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이젠 우리가 알아서 뜰거야!”
노형석 《한겨레》 기자
10년 전 필자가 쓴 《월간미술》 특집 기고글의 서두는 이런 코멘트로 시작했었다. 당시 제도권 미술에 냉소하며 대안세력임을 자부했던 청년 미술인들의 구호를 집약한 말이었다. 2015년, 지금 글의 서두는 “이젠 우리끼리 터 잡고 놀거야!”로 바꿔야할 듯싶다. 10년 전 선배들은 대안공간과 비엔날레의 든든한 후원, 새 블루칩 작가군을 확보하려는 화랑업자들의 추파 속에서 도발과 실험을 즐겼지만, 지금 청년작가들은 자기세대들 외엔 별로 우군이 없다. 끼리끼리 놀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자본에 짓눌린 제도권 미술판은 더 이상 그들에게 특별한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알아서 전시장을 차리고 작가들끼리라도 소통하지 않으면 도통 존재감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내놓은 존재가 된 지금 잉여세대 삼포세대 작가들은 대도시의 변두리에 그들만의 전시장을 만들고 또 만들어낸다. 특히 올해는 ‘자족공간’ ‘자생공간’으로 불리는 신생공간이 30여 곳이나 우후죽순 생기는 바람이 불면서 청년미술판의 또 다른 지형변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10년 전은 젊은 작가군이 쑥쑥 커나가는 ‘벨 에포크(좋은 시절)’였다. 1999년 밀레니엄과 2002년 월드컵을 지나 2005년까지 진행된 시간대는 이른바 K팝과 개념미술의 전형을 만들어내고 시장에서도 컬렉터들의 각광을 받던 시절이었다. 1990년대 장기 불황으로 미술시장이 동면에 들었던 질곡 속에서 당대 청년작가들은 시장의 유통망과 다른 판을 깔고 새 진지를 쌓았다. 왜곡된 근대화가 빚은 산업사회 한국의 기괴한 일상과 사회적 시공간의 잡다한 이미지들을 작품에 녹여넣으며 한국미술판에 새 개성을 불어넣었다. 특유의 미술지형을 생성했고, 시장에도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아쉽게도 이런 흐름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강타하면서 훅 꺼져버렸다. 젊은 작가들은 시장에서 내동댕이쳐졌다. 바로 앞 선배들이 화랑가와 경매장에서 각광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그들 앞에는 언제 퇴출될지 모른다는 잉여의 공포감이 짓눌러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난 3~4년 사이 청년미술판의 주변 환경은 퇴행의 징후들로 넘쳐났다. 90을 바라보는 ‘어르신’ 작가들이 40여년 전 벽지처럼 그린 단색조 그림이 화랑들의 마케팅 공세를 업고 ‘블루칩’ 상품으로 뜨는 기묘한 반전이 일어났다. 반면, 전망을 잃은 젊은 작가들은 귀신과 심령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세월호 침몰과 양극화, 종북몰이 같은 사회적 이슈들이 툭하면 터지는데도, 그들은 과거와 달리 무력하게 관망하기만 했다. 청년미술의 또 다른 숨통이었던 비엔날레와 국공립 미술관들은 정부와 지자체들의 전횡에 따른 작품 검열과 낙하산 인사, 채용 비리 등으로 숱한 적폐를 드러냈다.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청년작가들은 ‘성찰’과 ‘저항’을 잃은 채 눈앞 생계와 잉여의 두려움에 휘둘린다. 더 이상 공모전, 레지던시의 간택만 기다릴 수는 없다. 미술판 바깥의 젊은 작가들은 자구책으로 작업실 겸 전시장을 변두리 지하골방 등에 차려놓고 그들만의 기획전과 아트페어 리그를 구상하고 있다. 하나, 확실한 건 1990년대 이래 청년작가들의 안전판 기능을 해온 대안공간과 작업공간 지원(레지던시), 공모전 등이 또 다른 제도의 벽으로 변질되면서 신뢰를 상실했다는 점이다. 실존의 압박에 휘둘리는 청년작가들은 작업하고 전시할 보금자리부터 꾸리는게 급선무다. 일단은 작가들끼리라도 소통하고 작업세계를 공유 하는 게 긴요해졌다. ‘동시대 새로운 도전과 과제’ 보다 ‘일단 서식할 터부터 잡자’로 꿈이 바뀐 것이다.
지금 청년작가들은 소통의 벽 앞에서 고단하다. 대안을 좇던 10년 전과 달리 현실의 바닥으로 내려앉은 지금 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장소 특정적인 미술, 사이버 게임과 비슷해지는 미술, 소셜미디어로만 소통하고 담론을 나누는 작가, 기획자들의 기묘한 꿈틀거림을 기존 미술계는 어떻게 받아들이며 소화할 것인가. 임흥순 작가의 노동다큐영화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은사자상을 받은 성취에서 보이듯, 일부 작가들은 세계 무대에서 약진하고, 한국미술의 위상은 상당히 업그레이드된 것 또한 사실이다. 외부의 도약과 내부의 양극화가 공존하는 미술판의 모순적 상황을 어떻게 역동적인 판으로 탈바꿈시킬지가 과제로 남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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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_1990년대와 한국현대미술의 조변석개
임근준 AKA 이정우 미술비평
1990년 3월 서울미술관에서 심광현의 기획으로 개막한 <동향과 전망: 새벽의 숨결전>(민중미술 그룹전으로는 드물게 큐레이터십이 발휘된 사례), 10월 예술의전당에서 당대의 다양한 흐름을 한자리에 소환한 <젊은 시각 내일에의 제안전>(심광현 서성록 이준 등 5인이 각자 작가들을 선정해 비전을 겨루는 논쟁적 형식) 개막, 1991년 1월 민중미술가 임옥상의 호암갤러리 개인전, 3월 르네 블록이 큐레이팅한 국립현대미술관의 <테크놀로지의 예술적 전환전>, 1992년 7월 30일부터 8월 3일까지 서울/경주의 힐튼호텔에서 대전엑스포93의 사전 부대행사로 열린 <20/21세기 예술 심포지엄>(국내 논자들에게 무식의 두려움을 일깨움), 1991년 11~12월 대한민국미술대전의 대상작 <또 다른 꿈>의 표절(패스티시?) 논란과 구체제 권위의 몰락, 1992년 5월부터 1997년 7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서 현대미술계의 새로운 토대를 일궈낸 임영방 관장의 리더십, 1992년 12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비평을 본격화한 현실문화연구(윤석남, 김수기, 엄혁 등)의 출범, 1993년 3월 예술의전당 개관에 맞춘 <서울 플럭서스 페스티벌>로 김홍희 큐레이터 데뷔, 4월 개막한 호암갤러리의 <미국 포스트모던 대표작가 4인전>을 둘러싼 논쟁과 허황했던 미술계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투쟁 종결, 7월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의 충격과 파장, 10월 뉴욕 퀸즈미술관에서 <태평양을 건너서: 오늘의 한국미술전> 개막, 12월 큐레이터 이영철의 평론집 《상황과 인식: 주변부 문화와 한국현대미술》 출간, 대우의 선재현대미술관과 삼성의 호암갤러리가 경쟁하는 가운데, 1994년 1월 쌍용제지의 스카티 광고에 김선정 출연(큐레이터란 단어를 한국사회에 널리 알림), 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막한 <민중미술 15년: 1980~1994전>(빈사 상태의 민중미술이 ‘역사’로 성급히 정리됨), 3월 페미니스트 미술을 표방한 <여성, 다름과 힘전>에 윤석남, 김수자, 이불, 박영숙 등 참가,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8월 호암갤러리에서 <앤디 워홀전> 개막(이때 <인서울매거진>이 등장, 무가지 시대의 도래를 알림), 1995년(“미술의 해”) 2월 국제화랑에서 제프리 다이치의 기획전 <경계 위의 미술> 개최(데미언 허스트의 대표작 <약국>이 전시됨), 5월 아트선재센터 착공 기념 <싹전>(시대를 전후로 양분하는 지표로 기능), 6월 동아갤러리의 <인간과 기계: 테크놀로지 아트전>(제니 홀처, 토니 아우그슬러, 백남준 등 뉴미디어아트를 선봬), 6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개관과 전수천의 특별상 수상, 6월 금호미술관에서 박모 개인전 개막, 8월 일본위안부 출신 할머니 김순덕 여사 21세기화랑의 그룹전 <못 다 핀 꽃의 외침전>에 출품, 9월 광주비엔날레 출범, 1996년 6월 최정화의 뮤지엄바 ‘살’ 개점, 1997년 3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개원, 9월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의 지원에 힘입어 제2회 광주비엔날레가 성공적으로 개막, 10월 호암갤러리가 자체 소장품으로 현대미술의 역사를 개괄하는 <전환의 공간전>을 개최, 12월의 외환위기와 해외 거주 청년 작가들의 집단적 귀국, 1998년 외환위기의 한파를 맞은 미술계에서 대형기획들이 줄줄이 취소되는 가운데, 동아갤러리와 벽산갤러리는 폐관, 7월 아트선재센터 개관, 7월 쌈지아트스튜디오(암사동) 출범, 8월 가나아트센터 개관, 세대교체가 급격히 이뤄지는 가운데, 10월 <98 도시와 영상-의식주전> 개막(대성공!), 1999년 2월 대안공간 루프 개관, 4월 대안공간 풀 개관, 9월 예술의전당에서 <99 여성미술제 – 팥쥐들의 행진> 개막, 9월 아트선재센터에서 하세가와 유코의 큐레이팅으로 일본청년현대미술전 <팬시댄스> 개막, 10월 프로젝트스페이스사루비아다방 개관, 그리고 뉴밀레니엄의 도래.
1995년 여름 이후의 한국현대미술에선 전지구화 시대의 당대성을 감지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한국현대미술계도 그간의 양적 팽창을 발판 삼아 질적 도약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던 시절이었다. 20(00)년대의 도래와 함께, 지속적으로 새로운 청년미술가들이 나타났기에, 세대 교체를 통해 구시대의 어두움을 금세 타파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사고에 빠지기도 했다. 크나큰 착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