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리뷰]오치균

오치균의 그림은 서정적이다. 질퍽한 물감의 물성이 살아있는 듯 꿈틀대는 화면은 따뜻하고 감미롭다. 그것이 풍경이든 정물이든 마찬가지다. 거대 도시 뉴욕의 마천루와 뒷골목,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뉴멕시코 산타페와 탄가루로 뒤덮인 탄광촌 사북의 풍경이 그렇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주황색 열매가 별자리처럼 매달린 감나무는 또 어떤가?
오치균은 비로소 말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천착했던 회화의 근원은 바로 ‘빛’이었음을 다시한번 깨닫게 됐노라고.
6월 11일부터 25일까지 인사동 노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오치균의 최근작을 볼 수 있다. 자연-야외에서의 빛과는 다르게 실내에서 포착된 빛과 색감의 향연은 오치균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final-A0003307-cmyk

<램프> 캔버스에 아크릴 50×73cm 2013

화가 오치균에게 그림이란 무엇일까?

이은주  미술비평

그의 그림은 늘 두꺼운 물감 덩어리들이 얹히고 또 얹혀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붓이 아닌 손으로 찍어 바르는 화면기법은 오치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물론, 물감을 여러 겹 덧바르고, 거친 마띠에르 효과를 드러내는 작업은 익히 알려진 인상주의 화가들을 비롯하여, 국내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작가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오치균의 화면은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에 재현하되, 손가락 끝으로 느끼는 감각은 3차원의 대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손가락으로 물감을 찍어 바르는 까닭에 그의 작품에서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 흔들리는 풍경 속에서도, 정지된 사물들 사이에서도 명확한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손가락은 날카롭거나 매끈한 작업매체가 되지 못한다. 빛이 들추어내는 각각의 색 덩어리들에 의해서 형태가 드러날 뿐이다.
오치균의 작품들은 눈앞에 보이는 사물들을 재현하고 있지만, 시각보다는 촉각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것은 재료를 다루는 그의 방법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사물을 어루만지면서 느끼게 되는 감촉을 손가락 끝에 담아 그대로 캔버스 위에 옮겨놓는 행위이다. 손에 전해지는 촉감을 그대로 재현하다 보니, 사물의 고유한 성질이 그대로 화면에 드러난다.
<뉴욕> 시리즈의 다양한 작품들이나, <사북> 풍경, <감> 시리즈, 이번 노화랑 전시에서 공개된 <빛>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들에서는 두꺼운 물감 덩어리들이 화면을 구성한다. 그런데 그의 작품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품 속에서 꿈틀거리는 물감덩어리들은 모두 같은 표정이 아니다. 1986년 뉴욕생활이 시작되면서 뉴욕의 다양한 표정들을 담은 <뉴욕>시리즈 작품들-눈 내리는 겨울 풍경, 회색도시의 모습들, 뉴욕의 사람들-모두가 각각 다른 표정의 마티에르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감> 시리즈의 작품에서는 유난히도 푸른 늦가을, 하늘빛과 대조를 이루는 붉게 물든 감과 그 감들을 매달고 있는 감나무의 꿈틀거림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마치 용틀임을 하듯 굽이굽이 뻗은 가지들, 여기저기 갈라진 두터운 나무껍질로 덮인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20대 시절, 난 이른 아침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 내려 동학사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 동학사를 거쳐 계룡산을 넘어 갑사로 내려오는, 그런 여행을 몇 번 했었다. 특히 가을이 좋았다. 갑사 주변의 산과 들에는 감나무들이 즐비했는데, 잎을 모두 떨군 채 붉은 감들만 매달려 있는 풍경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갑사의 늦가을 정취는 아직도 내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오치균의 감나무를 보는 순간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근처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에도 그런 감나무가 많았었나 보다. 작가는 대상에 몰입하면서 그것을 어루만지듯 물감을 바른 손가락 끝에서 사물의 감촉이 느껴질 때 비로소 화면에서 손을 뗀다.
소설가 김훈의 글을 빌리자면, “연필로 글씨를 쓰는 나는 오치균의 손가락과 그의 손가락이 화폭에 남긴 흔적들에 각별한 친밀감을 느낀다. 연필로 쓰기는 몸으로 쓰기다 (중략) 오치균이 손가락으로 물감을 으깰 때 재료가 육체와 섞이는 그 확실한 행복감을 나는 짐작할 수 있다. 재료를 장악하고 그 재료를 육체화해서 재료를 마소처럼 부릴 수 있는 자만이 예술가인 것이다. 언어는 기호이고 또 개념인 것이어서, 나는 오치균이 색을 부리듯이 말을 부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는 오치균의 손가락을 대책없이 부러워한다. 손가락으로 색을 바르는 행위는 세계의 사물성과의 불화일 터인데, 그는 그 불화의 흔적을 남기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 흔적들이 모여서, 시간의 지속성, 미래에 도래할 새롭고 낯선 색깔의 흐름을 보여줄 때 그의 화폭은 아름답고 강렬하다.” – 김훈 <무너져가는 것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것(2008)> 중에서

 캔버스에 아크릴 108×162cm 2014

<작업실> 캔버스에 아크릴 108×162cm 2014

빛은 곧 생명이다
오치균이 1980년대 후반부터 그린 뉴욕의 다양한 풍경들, 2000년대 초부터 그린 사북의 풍경들, 그리고 함께 그려온 감나무 시리즈의 작품들에는 항상 빛이 존재했다. 이것은 의도적이기 보다는 야외에서 태양광이 뿜어내는 자연스러운 빛이었으리라. 그 빛들은 각각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마티에르 기법과 결합되어 조명이 비추는 방향에 따라, 작품을 보는 시점에 따라 각기 다른 효과를 누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작품에서는 소소한 대상 안에 자신의 강한 의지를, 놓치고 싶지 않은 한 줄기 희망을, 꺼지지 않는 영원한 빛을 표현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빛은 희망이고 염원이다. 빛은 우주 만물의 존재를 알리는 하나의 광선이고, 생명체들이 살아가게 하는 자양분이고, 각 사물에 고유의 색을 부여하는 물감 같은 존재이다.
“그동안 내 작품들 속에서 보여지는 빛이 의도된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작업을 하고 나면 항상 내 작품 속에서 상징 같은 것이 되어 있었죠. 그런데 이번 작품들에서의 ‘빛’은 나의 신체적 장애와 심리적 불안 속에서 나온 의도된 빛이예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촛불 작품을 봤어요. 촛불이라는 것은 희망과 염원을 담고 있죠. 하지만, 촛불은 작은 흔들림에도 꺼질 수 있는 아주 약하고 순간적인 존재예요. 그래서 나는 그것보다 강하고 영원한 빛을 생각했어요. 심지어 나의 생명이 다해도 남아 있을 수 있는 빛, 영원히 잡아둘 수 있는 빛, 그 안에 내 희망과 의지를 담고 싶었던 거죠.”
그 후 오치균은 작은 공간에 잡아둘 수 있는 빛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빛이 시간적, 공간적 영향력을 가진 자연의 빛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사라지지 않는 인공의 빛으로 영원을 바라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자신의 심리적, 신체적 간절함을 그대로 담아낸 작품들이라서 작가는 더욱 집착하고 매진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오치균의 작업에서 빛은 생명이다. 그것이 의도되었든 의도되지 않았든, 삶을 비추고 온기를 불어넣고 강한 에너지를 뿜어내야 할 생명인 것이다.
오치균 작업실의 작은 전시 공간에는 새롭게 제작된 10여 점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이제 그의 대상은 넓고 푸른 바깥 풍경에서 좁고 어두운 실내 풍경으로 옮겨져 왔다.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한 줌의 빛이 실내의 작은 사물을 감싸고 있거나, 좁은 방구석에서 어둠을 드러내고 있는 작은 실내등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소재의 작업들이 그동안 보여주었던 여러 시리즈 작업들을 접고 나온 전혀 새로운 작업은 아니다. 뉴욕 시리즈나 감나무, 사북 풍경들을 그렸을 때에도 그의 시선 한곳에서는 작은 사물들을 관찰하고 있었지만, 그 관심이 증폭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사람들은 오치균하면 감나무 작가로 기억해요. 하지만, 난 감나무만 그린 건 아닙니다. 보통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지면 거기에 몰입하게 되지만, 너무 빠져든다 싶으면 손을 놔요. 한 가지만 계속 그리다 보면, 나중에는 작품을 찍어내듯 그릴까봐 두렵고, 또 다른 걸 그리기가 너무 힘들어져요. 그런데 감나무 그림은 그린 기간이 좀 길어졌어요. 한 4~5년 정도. 감나무 그림을 그리면서도 이것저것 관심가는 것들을 그렸는데, 사람들은 감나무만 기억해요. 그러다가 작년 전시를 마치고 나서 하반신 마비가 왔어요. 나 자신으로서는 견디기 힘들었고, 나의 생명이 다하는 건가 두려웠죠. 나는 계속 작업을 하고 싶고, 이렇게 살아있다고 외치고 싶은데, 작품을 할 수가 없었어요.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집 안에서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그 때 눈에 띈 것이 실내의 사물들이었어요.”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한줄기 빛, 그것조차 허락지 않을 때는 좁은 구석을 비추는 작은 전등 빛이 아마도 작가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빛을 받은 실내의 사물들에도 어김없이 작가의 손으로 문질러댄 물감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사물들 위에 쌓인 물감 덩어리들은 이전에 자연물들 위에 얹혀진 물감덩어리들과는 달리 사물의 단단함, 무정함, 절제된 느낌이 묻어난다. 이것은 그동안 관심을 가져오던 작은 사물들(그러나, 다른 작품들로 인해 관심을 받지 못했던)이 그의 삶과 맞닥뜨려 떨어진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의 작업에서 담아낸 빛은 바깥 풍경 속에서, 감나무 위의 붉은 감에 비추어진 따뜻하고 부서질 듯한 눈부신 자연광이었다. 그러나 이번 작품들에서 담아낸 빛은 인공적이고 의도적인 빛이다.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자연광도 그 작은 공간을 절대 떠날 것 같지 않은 확고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으며, 그보다도 더 인위적인 전등의 불빛은 사람들의 시야를 벗어난 구석진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관심에서 멀어져가는 것들 모두 빛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 빛은 희망이고 생명이다. 빛은 우주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의 이 소소한 빛들은 어쩌면 작가에게 실낱같은 하나의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빛을 비추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의지를 발산하고, 작가로서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의미가 담긴 빛이리라.●

오치균은 1956년 충남 대전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뉴욕 브루클린 컬리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5년 백악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뉴욕으로 건너가 1987년 소호 핀다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가나화랑, 부산 공간화랑, 갤러리 아트링크, 부산 도시갤러리, 갤러리 현대, 갤러리 H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캔버스에 아크릴 213×142cm 1993

<뉴욕> 캔버스에 아크릴 213×142cm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