwVor Ⅱ〉알루미늄, 구리선 270×303cm 2025
화이트 큐브 《LuwVor》 전시 전경 2025
엘 아나추이(El Anatsui)는 아프리카 서북단 대서양 연안 국가인 가나에서 태어나 나이지리아를 오가며 생활했다. 당시 영국의 식민 지배 아래 놓였던 양국에서, 미술이란 학문은 으레 데생과 오일 페인팅, 석고나 대리석을 통해 접하고 익히게 되는 서구의 문화 양식이었다. 이처럼 한번 이식된 전통은 두 나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명맥을 이어갔으며, 나이지리아대의 은수카 캠퍼스에서 조소를 가르치던 아나추이가 재료에 대한 고민에 빠져든 계기와 무관하지 않다. 서구의 미술과 현실 간의 괴리는 서아프리카의 환경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가령, 정으로 쪼아 다듬으며 작업하는 화강암, 용접을 통해 형상을 구축하는 철근, 말끔한 흰색의 석고 따위를 미대 울타리 밖 일상에서 구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1990년대 어느 날 산책을 하던 아나추이는 비닐봉지에 담긴 병뚜껑 한 무더기를 발견한다. 그의 작업 세계를 대표하게 된 이 투박하고 이례적인 재료 “보틀캡”을 작가가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던 배경에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탐미 이상의 철학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번 화이트 큐브에서의 전시를 위해 서울을 찾은 루이스 네리 엘아나추이스튜디오 디렉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각가로서 확고한 정체성을 지닌 아나추이는 ‘환경이 던져주는 것으로 작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고수해 왔다.” 병뚜껑을 발견하기 전에 그는 시장에서 쓰이던 둥근 나무 쟁반이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깨진 항아리 등으로 작업을 하며, 지역의 특성을 강하게 발휘하는 ‘주어진 재료’에 대한 탐색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아나추이에게 재료를 던져주는 환경이란 단순히 생활 반경, 작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나 예술적 조건에 국한되는 현실만이 아니다. 이는 서아프리카라는 세계의 변두리에서 강력한 공동체 사회를 결성했던 아칸족의 정신적 토대이자 식민 시대를 경험하고 극복한 역사, 탈식민주의를 성찰하는 사회적 움직임과 실천까지를 아우르며 예술가로서의 역할과 의미에 무게를 더하는 일종의 시대정신이면서 가능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병뚜껑의 다양한 변형과 조형 과정에서도 그가 조각가로서 어떤 고민을 해 왔는지가 잘 드러난다. 대체로 일회성 사용을 목적으로 제조되는 알루미늄 병뚜껑은 연성이 높아 쉽게 자르거나 구부릴 수 있다. 회사별로, 제품이나 브랜드별로 만들어 내놓는 병뚜껑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작가는 지난 30여 년간 병뚜껑을 두드려서 얇게 펴낸 다음 작은 조각처럼 잘라 서로 연결하는 방법, 병뚜껑의 라벨이 잘 보이도록 가장자리를 접는 방법, 가느다란 끈처럼 만들어 그물망처럼 꿰어내는 방법 등 각 병뚜껑에 알맞게 다양한 가공법을 선보이며 하나의 재료가 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했다. 또한 가공 단계에 여러 공동체가 개입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뒀다. 병뚜껑의 작은 크기는 정밀하고 반복적인 수작업을 요하는데, 일반 사람들이 그 수공업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들에게 각각의 일정한 역할을 맡겨서 병뚜껑 조각들을 생산하는 공동의 노동 현장을 꾸리는 방법으로 2023년 현대자동차 커미션 프로젝트로 진행된 테이트모던 전시 《Behind the Red Moon》에서 보여준 높이 10m 이상의 대형 작품들도 탄생할 수 있었다. 루이스 네리 디렉터에 따르면 이 또한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가능성”을 믿었던 작가의 평소 신념에 따른 것으로, 작업량, 규모, 속도뿐 아니라 노예무역, 산업, 물자의 이동을 다루는 작품의 메시지를 증폭시키는 효과도 가져왔다. 아울러 그는 “이들 각자가 작업을 하다 보니 생각지 못한 새로운 방식의 작업이 나오기도 했다”며, 이렇게 만들어진 조각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엮어내는 형식은 마치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가는 것과 비슷했다고 전한다.
수천, 수백 개의 병뚜껑들이 서로 매달린 채 빛을 반사하는 풍경은 실로 장관이다. 이들은 전시장 한 축에 단단히 고정되어 걸려 있으나, 금속이라는 재료 특성상 관객과 끊임없이 빛을 주고받으며 표면의 일렁임을 선사한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빛의 반짝임은 사라지고 인간이 손끝으로 직접 매만졌을 것이 분명한 노동집약적인 구조물이 남는다. 성인 남성의 손톱만 한 납작한 병뚜껑에 가까이 들여다봐야 겨우 보이는 작은 구멍을 뚫고 구리선을 넣어 또 다른 병뚜껑과 반복적으로 연결한 집념의 결과물은 마치 평범한 이들의 지문처럼 저마다 고유한 형태와 이야기를 조용히 품고 있다. 그런가 하면, 병뚜껑을 둥근 모양으로 말아서 그물처럼 연결한 형태에서 기니안 만에 접한 어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망과 이를 손보던 어부들의 집단적 손놀림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인들에 의해 생산되고 소비되어 쓸모를 다한 병뚜껑은 아나추이의 세계 안에서 그 이동 경로만큼이나 풍부한 궤적을 내포하며 수명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엘 아나추이〈LuwVor Ⅰ〉알루미늄, 나무, 구리선 224×250cm 2025
사진: Jeon Byung Cheol 제공: 화이트 큐브
화이트 큐브가 이번에 서울에서 선보이는 《LuwVor》은 동명의 신작 4점으로 구성된 전시다. 아나추이는 자신이 사용하는 에웨어(Ewe, 가나와 토고에서 사용되는 언어)에서 ‘영혼’이나 ‘정신’과 관련된 의미를 지니는 단어를 차용해 ‘LuwVor’라는 제목을 만들었다. ‘서울’의 영문 발음이 ‘소울(soul)’과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한 언어유희이기도 하다. 10년 만에 개인전을 여는 도시 서울에 대한 아나추이의 헌정적 제스처로 읽힐 수 있겠으나, 사실 관람객이 그의 작품에서 어떤 ‘소울’을 느끼는 것은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나이지리아의 병뚜껑이라는 낯선 재료에서 출발해 집단 노동의 단계를 거쳐, 세속과 성스러운 장소를 가르는 휘장 같기도 하고 현실과 이생의 어딘가를 나누는 이정표 같기도 한 이 금속 드레이프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인식은 예술과 역사, 곧 아름다움과 처연함 사이의 독특한 지점을 끝없이 맴돈다.
천장에 매다는 방식으로 설치된 〈LuwVor Ⅱ〉(2025)는 관객이 그 주위를 돌며 작품의 모든 면을 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때 엉성하고 성기게 짜인 병뚜껑 사이의 틈으로 시선이 스며들어 그 너머의 공간에 가닿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그의 작품은 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압도적으로 점유하기보다 오히려 공간의 발견을 이끄는 조각으로 자리한다. 틈의 영역은 그의 작업에서 병뚜껑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동화 기계가 주는 완벽함이나 공장형 금속의 균질한 표면과는 거리가 먼, 인간만이 내보일 수 있는 기술적 결핍과 결함이 이곳에 있다. 여기는 식민지가 극복한 반세기의 역사에 대한 증언, 산업사회에서 간과된 노동과 물성의 중요성, 강대국의 논리를 뛰어넘는 인간 가치의 회복이 자리한 영역이다. 작가는 또한 작품의 위아래나 좌우와 같은 내적 위계를 설정하지 않고, 동일 작품을 전시 공간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로 설치함으로써 ‘비고정적 형태’의 조각 개념을 오랫동안 발전시켜 왔다. ‘LuwVor’ 연작은 이후 다른 공간에서 새로운 모습과 구성으로 다시 등장하며, 아나추이 작업 세계의 핵심인 유연함과 확장성을 다시 한번 각인시킬 것이다.
《남다현: 초특가展》
IBK 아트스테이션 3.9~27
노재민 기자

〈환전소 프로젝트〉(사진 오른쪽) 혼합재료 2021~ 《초특가展》 IBK 아트스테이션 전시 전경 2026
I Do Bargain
IBK 아트스테이션이 2026년 첫 전시로 선보인 남다현 개인전 《초특가展 Limited Time Only! Super Sales Event!》(이하 《초특가展》)는 제목에서부터 상업적 언어를 전면에 내건다. ‘초특가전’이라는 마트의 판촉 문구를 차용한 이 전시는, 현대미술의 가치가 형성되고 유통되는 과정을 전시장 내부로 끌어들인다. 이곳에서 전시는 더 이상 작품을 감상하는 장소가 아니라, 선택과 구매, 참여가 이루어지는 하나의 소비 환경으로 작동한다.
전시장의 인형뽑기 기계나 무인 결제 시스템은 일상에서 반복되는 소비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차용하며 미술의 맥락으로 이식한다. 관객은 작품을 바라보는 대신 고르고, 결제하고, 획득한다. 이때 작품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거래 가능한 상품으로 기능하며, 전시는 미술시장의 축소된 모형처럼 작동한다. 이러한 설정은 미술품이 거래되는 과정을 직관적인 경험의 층위로 환원한다. 문턱이 높아 보이는 미술시장 역시 결국 가격 책정과 유통, 소비라는 구조 위에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일상의 소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남다현은 이번 전시에서 셀프 계산대나 자동화된 결제 시스템을 비롯한 저가의 구매 메커니즘을 도입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개별 작업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합리적인 가격의 명작 프로젝트: 이아트〉(2024~)는 대형마트의 진열대를 연상시키는 연출 속에서 유명 현대미술 작품을 패러디한 작품들을 판매한다. 야요이 쿠사마, 다니엘 뷔랑, 댄 플래빈, 아이웨이웨이, 아니쉬 카푸어, 마크 로스코, 데이미언 허스트, 마우리치오 카텔란 등 미술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스타 작가의 작업들이 값싼 공산품 재료로 치환되어 진열됐다. 유명 작업이 실제 거래되었던 금액에서 99.9% 할인된 남다현의 판매작들은 관람객이 직접 바코드를 스캔해서 구매한 뒤 비닐봉투에 담아갈 수 있다.
〈환전소 프로젝트〉(2021~)는 더욱 직접적인 방식으로 가치의 문제를 전면화한다. 관객은 실제 화폐를 지불하고 작가가 손으로 그린 동일한 액면가의 ‘돈’을 교환받는다. 이때 손으로 그려진 화폐는 복제할 수 없는 원본이지만, 동시에 대량 복제를 전제로 하는 화폐라는 상징을 다루며 역설을 만들어낸다. 작품은 예술과 화폐가 공유하는 신뢰와 가치의 체계를 병치하며, 그 기반이 사회적 합의 위에 놓여 있음을 드러낸다.
한편, 〈예술일 수도? 아닐 수도? 뽑기방!〉(2025)은 문제의식을 보다 유희적인 방식으로 환기한다. 인형 뽑기에 사용되는 크레인 안에는 다카시 무라카미의 캐릭터를 패러디한 오브제와 한동안 연이은 품절을 기록했던 라부부 패러디 오브제가 뒤섞여 있다. 관객은 사실상 선택이 아닌 확률에 의해 작품(혹은 상품)을 획득하게 되며, 두 대상 사이의 위계는 흐려진다.

〈로봇 K-소비자〉(사진 왼쪽) 혼합재료 2026,
〈합리적인 가격의 명작 프로젝트: 이아트〉(사진 가운데) 혼합재료 2024~
《초특가展》 IBK 아트스테이션 전시 전경 2026
제공: IBK 기업은행
신작 〈로봇 K-소비자〉(2026)는 백남준의 로봇 시리즈를 오마주한 작품으로, 인체 형상을 구성하고 있는 10대의 중고 LED 모니터와 1대의 태블릿에 끊임없이 광고 이미지가 재생된다. 식품, 금융, 패션 등 다양한 업계의 광고가 과잉적으로 반복되는 화면은 소비를 끊임없이 유도하는 미디어 환경을 압축적으로 가시화한다.
중요한 것은 재료다. 남다현은 스티로폼, 박스, 기성품 등 일상적이고 저렴한 재료를 의도적으로 노출한다. 관객은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그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즉각적으로 인지하게 되고, 이어 “이것도 예술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한다. 값싼 물질성과 조악함은 이 전시에서 유머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매끈하게 마무리된 조형 대신 고의적으로 선택한 허술함은 미술의 권위를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그 권위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되비추는 역할을 한다.
남다현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재현의 방식 또한 주목할 만하다. 작가는 특정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작동하는 환경과 경험 전체를 재구성한다. 이는 개별 오브제의 재현이 아니라, 관객의 행위까지 포함하는 상황의 재연에 가깝다. 관객이 상품을 고르고 결제하는 행위는 단순한 참여를 넘어, 우리가 일상에서 수행하는 소비의 규율을 다시 반복하는 과정이 된다. 이때 관객은 작품의 외부에 머무르지 않고, 그 시스템을 완성하는 요소로 편입된다.
이러한 전략은 전시가 놓인 장소와도 긴밀히 맞물린다. 은행이라는 공간은 자본과 가치가 생산되고 교환되는 장소이며, 이는 전시의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강화한다. 관객은 작품을 감상하기보다 얼마인지를 먼저 따지게 되고, 그 순간 전시는 감상과 거래 사이의 경계를 교란한다.
그럼에도 이 전시는 특정한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어린이에게는 놀이로, 일반 관객에게는 소비의 경험으로, 미술계 내부자에게는 비판적 읽기로 작동하는 다층적 구조를 취한다. 관객은 반드시 미술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않아도 전시에 참여할 수 있으며, 동시에 더 깊이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열려있다. 남다현은 미술이 과도하게 화폐화되고 투기적 대상으로 전환되는 지점을 겨냥하지만, 그 비판은 직설적인 고발이 아니라 패러디와 코미디로 제시된다. 비판을 가볍게 소비하게 만드는 전략은, 미술의 문턱을 낮추면서도 그 비평적 기능을 유지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남다현은 인터뷰를 통해 “무엇이 예술인가 보다 어떻게 이것이 예술이 되는가를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작업을 한다”고 밝히며, “어떻게 예술이라는 가치를 부여받는지 생각하며 다양한 상업적인 문법을 차용한다”고 덧붙인 바 있다. 《초특가展》은 그 고민의 결과로 미술의 가치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소비되는지를 설명하기보다, 그것을 직접 경험하게 만드는 전시다. 남다현은 미술을 둘러싼 복잡한 구조를 제시하기보다, 그것을 과장하고 압축해 일상의 언어로 번역한다. 그리고 그 번역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긋남—값싼 재료와 고가의 가치, 감상과 소비, 작품과 상품의 간극—을 통해 오늘날 미술을 되묻는다.
《강나영: 드림하우스》
경기도미술관 2025.12.19~3.1
콘노 유키 미술비평

강나영 〈그가 그린 집〉 공간 설치, 혼합재료 600×350×300cm 2025
제공: 경기도미술관
드림하우스가 지어지는 곳: 설계도, 영화관, 땅속
강나영의 개인전 《드림하우스》는 아직 지어지지 않은 미래의 집에 관한 동생 강기민과의 대화로 시작한다. 가족 단톡방과 강나영의 개인톡을 오가며 나눈 이야기는 강기민의 설계도로 발전하고 강나영의 설치 구조물〈그가 그린 집〉(2025)과 단채널 영상 작업 〈드림하우스〉(2025)와 함께 전시에 소개된다. 보행에 어려움을 겪는 강기민이 꿈꾸는 집은 어떤 모습일까?
그 모습은 집의 기능을 각각 그린 설계도를 따라 소개된다. 이 설계도가 집의 어느 구역인지 서로 확인하는 대화는 흥미롭게도 ‘영화관’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시장에 놓인 강나영의 에세이 『행복 가족』(2025)을 읽어보면 그가 가족과 함께 영화관에 가는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집에만 있는 강기민에게 일반적인 영화관에서 감상하는 경험은 바깥 바람을 쐬고 세상과 접촉하는 중요한 기회가 된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을 이동식 침대에서 봐야 하는 어려움 또한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외부 세계의 장소를 집으로, 심지어 지하로 들여오자는 발상은 나의 개인적 공간이자 소유물인 집에 ‘게스트’로 초대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설계도에 그려진 영화관의 좌석은 넓지 않아 보일지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영화관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드림하우스〉에서 강기민은 대형 ‘스크린’ 대신 “TV[모니터]”라는 단어를 쓰는데, 그것은 일대일에 가까운 상태로 볼 수 있는 환경, 즉 내가 시선과 화면의 주인이 되는 조건임을 시사한다. 어쩌면 스크린은 그가 상상을 투영하는 설계도를 가리키지 않을까.
〈드림하우스〉는 강나영과 강기민의 대화로 시작하는데, 중간에 강기민이 가족 중 형과 누나(즉, 강나영)의 방을 설명하면서, ‘게스트룸’이라는 표현으로 바꿔 말한다.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이지만, 생활을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한 강기민에게 떨어져 사는 이들은 어쩌면 가족이라기보다 게스트에 더 가까운 존재일 수 있다. 형과 누나가 게스트라면 강기민은 ‘호스트’가 되는 셈인데, 그렇다고 형과 누나를 가족에서 추방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집을 지음으로써 자신을 돌보던 가족을 손님처럼 모실 수 있는, 말하자면 집주인이 되는 권한과 기회를 스스로 획득한다. 이는 상상의 역할놀이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집에 내가 산다’는 의미에서 집주인이자 자기의 주인이 된다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혹은 그것을 상상하는 일은 강기민에게 자신이 머물며 사는 곳을 정립하고 내가 점(유)할 수 있는 영역을 관리하는 보살핌의 태도로써 외부 세계와 타인을 허락하는 곳을 마련하는 의미다. 이는 강나영이 “니 기억을 살려야지”라고 말해 주는 부엌의 드로잉에도 해당된다. 부엌이라는 공간은 요리라는 창작 행위가 이뤄지는 공간이며 타인에게 마음을 열어 환대하는 곳이다. 냉장고에 보관한 식재료를 다시 꺼내듯이, 강기민은 물러서 있던 기억을 꺼낸다. 부엌은 집에 들어올 권리가 없는 존재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1 비록 영상에 식탁은 등장하지 않지만, 부엌은 게스트와 비-인간적 존재를 초대하고 보관된 기억을 재료처럼 재가공하는 창작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니 기억을 살려야지”—기억은 기억에 그치고 퇴출당하는 것이 아니라, 살려야만 표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꿈꾼 집, 집의 드로잉, 지하 영화관은 현실에 아직 없는, 출현하고 도래할 시공간을 점유한다. 살림은 타자를 받아들이면서 기억을 ‘살리는’, 그러니까 ‘생생하게 담아내고’ 부패나 소진에서 ‘구하는’ 데서 출발한다.
강기민이 꿈꾸는 영화관을 연출한 전시에서 관람객은 합판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서 영상을 본다. 영상 작업 후반부로 가면, 그가 가족들과 함께 집이 들어설 위치를 직접 방문한다. 눈송이가 펑펑 내리고, 땅이 덮여간다. 가파른 오르막을 삼촌과 형과 같이 올라가면서 강나영과 강기민은 이곳에 지어질 집을 드로잉과 대조해 본다.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같이 걸어오면서 눈 위에 남긴 발자국을 화면에 담았다. 꿈꾸는 집이 세워질 장소에 가 봤지만, 드로잉으로 상상한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가 생각한 영화관이 있는 지하 공간은 이 장면에서 아예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지도 못한다. 눈에, 땅에 덮여, 시야에 잡히지 않는 지하실은 영화의 상영 형식처럼 숨어 있다. 그렇다고 이는 완전히 은폐된 곳은 아니다. 그는 왜 하필 지하에 있는 영화관 옆에 곧게 자라는 나무를 그렸을까. 나무는 보통 지상에 자라는 것이 아닐까—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무가 뿌리를 두는 곳은 땅속이다. 땅에 뿌리를 둔다는 것, 보행에 어려움을 겪는 그가 땅에 뿌리를 두고 산다는 것, 바꿔 말해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건축물의 청사진과 지하 영화관에서 펼쳐지는 꿈과도 같이 은폐되어 있다. 이곳은 상상으로 추방하여 퇴각당하는 대신 실현할 미래로써 염원이 되고 추구된다. 영화관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함의하는 바는 이것이다. 발자국은 눈이 녹으면 이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상상과 꿈이 뿌리를 두는 곳은 (아직) 보이지 않을 뿐 깊이를 가진 채 그곳에 뿌리박혀 있다.2
〈드림하우스〉를 보다가, TV 모니터 뒤에 붙은 시트지에 그려진 나무를 보게 된다. 강기민이 그린 드로잉에서 왜 이 나무는 지하에 자랄까—밖을 보고 싶어 하는, 밖에 나가고 싶어 하는 그의 바람이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상에 살아간다는 것은 뿌리를 두는 것, 즉 보이지 않는 곳에 자신이 있을 수 있는 지반을 갖(추)는 것이다. 그것은 ‘선다’는 비유를 그대로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이상을 품는다는 것은 견고한 지반을—그러니까 당연해진 장벽까지도—뚫는 상상을 가진다는 것이 아닐까. 지하부터 뻗어 있는 나무는 강나영의 이번 전시에서 상상이 뿌리내릴 곳을 찾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채로 힘을 묵묵히 함양하는 수행을 보여준다. 《드림하우스》의 영화관에서 플라톤의 동굴 비유—움직이지 않는 채로 본인의 그림자를 타자화해서 보는—는 강기민이 보내는 삶의 지반을 견고히 하기 위한 상상으로 도약한다. 자리를 쉽게 움직이지 못할 때, 우리는 발 디딜 곳을 상상하며, 강기민은 영화관을 그려본다. 전시가 열린 한겨울에도 이 나무는 전시장에서 꼿꼿이 서 있다—그것 또한 허상일지라도, 말이다. 이동식 침대에 익숙한 삶에서 영화관을 짓는 것은 꿈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내려놓은 줄만 알았던 집은 동생에게 여전히 미래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라는 마지막 자막이 은연중에 가리키는 것처럼, 강기민에게 ‘내려-놓을’ 것/곳은 지어지는 것/곳이 된다.
1 에마누엘레 코치아(エマヌエ〡レ コッチャ) 지음 마츠바 류(松葉類) 옮김 『집의 철학: 주거 공간과 행복(家の哲 : 家空間と幸福)』게이소샤(勁草書房) 2024 p.161
2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외출하는 날 A Sunday Outing》(2025)에 소개된 영상 작업 〈하늘, 바람, 땅〉 (2025)의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사람들, 그러니까 운전한 사람, 타고 있던 사람, 이동식 침대에 탄 사람, 반려묘, 모두가 차에서 내리는데 영상은 마지막 사람까지 프레임 밖으로 나오길 기다린다. 이동 수단을 형상화한 구조물에 자동차 내부를 찍은 영상이 투영되는 이 작업에서 폐쇄적이고 내적인 탈것-프레임을 벗어난 시점으로 이동할 때, 이미지 안에 함께 있던 사람은 문을 열고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 현실로 다시 돌아올 때 발생하는 차이는 탈것-프레임 안에서 균질화된다. 이처럼 〈하늘, 바람, 땅〉에서 이미지가 한 작품 안에서 각자 다른 사람을 통합하는 경험을 가져다준다면,〈드림하우스〉에서 이미지는 강기민에게 든든한 지반을 건축하는 수단이 된다
《송영숙: Meditation on the Road 길 위에서》
현대화랑 3.7~3.31, 한미 C&C 스퀘어 갤러리 3.7~6.28
김정은 더레퍼런스 디렉터

송영숙 《Meditation on the Road 길 위에서》 현대화랑 전시 전경 2026
사진 위에 다시 그린 풍경
사진 위에 다시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사진이 언제 완성되는지를 다시 묻게 만든다. 송영숙의 작업은 인스턴트 필름 위에 촬영된 풍경을 유화로 다시 채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기록된 이미지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 위에 더해진 색채와 붓질은 사진의 표면을 다른 감각의 화면으로 전환시킨다. 이 전시는 이러한 제작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이미지의 층위를 조망한다.
《Meditation on the Road 길 위에서》는 송영숙이 인스턴트 컬러 필름 위에 유화 물감을 덧입힌 새로운 형식의 작업을 선보이는 자리다. 1980년 첫 개인전 이후 폴라로이드 사진을 중심으로 작업해 온 작가가 오랜 시간 해온 실험을 다른 방식으로 전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1969년 사진과 인연을 맺은 이후, 여성 사진가이자 한미사진미술관 설립자이자 가현문화재단 운영자로 활동해 온 그의 이력은 한국 사진계의 제도적 기반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역할과 별개로 그의 작업은 언제나 개인적인 시선과 감각의 축적 속에서 지속되어 왔다.
인스턴트 사진(Instant Photography)은 1970년대 이후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 매체였다. 촬영 직후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이 기술은 사진 제작의 시간을 단축시키는 동시에, 이미지가 형성되는 과정을 육안으로 경험하게 했다. 특히 송영숙이 사용한 폴라로이드사의 SX-70 필름은 현상 물질이 필름 내부에 포함된 구조로, 정착 과정에 직접 개입할 수 있다는 특징을 지녔다. 이러한 물질적 조건은 즉석 사진을 단순한 기록 도구를 넘어 개입 가능한 실험적 매체로 확장시켰다. 예를 들어 워커 에반스(Walker Evans)는 생애 후반 SX-70 카메라로 작은 컬러 폴라로이드를 통해 거리의 사물과 일상의 장을 기록했고, 루카스 사마라스(Lucas Samaras)는 폴라로이드 필름의 유제층을 변형하는 방식으로 사진의 물질적 가능성을 탐구했다. 이처럼 폴라로이드 필름은 인스턴트 사진의 한 유형으로서, 사진을 단순한 기록 이미지가 아니라 개입 가능한 물질적 표면으로 인식하게 만든 중요한 매체였다. 이러한 매체적 조건 속에서 송영숙은 1980년대 국내 최초로 폴라로이드 작업만으로 이루어진 개인전 《폴라로이드 SX-70》을 열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SX-70 필름을 기반으로 드럼스캔과 편집을 결합한 이미지 실험을 전개했으며, 촬영 직후 유제를 밀어내거나 표면을 변형하는 방식으로 풍경의 인상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러한 시도는 사진을 단순한 기록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의 물질적 레이어로 확장한 작업으로 평가되었고, 이후 1998년 현대화랑 개인전에서는 이러한 즉각성과 우연성에 기반한 실험이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사진은 언제나 장치의 변화 앞에서 자신의 존재 방식을 다시 묻게 된다. 디지털 촬영 기술의 확산 속에서 폴라로이드 필름의 단종은 이러한 변화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위기였다. 역설적으로 사진의 역사는 새로운 장치가 등장할 때마다 자신의 조건을 다시 질문해 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송영숙 역시 기존 방식을 지속하기 어려워졌지만, 이번 작업에서 폴라로이드의 감각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다. 작가는 즉석 필름의 작은 화면(62×46mm)을 유지함으로써 즉각적인 시각 경험을 보존하고, 붓질을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방식으로 확장한다. 채색은 이미지를 덮으면서도 풍경의 색과 빛을 다시 조율하며, 보는 행위를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방식은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독일 현대 예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Overpainted Photographs’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리히터가 이미지를 가리고 흐리게 하며 회화의 물질성을 강조했다면, 송영숙은 풍경의 색과 분위기를 다시 직조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결과 사진의 위기는 소멸이 아니라 감각과 기억을 새롭게 구성하는 계기로 전환된다. 작은 사진 위에 남겨진 붓질의 자국은 정교한 관찰과 몰입의 시간을 드러내며, 이는 외부 풍경과 내면을 동시에 응시하는 시간과 맞닿아 있다.

송영숙 《Meditation on the Road 길 위에서》 한미C&C스퀘어 전시 전경 2026
사진: 강재영
이번 전시에는 유제를 입힌 원본 사진과 1980년대 초기작 등 250여 점이 소개되었다. 도시와 자연, 야생화와 이끼는 작가가 이동하며 포착한 일상의 단편들이다. 가까이에서는 유화의 물질성이 드러나고, 멀리서는 작은 이미지들이 하나의 풍경을 형성한다. 특히 세밀화처럼, 붓질은 빛과 공기, 시간의 인상을 다시 조율하며, 작은 화면은 관람자를 이미지 가까이 끌어당기고 바라보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길어지게 만든다. 사진 위에 색을 더하는 행위는 사진의 역사 초기부터 존재해 왔다. 그러나 송영숙은 이를 형식이나 재현이 아닌 기억의 상태로 전환했다. 이미지를 지우지 않고 덧입히는 방식은 풍경의 기억을 다시 구성하는 과정이 된 것이다. 그 결과 붓질은 하나의 기법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변화한 기억의 층위를 드러내며, 그의 작업에서 풍경은 기록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을 다시 바라보는 시선으로 남는다. 이때 이미지는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머물고 스며드는 시간의 형태로 남는다. 사진과 회화의 경계는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다.
《75년 동안의 해와 별》/ 《최선: 한 날》
노근리평화기념관 2025.9.13~7.3 / 씨알콜렉티브 3.17~4.25
강재영 기자

왼쪽 정정엽〈몸짓 1~9〉 쉬폰 위에 먹, 아크릴 가변설치 2018~2025
오른쪽 이순종 〈검은잠자리는 알고 있다〉 컬러, 사운드, 싱글채널 비디오 2분 15초 2025
재현의 불가능성 앞에서: 비극을 감각하는 윤리적 방법론
2026년 초, 이란 수도 테헤란 교외의 ‘알-자흐라’ 초등학교에 미군 미사일이 떨어져 150여 명의 어린 생명이 숨졌다. 미군 당국은 이를 ‘기술적 오폭’이라 명명했으나, 그 차가운 수사 뒤에 남겨진 아이들의 가방과 무너진 교실은 1950년 7월 노근리 쌍굴다리의 비명을 소환한다. 75년 전 미 제7기갑연대가 피난민 대열을 향해 퍼부었던 기총소사는 오늘날의 2026년의 미사일과 겹쳐진다. 권력의 폭력은 언제나 ‘효율’과 ‘전략’의 이름으로 무고한 육체를 지운다. 왜 이런 일은 기어코 반복되는가,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인가,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노근리 사건을 소재로 한 두 전시, 충북 영동 노근리평화기념관의 정정엽·이순종 2인전 《75년 동안의 해와 별》과 씨알콜렉티브의 《최선: 한 날》은 바로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각각이 지닌 재현의 윤리적 방법론으로 발언한다. 이는 지금 이 시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팔레스타인 전쟁,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의 현실에 공명하며 예술을 향한 다급한 외침에 응답한다.
정정엽의 작업은 증언과 기록, 몸짓을 통해 사건의 역사적 좌표를 붙드는 재현으로 읽힌다. 작가는 쌍굴다리 탄흔의 표지(標識)인 하얀 원과 세모, 다리의 외곽선을 작업의 주요 모티프로 가져오지만, 그것을 기하학적 기호로 추상화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몸짓’ 연작(2018~2025)은 굴 밖으로 나오려던 사람들의 몸짓을 불러내면서도, 그것을 출근하고 기도하고 서로를 껴안는 너무나도 보편적인 하루의 몸짓과 연결한다. 그 과정에서 사건은 순간의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고, 일상의 신체 언어와 접속하면서 현재로 연장된다.〈뜨겁다 무겁다〉(2025)는 이러한 전략을 더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세로 4.5m, 가로 10m 규모의 50개 패널 모자이크 벽화는 조각난 기억을 이어 붙이겠다는 작가의 수행적 태도가 형식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피가 뜨겁다는 것, 죽은 몸이 무겁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알게 된 생존자의 증언이 쌍굴다리의 이미지 위로 새겨질 때, 재현은 사건의 장면을 묘사하는 데서 나아가 증언을 촉각적으로 매개한다. 행정 서류를 들고 정면을 응시하는 4.3 피해자를 그린 ‘말하는 씨앗’ 연작(2024)에서 서류 위의 텍스트는 반복해서 입증해야 했던 국가 폭력의 사후 구조 위에 ‘진심으로 기억되고 싶은 나의 모습’을 담은 문장을 덧씌운다. 정정엽은 사건 외의 목소리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현재가 과거에 휩싸이지 않도록 만든다. 역사적 사건의 층위로 납작해질수 있는 의미 구조가 사건 밖의 이야기를 통해 개인적인 층위에서 재현되며 관객과 조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순종은 평화는 폭력적이고 탐욕적인 인간 본능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한다.전시장 한켠을 채운, 검정 무광 유골함은 부재의 상징이기도 하면서 다시 무게와 표면을 지닌 대상이 된다. 영상 〈검은잠자리는 알고 있다〉(2025)는 쌍굴다리 옆으로 흐르는 개천과 그 위를 날아다니는 검은잠자리를 매개로 노근리 사건을 생태적 기억의 층위까지 확장한다. 잠자리는 사건을 목격한 비인간적 시선이자, 인간의 폭력 이후에도 현장에 남아 있는 시간의지표처럼 작동한다. 여기서 재현은 설명적이지 않다. 대신 이순종은 묻는다. “살아있는 사람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애도를 인간에게 부여된 수동적 질문이 아니라 나와 연결된 현재의 질문으로 치환한다. 정정엽이 증언과 기록을 통해 기억의 좌표를 고정한다면, 이순종은 물질과 생태 감각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애도에 대해 자신과 관객 모두에게 묻는다.

최선〈웅덩이〉캔버스에 천연 안료 각 227.3×145.5cm 2026
사진: 이의록 제공: 씨알콜렉티브
최선의 《한 날》은 노근리 사건과 우리와의 물리적, 역사적 거리를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쌍굴다리의 탄흔 표지인 원과 세모를 처음 봤을 때, 자기도 모르게 ‘회화적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전시는 이러한 감각을 만들어내는 ‘거리’에 대해 질문하며 관객을 이끈다. 전시장 바닥과 캔버스 위에서 이 ‘기호’는 반복적으로 재현된다. 〈한 날〉(2026)에서 작가는 수지침으로 손가락에 낸 피로 탄흔의 자국을 재현하며 자신의 상처를 노근리 사건과 연결하려 시도한다. 자기 신체의 개입은 자신과 사건 사이의 거리를 자각하면서도 그 거리 자체를 재현의 조건으로 끌어들이는 수행이다. 〈웅덩이〉(2026)는 이 전략을 더 확장한다. 대형 캔버스 네 폭으로 이루어진 이 작업에서 작가는 태안의 소금땅에서 자라는 붉은 풀 염초를 직접 채취해 붉은 안료와 함께 흩뿌리는 드리핑 기법을 사용한다. 바닥에 붙은 하얀 동그라미 탄흔 표기 기호는 붉게 물든 캔버스을 응시하는 관객을 순간 ‘노근리’라는 텍스트가 지시하는 장소로 끌어들인다. 여기서 노근리는 ‘알-자흐라’ 초등학교가 되기도 하고, 가자지구의 어느 마을이 되기도 하고, 제주 4.3 사건의 어느 하루가 되기도 한다.
세 작가의 작업은 예술이 전쟁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재현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상이한 응답이다. 정정엽은 증언과 문서, 몸짓을 통해 사건의 역사적 좌표를 현재로 확장시킨다. 이순종은 유골함과 잠자리, 검은 물질의 밀도를 통해 애도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최선은 탄흔을 기호화하고 자신의 신체를 매개로 개입시키는 과정에서, 자신과 관객 모두가 권력에 의한 폭력의 현장으로 소환한다.
노근리 사건을 재현한다는 것은 노근리평화기념관 상설전시장을 채운 기관총 든 미군을 1:1 디오라마처럼 사실을 나열하거나 당시 현장을 재현해내는 것이 아니다. 어떤 형식이 그 사건을 종결된 과거로 봉합하고, 어떤 형식이 그것을 현재의 윤리적 문제로 다시 작동시키는가의 문제다. 그런 점에서 세 작가의 작업이 제안하는 것은 메모리 액티비즘 작동의 일례라 할 수 있다. 예술은 전쟁을 멈출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전쟁의 이미지가 무감각하게 소비되는 방식을 교란하고, 그 앞에 선 우리의 시선과 위치를 다시 구성할 수는 있다. 노근리의 탄흔을 그리는 이들의 손이 멈추지 않을 때, 과거는 흔적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새로운 흔적을 직시하고 해석하게 하는 증거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