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아라리오를 아시나요? “Art is Life, Life is Art”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탑동. 공항에서 차로 약 10분, 제주항 여객터미널에서 걸어서 20여 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이 있다. 이렇게 좋은 입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일대는 자칫 도심 공동화 현상이 우려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다. 하지만 지난해 아라리오 뮤지엄이 개관하면서부터 다시 사람들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다. 아라리오 뮤지엄 개관으로 심폐소생술을 받은 듯 활력을 되찾았다. 새로운 ‘핫 플레이스’로 급부상했다. 쇠락했던 제주 구도심의 분위기를 극적으로 반전시킨 주인공이 바로 김창일 회장이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컬렉터로, 그리고 뮤지엄 설립자인 동시에 작가로도 활동하며 1인 4역의 삶을 살고 있는 김 회장은 요즘도 한 달에 거의 반을 제주도 스튜디오에 머물며 작업하고 사업 구상도 한다.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 시네마 바로 옆 건물에 있는 김 회장의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Art is Life, Life is Art”
이준희 편집장
미술, 나아가 미술관에 대한 꿈을 언제부터 가졌나요?
저는 서울 남산 기슭 회현동에서 자랐어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비가 갠 후 햇빛이 쫙~ 비치면서 엄청나게 큰 무지개가 뜬 하늘을 봤어요. 그 광경은 마치 천국 같았고, 우주 같았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제 인생에 대해 자문했지요. “도대체 나는 뭐지?”라고.
아무튼 처음으로 작품을 산 건 1978년입니다. 스물여덟 살 때죠. 당시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아트페어에서 남농과 청전의 작품을 샀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신기한 게, 누가 가르쳐주거나 시키지도 않았고 얘기해준 것도 아닌데 뭐에 홀린 것처럼 제 발로 찾아가서 그림을 구입했어요. 그 다음부터 차츰 그림 보는 안목이 생겼어요. 하나에 절대적으로 몰입하다보니 감각이 진화했다고 볼 수 있죠. 저는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거나 외국 유학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한테 배운 것도 없고 오직 필드에서 온몸으로 느끼고 배운 거죠.
그래도 미술관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LA현대미술관(MOCA)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입니다. 모카MOCA는 제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컬렉션의 기준이랄까, 작품 구입을 결정할 때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원칙은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말해 ‘생명’과 ‘영혼’이 있는 작품을 삽니다. 오리지널리티와 아이덴티티가 확실한 작품 말이죠. 저는 작가의 이름을 보고 컬렉션하지 않습니다. 대신 ‘생명과 영혼’이 깃든 작품이라는 판단이 서면 두 배 값을 주고라도 살 수 있습니다. 요즘 한국 미술시장에서 단색화 얘기가 많은데, 단색화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단색화 중에서도 어떤 단색화 작품이 좋은 건지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컬렉터란 어떤 인물일까요?
무엇보다 아트 컬렉터는 인격과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컬렉션 리스트에는 그 컬렉터의 인격이 반영됩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 컬렉션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 컬렉터를 존경하게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생명과 영혼’이 있는 작품을 사야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결국 나중에 돈도 벌게 되는 거고요. 처음부터 짧은 기간에 컬렉션으로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면 남길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결국 10년, 20년 후에 가치가 증명되니까요.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배운 점이 있다면요?
갤러리는 생존게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모든 걸 라이브로 배웠어요. 갤러리를 하면서 실제경험을 통해 온몸으로 직접 피부에 와 닿게 공부했어요. 뉴욕에 갤러리를 냈다가 결국 손해를 봤지만, 더 큰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예방주사를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는 무엇인가요?
2005년 라이프치히 화파를 국내에 처음 선보인 그룹 쇼입니다. 라이프치히 작가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때고, 누구도 그들의 작품을 선뜻 사지 않을 때였죠. 하지만 당시 제가 보기에 그들의 작품엔 ‘생명과 영혼’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봐도 이런 전시를 유치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직접 작업하는 컬렉터로도 유명합니다.
아티스트는 하느님과 닮아가려는 존재입니다. 왜냐면, 창조하려고 하니까요.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작업하는 이유는 유명해지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지금처럼 작업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인생을 망쳤을 겁니다.(웃음) 젊어서 제 인생은 극과 극을 달렸어요. 진짜 헐크 같았다니까요.(웃음)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 평양에서 월남하신 부모님께 물려받은 제 DNA는 굉장히 착하고 말이 없고 소심하고 남 앞에 나서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었어요. 휘문고등학교 동창들한테 물어보세요.(웃음) 그런데 원하던 대학에 두 번이나 떨어지고, 특히 군 복무하면서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육군본부 의장대에서 근무할 때 무진장 맞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천안에서, 그것도 험한 터미널에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저도 모르는 집념과 집중력이 생겼어요. 그래선지 그때는 사람 많은데 갑자기 테이블에 올라가서 노래 부르고 그랬어요. 그러면 안정감이 생기고 차분해졌거든요. 일종의 정신병이었죠(웃음)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작업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 작업하지 않았으면, 저는 지금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을지도 몰라요.(웃음)
원래 컬렉터보다 아티스트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었군요?
한때는 식당을 25개나 운영하기도 했는데, 그때 그 모든 식당 인테리어에 제가 다 관여했어요. 천안터미널에서 처음 매점 사업을 시작할 때도 당시로는 잘 사용하지 않던 알루미늄으로 직접 인테리어를 했어요. 그리고 처갓집이 있는 LA에 갔을 때, 한 식당에 들어섰는데 인테리어가 아주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요즘처럼 식당에서 자유롭게 사진 찍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아날로그 필름카메라에 플래시 펑펑 터뜨려야 했으니까요. 허락 없이 사진 찍었다가는 경찰한테 잡혀가는 때였으니까요. 그래서 식당 분위기를 직접 드로잉 했지요. 요즘도 식당 뿐 아니라 옷집이나 카페처럼 맘에 드는 공간과 장소에서 닥치는 대로 드로잉을 한답니다. 그리고 여행할 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찍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구도를 익히게 된 것 같아요. 이런 훈련이 지금 작업에도 큰 도움이 되고요.
항상 열정과 에너지가 넘칩니다.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에너지는 방전시키지 않고 필요할 때 집중적으로 쓰는 게 중요합니다. 간혹 친구가 집을 설계해 달래요. 하지만 저는 안 해줘요. 하기 싫어요. 왜냐면, 그걸 하면 내 에너지가 방전되니까요.(웃음)
저는 사업 초기부터 운전기사와 비서를 꼭 두었습니다. 1978년에 운전면허를 땄지만 직접 운전하지는 않아요. 그 시간에 집중해서 생각을 하거나 피곤하면 자면서 에너지를 충전하지요. 그러니 기사 월급 주는 게 남는 장사라고 생각해요. 비서도 마찬가지죠.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업무는 비서가 처리해주고, 저는 창의적인 일만 합니다. 스마트폰이나 이메일도 안 써요. 비서가 팩스로 전달해줍니다.
아라리오라는 이름은 직접 지으셨나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소심한 성격이라 남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눈에 띄지도 않았죠. 대학 두 번 떨어지곤 괜히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죠.(웃음) 그러다 대학 2학년 때 군대를 갔는데 정말 악몽이었어요. 지금은 말도 안 되겠지만, 엄청 얻어맞고, 기합 받고…. 졸병 때 헬기장에서 보초 서면서 아무도 없는 새벽에 풀벌레소리를 들으며 명상을 했어요. 완전히 킬링 타임용. 그렇게 몰입하다보니 한 시간이 십 분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갑자기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가 떠올랐어요. 그때 결정했죠, 내가 앞으로 사업을 하면 회사이름을 ‘아라리오’로 정하겠노라 말이죠.(웃음) 알파벳 A로 시작하는 영어 표기로도 좋고, 한자도 없는 순수 한글이라 좋아요. 다른 회사이름도 제가 작명했어요. 우스갯 소리로 “홍도야 우지마라”를 세 글자로 줄이면 “홍도뚝”이라고 하는 것처럼, ‘야우리’라는 회사이름은 명상하던 중 떠오른 “야! 우리들만의 세상”에서 앞 세 글자를 따서 졌어요. 제주도 아라리오 뮤지엄 이름도 누구는 구겐하임 뮤지엄이나 바이엘러 뮤지엄처럼 ‘씨킴 뮤지엄’이 어떻겠냐는 의견도 주었지만, 원래 건물의 역사와 특성을 살리고자 ‘탑동 시네마, 바이크샵, 동문모텔’로 정했답니다.
막상 뮤지엄을 개관하기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요?
첫 컬렉션을 시작한 게 1978년이고, 1989년에 백화점 내에 처음으로 갤러리를 오픈해서 1999년에 문을 닫고, 2002년에 갤러리 건물을 새로 지어서 조각광장을 만들었죠. 이렇게 20년 넘게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국내외 다양한 릴레이션 십도 형성됐고, 특히 외국 미술관을 둘러보면 그날 저녁 몇 시간 동안 습관적으로 눈을 감고 낮에 본 미술작품을 머릿속으로 리와인드 합니다. 그렇다고 목적이 있는 학습은 아니고, 호텔방에서 저녁에 할 일이 없으니까 심심풀이로 하는 거죠.(웃음) 이런 과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저도 모르는 ‘촉觸’이 생겼어요.
그러고 보면 예전엔 단순하게 갤러리와 작가가 미술계를 이끌었어요. 두 바퀴 자전거 처럼요. 그런데 이제는 네 바퀴로 가는 자동차처럼 더욱 복잡해졌어요. 갤러리와 작가뿐 아니라 컬렉터와 뮤지엄이 공존공생하며 유기적으로 얽히고 관계 맺는 시대가 됐어요. 예전엔 미술관이 직접 작가를 상대했는데, 이제는 만약 죽은 작가를 전시하려면 그 작가와 관계를 맺었던 갤러리나 컬렉터를 찾을 수밖에 없어요. 좋은 컬렉터가 현대미술을 이끄는 시대인 거죠.
기존 건물의 구조와 특성을 최대한 살린 점이 눈에 띕니다.
제가 미술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시기의 작품은 대부분 페인팅이 주도했다고 봅니다. 그 페인팅에 맞는 공간은 ‘화이트 큐브White Cue’였고요. 하지만 동시대미술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페인팅뿐 아니라 비디오나 설치처럼 다양하죠. 즉 이런 경향을 소화하기에 화이트 큐브는 적합하지 않아요. 깔끔하면 재미없거든요, 새로 지어도 맛이 안 나고요. 건축이란 원래 100~200년 지나야 제 맛이 우러나요. 오래된 절에 있는 석탑처럼. 요즘에 지은 매끈한 화강암 건물은 맛이 안 나잖아요. 그래서 저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건축자재를 시멘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치 곰팡이처럼 과거의 시간과 흔적이 배어있는 거기에 동시대 작품이 조화롭게 어울리면 새로운 맛을 풍깁니다. 화음이 잘 맞는 거죠. 그래선지 건축과 학생들도 견학을 많이 옵니다.
서울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처럼 이곳 제주도 뮤지엄도 전시장뿐만 아니라 레스토랑과 수제 맥주 펍, 아트숍 등이 어우러진 ‘아트 타운’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제주 사람들이 이 동네를 ‘아라리오 로드’라고 부릅니다. 뮤지엄 하루 관람객을 1000명으로 목표하고 있는데, 제주도민뿐만 아니라 외지에서 관광 온 관람객 비중이 60%가 넘습니다. 4월에 동문모텔Ⅱ와 편집매장이 오픈하면 제주 뮤지엄 프로젝트가 1차적으로 완성된다고 봅니다. 저는 패션이 미술관을 완성시킨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음식점에 들어가면 무조건 음식을 먹어야 하지만 옷 가게는 그렇지 않거든요. 꼭 구입하지 않더라도 구경을 할 수 있어요. 미술관도 마치 옷가게처럼 편하게 구경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돼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의미에서 “Art is Life, Life is Art”가 실현되는 거니까요.
최근 구입한 작품은 어떤 건가요?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일본작가 다츠오 미야지마의 작품입니다. 저는 뮤지엄 디렉터는 지휘자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케스트라 마에스트로가 각기 다른 악기 소리를 듣고 전체 음악의 색깔을 구상하듯 저는 항상 머릿속에 미술관에 전시될 작품의 레퍼토리와 화음을 생각합니다. 여기서 물론 개별 작품도 중요하지만 전시의 화음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비디오작품이 이쯤에 있고, 이쯤에 회화가 걸리고, 이쯤에 설치작품이 놓여지고…. 예를 들어 탑동 시네마에 전시된 앤디 워홀 판화시리즈는 제가 250만 불을 주고 산 작품인데, 원래는 제가 10만 달러에 구입했다가 25만 달러를 받고 되팔았던 그걸 10배 값에 다시 구입했어요. 뮤지엄의 화음을 위해서요. 마찬가지로 서울 인 스페이스 5층 구석방에 있던 이탈리아 작가의 작품을 이번에 故 류인 작가의 조각으로 바꾸었습니다. 다츠오 미야지마 작품 역시 뮤지엄 인 스페스 전시공간의 화음을 고려해 구입한 거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미술관이나 롤모델이 있다면?
앞서 말한 대로 모카를 처음 보고 무의식적으로 미술관을 꿈꾸었는데, 디아 비컨Dia:Beacon을 보고 그 꿈을 실제로 이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너무 좋았어요. 다 둘러보고 나와서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죠. 아내와 아들이 부축해서 간신히 야외 벤치에 한참을 앉아 복기했어요. 그 미술관에서 제 상상력의 실체와 미래 비전을 보게 됐답니다. 미술을 핑계로 한 사치와 허영을 버리고, 미술관의 권력을 다 내려놓았더군요. 디아비컨을 둘러본 경험과 그 잔상이 지금 이 미술관을 가능하게 했어요.
앞으로 꿈꾸는 미술관은 어떤 모습일까요?
어쩌면 지금 뮤지엄은 예행연습일지도 몰라요. 제가 생각하는 뮤지엄의 최종은 하나의 박스형태입니다. 덩어리 같은 박스를 툭툭 던져 놓은 듯한 공간에 오직 한 작품만 있는…. 작품은 팔수도 없고, 박스-공간에 작품이 없다면 그 공간은 아무 의미가 없는 공간이 되는 그런 미술관 말입니다. 제 스튜디오가 있는 하도리에 땅 15만 평(49만5000여㎡)을 구입했습니다. 앞으로 또 다른 가능성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