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사적인 오진, 젊은 작가들에게

contents 2014.02. Special Feature | 사적인 오진, 젊은 작가들에게
강홍구 l 작가
‘젊은 작가들에게’라고 쓰고 나니 낯설다. 나도 아직 철이 안 들었고 들 가망도 없는데, 뭔가 좀 아는 것처럼 쓰려니 그렇다. 하지만 생물
학적 나이는 도저히 속일 수 없어 오늘도 어깨가 아파 진단을 받으려 대학병원에 들렀다. 한데 충격이다. 몇 달 동안 다녔던 동네 병원에
서는 오십견이 문제가 아니라, 아주 작은 석회화 건염이 문제라고 했는데 대학병원에서는 명백한 오십견- 즉 회전근개 문제이니 한 달
동안 날마다 사우나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오란다. 다시 한 번 놀랍다. 내가 체험한 동네 병원 오진율이 거의 70%에 육박한다. 잘 낫지
않아서 대학병원에 가면 견해가 다르고 처방과 치료는 간명하다. 절망적이고 우울하다. 동네 병원이라고 다 그런 수준은 아니라고 믿
고 싶은데 내 몸은 그렇다고 한다.
지금 내가 쓰는 이 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잡지사에서 내게 청탁한 글의 주제는 요즘 젊은 작가, 대체로 1980년부터 1990
년 사이에 태어난 작가들에 관해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동네병원일까, 대학 병원 수준일까? 아무래도 좋다. 그래야 글을 쓸
수 있으니까. 오진이라도 할 수 없다고나 할까? 동네 병원 의사들도 나 같은 기분일까?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일종의 병이다. 시간이 지나도 치유될 가망이 별로 없는 병이다. 요즘 젊은 작가를 그냥 그들이라고 부
르자. 나이는 대강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대 후반쯤- 한 십년 보자. 전시장과 작업실에서 본 그들의 작업, 그림, 설치, 영상, 공모전, 심
사 경험, 기타 등등을 생각해본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작품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솜씨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자신이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작품처럼 보기
좋게 묶어내는 능력이 있다. 요는 포장 기술이 괜찮다. 그러나 포장을 풀어보면 별거 없다. 이때 별거는 내용이 심오하지 않다든지, 어
째서 사소한 문제를 다루고 있느냐는 질책이 아니다. 절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절실함이란 그 작가가 정말로 그 이야기를 꼭 하고 싶고,
해야만 했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건방진 충고 하나 하자면 좋은 작가란- 잘나가는 작가 말고- 세상에 대해 진짜로 자신이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이때
이야기란 물론 내용이나 형식을 가리지 않는다. 아주 사적이어도 좋고, 아니면 공적인 것이라도 상관없다. 아니면 내용 따위는 아예 배
제하고 미술에 관한 새로운 형식적 시도도 좋다. 미술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군가의 작품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긴지 아닌지 금방 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말로 설명할 수 있으면 작품을 왜 만들겠는가? 그리고 알 수 없다면 작업을 그만두
는 게 낫다.
다음으로는 기본적으로 작업이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전에도 그랬
다. 하지만 21세기가 시작되자마자 한 차례 불어닥친 상업적 성공의 열풍이 잘 팔리는 작가들을 생산한 뒤 그러한 예가 일종의 모델이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앞서 말한 포장 기술과 결합해 여러 가지 방식의 유행을 낳았다. 예를 들면 저주에 가까운 묘사 기술의 과시에서
부터, 현장과 사회와 개념을 그럴듯하게 어중간하게 묶는 프로젝트화, 사소한 트릭과 시시한 관념을 크게 확장한 빤한 설치와 일종의
알리바이로 동영상 활용하기, 전통적인 것과 디지털, IT 등을 적당히 한 다발로 묶기 등등. 이는 아마도 자신이 사용하는 매체에 대한 아
주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일처럼 보인다.
좋은 미술작품이란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이다. 최소한 자신이 하는 작품의 장르에 관해 이게 도대체 뭔가, 관습적
인가 아닌가를 묻고 새로운 정의를 시도하는 뭔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학문이나 예술 심지어는 일상적 삶조차 창조적이려면 반드
시 창조적인 질문이 있다. 그걸 어떻게 하느냐고? 내가 그걸 알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창조적인 것을 가르치는
기술은 없다. 단지 어느 게 창조적이 아닌지 말해줄 수 있을 뿐이다.
이것들 말고도 쓰면 뭐 좀 나오겠지만 더 이상 쓰는 것은 무의미하다. 청탁시 요구받은 원고의 양도 거의 다 찼다. 글을 다시 읽어본
다. 이 두루뭉술, 애매모호한 진단은 어디에 해당될까? 내 스스로 늙어가는 환자인 주제에 잔소리를 해도 될까 하는 의심이 인다. 위에
서 말한 내용들은 오진일 수는 있다. 하지만 작업을 한다는 것은 이 후진 세상에 대해 개인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길을 내는
것이다. 비록 그 길- 작업을 한다는 것이 결국 환상에서 시작해서 환멸로 끝나더라도 숙명이기 때문에 하는 거라면 다시 생각해봐야 하
리라. 너무 올드패션이라고? 어쩌겠는가? 나도 낼모레 육십이다. 나이 먹는 것이 어쩔 수 없듯이 올드패션이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불만이면 새로운 뭔가를 좀 보여다오. 충격받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