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김형대
회화와 판화를 50여 년간 탐구해 온 작가 김형대의 화업을 총망라한 전시가 4월 8일부터 7월 1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다. 다색 목판화와 채색 부조 회화로 나뉘는 그의 작품은 크게 물성(物性)과 환원(還元)이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국 미술이 걸어온 역사 한편에 현재까지도 활발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김형대의 작품세계를 면밀히 들여다 본다.
김형대의 ‘환원 B’, 정박되지 않은 한국 모더니즘의 기표
김미정 | 미술사
김형대의 50년 화업을 결산하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렸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미술사 정립을 위해 한국 현대미술가들을 조명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전시는 ‘격정과 도전의 시기’, ‘탐구와 체화의 시기’, ‘후광 그리고 새로운 시작’ 총 3부로 구성되었다. 앵포르멜 시기의 〈환원 B〉부터 2012년 제작한 대작 아크릴 부조 회화 〈후광 12-303〉까지 일람할 기회였다.
1936년생인 김형대는 소위 ‘단색화’ 세대의 화가이다. 그러나 회고전에서 살펴본 김형대의 작품세계는 앵포르멜 세대의 집단 미술운동과는 얼마간 거리가 있었다. 1960년대의 <씨족>과 <생성시대>, 다색 목판화와 <후광> 연작에서 보듯이 작가는 1960년대 말부터 한국 화단에 몰아친 이우환식 모노하 설치나 퍼포먼스를 시도하지 않았다. 〈에꼴 드 서울전〉과 같은 단체전에 초대는 되었지만, 김형대의 활동은 1970~1980년대 단색 모노크롬 평면화의 대열에서도 반 발자국 정도 빠져나와 있는 듯하다.
김형대의 회화는 본질적으로 개념이기보다 표상이다. “수행과 행위”보다는 “소재”로서의 한국적 미술을 추구한 것인데, 그래서인지 김형대의 그림에서는 모티프와 장식, 색채와 같은 조형 요소들이 중요하다. 전시장에서 영상으로 제공되는 작가의 말에서, 혹은 회고담에서 거듭 드러나듯이 김형대는 자신의 추상화 기원이 사적인 추억과 주변의 자연물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되었음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통학 길에 보았던 여의도 샛강 여울의 소용돌이, 조계사의 목조장식과 불상, 나무의 나이테 등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들이다. ‘생성’ 연작의 유기체적인 프랙탈 구조는 쉼 없이 역류하는 물의 이미지였다. 화사한 채색은 그가 진솔하게 털어놓듯이 동대문에서 포목점을 운영했던 어머니의 추억에서 비롯하였다. 차곡차곡 쌓여 정리되어 있다가 좍 펼쳐지는 옷감들의 휘황함에 자극받은 유년기의 미적 체험은 화가 미의식의 원형이었던 셈이다. 사실 이러한 낭만적 회고담은 전위미술의 대열에 섰던 동년배 한국 미술가로서는 다소 특이한 고백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1960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과 연이은 국전 서양화부 최고상으로 출발한 김형대 미술의 범주는 제도권에서 장려(?)한 한국적 추상화라고 할 수 있다. 단색화 시대로 기억되는 한국적 모더니즘 양상은 저마다 몸담고 있는 단체나 주력하는 전시에 따라, 지역과 연배에 따라 기법, 형식, 주제가 다양하게 갈라져 있는데, 김형대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화사한 색채와 민예적 소재는 1970년대 국전 비구상 부문 수상작들, 예를 들면 이준(1919~), 유희영(1940~) 박길웅(1941~1977) 등의 작품과 유사한 장르적 특징이었다.
<국전>과 김형대의 화업은 그 시작부터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아니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김형대의 미술은 1961년 수상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상’ 이라는 이름에 결박되어 있는 듯하다. 이 수상이 명예로운 이력인지, 올무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김형대의 미술이 이후 회화에서 판화, 아크릴 부조로 이어지는 현재 진행형이었음에도 이 한 줄의 이력은 화인(火印)처럼 화가를 따라다녔다. 이 이력은 ‘지글지글 끓고 있는’ 현대미술 전위로서의 면모를 상쇄시키며, 김형대가 1960년 10월에 덕수궁 담에서 동료들과 감행했던 <벽전>과도 논리적으로 충돌하였다. 무엇보다 이 상의 낯설고 긴 명칭은 어쩔 수 없이 1961년의 역사적 상황을 상기시킨다.
1960년과 1961년에 연이어 발발한 4·19와 5·16 두 사건에 대한 해석이 곧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는 사관(史觀)을 형성하듯, 미학적 전위와 관전 진입이 동시에 가능했던 당시의 미술계 상황은 전후 한국 모더니즘에 대한 어떤 비평적, 혹은 미술사적 해석보다 상징적이다. 한국 현대미술을 연구하는 필자에게 김형대의 〈환원 B〉가 전후 한국 모더니즘의 ‘증후’ 적 작품으로 다가오는 이유이다. 필자는 이 작품과 사건을 증거 삼아, 앵포르멜 세대의 전위에서 주류로의 전환이 군정(軍政)기에 이루어졌음을 논증하며 한국적 모더니즘에 관한 정치·사회적 해석을 시도한 바가 있다. 그러나 미술사가 정치·사회사의 결과물이 아니라 결국은 미술가들의 실천의 역사라는 사실에 더 큰 방점을 두는 지금, 중요한 것은 <국전> 최고상 이력이 김형대의 이후 50여 년 예술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하는 질문이다.
김형대의 미술은 단색화의 수행적 담론이나 이우환(1936~)의 신체와 장소성과 같은 현학적 수사로부터 얼마간 거리를 두고 진행되었다. 물론 장인적 노력과 다색 채색판화를 통해 관전 추상화라는 좁은 장르적 울타리도 뚫고 나왔다. 기성세대로 몰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감상적인 회상을 늘어놓는 김형대의 미학적 취향은 윤명로(1936~), 김봉태(1937~) 등 동료 세대의 단체인 ‘60년 미술가협회’의 논조보다 오히려 김환기(1913~1974)나 유영국(1916~2002)과 같은 근대기 모더니스트의 서정주의와 유사하다. 1960년대 실존주의 미학의 전방위적인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가 느긋하게 감상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첫 번째 빛나는 이력,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상이 허용한 미학적 자유의 결과였을지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김형대가 회화의 물성에 몰두하게 된 것은 다색 목판화 제작의 여파였다. 1960년대 김형대의 색채에 대한 탐닉은 다색 목판화 시대로 이어졌다. 그가 다색 목판화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은 주목되어야 한다. 사실 다색 목판화는 한국 현대판화에서는 희귀한 것으로 유강렬(1920~1976), 정규(1923~1971)의 초기 판화는 물론이고, 1960년대 이후 많은 미술가가 조형실험으로 혹은 미술의 대중화를 위해 목판화를 제작했으나 주로 단색의 민예적인 투박함을 선호하였다. 그가 판본을 여러 개 만들어 색채를 거듭 찍고 종이에 색이 은은하게 배어 나오게 했던 것은 판화에 섬세한 회화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이었다. 요지는 기름기를 빼서 담백한 느낌을 주는 잉크 제조, 원하는 배색을 위한 종이의 선택이 까다롭게 이루어지면서 화가는 자연스럽게 질료의 문제에 집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포괄적으로 보자면 김형대의 색채와 빛에 대한 집착도 사실은 서구의 물질성에 대한 저항이었다. 결국, 담론의 구조는 ‘무위(無爲)’의 수행으로 서구의 물질성을 상쇄하려 했던 한국 단색화 미술가들의 논법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김형대 회화가 단색화의 울타리 바깥에 위치하면서 동시에 단색화 미술운동과 교집합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환원(還元)’ 정박되지 않은 한국 모더니즘의 기표
김형대의 미술은 근대 주정주의와 현대 물질주의 미학의 접경지대에 있을 뿐 아니라 국전 추상화라는 ‘장르’ 미술과 ‘단색화’ 미술 그 중간에 걸쳐 있다. 이를 절충적이라고 할 수도 있고, 혹은 경계의 확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미학적 자기 완결, 평면의 매체 담론으로 “환원” 하고자 했던 1970년대 동시대 모더니즘의 다른 영토에도 많은 한국의 미술가가 군집하고 있었으며, 김형대는 그중에서 확연한 성취를 이룬 미술가라는 사실이다.
논박할 여지없이 앵포르멜 추상미술의 제도적 승인의 징표가 된 <환원 B>는 한국 현대미술사 전후 추상미술의 챕터에서는 빠지지 않는 대표작이다. 한국적 모더니즘 시대를 동고동락했던 비평가 이일(1932~1997)의 유명한 평문 “환원과 확산”에서 거듭 반복되고 있듯이 환원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식 모더니즘의 용어이다. 그러나 오래전 국전 출품작 〈환원〉의 의미를 궁금해 하는 필자의 전화 인터뷰에 화가가 돌려준 대답은, 기억하건대 미니멀리즘의 미학적 근거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화가가 설명하는 ‘환원’은 추억으로의 회귀라는 대단히 낭만적 시어였다. 기대했던 “표면으로의 환원”이라거나 “매제의 물성”이라는 형식주의 이론과 상관도 없는 이야기라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생각해보면 김형대의 〈환원 B〉의 붉은 색조는 미묘하고, 수평으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요철은 ‘켜켜이 쌓여 있는 옷감’ 같이 섬세하다. 당시 앵포르멜 작가들의 미학적 퍼포먼스가 부조리극에 가까웠다면 김형대의 지향은 대상에서 환기되는 시적 정서였다. 그래서인지 1960년 ‘벽동인’과 같은 전위 미술가로서의 분명한 출발에도 불구하고 김형대의 미술은 이후 한국 현대미술사 서술에서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것은 어쩌면 미술을 전위와 보수의 역학적 좌표로만 파악하려는 미술사가의 성긴 그물망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서구적 모더니즘 담론으로 무장했던 현대 비평가들의 맹점(盲點)에 그의 작업이 포섭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김형대의 이번 회고전은 그가 서정주의와 물질성이라는 근대와 현대미술의 두 논제를 규합하려 분투해왔음을 증명한다. 그의 목판화는 국전 추상화 장르의 진부함을 깨고, 조선시대 회화의 은은한 배채법(背彩法)과 다색 목판화 기법을 현대화하려는 노력이었다. 화가는 지금도 어엿한 현역 작가로서 다색 목판화와 채색 부조 회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기억은 반복적 해석의 행위라 했다. 김형대의 긴 화업의 첫 줄에 선명한 화인을 남긴 ‘환원’이 정박되지 않은 기표인 것처럼 말이다. ●
김 형 대 Kim Hyungdae
1936년 태어났다.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7년부터 2002년까지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서양화과 교수를 지냈다. 1965년 신문회관 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0여 회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1982년 제2회 공간국제판화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경기도 안성에서 작업한다.